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누가 더 큰 사람이냐’를 두고 서로 다투고 있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 제자들은 뭔가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하느님 앞에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 될까'에 마음을 쓰는 게 아니라, '사람들한테 누가 더 크게 보일 것인가' 하는 것에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생각나는 게, 요즘 일부 신부들이 하느님께 향하기 보다는 사람들(신자)에게 어떻게 보일지 신경쓰는 모습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거 가만 놔두면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셨는지, 깨우침의 말씀을 주십니다.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라고 낮은 자세로 봉사하는 ‘섬김의 태도’를 가르치십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교회가, 또 우리 사목자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정말 낮은 자세로 섬기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을까를 성찰하게 됩니다.
작년에 일산 마두동성당에서 전체 의정부교구에서 의식있는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여성을 주제로 한 경청 모임’을 가졌다고 합니다. 여기서 나왔던 몇 가지 이야기인데, 오늘날 우리 교회 모습을 잘 보여주는 현실적 이야기로 우리 교회가 귀담아 들어야 할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먼저, 우리가 자주 이야기하는 소외되는 신자 이야기인데, 말만 그렇게 하지 말고 현재 우리 교회에서 어떤 사람이 소외되고 있는지 정확히 인지하고, 말로만 하지 말고 그들을 포용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일례로 우리 천주교 성당 모임을 보면, 주로 자녀가 있는 가정이 모이기에, 자녀가 없는 가정 혹은 이혼한 사람 같은 경우는 성당 모임에 어울리기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성당에서 좋아하는 (성당에서 주로 얘기하는) ‘가정’이란 것은 대개 안정된 주거지역에서, 안정적으로 거주하는 일반적인 가정입니다. 그러니 사정이 그러지 못하면 지역 성당에 어울리기 어렵다는 거죠. 그러다 보니 가톨릭은 중산층이면서 별 문제점이 없는 가족만이 다닐 수 있는 ‘럭셔리한 종교’로 인식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당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계층은 주로 교회의 가르침에 긍정적으로 잘 따르고 하느님 안에서 감사하면서 사는, 형편이 되는 이들 중심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본당의 주류를 이루며, 또 교회가 하는 일에 긍정적으로 호응하고, 협조하고 동참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현실이다 보니 반면 이런 ‘주류 계층’에서 벗어난 비주류, 소외된 계층의 목소리는 듣기 어렵고, 상당히 동떨어져 있습니다.
그 밖에도 여성 이야기, 생명 수도 이야기 등 많은 이야기가 나왔는데, 우리 교회현실을 제대로 진단하는 현실적 이야기들로, 이런 지적과 건의를 또 우리 교회는 얼마나, 또 어떤 방식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일지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