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2월 16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사사기 명언에서 찾은 ‘주의’ 교회 이야기 - 하나님은 과연 왕의 자리에 계신가?
본문 : 사사기 17장 6절(1~6절)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새번역>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참으로 다양한 ‘관계’ 속에 놓이게 됩니다. 가장 먼저 가족이라는 관계를 통하여, 부모와 자녀, 조부모와 손주, 누군가의 조카, 사촌 등의 관계를 형성합니다. 그리고는 형제, 자매, 남매 등의 관계가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회생활이 시작되면 가족은 아니지만, 형이나 누나, 동생, 친구라는 관계도 만들어집니다. 또한 직장생활 속에서는 누군가의 부하, 누군가의 상관, 누군가의 동료도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동역자요, 예배자가 된 관계도 있습니다. 아마 나열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관계 속에 우리는 놓여 져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잡한 관계 속에서 사랑 받고, 사랑 하고, 서운하고, 실망하고, 기뻐하고, 행복해 하는 수많은 감정들 속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관계를 통하여 자신의 위치를 지정합니다. 어떤 관계인가에 따라 내가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어떤 모습을 보일지를 결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여 사회적인 관계까지 모두 상대방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결정하고서, 그 관계에 맞게 행동하는 것을 어릴 때부터 습득하게 됩니다. 이건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DNA 안에 숨겨져 있는 무엇인가가 움직이는 듯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주 신기한 점은, 아마 이것도 DNA안에 숨겨져 있는 본능인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관계 속에서 어떻게든 우위에 서려고 합니다. 최대한 내가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 관계를 만들고자 합니다. 가능하면 내 중심적으로 관계를 형성해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소위 ‘손해’보지 않는 관계가 최고의 관계라고 생각하는 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비즈니스 관계, 적절한 관계, 선 넘지 않는 관계 등 내가 존중받기 위한 수많은 관계로 정립하곤 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그래서 이토록 ‘믿음의 삶’을 시작하는 것이 힘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믿음의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과의 관계 형성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그대로 인정해 드린다면, 사실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그렇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우위에 서려고 하는 모습이 여기서도 어김없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말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마태복음 16장 24절, 새번역>
‘나는 죽고 예수는 살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라는 말은 차마 생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지 입 밖으로는 흘러나오지 않는 미지의 단어이며, 상상의 영역의 말이 되는 것입니다. 아주 단호하게 이렇게까지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내가 없이 하나님이 존재할 수 있는가?’, ‘내가 있어야 하나님도 있는것 아닐까?’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미 우위를 뛰어 넘어서 주도권을 쥐고 쥐락펴락할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간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내’가 우위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되고 나면, 정확하게 이 말이 반대가 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요한복음 3장 30절, 새번역>
하나님은 결코 내 안에서 흥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나로 충만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쇠하여져야 하고, 부인해야 하고, 버려야 할 내 자아가 너무도 소중해 도무지 섬기지 않고는 못 베길 우상으로까지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흥하여야 하고, 하나님은 쇠하여지는 것이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온 축복이라고까지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바로, ‘나의’ 나라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의 방법과 나의 생각과 나의 기준과 나의 경험으로 만들어지는 나라,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요, ‘주의’ 교회라고 설명하면서 말입니다.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권리처럼 행동하지만 결국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자신의 나라일 뿐 인대도 말입니다. 어쩌면 너무도 아프지만 이 모습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아닌지 돌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어떤 위치에 두고 계십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금 주도권을 누가 쥐고 있습니까?’
‘지금 나에게 하나님은 나입니까? 하나님입니까?’
그리고 이런 질문들은 사사기 본문을 통해 가장 많이 묵상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사사기는 우리에게 이 구절을 알려 주기 위한 성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 <사사기 17장 6절, 새번역>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 <사사기 21장 25절, 새번역>
그런데 이 말도 너무 멋지게 번역해 준 것입니다. 사실 이 번역이 더 명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때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서 사람마다 제멋대로 하던 시대였다. <사사기 17장 6절, 공동번역>
그 때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서 사람마다 제멋대로 하던 시대였다. <사사기 21장 25절, 공동번역>
사람마다 제 멋대로 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이유가 무엇입니까? 왕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곧 사사기에서 이어지는 사무엘상을 통하여 그렇게 사무엘 선지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을 달라고 소리치는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에게 왕이 있어야 자신의 제멋대로인 행동을 멈출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이미 왕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주인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통치자가 있고, 이미 주관자가 있고, 이미 대장이 있고, 이미 대표가 있습니다. 모세도, 여호수아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왕으로 처음부터 계셨던 분이심을 그들도, 우리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왜 왕이 없습니까? 살아계신 왕,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생각하는 왕이 없었으며, 하나님을 왕으로 모실 마음도 없었기에, 왕이 없다는 기록을 저렇게 편하게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엘로힘, 창조주 하나님’, ‘엘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 이런 하나님의 이름을 꺼내지 않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인이자 왕은 언제나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나의 임금님, 땅 위 모든 곳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옵니다. <시편 74편 12절, 공동번역>
그런데 사사기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기에 사람들이 자신의 뜻대로 옳은 대로, 제 멋대로 행동한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자신의 뜻대로 옳은 대로, 제 멋대로 행동하다보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버린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왕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왕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왕이 없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대표로 본문 17장에서는 에브라임 산간지방에 미가라는 사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 혼란한 이야기라 잘 들으셔야 합니다. 이 미가라는 사람이 어머니에게 말합니다.
“어머니, 누군가가 은돈 1100냥을 훔쳐갔을 때, 그 훔친 사람을 저주하셨지요? 제가 똑똑히 들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돈이 여기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훔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저를 저주하신 게 되더군요.” 그러자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꾸짖는 것이 아니라 겁을 내며 도리어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얘야, 주님께서 너에게 복 주시기를 바란단다.” 그리고 미가는 자신이 훔쳐간 1100냥을 뻔뻔하게도 어머니 앞에 내놓았습니다. 그러자 미가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이 자신이 빈 저주를 받지 않도록, 이 은돈을 주님께 거룩하게 구별하여 바치겠다고 이야기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은을 입힌 목상을 만드는데 그 돈을 쓰겠다고 말하며, 다시 미가에게 은돈을 돌려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미가는 다시 돌려받은 그 돈을 어머니에게 다시 돌려주게 됩니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는 1100냥 중 200냥을 은장이에게 주어, 조각한 목상에 은을 입힌 우상을 만들어 미가의 집에 놓아두게 됩니다. 이게 왜 주님께 거룩하게 구별하여 바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미가의 어머니의 이해 가지 않는 행동을 보아서도 그렇지만, 실제적으로 이 미가라는 사람도 심상치 않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미가는 개인 신당도 가지고 있고, 에봇과 드라빔 신상도 만들었으며, 무엇보다 구별하여 세워야 할 제사장을 자기 아들 가운데서 하나를 삼게 됩니다.
혹시라도 이 이야기가 이해가 가시면 안 됩니다. 이건 시작부터 끝까지 조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돈을 훔쳐간 아들, 그런 아들이 자신을 저주했다고 어머니를 협박하자, 어머니는 두려움에 그 돈으로 신상을 만들어 가져다놓고! 그런데 이미 그 아들은 개인 신당이 있고, 마치 대제사장처럼 에봇과 드라빔 신상도 있고, 자신의 아들도 제사장으로 삼고 있습니다. 정말 무슨 스토리가 이런 스토리가 있을까 할 정도입니다.
똑같이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행동했다는 구절이 한 번 더 등장하는 사사기 21장의 상황은 훨씬 더 잔인하고 슬픕니다. 11지파로부터 버림을 받은 베냐민 자손이 여자의 수가 부족하게 되자, 해마다 실로에서 열리는 주님의 축제에 춤추는 여자들 가운데서 자신들의 수효만큼 여자들을 붙들어 아내로 삼도록 회중의 장로들이 묘안이라며 계획을 짜준다는 정말 어질어질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건 또한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하려고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올바로 된 기초가 하나도 없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던 그 어떤 것도 지키지 않는 때였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각 자 사람의 나라만이 존재하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멋대로 행동한다는 기록이 정확한 것입니다. 참된 왕이 여전히 있었지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왕은 없던 시대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나눈 사사기 본문을 통하여 ‘주의’ 교회를 향한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사기 명언에서 찾은 ‘주의’ 교회이야기는 바로 ‘하나님과 나의 관계 형성’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어떤 위치에 둘 것인가를 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제멋대로 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그런 교회가 아니라 ‘주의’ 교회가 되기 위하여 반드시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처음부터 명확했던 관계였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창조주이십니다. 고로 하나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나는 피조물입니다. 고로 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양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이런 수많은 명확했던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관계에 대해서 다시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십니다. 그리고 나는 그 하나님 나라를 사는 백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하나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이 고백이 오늘 ‘주의’ 교회를 만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우리 모두의 선포가 되어야 합니다.
창조주도, 아버지도, 주인도, 다 좋은 표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주의’ 교회를 만들어가는 우리가 명심해야 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바로 왕과 백성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송합니다만 이 관계를 정치적인 관계로 절대 왕정이니 절대주의 시대나, 왕권이 신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왕권신수설, 절대 군주 등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강력한 왕권을 통하여 백성을 만든 세상 나라의 정치와는 완전히 정 반대의 관계라는 것을 오히려 밝히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 되시고자 우리를 백성 삼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살고자,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길 원하며,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길 소망하면서, 자연스럽게 하나님만을 나의 왕으로 모시기로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구원해 주신 이유를 깨달았기에, 사랑을 깨달았기에, 나를 향한 목적을 깨달았기에!
조금의 강압도, 협박도, 위압도 없습니다. 나의 자원함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살기 위하여, 하나님 나라를 살기 위하여, 하나님 나라를 전하기 위하여, 그 나라 백성이 되기로 결단하면서 하나님과의 나와의 관계를 나의 왕! 나는 그의 백성으로 명확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주권자인 왕에게 백성으로서 나의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왕의 통치만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제 멋대로 하지 않고, 왕의 뜻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기꺼이 하나님이라는 왕이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에 사는 것을 기뻐하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결단이며 결정이며, 믿음의 선포이며, 기쁨의 환호이며, 내 평생의 다짐입니다.
환호 소리 크게 울려 퍼진다. 하나님이 보좌에 오르신다. 나팔 소리 크게 울려 퍼진다. 주님이 보좌에 오르신다. 시로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시로 찬양하여라. 시로 우리의 왕을 찬양하여라. 시로 찬양하여라.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시니, 정성을 다하여 찬양하여라. 하나님은 뭇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시다. 하나님이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다. <시편 47편 5~8절, 새번역>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마지막으로 나누어 드릴 수많은 질문들에 묵상하는 주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여러분의 왕의 자리에 계십니까? 찬양을 부를 때의 가사가 아닌 삶으로 살아가는 중심에 ‘왕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로 살고 계십니까? 온전한 통치를 받아들임으로 인하여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되어 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왕이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임이 기쁘십니까? 오늘 우리 교회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주의’ 교회입니까? 우리 교회는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나라입니까?
결정하셔야 합니다. 관계를 확실하게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 <사사기 17장 6절, 새번역>
‘지금은 하나님이 왕이심으로, 사람들은 저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더라’ 라는 기록으로 바뀌어가는 그리스도인,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교회를 통하여 진정한 왕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왕의 통치가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만방에 드러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이 구절을 고백하며 하나님은 과연 왕의 자리에 계신가에 대한 모든 질문들이 은혜의 시간이 되어 기쁨으로 마무리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시편 145편 1절, 개역개정>
결단 찬양 - 왕이신 나의 하나님 + 왕 되신 주 앞에 후렴
#2025년2월16일주일설교문, #20250216주일설교, #살아나서살리는교회, #김광수목사, #오늘의말씀, #사사기17장6절,
#사사기, #하나님은왕이신가, #왕이신나의하나님, #하나님과의관계, #하나님의위치, #주일설교문, #하나님의나라,
#주인과종, #부모와자녀, #왕과백성, #왕이없으므로, #하나님만이우리왕, #살아계신왕, #시편145편1절, #왕되신주앞에,
#경기도광주시교회, #오포1동교회, #문형동교회, #오포교회, #모현교회, #말씀이있는교회, #가나안성도들을위한교회,
#누구나올수있는교회, #봉골길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