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참가자
김재선 김진섭 김태원 박도서 박영우 백웅열 이성우 허덕행 허정구 허헌구
1. 답사내역
재선이와 통화하여 복정역에서 분당선 3-1번칸 덕행이와 재선이를 만났다.
또 수원역에서 1호선 환승하며 정구와 태원이 만나 함께 병점역에서 내려 기다린다.
병점역 2번출구 버스 정류장에 모인 친구들 모두 열명이다.
2008년 2월 첫번 답사 때에도 모두 열명이였는데 이번에도 열명 신기하다.^^
먼저 번엔 융건릉을 보고 점심식사 후 용주사였는데 이 번엔 용주사부터다.
뒤풀이 하면 으례 반주가 따르므로 얼굴 벌겋게 하고 사찰문 들어서기가 예가 아닌것 같다.
해설사 없이 들어가려 했는데 대기하고 있던 미모의 해설사가 달려왔다.
수 인사 후 유창한 말 솜씨로 해설이 시작되고 홍살문 삼문 5층석탑 천보루
절의 창건과 중창 가람배치 등 융릉과 정조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용주사는 본래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창건된 갈양사로 이름 높은 청정 도량이었다.
병자호란 때 소실되어 폐사되었다가 현륭원 천장 때문에 근처를 오가던 정조가
보경스님의 부모은중경 설법을 듣고 크게 감동하여 내탕금을 들여 다시 절을 짓고 원찰로 삼았다.
중창불사 낙성식 전날 밤 정조의 꿈에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여 용주사라 이름하였다.
사찰 산문을 알리는 일주문 대신 아버지 사당을 알리는 홍살문을 세우고 대문인 삼문을 세웠다.
홍살문에서 삼문에 이르는 길 양옆으로 불경의 문구를 돌에 새겨 세운 것도 특색이다.
사찰 안으로 들어가는 천왕문은 천보루 아래에 배치하여 불법을 전하는 도량임에 틀림 없다.
용주사는 왕의 사당을 모시고 부모은중경을 중시하는 효행 중심의 도량이다.
대웅보전이라 함은 석가모니 부처님만 모신게 아니고 약사불 아미타불 세분을 모신 법당이다.
가운데 주존불에 따라 전각이름이 달라지는데 석가여래면 대웅전 아미타여래면 극락전
약사여래면 약사전 이런식이고 협시불이 보살이 아닌 부처일 경우 보전이라 이름 하는데
반드시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본존불 한 분만 모시고도 보전이라 이름한 사찰도 있다.
대웅전 후불 탱화에 대하여 김홍도의 진두 지휘로 25인의 화승들이 그렸다고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김홍도이하 도화서 화원들도 참여하여 공동 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해설사는 국보로 지정된 고려초기 동종까지 마치고 헤어졌다.
우리들은 다시 돌아 나와 효행박물관을 돌아보고 버스로 융건릉을 향하였다.
매표소에서 경로표 10명 발급받고 점심시간이라 해설사 없이 융릉을 향한다.
사도세자의 형 효장세자가 1728년 10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7년 뒤 1735년 사도세자가 태어난다.
세자가 15살 되던 해 1749년 영조는 임금을 대행하는 대리청정을 시킨다.
노론에 의해 왕위에 올랐는데 세자는 노론을 멀리하고 소론과 남인을 가까이 하게된다.
이로 인한 노론의 모함에 왕과 세자의 사이는 점점 벌어지게 되고 1762년 임오년 윤5월 13일
창경궁 편전 문정전 앞마당에서 혜경궁의 표현으로 임오화변이 일어나 쌀 뒤주에 갇히게 된다.
뒤주에 갇힌지 8일만인 21일에 폐서인 된 세자는 죽게 된다.
보고를 받은 부왕 영조는 죽음을 애도한다는 의미의 시호 사도를 내리게 된다.
장지까지 따라가 잔도 올리고 신주에 직접 글씨를 쓰기도 했다.
초 장지는 지금의 전농동 시립대 위생병원 부근 배봉산 자락에 묻고 수은묘(垂恩墓)라고 했다.
사당도 수은묘(垂恩廟)라고 하여 북부 순화방에 두었다가 얼마되지 않아 함춘원 옆으로 옮겼다.
세손은 사도세자의 형 효장세자의 양자로 해 놓아 후일 왕위에 오른 후 시비거리를 없애 놓았다.
영조는 유지로 세손이 왕위에 오르면 효장세자를 왕으로 추존하도록 해 놓았다.
1776년 영조가 승하하고 즉위한 후 진종으로 추존하였고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공표하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무덤을 영우원으로 사당을 경모궁으로 격상시키고
창경궁 제일 높은 위치에 경모궁이 건너다 보이는 자리에 어머니를 위해 자경전을 지어 드렸다.
아버지 무덤이 흉당이라 노심초사 하다가 드디어 1789년 수원 화산으로 천장한다.
효종이 죽자 고산 윤선도가 화산 자리를 추천하였으나 우암 송시열의 반대로 동구릉에 묻힌다.
화산 밑에 있던 수원부와 민가를 국고를 들여 지금의 수원으로 이주시킨다.
그리고 화성을 쌓고 수리시설을 만들고 농지를 개간하고 완전한 계획도시로 만든다.
왕이였지만 아버지를 왕으론 만들지 못하고 왕릉에 가까운 무덤을 만들고 현륭원이라 했다.
아관파천 후 고종이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1899년 11월에 왕으로 추존하고 12월 황제로 격상한다.
능상에 올라 가지 못하므로 밑에서 올려다 보기만 하여 병풍석 인석 석등 정교한 조각을 못 보아 아쉽다.
건릉으로 바로 갈 수 있는 중간 산책로를 따라 건릉으로 이동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눈다.
현대인들의 시각으로 역사를 난도질 하는 것은 가급적 삼가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드라마작가들 없는 사실 만들어서 사실인양 비하 하는 것 나라의 위상을 깎아 내리는 것이다.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가고 있으므로 더욱 신중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건릉은 아버지 옆에 묻어 달라는 정조의 뜻에 의해 융릉 동쪽 능선 자락에 묻혔는데 자리가 좋지않았다.
1821년 정조비 효의왕후가 승하하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왕비와 함께 묻힌 합장릉이다.
부왕의 융릉도 1815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훙서하자 사도세자와 함께 묻힌 합장릉이다.
두번째 찾아간 답사이고 그 동안 많은 왕릉 답사를 한지라 그냥 눈으로 보고 이야기한다.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후 음식물 섭취를 금하여 무거운 짐을 진 영우가 보챈다^^
왕년의 조달청장 영우가 먹을 것 한짐 지고 왔는데 풀지를 못해 안스럽다.
돌아 나와 태원이 매표소 직원에게 근처 맛집을 물어보고 쭈꾸미집을 추천 받았다고 한다.
우린 잠시 후 쭈꾸미집에 들어갔는데 주차장에 만차 유명세를 타는 모양이다.
자리가 없다고 기다리라고 하더니 잠시후 2층 방으로 들어가라하여 자리잡고 앉는다.
쭈꾸미 세트메뉴 시키고 소주 맥주 막걸리 청하여 묵사발 안주하여 일배 일배 부일배...
영우가 지고 온 매실주 술은 남아돌고 덜 맵게 해 달랬는데 입 안에선 불이나고 호호 하하...
역시 매워야 개운하다고 하면서 한마디 씩 던진다.
영우가 계산하고 매운데는 찬것이 좋다고 하드 하나씩 돌린다.
자리 정리하고 일어서서 나와 융릉 앞에서 버스로 병점역에서 다시 전철에 오르고
도서와 진섭인 1호선 그 대로 덕행 웅열 재선 정구 태원 헌구 나는 분당선으로 갈아타고
정구는 서현역에서 태원인 이매역에서 나와 웅열인 복정역에서
덕행 재선 헌구는 그대로 뿔뿔이 헤어져 각자의 보금자리 찾아 아침에 나왔던 길 되돌아 간다.^^
친구들이 있어 친구들과 함께 더불어 찾아가는 유적답사
하루가 언제 갔는지도 모르게 웃음 가득한 즐겁고 행복한 하루였읍니다.
병점 자기 나와바리에 왔다고 채금 진 영우에게 박수를 보낸다.
함께 동행 하면서 즐거움 나누어 준 친구 모두에게 고맙고 감사합니다.^^
친구들 자알 들어갔겠지?
다음에 또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 낄낄 대 보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