■ 참봉 정공 묘갈명(參奉鄭公墓碣銘)
정씨(鄭氏)는 연일(延日)에서 나왔다. 포은(圃隱) 선생은 고려 말엽 국운이 끝난 때에 나라와 함께 죽어 그 순결한 충정과 큰 절개가 곧장 일월과 빛을 다투었고, 또 성리학(性理學)을 창도하여 밝혀 우리나라 3백 년간 문명의 정치를 열었으니, 문정공(文正公) 우암(尤菴)
송 선생(宋先生)께서 신도비를 세워 천양(闡揚)하였다.
그 손자 감찰 휘 보(保)는 세조(世祖) 병자년(1456년, 세조 2) 옥사 때에 육신(六臣)을 위해 강개한 마음으로 죽고자 하여 친국(親鞫)을 받으면서도 굽히지 않았는데, 환형(轘刑)을 행하려다가 충신의 손자라는 이유로 특별히 목숨을 살려주었다.
몇 대를 지나 또 전첨(典籤) 휘 준(儁)은 병자호란 때에 최명길(崔鳴吉) 등이 비석에 전공(戰功)을 기리고 비각(碑閣)을 세워 오랑캐에게 아첨하자, 와서 별제(瓦署別提)로서 수치스러워 기와를 공급하고 싶지 않아 마침내 벼슬을 그만두었다. 나는 외람되게도 이 두 공을 위해 묘지명을 지었다. 아! 정씨 가문에 어찌 이리도 현자가 많은가!
공의 휘는 성징(星徵)이고 자는 문보(文甫)이다. 군수를 지내고 승지에 추증된 부친 운한(雲翰)은 전첨의 아들이고, 감찰은 전첨의 몇 대 조상이다. 공은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 태어나 문사(文辭)를 일찍 성취하여 여러 차례 향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일찍 부친을 여의고 형제도 없어 세상일에 뜻을 두지 않고 문을 닫고 깊이 들어앉아 농사에 뜻을 붙여 고인(古人)의 곡식 가꾸는 묘미를 깊이 얻었다.
포은 선생의 종손 찬광(纘光)이 일찍 죽어 그 고아들이 곤궁하고 의지할 곳이 없자, 공이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종갓집 일을 대신 행하였다. 여러 종인(宗人)들과 도모하여 사당을 옮겨지으려는 차에 마침 당시 재상으로 있던 오시수(吳始壽)가 성상께 아뢰어 지어주라는 명을 유사(有司)에게 내려졌다. 또 종손이 어리다는 이유로 특별히 공을 장릉 참봉(章陵參奉)에 제수하여 임시로 선생의 제사를 받들게 하니, 공이 마지못해 힘써 명에 응했으나 뜻은 즐겁지 않았다.
경신년(1680, 숙종 6) 정국이 바뀌자 정승 노봉(老峰) 민정중(閔鼎重) 공이 별도로 영당(影堂)을 세워 후학들이 편리하게 참배하도록 청하고, 얼마 뒤에 우암 선생께서 또 호서(湖西)를 떠도는 찬광의 아들에게 늠료(廩料)를 지급하여 속히 돌아가 사당을 지키게 하기를 청하니, 공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의 일이 끝났다.”라고 하였다. 마침 임기가 만료되어 규례대로 전옥서 봉사로 승진하였으나 마침내 그날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으니, 우암 선생이 이를 듣고서 훌륭하게 여겼다.
공은 이때부터 완전히 시골로 돌아가 지족(知足)으로 당명(堂名)을 삼고서 그 속에서 유유자적 지내며 양식이 떨어져도 태연하였다. 《논어》와 주자(朱子)의 글을 즐겨 읽어 늙어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승지공의 무덤이 좋지 않아 홍산(鴻山)으로 이장하였는데, 공이 노쇠하고 병들어 왕래할 수 없자, 장공예(張公藝)의 고사를 본받아 새 무덤 가까운 곳에 집을 지어 여러 조카를 데리고 함께 살고자 하였으나, 심한 기근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병으로 청양(靑陽)의 우사(寓舍)에서 세상을 떠나니, 기묘년(1699, 숙종 25) 윤7월, 향년 61세였다. 명정(銘旌)에 관명(官名)을 쓰지 말라고 유언하였으니 애초에 벼슬에 나아간 것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홍산(鴻山)의 추곡(鄒谷)에 안장하니, 승지공의 무덤과 십여 리 떨어진 곳이다.
공은 남양(南陽) 홍집(洪鏶)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6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찬일(纘一), 찬빈(纘彬), 찬형(纘馨), 찬연(纘淵), 찬명(纘明)이고, 막내는 장가들기 전에 죽었다. 사위는 사인(士人) 김주남(金柱南)과 유일성(柳一星)이다. 여러 손자는 추(錘), 수(銖), 순(錞), 함(䤴), 협(鋏), 탁(鐸), 전(鐫), 륜(錀), 옥(鈺)이다. 륜(錀)은 찬형(纘馨)의 아들로 찬명(纘明)의 후사가 된 자인데, 멀리 찾아와서 내게 명(銘)을 청하였다.
공의 온아한 자질과 돈독하고 화목한 행실이 이미 종당(宗黨)과 향리(鄕里)에서 존중을 받았으나, 본래 조용한 성격으로 교류를 좋아하지 않고 자신을 뽐내고 자랑하지 않았기에 공을 아는 자가 적었다. 게다가 불행하게도 험난하고 비색한 때를 만나 끝내 일명(一命)의 관직에 그치고 말았으니 어찌 곤궁한 명운이 아니겠는가?.
내가 짐짓 공의 선대의 아름다운 덕과 사업 가운데 중대한 것을 차례로 서술하여 공의 어짊이 유래가 있음을 드러내었는데 공이 크게 수립하여 선조의 공업에 광채를 보태지 못한 것이 거듭 안타깝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주역》〈비괘〉에 / 在易之比
비인을 경계하였네 / 戒存匪人
아, 공이 일명에 그친 것은 / 噫公一命
좋은 않은 때를 만나서라네 / 偶丁不辰
녹봉을 위해 억지로 벼슬살이했으나 / 黽勉祿仕
끝내 속세에 물들지 않았네 / 卒無緇磷
맑은 시대를 만났지만 / 雖見淸時
농민의 삶을 달게 여겼네 / 自甘農民
독서하고 분수 지키며 / 讀書安分
자신의 몸을 마쳤네 / 以終厥身
아, 포은 선생에 대하여 / 嗚呼圃翁
현친의 의리를 겸하였네 / 義兼賢親
어떻게 선조를 욕되게 하지 않았나 / 曷云無忝
자중자애하였을 뿐이네 / 秖足自珍
내가 그 뜻을 드러내어 / 我表其志
비석에 새기노라 / 以刻貞珉
[脚註]
[주01] 참봉 정공 묘갈 :
이 글은 정성징(鄭星徵, 1639~1699)의 묘갈이다. 정성징의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문보(文甫)이다.
[주02] 문정공(文正公) …… 천양(闡揚)하였다 :
한국문집총간 113집에 수록된《송자대전(宋子大全)》권154에〈포은 정 선생 신도비명(圃隱鄭先生神道碑銘)〉이 실려 있다.
[주03] 나는 …… 지었다 :
정보(鄭保)의 묘문인〈감찰 설곡 정공 묘표(監察雪谷鄭公墓表)〉는 본서 제38권에 실려 있고, 정준(鄭儁)의 묘문인〈전첨 정공
묘갈(典籤鄭公墓碣)〉은 본서 제31권에 실려 있다.
[주04] 장공예(張公藝)의 고사 :
장공예는 당(唐)나라 수장(壽張) 사람으로, 9대의 친족이 한집에 모여 화목하게 살았다. 고종(高宗)이 직접 그의 집을 방문하여 그
비결을 묻자, 그는 글자를 써서 대답하겠다며 지필(紙筆)을 청해 단지 참을 인(忍) 자만 백여 개를 써서 올리니, 이는 상하 간에 불평
과 불만을 서로 참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것을 본 고종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비단을 하사하였다.《舊唐書 卷188 孝友列傳》
[주05] 주역 …… 경계하였네 :
《주역》〈비괘(比卦) 육삼(六三) 상전(象傳)〉에 “좋지 않은 사람을 친애함이 해롭지 않겠는가.[比之匪人, 不亦傷乎?]” 하였다.
비인(匪人)은 행위가 바르지 못한 사람을 말한다.
[주06] 현친(賢親) :
현현친친(賢賢親親)으로,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고 친척을 친하게 대하는 것을 말한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