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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10 - 2천년 외세에 맞선 베트남 다시 프랑스군과 싸우다!
베트남 최초의 국가는 기원전 7세기경 락비엣(駱越) 민족이 북베트남 홍감 삼각주 지역 에
세운 "반랑국" 인데, 수백년간 이어지다 기원전 257년 툭판이 반랑을 멸망시키고 어우락
을 건국해 안양왕(安陽王) 이라 했는데.... 공주인 미주가 중국 광동의 군수 조타의 아들과
사랑에 뻐져 부탁을 받고 쇠뇌를 부수니 기원전 208년에 조타가 쳐들어와서 망하게 됩니다.
진시황이 죽고 진(秦)나라가 무느지자 혼란속에 기원전 207년 조타가 중국 광동성과 북부 베트남
을 아우르는 넓은 지역에 남비엣(Nam Viet 남월 南越) 을 건국했는데, 100년이 지난후 한무제는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4군을 설치하기 3년전인 기원전 111년 남월을 멸망시키고 9군을 만듭니다.
한(漢) 나라 지배기에 탐관오리들이 식민지 남월 南越)을 가혹하게 수탈하자 견디지 못한
베트남인들은 반란을 일으키는데.... 후한의 복파장군 마원이 쯩 자매의 반란을 진압
하고 베트남을 직접 지배하니, 이 사람은 바로 삼국지의 마등, 마초 부자의 조상이며
마원은 동화정책을 실시하니 비엣족은 본격적으로 "중국문화" 의 영향을 받기 시작합니다.
후한 이후 베트남 직접 통치는 흐지부지되었으나 수나라는 주변국과 민족을 모두 정벌함으로서,
옛 한(漢) 제국 시대의 영광을 되살리고자 했으니, 602년 수문제는 하노이가 속한 교주(交州)
를 점령했으며 605년 수(隨)군은 남하해 참파 왕국을 침공해 코끼리부대를 격파하고 점령에
성공했지만 풍토병으로 많이 죽었으며 그후 당나라 군대가 침략해 "안남도호부" 가 세워집니다.
이후 906년에는 쿡 트아주가 절도사를 자처했는데 중국의 5대 10국 혼란기에는 독립국가
를 세웠으니, 정해군 절도사 유은이 세운 중국의 남한군의 침공을 물리쳤으며 938년
에는 안남(安南) 응오 왕조가 세워지고.... 968년에 다이비엣(大越, 대월)이 건국되어
1802년 까지 존속했으며 이 해에 월남(越南) 응우옌 왕조가 세워져 1945년까지 이어집니다.
대월은 980년 중국을 통일한 승승장구하는 기세의 송나라 대군의 침략을 격퇴했고 그 후에
리(李) 왕조는 절치부심해 대군을 동원해 다시 쳐들어온 송나라 군대를 물리쳤으며....
1226년 수립된 베트남의 쩐(陳)왕조는 1257년 몽골군 우량하타이가 이끄는 5만대군
의 침략을 격퇴하니.... 징기스칸 이래 몽골의 대외정복 전쟁에서 당한 “최초의 패배” 입니다.
쿠빌라이는 1259년 고려(高麗)의 항복을 받고 1278년 남송을 멸망시킨후 1284년 7월 21일
9번째 아들 토곤(脫歡)을 진남왕(鎮南王)겸 총사령관에 임명하고는, 25만 대군으로
광동(廣東)에서 바다로 베트남 중부 점성(占城 참파)국을 공격해서 정복한 후에 남북 양쪽
에서 협공을 했으나 베트남군은 수도 탕롱이 함락됐지만 게릴라전으로 몽골군을 격퇴합니다.
1258년과 1284년 두번의 대월(大越) 원정을 실패한 쿠빌라이칸은 분노를 삭힐수 없었으니
기어이 1287년에 토곤왕자등 10만 몽골군에 송나라 출신 수군등 25만을 합쳐 35만
대군으로 3번째로 침공하니...... 박당강 전투와 게릴라전으로 물리치니 몽골은 고려
침공시 1~3만에 비해 그 10배가 넘는 30만 대군으로 침공하고도 패배하고 물러난 것입니다.
베트남은 한국과 쌍둥이처럼 닮았으니 한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4군을 설치하기 3년
전에 남월(베트남) 을 멸망시키고 9군을 설치했으며, 중국이 통일되면 침략을 받으면서도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니 한자와 유교를 들여와,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통한 관리는 유교로
나라를 다스리고 주민들은 불교를 믿으며 궁궐도 조선과 베트남 모두 장안을 모방 했습니다.
두나라 모두 몽골의 침략을 받은것은 같지만, 침략 규모가 베트남은 5만 ~35만인데 비해 고려에는
1만 ~3만이며.... 베트남에는 몽골 왕자와 대장군들이 중앙군을 이끌고 갔지만 고려는 중앙군이
아닌 만주의 지방군이 동원되었고 베트남은 지배할 목적이었지만 고려는 1차 몽골 중앙군 20만이
금나라를 치면서 배후의 안전을 위해 지방군 3만을 보냈고 송나라를 공격하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려는 1차때 중앙군 2만여명이 안북성 벌판에서 허벌나게 깨어진후 강화도로 도망쳐서
2~9차 침입시는 숨어서 아예 나오지도 않았으며.... 3별초 역시 단 한번도 몽고군에
맞선 적이 없고 고려왕 역시 전쟁터에 나가지 않았고, 최씨 정권의 수뇌부와 대신에
장군들 역시 강화도에 숨었으니 2~9차 전쟁 때 단 한번도 육지로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안전한 강화도에서 국왕과 실세인 최씨들이며 대신과 장군들은 큰 저택을 짓고 호화찬란한 연회를
열고 화려하기 그지없는 팔관회등 불교행사를 벌이면서.....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항복 사신을
보내고 물러가면 약조를 어기고 대도에 입조하지는 않으면서 생활 비용을 조달해야 하니, 비로소
육지로 나와 백성들의 등가죽을 벗겨 세금을 쥐어짜는데... 반란이 일어나면 가혹하게 진압했습니다.
하지만 2곳만은 진압하지 못했으니 1258년 조휘와 탁청은 함경남도 영흥에서 고려 관리를 죽이고는
항복하니 원나라는 쌍성총관부를 설치했고, 1269년 서북면의 최탄등이 난을 일으켜 서경(평양)등
54개 성과 자비령 이북 서해도 6개성은 몽골에 바치니 원나라는 동녕부를 설치해서 직접 통치합니다.
반면에 베트남은 몽골 대군에 수도 탕롱(하노이)이 함락돼도 항복하지 않고 후퇴해 계속 싸웠
으니, 국왕은 이리저리 도망치며 몽골군을 끌고 다녀 지치게 만든 다음에 대신과 장군들은
흩어진 병사들을 한곳에 집결시켜 몽골군을 공격하는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고
고려는 결국 항복했지만 베트남은 끝끝내 싸워 3번 모두 대승리를 거둔게 다른 점인가 합니다?
새로 들어선 베트남 호왕조는 1406년 명나라 대군의 침략에 패해 중국의 식민지가 되었으나 22년후
1428년에 레러이가 명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레왕조를 세워 독립을 유지했으며.... 350년이 흐른
1780년 청나라 20만 대군이 침공해 수도 탕롱을 점령해 독립을 위협했으나, 1788년 베트남 중부
후에에서 왕위에 올라 새 떠이산 왕조를 연 응웬후에는 청나라 대군을 몰아내고 독립을 지켜냅니다.
응우옌 왕조는 쩐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울 때 프랑스군의 지원을 받았으니...
프랑스는 인도 식민지 각축 전투에서 영국에게 패한 뒤 베트남으로 눈을 돌리고
있었는데, 응우옌 왕조는 2대 황제였던 민망이 가톨릭 선교를 금지하고 프랑스 선교사
를 처형하였으니, 프랑스는 이를 빌미로 인도차이나 반도를 식민지로 만들기 시작합니다.
1843년 외무장관 프랑수아 기조는 장바티스트 세실 제독과 레오나르 샤르네르 대령의 지휘
하에 베트남에 함대를 파병하였으니, 프랑스는 남부 코친차이나(월남)를 할양받은 이후
차츰 식민지를 확대하여 1887년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를 병합한 식민지인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설립하니.... 저 인도차이나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까지 계속됩니다.
프랑스군은 홍강 삼각주인 하노이를 침공했으니 홍강 수로를 이용해 중국 윈난성 방향 교역로를
장악하려고 했는데, 베트남의 수도는 중부 후에였지만 하노이도 옛 수도에다가 베트남의 핵심
곡창지대이므로 절대로 빼앗겨서는 안되는 상황이었으니... 프랑스군이 침공해 오자 베트남
응우옌 왕조는 태평천국을 이끌던 유영복(劉永福)이라는 인물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바로
흑기군(黑旗軍)이니 1873년 12월 600명 병력으로 하노이에서 18명의 프랑스군을 격파합니다.
프랑스는 550명 해군과 해병대를 파견했고 이듬해 5월 하노이 외곽에서 3,000명 베트남-흑기군
연합군과 전투를 치렀는데... 이 전투에서 프랑스는 수에 밀려 패배했고(프랑스군 35명 전사
52명 부상, 흑기군 50명 전사 56명 부상) 당시 프랑스군 사령관이었던 리비에르는 전사 했습니다.
1874년 12월 프랑스 의회는 군비 추가와 함께 15,000명의 증원군 파병을 승인하니 원정군
의 총사령관 아메디 쿠르베는 우수한 무기와 병력의 우위를 앞세워 손타이, 바쿠닌,
타이구엔, 훈호아 등 여러 도시를 함락하고, 손코이강 삼각주를 제압하니 베트남
쪽에서도 별수없이 청나라에 손을 내밀었고, 청나라는 군대를 파견했으니 명나라가
임진왜란때 조선에 파병한 이유와 같은데 바로 조공하는 제후국을 보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청나라는 신강에서의 전쟁이 막 끝났고, 이홍장은 베트남에 힘을 쏟을 생각은 없었으니 빨리 전쟁
을 종결시키기를 원했기에... 1884년 4월 프랑스 대표 푸르니에와 함께 천진에서 만나 이른바
간명(簡明) 조약을 체결했는데, 청은 프랑스의 베트남 보호권을 승인하고 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을 변경으로 철수시키기로 하는 대신 프랑스는 중국 변경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는 간명조약에 조인하고 난뒤, 바로 청군을 공격했으니 청군이 국경선까지 철수한다
는 약속을 어겼다는 것이 명분이었는데..... 간명 조약에는 맹점이 있었으니 조약에서는 분명히
청군의 철수를 약속했지만 언제까지 철수할 것이라는 내용이 없었고 만일 조약 내용에 청군이
특정 시한내에 철수하겠다는 내용이 있었다면 그 전까지는 프랑스가 공격할 명분은 없었습니다.
간명 조약에는 철수기한이 명시되어있지 않았으니 프랑스가 청군을 공격해놓고 '왜 먼저
청군이 물러나지 않았느냐.' 라고 논리를 펼 수 있는 셈이었으니... 이에 베이징 주재
프랑스 공사는 전쟁 비용 2억 5,000만 프랑의 배상과 청군의 즉시 철수를
요구했는데 청나라 조정에서는 '1개월 이내에 다 철수시킬 것' 이라고 공언했지만,
프랑스는 이미 푸저우(福州) 의 마미 군항(馬尾 軍港) 을 공격했으니 마미 해전 입니다.
선정대신을 맡으며 복주에 체류 중이던 하여장(何如璋) 은, 나름대로 사태를 더 크게 만들지
않기위해 청군에게 발포 금지 명령을 내렸지만 덕분에 프랑스 함대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복건함대를 전멸시켰으니..... 무엇보다 마미 조선소는 은 2,000만냥을 들여 만든
양무파의 기대 자체였지만 어이없는 명령으로 저항하지도 않자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분노한 청나라 조정은 복건함대가 전멸한지 3일후,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해전
은 함대가 없어졌으니 프랑스군의 압도적인 승리였고, 육전인 박닌전투에서는 의외로
청군이 분전했지만 유리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으니 통킹을 둘러싼 크고 작은 전투
에서 프랑스군의 교환비는 1 : 10을 넘겼는데.... 압도적인 인명피해에도 어떻게든
프랑스군의 진격을 막아 교착상태를 만든 점에선 청군의 전술적 성공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프랑스군은 베트남 전선에서 청군을 얕보고 지나치게 북상했는데 원군으로 온 풍자재는 청군에
몇 없는 용장이었으니 풍자재 지휘하에 청군은 물러서지 않고 치열하게 돌격했고, 그 결과
프랑스군은 진남관(鎭南關) 전투에서 패배했는데 이후 키루아(Ky Lua) 전투에선 일단 량선
(Lang-Son) 지역 탈환을 목표로 한 청군의 공격을 방어할 수가 있었고 피해도 크지 않았습니다.
프랑스군은 보급이 차단될까 아노미상태에 빠져 물자도 버리고 남쪽으로 도주했고 본토에 패전
가능성이 있다는 전보를 보내, 이 여파로 쥘 페리 총리는 불신임안을 받고 내각까지 총사퇴를
하게 되는데... 청군은 교환비에서 피해를 많이 봤고 전황에서 유리하다고는 볼수 없던 상황
이었지만 지금까지의 전투 경과로는 협정에서 프랑스가 많은 양보를 해야 할 수도 있었습니다.
청 조정은 프랑스에 타협해 화친을 구하고 1885년 4월 7일 정전하고 철병하라는 윤지를 하달해
화의가 시작되었는데, 이전에 맺은 간명조약 유효성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리한 쪽은
프랑스였으니...... 간명 조약을 맺을 당시의 프랑스는 중국에 대해 우위에 있던 입장인데, 정작
청나라가 프랑스군에 여러차례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고도 조건은 이전과 달라진게 없었습니다.
청의 이홍장은, 군사력을 베트남에 끊임없이 투입하는 프랑스 보다는 근대화된지 얼마안된 일본이
더 약하고 쉬운 상대라 생각했으니 베트남을 버리고 조선을 보호국으로 유지하고자 했기에,
그리 나쁘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 베트남을 통째로 갖다 바쳤으니 베트남을 양보
하고 대신에 조선을 장악하려 한 이홍장의 이 잘못된 선택은 9년 후에 큰 후환으로 되돌아옵니다.
이 전쟁에서 청나라는 은 10억냥 이상을 지출했고 2억냥의 빚을 지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조공국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이 사라졌는데, 프랑스의 경우에는 드디어 청나라의 세력을 완벽하게
일소하고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확립해 본격적으로 인도차이나 식민지화에 착수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중화제국~ 조공국의 관계에서 제국주의 열강이 끼어들어 중국을 압도하고 조공국을 자기
식민지로 빼앗는 구도는 후일 청일전쟁에서도 그대로 재현되니..... 쑨원 같은 경우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질서에 금이 간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보고 자신이 청나라 정부 전복에
뜻을 세웠다고 말했는데 이 사태는 근본적으로 청나라 후진적 체제 때문이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전쟁으로 인해 다시 한번 청나라의 취약함이 드러나자 영국, 러시아, 프랑스, 미국,
일본 등이 중국과 그 주변의 나라에 대하여 야심을 품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조선과 만주가
전략적인 요충지로 청불전쟁 이후 10년간 열강의 쟁탈목표가 되었는데, 이후 청나라는
청불전쟁과 비슷한 전쟁에서 조선을 둘러싸고 일본과 복귀전을 치르게 되며 기껏 세운
조선소 등 공장 지대가 프랑스 함대의 포격으로 파괴되며 산업화에 큰 지장을 겪었습니다.
청불전쟁은 조선의 역사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갑신정변은 조선 주재 3천 청군 병력의 절반 1,500
명이 청불전쟁에 투입된 것을 기회로 발생했으니.... 그러나 정변 세력의 보유 병력은 그 절반만
남은 청군과 싸우기에도 너무 적었고, 다케조에 공사가 직접 데려온 휘하의 일본군 수비병력 200
명도 약속을 어기고 인천으로 철수하는 바람에 남은 청군의 규모로도 충분히 반격이 가능했습니다.
청국은 일본으로부터 조선을 지키는게 더 낮다는 판단에서 전황이 불리하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나도
쉽게 베트남을 포기한 것인데.... 청불전쟁을 계기로 사실상 프랑스의 속국이 된 대남(하노이) 과
프랑스령 코친차이나(남베트남)에 라오스, 캄보디아를 합쳐 인도차이나는 프랑스령 식민지가 됩니다.
조선총독과 달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은 문관도 부임했고, 무관도 일본 육군장군(대장)이 대세
인 조선 총독에 비해 해군 제독들이 취임한 것이 특징이라고 보는데, 베트남은 유교가 국교이고
백성들은 불교를 믿으며 공자를 받들어 석전제 제사를 지내며 유학자 선비들이 중국의 4서 3경을
공부해 과거시험으로 관리로 선출되고 중국에 조공하는 제후국인등 모든면에 조선과 판박이 입니다.
응우옌 왕조가 무너진뒤 베트남에서 지속적인 독립운동이 있었으니 1885년 관군이 프랑스군에 패하자
응우옌 왕조의 관원이었던 쯔엉딘은 의병을 일으켜 싸웠는데... 그는 수차례 프랑스군에게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결국 수세에 몰려 자결했고 무장투쟁이 실패로 돌아간후 문신들에 의한 근왕운동이
있었으며, 근왕운동이 실패한 뒤에도 판보이쩌우와 같은 민족주의자들이 항불 독립운동을 지속합니다.
초대 베트남 총독 사르네 제독은 정치를 전혀 모르는 인물이니 코친차이나는 후에조정이 임명
했던 관리나, 조세 명부, 관청문서 등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최악의 상황이라 실질적인
통치가 시작된 것은 1863년 그랑디에 제독이 부임한 후니... 그랑디에는 5년간 지배
하면서 조세제도를 개혁하고, 공공사업을 벌이며 통역학교를 설립하는등 통치기초를
다졌으니 인도차이나의 총독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건 1897년에 부임한 폴 두메르 입니다.
폴 두메르는 강력한 동화정책과 본국중심 식민지정책을 단행했으니 적자였던 인도차이나 경영을
위해 예산을 높이 책정하고... 이를 조달하기 위해 인두세를 500%, 토제세를 150% 인상하고
각종 간접세를 신설했으니, 우선 술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 모든 술 제조와 판매에 관한 권한을
프랑스 기업인 퐁텐에 부여하고 마을마다 소비량을 할당하여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하였습니다.
집에서 술을 빚는 것은 금지되었고 술을 만들다 발각되면 감옥에 가거나 재산이 몰수되었으니
이 조치로 퐁텐은 자본금 350만프랑을 투자하여 연간 200에서 300만 프랑의 이익을
거둘수 있었으며, 베트남의 술값은 1902년 5센트이던 것이 1906년에는 29센트로 4년
사이 6배 가까이 폭등하였고, 베트남인들은 명절마다 집에서 담은 술로 축제를 벌이던
관습이 있었으니 총독부의 술 제조 금지령은 베트남 생활문화의 핵심을 파괴한 행위였습니다.
이후 폴 두메르는 소금을 전매하자 소금 값은 10년만에 5배로 상승하였고 거기에 아편마저
독점 판매해 폴 두메르가 물러났을때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아편 수입은 취임할
때의 2배인 150만 프랑이었고.... 아편 흡연자도 2배 이상으로 늘어있었으며 게다가
아편 재배와 판매는 식민 당국이 지역유지와 기업들을 통해 반강제적으로 확산 시켰습니다.
1840년 아편전쟁의 여파를 보며 기존 성리학적 가치관에 따라 마약에 취해 해롱
거리는 걸 극히 죄악시 하던 베트남인들의 가치관에 큰 모욕감을 주었으니...
바로 다음 시기 총독부 역시 토지 조사 이후 높아진 세금 + 소작료, 술 제조
금지, 소금, 담배, 인삼의 전매 등으로 식민지인들을 혹독하게 쥐어짜게 됩니다.
폴 두메르가 취임 전에 적자던 인도차이나의 예산을 흑자로 돌렸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는
인물도 있는 것 같지만, 전체 예산의 25%를 술, 아편, 소금의 전매로 조달했다는 문제점도
안고 있었으니... 폴 두메의 큰 악정은 베트남인들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아 프랑스에서
이주해온 기업과 사람들에게 나눠 주면서 베트남 민중들의 생활 기반을 빼앗은 것 입니다.
이 결과 코친차이나의 토지 중 총 36만 헥타르가 프랑스인 이주자에게 불하되었
으니 여기에 소수의 대지주가 동참하면서 토지 집중은 심화되었고, 전체
국민의 90% 에 달했던 농민층의 양극화와 빈곤화를 초래하였으니.... 이런
악조건은 나중에 인도차이나 공산당 조직이 결성되는 데 일익을 담당하게 됩니다.
프랑스 식민통치에 관여한 프랑스인들은 베트남을 지배할 때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사상
을 말살하기 위해 한자(漢字) 대신에... 베트남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국어(꾸옥응으)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식 교육 대신 프랑스식 교육을 강요하였습니다.
교육의 혜택을 받기 어려웠던 육체노동자나 일꾼들도 따이보이(Tây Bồi, "일꾼 서양말")
라는 피진 프랑스어 정도는 배워서 구사해야 생계를 이을 수 있었으니 일부 애국지사
들은 프랑스어 학습을 거부하기도 했으나, 근대 교육을 받거나 국제 여론전에 호소
하기 위한 방편으로 프랑스어를 배워 구사하던 식자층도 있었으니 어떤 사람들은
프랑스어를 배운뒤 친불파가 되어 프랑스 식민통치에 부역하며 재물을 불리기도 했습니다.
라오스의 경우 베트남 응우옌 왕조처럼 루앙프라방 왕국이란 괴뢰왕국과 왕이 존재했으나
당연히 실권은 프랑스 측에 있었는데.... 라오스는 농사를 짓기에 환경도 좋지 않았고,
중국 진출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프랑스 당국으로 부터 상대적으로 소외당했습니다.
때문에 라오스 프랑스 식민지 당국은 돈이 되는 아편 재배를 적극적으로 장려했으며
교육도 이루어지지 않아 평민을 위한 교육 기관은 사찰이 전부였으며.... 이웃
나라인 캄보디아 역시 라오스와 사정은 비슷하여, 고무, 옥수수 등의 플랜테이션
농법이 주된 경제 수단이었는데..... 그마저도 대공황 이후에 완전히 망해버렸습니다.
프랑스 식미지로 부터 베트남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1885~1888년 까지는 '껀브엉(勤王)
운동' 이라고 하여 응우옌 왕조를 도와서 국토 회복을 이루려는 독립운동이
있었으나, 당시에는 식민침략 열풍이 거셌던 터라 '그들만의 리그' 취급을 받았습니다.
상대적으로 교육 수준이 낮고 당국의 관심도 적었던 라오스, 캄보디아와는 달리 교육
수준도 상대적으로 높았고 착취가 가장 심했던 베트남에서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의 세가 빠르게 커져갔으며... 또 베트남 국민 입장으로 보면 인간적인
종래의 유교 왕조가 야만적인 프랑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분노심도 한몫 했습니다.
프랑스의 침략 초기부터 계속된 게릴라식 무장 독립투쟁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서
두 가지 움직임이 새롭게 등장하였으니 하나는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었던 투쟁
을 전면적이고 조직적인 투쟁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을 지향하는 움직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국내의 모든 저항세력을 규합해 전국적으로 무력 투쟁을 벌이자는 부류와
국제 사회의 지원을 기대하는 부류로 나뉘었고, 다른 움직임은 프랑스 식민지배는
물론 응우옌 왕조를 비롯한 봉건체제 자체를 타도 대상에 포함시키는 형태였습니다.
여기에 프랑스에 대한 저항 의식이 가미 되면서 초기 베트남의 민주주의와 독립운동
은 판보이쩌우와 판쩌우찐이 주도했으니.... 판보이쩌우가 군주제를 옹호하고
외세의 힘, 특히 버마의 아웅산이나 인도의 찬드라 보스처럼 일본 제국의 힘을
빌려 프랑스를 물리치려는 생각으로 일본으로 유학 가자는 동유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 반면에 판쩌우찐은 프랑스의 괴뢰인 응우엔 왕조의 군주제를 부정하고 프랑스
의 도움으로 근대화를 이룩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군주제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고, 프랑스를 도와서 개혁을 이루려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것인
데.... 그 외에 옛날 유교사회로 돌아가려는 복벽주의 독립 세력들도 있었습니다.
분열된 운동을 하나로 규합시킨 인물이 응우옌타이혹 이었으니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하노이의
인도차이나 대학을 다니면서 사회주의 사회개혁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해, 1926년에는 친구
들과 남동서사를 설립해 유럽에서 발생한 사회개혁 주장을 게재한 출판물을 제작, 판매하였고
1927년에는 지지자를 모아 무력혁명을 통한 베트남 독립을 위하여 베트남 국민당을 창설합니다.
베트남 국민당은 1929년에 당원수가 1,500여명에 이를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였지만, 하노이
에서 발생한 프랑스인 바쟁 살인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되면서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탄압을
받자, 1930년 엔 바이에 위치한 프랑스군 막사를 공격하면서 무장봉기를 일으켰으나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실패해 천명의 당원이 체포되고 응우옌타이혹은 사형에 처해집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의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비공산주의 계열에서 공산주의 계열
의 주도로 바뀌게 되며, 그리고 이를 주도한 베트남 근대사 최고의 영웅 “호찌민”
의 지휘로 베트남 민족주의 세력은 공산주의의 세력의 영향력 속으로
규합되니.... 공산주의 방식이 아니면 베트남 독립은 어렵다는데 공감대를 이룬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중 1940년에 비시 프랑스의 페탱 정권이 나치 독일에 항복하자 일본제국은
이 기회를 틈타 대다수가 유럽국가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로 세력을 확장시켰으니그
명분은 당시 일본에 저항하던 중국을 압박하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비시 프랑스를 압박
하여 거의 강제로 허락받아 최대 25,000명의 인도차이나 파견군을 베트남에 진주시킵니다.
일본 상인들은 과거 임진왜란 이전부터 배를 타고 중국 영파와 필리핀 마닐라, 베트남 호이안
과 태국의 아유타야 에, 말레이시아 말래카와 인도네시아와 크메르 여러곳에 "일본인촌"
을 건설하고 무역을 했었으니..... 아유타야에서는 왕위 계승전쟁에 개입했고 호이안에서는
일본교 다리를 건설했었는데, 360년 만에 침략전쟁을 일으켜 다시 동남아로 진출한 것입니다.
1937년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을 상당부분 점령한 상태였는데 “国際信義上ドウカト思
フガマア宜イ 국제 신의상 어떨지 싶지만 뭐 괜찮겠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격을 허용
하는 쇼와 덴노의 반응으로 1941년 6월 25일 스기야마 메모 (杉山メモ) 상권 231쪽에 나옵니다.
1941년말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아돌프 히틀러는 일본이 연해주를 공격해 전쟁수행에 도움 주기를
원했기에, 일본의 환심을 사기위해 비시 프랑스 정부를 압박했으니 이에따라 일본군 25,000명의
파견제한이 사라졌고, 인도차이나 군사시설을 마음껏 이용할수 있으며, 인도차이나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마음대로 수탈할수 있었으니 프랑스 총독부와 일본군 사령부 간 이중권력이 생긴 셈입니다.
때문에 베트남인들은 공납을 프랑스와 일본에 따로 바쳐야 하니 수탈은 2배니... 더욱 심해졌는
지라 독립열기가 고조되니, 1941년 베트남 공산당은 독립운동 조직인 베트남독립동맹
(Viet Minh)을 결성하고, 호치민이 지휘를 맡았는데 공산당에 의해 창건되었지만 성향에
관계없이 조직원을 받아들여 1943년쯤에는 베트남 내에서 가장 활발한 독립운동 세력이 됩니다.
1944년 전세가 불리해져 일본군이 필리핀에서 패망하자 일본 남방군 사령부를 사이공으로 옮기게
되면서 인도차이나 지역의 중요성이 커졌는데, 그러나 비시 프랑스 정부가 몰락하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는 자유 프랑스 쪽으로 갈아타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에 불안감을 느낀
일본군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폐지시키고 행정권 까지 장악 합니다.
각 지역 명목상 군주들을 수반으로 한 괴뢰국(베트남제국, 라오스왕국, 캄보디아왕국)이 성립되니
자유 프랑스의 샤를 드골은 식민지 회복을 위해 라오스 지역의 민족 운동을 적극 지원했는데...
태평양전쟁 과정에서 일본군에게 식량수탈을 당해 베트남은 1945년초 인구의 10% 에 가까운
200만명이 굶어죽는 대기근을 겪으면서 일본에 대한 저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기가 됩니다.
프랑스는 1945년에 일본의 침략에 무릎을 꿇었으니 당시 프랑스군에는 베트남인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계속되는 핍박에 질려 있었던지라 일본군에게 투항했고, 프랑스군이 어디있고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일본측에 제공했으니 이는 프랑스가 참패하게 된 원인
이 되었으며 응우옌왕조 황제 바오다이도 프랑스를 적대하는 일본군에게 협력합니다.
프랑스군이 일본군에 굴복했다는 것부터 베트남 독립투쟁을 더욱 고무시켰고, 호치민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중심이 된 가운데 인도차이나 공산당과 그 전위조직, 베트남 문화 강경지지파,
베트남 국민당의 일부세력, 군소집단 및 중국으로 망명한 소수의 개인들이 참가했으며 이후 모든
정치활동은 베트민의 이름으로 행하여지고 공산당은 뒷전으로 물러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베트민의 베트남 해방군 선전대가 월맹군으로 발전하였고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이 봉기하면서 일시적으로 베트남을 해방시켜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성립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사람들은 모두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할 천부의 권리를
조물주로부터 부여받았다.” - 베트남 독립 선언 서문, 호찌민 1945년 9월 2일 하노이 바딘 광장 -
그러나 2차대전후 전후처리를 위해 북위 16도선을 경계로 베트남 북부에는 중화민국군이, 남부에는
영국군이 진주했으니 북부에 주둔한 중화민국군은 국공내전으로 1946년 2월 프랑스에 북베트남
을 넘기고 철수했고.... 이어 1946년 3월 6일, 프랑스는 베트민과 하노이 예비 협정을 체결하여
프랑스 인도차이나 연방에 소속된 하나의 국가로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지원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이는 베트남에 지배권을 다시 행사하려고 시간을 벌기 위한 프랑스의 눈속임에 불과
했고, 같은 해 3월 26일, 남부 코친차이나(월남) 지역에 프랑스는 괴뢰국인 코친차이나
공화국을 성립시켜 프랑스가 구상한 인도차이나 연방에 편입시킬 요량이였으니.....
네델란드가 자신들이 조종할수 있는 인도네시아 연방을 만들려고 했던 것과 비슷합니다.
독립협상이 지지부지한 와중에 1946년 11월 20일, 하이퐁 항구에서 밀수선 단속으로 인한 충돌
을 기회로 프랑스군은 하이퐁 항구를 기습적으로 공격했고, 1946년 12월 19일 부터 프랑스군
은 통킹 삼각주 일대 요새와 하노이의 호치민 관저 및 요충지를 습격했고 1947년 2월 중부
다낭, 후에에 상륙했으니 프랑스와 베트민 사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북위 16도 이남 남베트남(월남)은 일본 패망후, 영국군은 프랑스인들을 풀어주면서 지배권을 프랑스에
넘겼고, 돌아온 프랑스군은 베트남을 다스리려 했다가 국제 여론의 비난을 받았으니... 이에 프랑스는
1946년에 마카오로 도주해 방탕한 생활을 하던 옛 바오다이 황제를 1949년에 불러와 베트민이 장악
하지 못한 남부 베트남을 베트남국(월남) 으로 형식적으로 독립시켰으나 "프랑스의 괴뢰국" 이었습니다.
반면 베트민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유리한 위치를 점했는데 프랑스는 1946년 3월, 베트민과
하노이 예비협정을 통해 베트남을 자유국가로 인정했으니, 프랑스연방 내 자치령으로 남는
것을 의미했고 프랑스군이 1952년까지 단계적으로 철수하는 것으로 협상이 됐으나 프랑스
의 일시적인 눈속임으로 베트남에 공산주의자들이 통치하는 것을 묵인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호찌민" 역시 이 협상을 두고 공산당 내부에서 매국노라 욕을 들어먹고 있던 상황이었고, 결국
양국간에 전면전쟁이 벌어지는데, 1946년 11월 20일 프랑스가 함포사격으로 베트민군을 공격
하면서 수많은 시민들을 학살하는 하이퐁 사건이 터지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됩니다.
남베트남은 온건한 독립을 준비중이었으니 프랑스군은 응우옌 왕조 황제를 명분으로
친프랑스 "괴뢰 정부" 를 세우려 한 것인데, 1946년 성립된 괴뢰국인 코친차이나
자치공화국을 이어받아 1948년 베트남의 여러 세력과 프랑스가 절충을 한 결과,
같은 해 5월 27일에 잠정 정부로서 베트남 임시 중앙 정부를 설립하니 "월남" 입니다.
베트민은 1949년에는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통일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까지
받으면서 프랑스를 더욱 몰아붙였으니, 프랑스의 재식민지화 정책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는 베트민군의 대반격과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오는 재정적인 문제에 국제여론마저 악화되면서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년 12월 19일 ~ 1954년 8월 1일)은 사이공시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프랑스 본국의 군인이 상륙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사이공시에서 시민들이 무차별 학살되는 것을
목격한 베트남인들은 곧 게릴라전을 통해 프랑스군과 전면전을 벌이기 시작했으니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미국은 1954년까지 80% 나 되는 전쟁 비용을 프랑스를 대신해 지불합니다.
초기에 자본과 무기 등에서 뒤진 베트남 게릴라들이 엄청난 열세에 놓였지만 제국주의에 반감을 가진
시민들과 농민들의 지지를 등에업고 전세를 역전하기 시작했으니... 베트남 게릴라들은 뛰어난 전략,
전술을 통해 소총과 권총만 갖고서 전차, 장갑차, 대포 등을 동원한 프랑스군을 제압하기 시작하니
1953년 들어 총반격을 개시한 베트남군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에서 프랑스군을 궤멸시킵니다.
"디엔비엔푸 전투" 에서 지압 장군이 이끄는 베트민군에게 프랑스군은 대패해 병력 대부분
을 상실하니 1954년 8월 1일부로 전쟁은 끝났고.... 10월에 프랑스 군이 철군하면서
정전선 설정에 관해서 논란이 벌어지는데 프랑스는 18도선을 고집했고, 베트민은
13~14도선을 주장하자 주은래가 16도선을, 몰로토프가 17도선을 중재하여 베트남은 북위
17도를 군사경계선으로 하여 베트남에 남북으로 2개의 정부가 들어서니 제네바 협정입니다.
그리고 1955년 10월 26일 남베트남에 국민투표로 왕정이 축출되고 응오딘지엠 정부
가 수립되니 베트남 공화국(월남) 의 건국이었으며.... 그 다음달 1월 내전은 다시
시작되었으니, 호치민 대통령은 17도선을 휴전선이라고 보며 남베트남이
"제네바협정" 대로 1956년 "남북통합 총선거" 를 받아들여 줄 것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하지만 남북 베트남 총선거를 하면 아이젠하워는 "호치민이 80% 이상 지지" 를 받는다고
보았으니, "베트남에 합법적 공산국가" 가 들어서는 것을 두려워한 미국이 개입해
남베트남이 선거에 응하지 않는지라.... 베트남이 평화적으로 통일될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이에 절망한 남베트남 내 공산주의자들은 테러공격을 감행하였고 1960년 12월 '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 이란 이른바 '비엣콩(베트콩)' 이라 불리는 빨치산을 결성하니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 과 중국, 소련의 원조를 받아 세력을 더 확장합니다.
제네바 협정 의장국 영국의 외무장관은 "회의 최종선언" 을 발표하여 통일된 베트남을 수립하기 위해
1956년 7월 이내에 보통선거를 진행한다고 규정했지만... 프랑스는 제네바협정을 이행하지 않고
군대만 철수시켰으니, 베트남 전국 총선거가 결국 이뤄지지 못하는데 이 틈을 타 미국이 반공을
명분으로 남부 베트남에 개입하니 미국은 1955년 남베트남에 부정선거를 통해 친미 정부를 세웁니다.
프랑스가 세운 괴뢰정권인 남베트남(월남) 정부는 미국이 개입한후 친미정권으로 바뀌니 바오다이
를 몰아낸 응오딘 지엠 정권하에서 부정과 부패가 더 심해졌고, 정부가 가톨릭 교도들로 구성된
테러 조직을 만들어 불교를 심하게 탄압하는 등 인권탄압이 심각해지면서, 혁명세력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 을 결성하고 분노한 시민들과 함께 전면적인 무장투쟁에 나섭니다.
응오딘 지엠은 동생 응오딘 누를 비밀경찰 책임자로 세웠고, 독신이던 지엠은 국가 의전에서
누의 아내 마담 누를 퍼스트 레이디로 삼았으며, 마담 누의 아버지는 미국 대사로,
어머니는 유엔 참관인으로 보냈고 자신의 친형은 후에의 추기경으로, 다른 2명의 형제
들은 지방의 권력자로 임명하였으며 사촌과 일가친척 역시 모두 주요 요직에 등용하였습니다.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남베트남의 대부분을 점령하게 됨에 따라 남베트남의 미군
주둔 병력도 계속 증가되었으니.... 호찌민을 지지하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베트콩) 이 베트남 전역을 공산화할 것을 염려한 미국은 북베트남을 침공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1964년 8월 4일에 통킹만 사건을 의도적으로 조작해 일으킵니다.
되돌아 보면 월남 국토가 네이팜탄과 고엽제로 초토화 되고 수백만명이 죽은 민족 내전인 "월남전쟁"
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전쟁이었으니, 제네바 협정대로 남북 베트남 총선거가 실시됐다면
괴뢰 정부인 월남 정부의 인사들을 제치고 호치민이 당선되어 "합법적인 공산국가" 가 들어
섰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동남아가 베트남 때문에 공산화 된다는 도미노 이론은 틀렸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