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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문화소개 스크랩 법전리.진주강씨.기헌고택...
홍왕식 추천 0 조회 50 13.03.06 07: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진주강씨기헌고택..

오른쪽 담장 밖 전경

왼쪽에서 본 문간 밖 전경

진입로

진입로

진주강씨 기헌고택을 처음 연 사람은 첨지(僉知) 강완(姜浣)이며,

강완의 손자인 기헌(起軒) 강두환(姜斗煥, 1781~1854)이 완성하였다

이 마을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마을이 둘로 나누어진다. 양지쪽과 음지쪽이다. 음지쪽에는 이 진주강씨 기헌고택이 자리 잡고 있다.

양지쪽에는 강씨종택이 위치한다.
병자호란 때 강흡(姜洽)과 강각(姜恪) 두 형제가 이 마을에 들어와서 정착하게 되었다.

형제가 영남으로 내려왔을 때 형은 나이가 웬만하였고,

아우는 나이가 아주 어렸다고 한다.

형은 법전의 음지쪽에 자리를 잡았다.

진주강씨 기헌고택이 있는 이 마을이 음지쪽 마을이므로 음지마을(음지마)이라고 한다.

음지마을은 오늘날에는 법전리가 되었다.

강흡 형제의 부모님

강흡의 부친 강윤조(姜胤祖, 1568~1643)의 자는 여승(汝承)이다.

1606년 생원·의금부 도사·한성 참군 등을 거쳐 성현 찰방을 역임하였다.

묘는 파주에 있다.

첫 번째 배위는 숙인 한양 조씨인데 1남 4녀를 두고 1608년(광해군 1)에 타계하였다.

후 배위 숙인 파평 윤씨는 1남 2녀를 두고 1659년에 타계하였다.

강흡 형제는 1636년(인조 14)에 아버지 강윤조, 어머니 파평 윤씨를 모시고 태백산 아래로 들어갔다.


법흥사와 너른 들이 있는 고장 (법전리,이야기)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는 갈방산의 동쪽 영역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은 주로 36번 도로의 위쪽으로 분포되어 있다.

법전리는 법전면소재지이다.
법전면사무소가 있는 마을이 법전고을, 법지이 고을이다.

이곳에는 옛날에 법흥사가 있었고,

또 그 앞에 너른 밭이 있었으므로 법전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법전고을은 36번 도로의 좌우로 펼쳐져 있고,

중심지는 남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 법전고을의 동쪽 부분에는 법전역이 위치한다.

철도는 봉화읍의 동북쪽, 유곡마을 앞에서 36번 도로와 떨어져 남쪽의 봉성 쪽으로 휘돌고, 법전에 이르러 다시 36번 도로 쪽으로 다가선다.
면소재지를 두루 거쳐 나아가고자 하였던 것이 철도를 놓은 시대의 철학이었던 것이고, 동서 사이를 횡단하기 좋은 지점을 뚫고 나가는 것이 36번 도로를 놓은 사람들의 생각이었던 탓에,

철도와 36번 국도는 서로 동행하지는 않게 되었다.
36번 도로의 남쪽, 법전고을의 서쪽으로 붙어 있는 마을이 음지마을이다.

이곳에는 병자호란 때 강흡이 아우 강각과 부모를 모시고 입향한 이래,

강흡 계열 진주강씨들이 대대로 이곳에 살게 되었다.

오늘날 이 마을에는 강흡의 후손들이 살았던 기헌고택이 있고,

마을 입구 쪽으로는 정조 때 승지를 지낸 강윤의 정자 경체정이 있다.
경체정은 상당히 단정하고 우아한 모습이다.

이곳이 음지말인 것은 반대편의 양지말과 대비되어 말해지기 때문인데,

양지말은 형제 중 아우인 강각의 후손들이 사는 곳이고,

법전이 아닌 척곡이다.
법전면소재지가 있는 큰 마을의 위쪽으로, 도로를 건너 법전 중앙초등학교 안으로 들어가면 황새말이 있다.

산이 황새목처럼 생겼고, 옛날에 황새가 많이 찾아들었다고 하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황새말의 동쪽으로 좀 나가서, 법전역의 길 건너 북쪽 편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서망이·서망고을이다.

옛날에 임금이 미복으로 잠행하여 이곳에 와서는 가뭄이라 모내기도 하지 못한 것을 크게 걱정하였고, 후에는 이곳에 모가 심겨졌다는 소리를 들으면 풍년이 될 것이라며 안심하였다고 한다.

이 고을 사람들은 그런 임금의 은혜에 감격하여 대궐이 있는 서쪽을 바라본다고 하여 서망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황새말의 서쪽, 얼마쯤 산골 속으로 파고 들어가면 용동 고을이 있다.

산세가 용혈을 포함하고 있다는 곳이다.

용동의 북쪽 방향으로는 모래골·붓든·사랭이 등이 펼쳐져 있다.

붓든은 중앙에 북처럼 솟은 산이 있고 좌·우로 베틀 같은 모양의 산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배출 인물

강정희(姜正熙),강신우(姜信友)
- 교유 인물

김장생(金長生),홍우정(洪宇定),심장세(沈長世) 등

- 사계 김장생의 제자, 태백오현(太白五賢) 중 1인


진주강씨 기헌고택의 전 종손은 강정희(姜正熙, 1901~1943)이다.

그는 字가 숙어(肅御), 호가 석은(石隱)이다.

묘는 법전 사곡에 있으며, 배위는 청풍 김씨이다.

아들은 1926년 출생의 강신우(姜信友), 1930년 출생의 강신택(姜信宅)이 있으나 북한에 거주하므로 강만희(姜萬熙)의 아들 강신창(姜信昌)을 택하여 양자로 들였다.

강신창은 字가 명중(明仲), 호가 운봉(耘奉)이다.

1937년생이고, 부인은 장수 황씨 황영자이다.
진주강씨 기헌고택을 처음 연 사람은 강흡(姜恰, 1602~1671)이다.

강흡의 字는 정오(正吾), 號는 이오당(二吾堂)이며,

다른 호는 잠암(潛隱)이다.

어려서 상촌(象村) 신흠(申欽)에게 수학하였고,

후에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에게 배웠다.
1630년(인조 8)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635년(인조 13)에는 ‘우율이선생종향소(牛栗二先生從享疏 :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를 문묘에 배향하자고 하는 상소)’에 참여하였다.

이 점은 강흡이 서인 중심의 학통을 잇고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는 부분이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양친을 모시고 태백산 아래 성금촌으로 피난하여 살기 시작하였다.

1637년에는 제릉 참봉으로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세마 찰방 등이 제수되었고, 산음 현감 직이 주어지는 데까지 이르렀다.

묘는 파주에 있다.
1816년(순조 16)에 유림의 상소로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1858년(철종 9)에 유림의 상소로 다시 이조 판서가 증직으로 주어졌다.

1863년(철종 14)에는 정민(貞敏)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세칭 태백오현에 속한다.

태백오현은 두곡 홍우정, 각금당 심장세, 포옹 정양, 손우당 홍석과 강흡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들은 생사를 같이 하자는 친교를 맺고 태백산에 은거해 살았다. 강흡의 배위는 청송 심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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