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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의 시고(詩稿)를 몸에 싸 감고 바다에 투신한 옥봉 이씨.
보고싶은 사람이 얼마나 그리웠다면 "이불 속에서 흘리는 눈물은 얼음장 밑을 흐르는 물과 같다오(衾裏泣如氷下水)" 라고 절규한 여류 시인 옥봉 이씨는 조선 중기의 문신 조원(趙瑗 1544-1595)의 풍류반려(風流伴侶)였다. 여성의 신분으로 부자유한 시대에 아무리 시재(詩才)가 뛰어나도, 그 신분이 서출이라면 한 남정네의 소실이 될 수박에 없었던 옥봉 이씨의 짧은 한 평생은 참으로 가련하였고, 그녀의 처절한 죽음은 더욱 그러했다.
우리 역사에서 시기(詩妓), 즉 기생으로서 시를 지어 남정네의 풍류반려가 된 여러 가지 사례는, 흔히 일간지나 월간지의 기사 내용을 장식하여왔다. 그러나 옥봉 이씨는 출신 신분 때문에 시기가 아닌, 한 남정네의 소실로 들어가 풍류반려의 역할을 잘 하여 오다가, 글재주에 열등감(?)을 느낀 남편의 자격지심에 하찮은 내용으로, 그것도 시 한 구절 때문에 쫓겨나, 평생을 방황 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갈곳이 막막하여, 처절한 모습의 죽음을 택하여, 평생의 시고를 온 몸에 싸 감고 바다에 투신함으로서, 그 시신이 서해 바다를 떠돌다가, 중국에 건너간 기이하고도 애절한 사연이 이채롭다. 그러나 목능성세(穆陵盛世)에 그녀는 글재주를 다 발휘하지 못하였으니, 임진왜란 때문 이였다.
목능성세(穆陵盛世)에 국난을 피하여 먼저 사라진 시인·문장가들.
임진왜란이 다가 오기 전, 율곡과 퇴계가 뿌린 성리학의 위력은 정신면에서 크게 발휘 되였으나, 그들의 사후에 성리학은 개혁의지를 상실하고, 출세를 위한 도구 학문으로 변질되었다. 그러나 `목능성세`를 가저 왔으니 목능은 구리시의 동구능에 있는 조선조 제 14대 선조및 그 원비와 계비의 능을 지칭하고, 성세란 태평성대를 이르는 말로 선조 시대에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던 이른바 `목능성세` 로 불릴 만큼 문인 재사(才士)가 많고 문학이 화려하게 꽃핀 시기였다.
선조의 치세 년 간에 일어났던 임진왜란은 조선조의 크나큰 국난 이였다. 이 크나큰 국난의 어려움이 올 것을 미리서 알았는지 당대를 풍미하던 천재 시인들과 재기 있는 문장가들은 1594년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나이를 불문하고 젊거나 늙거나 모두 죽어 갔다. 우선적으로 한글 가사문학을 이르켰던 송강 정철은 1593년에 타계하였고, 우리의 역사상 가장 뛰어난 규방시인 이었던 난설헌은 1589년에 타계하였다.
허 난설헌의 스승으로 손곡 이달은 1586년에, 삼당(三唐) 시인 백광훈은 l582년에 타계하였다. 진사의 딸로 서출이었으나 탁월한 시 재능으로 개성바닥을 뒤흔들던 명기 황진이는 임진왜란 전에 타계하였으며, 황진이를 그리워하여 그 무덤을 찾아가 술잔을 붓고 제를 올리다가 임지에 가기도 전에 관직에서 삭탈 당하였으나, 부패한 사회상을 비유하여 쾌활하고 걸출한 시풍으로 이름을 떨친 시인 임제는 1587년에, 천의무붕(天衣無縫)의 시인이자 명필가 양사언은 1584년에 타계하였다.
또한 문장과 학문이 능하여 율곡과 함께 조선의 팔 문장이요. 이달 백광훈과 함께 삼당 시인이었으며, 풍류반려 홍랑과 함께 시문을 주고받던 청백리 최경창은 l583년에 타계하였다. 최경창이 타계하자 묘막을 짓고 묘 직이로 살면서 남정네의 범접을 피하기 위하여 머리칼을 헝크리고 얼굴에 분칠을 하지 않고 평생을 살다간 홍랑(洪娘)은, 홍자성의 채근담(菜根譚)에 기록된 한 문장을 실천하였다고 할 수가 있다. 즉 "기생도 늘그막에 남편을 따르면 한평생의 분 냄새가 사라져 버리고, 열녀(烈女)라도 머리가 센 뒤에 정조를 잃으면 반평생의 절개가 물거품이 된다. 옛말에 이르기를 사람을 보려거든 그 후반생을 보라고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명언이다." 고 채근담에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당년 에는 강원도 삼척의 <죽서루 시>로 이름 높았던 옥봉 이씨는 처절한 모습으로 서해바다에 투신하였다.
여인의 마음(여인의 정)
오신다 약속하고 어찌 늦으실까
뜨락의 매화는 다 지려 하는데
문득 들려오는 나뭇가지 위 까치소리에
부질없이 거울 보며 눈썹만 그리고 있네
조원의 풍류반려가 된 옥봉이씨.
조선조의 여류시인 중에 가장 처절하게 삶을 마감한 옥봉(玉峰) 이씨, 그녀의 이름은 원(媛)이고 호가 옥봉이다. 옥봉은 충북 옥천군수를 지냈던 이봉(李逢)의 첩실의 딸 이였으나, 제 14대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의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왕손의 후손답게 당당하게 자랐다. 옥봉은 어린 나이에 총기가 밝고 재기가 있어 시문에 능하였다. 어린 나이에 제법 염과 운을 맞추어 시를 짓더니, 감탄하리 만큼 청아한 시구를 읊어 내기도 하였다. 첩실의 딸이었으나 아버지 이봉은 손안의 구슬처럼 아끼고 사랑하였으며, 옥돌이 솟아 오른 듯 아름다운 봉오리, 즉 옥봉이라 호를 지어 주고, 딸의 시 공부를 위한 책들을 아낌없이 사주었다. 자라면서 아릿다운 몸매를 갖추었고 괞찮은 집안에 출가했다가 일찍 본남편을 여의었다.
옥봉 이씨는 이때부터 한 많은 삶이 시작되었다. 한번 결혼했던 여성은 재혼할 수 없었던 시대였다. 절해고도에서 한 많은 젊은 시절을 보내야 했던 옥봉은, 그녀의 재기를 아껴 오던 아버지 굴욕적인 노력에서 새로운 삶을 찾을 수 있었다. 당시의 선망적 인물인 조원(趙瑗 1544-1595)은 남명 조식의 수제자로 율곡과 나란히 과거에 급제한 인물이었는데, 이미 승지의 벼슬을 지내고 있었다. 옥봉의 아버지 이봉은 굴욕적인 자세로 조원을 찾아가, 자기의 딸 옥봉을 소실겸 풍류반려로 받아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하였다.
얼마후에 조원은 장인 이준민(李俊民 1524-1590) 앞에 불려가 앉아 있었다. 이봉의 딸 옥봉의 과거가 있기는 하나 시재(詩才)가 뛰어나 풍류반려로 맞아 들일만 하니 받아주라는 권유였다. 조원은 장인의 권유에 못 이겨, 옥봉을 부실(副室)겸 풍류반려로 맞아들이게 되었다. 딸의 재능을 아끼던 이봉의 굴욕적인 자세로 조원의 장인을 찾아가 담판을 낸 결과였다. 그래서 장인이 택일하여 사위의 부실을 데려온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조원은 옥복을 받아들이는데 조건을 붙였다. 남편에게 부담이 되는 글을 쓰지 말 것을 맹세하라 했다. 옥봉은 맹세하였다. 여염의 여인이 시를 짓는 건 지아비의 얼굴을 깎아 내리는 일이라면서, 자신의 시는 외로움과 허망함의 발로였으니 지아비를 얻으면 시를 쓰지 않아도 좋으리라고 맹세 한 것이다.
옥봉 이씨의 글재주.
옥봉 이씨는 조원의 소실로서 또는 풍류반려로 원만하게 지내고 있었다. 조원이 관직을 그만두고 한가로이 지나던 어느 날 이었다. 두메 산골의 한 선비가 안면이 있는 조원에게 책력을 달라는 부탁의 봉서가 왔다. 조원에게는 줄만한 책력의 여유가 없어 난감한 표정으로 옥봉 이씨에게 답장을 쓰도록 하였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빙그레 웃으며 붓을 들어 거침없이 답 글을 썼다. "어찌 남산의 스님에게 빗을 빌려 달라고는 안 하시오 (何不借梳于南山之僧耶)".라 하였으니, 참으로 재치 있는 글 장난이었다.
위의 이야기는 조원의 고손 조정만(趙正萬 1656-1739)이 남겨 놓은 <이옥봉행적(李玉峰行蹟)>에 기록되어 있다. 그녀의 시는 재기발랄하고 풍류와 품위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높이 평가해왔다. 그녀의 시중에 <소낙비(雨)>가 있다. 난설헌의 아우 허균이 이 시구를 보고 감탄하여 평하기를 "기발하고 고운 것이 화장품 냄새를 단번에 씻었다."고 하여 자신의 누이 난설헌과 나란히 일컫는데 주저하지 않으면서, 한갓 여인의 가벼움을 벗어난 중진 시인으로 평가하였다.
雲葉散邊殘照漏, 구름 흩어진 가장자리, 햇빛이 새나오고,
漫天銀竹過江橫. 하늘 가득 은빛 댓가지, 강을 가로지르네.
하늘에 먹장구름이 갈라지면서, 햇살이 환하게 새어 나와 강물에 가득히 내려 꽃이면서, 가로 질러가는 순간적인 소낙비를 묘사하였다. 은빛 댓가지(銀竹)란 과연 구름사이로 새어나온 햇살일가?, 아니면 햇살 속에 쏟아지는 장대 빗줄기일가?, 허균이 반할만한 재치 있는 시구임에는 틀림없다.
또한 옥봉의 시 구절을 천고(千古)의 절창(切創)이라고 조선중기의 이름난 시인 신흠(申欽 1566-1628)도 옥봉을 극찬하며 "고금의 시인중에 누구도 이에 비견될 시구를 지은 적이 없다"는 시 구절은 삼척의 죽서루(竹西樓)를 읊은 시이다. 그녀의 남편 조원이 한때 삼척부사로 있을 때에 지은 시 구절이다.
江涵鷗夢闊, 강은 갈매기 꿈을 품어 넓고,
天入雁愁長. 하늘은 기러기 슬픔에 들어와 머네.
고려시대에 <제왕운기> 의 저자 이승휴를 비롯하여 수많은 시인 묵개서루에 올라 시를 지었는데, 그중 옥봉의 시가 가장 돋보인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옥봉의 「죽서루시」는 짧으면서도 당시 여성이 썼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자연과 인생 그리고 우주에 대한 폭넓은 세계관을 보이고 있다. 옥봉은 죽서루의 절경에 대한 현실적인 이미지를 자신의 인생과 결부시켜 초현실적인 세계로 옮겨 놓았고 드넓은 하늘로 이전시킴으로써 형이상학적인 세계로 안내하고 있다.
세월이 흘렀다. 옥봉 이씨에게 행복한 나날이 계속하여 이어질 수만은 없었다. 어느 날 조원 집안의 산지기 아내가 찾아와 하소연하였다.
남편이 소도둑 누명을 쓰고 잡혀갔으니 조원과 친분이 두터운 파주목사에게 손을 좀 써달라고 했다. 사정을 들어 본즉 아전들의 토색질이 분명했다. 옥봉은 파주목사에게 시 한 수를 써보냈고, 바로 이 글의 힘으로 집안의 산지기 남정네가 무사히 풀려났다. 그러나 후에 이일을 남편인 조원이 알게 돼서, 부녀자가 함부로 송사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남편인 조원은 화를 내며 면박을 주었다. 뛰어난 시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능력이 칭찬의 대상이 되기는커녕 남편에게 버림을 받고 만 것이다. 그래서 이 일로 옥봉은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조원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여자와는 살 수 없다”며 내친 것이다. 옥봉은 눈물로서 사죄하였으나 조원의 마음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사랑에 꺽이고 그리움에 지쳐버린 애닲은 시심.
이렇게 옥봉은 첫 번째 남편을 여의고, 두 번째 남편에게도 글재주로 버림을 받게 되면서 고독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이런 자신의 삶에 대한 한탄과 남편에 대한 기다림은 급기야 마음의 깊은 병으로 도져서, 우울한 일생을 산 것이다. 다음의 시는 이런 심정이 적나라하게 나타났다고 할 수 있는데 읽는 이의 마음까지 아리게 한다. 옥봉 시의 진수는 사랑에 있다. 그녀의 시는 그녀의 인생만큼 간절하고 안타까움을 남겨 읽은 사람들에게 오랜 여운을 남기고 있다
平生離恨成身病 평생동안 이별의 한, 이 몸에 병이 되어,
酒不能療藥不治 술로도 못 고치고, 약으로도 못 다스려.
衾裏泣如氷下水 이불 속 흘리는 눈물은, 얼음장 밑에 물과 같아,
日夜長流人不知 밤과 낮을 길게 흘려도 그 뉘, 알아 주리오.
혹시나 다시 남편의 부름이 있지나 안을까 하여 그리움 속에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또 한편의 간절하고 호소력이 있는 시를 남겼다. 쫓겨난 여인네의 애절함이 돋보이는 내용으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옥봉은 이 시를 남편에게 보냈지만 조원은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고 한다. 조원이 좀더 너그러운 사람 이였다면 이런 시를 보고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近來安否問如何, 요 지음 안부가 궁금하니 어떠 한가요,
月到紗窓妾恨多. 창문에 달 비치면 새록새록 님 그립네.
若使夢魂行有跡, 꿈속의 혼백이 가는 길, 발자국 남기기로 하자면,
門前石路半成砂. 님의 집 문 앞, 돌길 반은 모래 되었을 것이외다.
사랑의 노래 / 이수인 시, 곡
첫댓글 수많은 재주있는 여인들이 천출이라는 이름하에 기구한 일생을 살다갔지요...
이시대에 태어난 여성들이여 화이팅! 입니다.ㅎㅎㅎ
제가 옛날에 태어났더라면 기생은 아니었을까요? ㅎㅎㅎ
꽤 괜찮았을 것 같은됴ㅋㅋㅋ
어디 꽃이 매화 뿐이겠소 ?사시사철 지천으로 피는게 꽃인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