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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내마음에창 원문보기 글쓴이: 시골버스
숲을 거닐 때 새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그 숲은 얼마나 쓸쓸할까? 인간 세상에서 숲의 새소리에 해당하는 것은 바로 가수가 부르는 절절한 노래가 아닐까 한다. 새소리가 있어서 숲이 더욱 아름다운 것처럼 가수들의 좋은 노래가 있어서 세상살이의 고달픔은 한결 반감되고 위로를 느끼게 되는지도 모른다. 나라의 주권을 일본에 강탈당하고 갖은 유린을 겪던 시절, 입이 있어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던 때에 이난영이 불렀던 노래 한 곡은 우리 강토를 깊은 슬픔과 격동 속에 잠기도록 하였다. 슬픔을 불러오게 한 근원을 찾아내어 그것을 파헤치고,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올바른 분별과 깨달음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힘을 깊은 슬픔은 가졌다. 하며 상큼하면서도 깊은 슬픔을 느끼게 해준 가수는 그리 흔하지 않았다. 이난영으로 하여금 깊은 슬픔의 성음을 자아낼 수 있도록 해준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거의 모진 핍박에 가까운 고난과 역경이 바로 그 힘이었을 것이다. 인생의 그 어떤 신산한 지경에 허덕일지라도 이난영은 결코 무릎을 꿇거나 비굴하지 않는 자세 로 그 고난의 시간을 이겨내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지혜와 자세가 아닌가 한다. 항상 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 지독한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집을 떠난 이후로 줄곧 땅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물풀처럼 살아간다. 삼촌댁에서 더부살이 아이로, 혹은 제주도의 일본인 가정에 들어가서 아이보개로, 혹은 떠돌이 유랑극단의 식모살이와 무명의 막간가수로…. 이것이 소녀 이옥례가 겪었던 눈물의 시간이었다. 30년대 초반 태양극장의 이름 없는 막간가수로 일본공연에 참가하게 된다. 이 무렵 태양극장 단장이던 박승희가 옥례의 예명을 이난영이라 지어주었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활동도 고달픈 역경의 한 과정일 뿐이었다. 밥도 굶고 생활비도 떨어져 거의 죽음의 문턱까지 다다랐을 때 이난영은 마침내 오케레코드라는 멋진 활동무대와 만나게 된다. 이철 사장과의 운명적 만남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나간 옛꿈'(김파영 작사, 김기방 작곡, 태평 8068), '향수'(김능인 작사, 염석정 작곡, 오케 1580)를 단번에 히트시키면서 잇따라 '고적' '불사조' 등을 발표하였다. 전 조선의 가요팬들은 애교를 머금은 이난영의 독특한 코맹맹이 소리에 흠뻑 빠져 들었다. 가슴 속에 켜켜이 쌓여 전혀 녹을 기색조차 없던 슬픔과 한이 이난영의 노래를 듣는 순간 스르르 녹아내려 눈시울을 흥건히 적시곤 했던 것이다. 이난영의 두 번째 히트곡으로는 '봄맞이'(윤석중 작사, 문호월 작곡, 오케 1618)를 손꼽을 수 있다. 모진 겨울에서 슬금슬금 풀려나는 이른 봄, 이 노래의 구성진 가락을 듣노라면 가슴 속 차디찬 빙하가 녹아내리는 기적을 경험하곤 했다. 여기저기서 들리느니 오직 이난영의 노래요,
그 창법과 음색의 흉내였다. 월, 김능인, 윤석중, 차몽암, 박팔양, 신불출, 양우정, 강해인 등이었다. 주로 시인 들이 많은 작품을 주었다. 작곡가로는 문호월, 염석정, 홍난파, 이면상, 손목인, 박 시춘, 김해송, 이봉룡 등 당대 최고의 대가급이었다. 이난영 노래의 특색이라면 밝고 생기로운 느낌이 드는 청년기 세대들의 삶에서 테마를 선택한 작품이 많았고, 이난영이 이를 잘 소화시켰다. 그 때문에 경쾌하고 깜찍하며 발랄한 정서가 듬뿍 느껴지는 작품이 많았다. 김해송과 함께 만든 작품 중에는 재즈 스타일의 노래도 많았다. 더불어 이난영의 노래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 하고 있는 것은 신민요풍의 곡이다. '오대강 타령' '이어도' '녹슬은 거문고' 등이 이에 해당한다. 작사가 김능인과 작곡가 문호월 콤비에다 이난영의 창법이 조화를 이루면 더할 나위없는 멋진 트리오를 이루었던 것이다. 1935년, 그녀의 나이 19세 되던 해에 한국가요사에서 불후의 명작으로 일컬어지는 '목포의 눈물'(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이 오케레코드사에서 발표되었다. 이 음반은 무려 5만장이나 팔려나가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노래 한 곡 으로 이난영은 단번에 가요계의 여왕 자리에 올랐다. 한 곡의 유행가는 식민지 땅을 온통 흐느낌으로 잠기게 하였고, 항구도시 목포를 애틋한 추억의 장소로 되살아나게 하였다. / 부두의 새악씨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토막토막 끊어내는 느낌의 창법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노래였다. 모두들 입을 모아 이난영의 창법에는 남도 판소리 가락의 오묘한 효과가 그대로 배어난다며 무릎을 쳤다. 가슴에 깊은 슬픔이 자리잡고 떠나지 않는 독자들이 계시다면 이 노래를 혼자 나 직이 흥얼거려 보시라. 그런 다음에 어떤 반응이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가만 히 지켜보시기를 권하는 바이다. 사실 이 노래는 가사에도 반영되어 있듯 일제에 대한 한과 저항의 혼이 표현된 민족의 노래였다. 인기가수가 되었지만 이난영에게 시련과 역경은 끝이 아니었다. 작곡가 겸 가수로 이난영과 급격히 가까워진 김해송은 기어이 혼인을 했고, KPK 란 이름의 악극단 경영까지 했다. 하지만 6·25전쟁의 세찬 풍파는 이 부부를 영원한 이별로 갈라놓았다. 일곱 자녀 에게 매로 노래를 가르쳐 김보이즈와 김시스터즈로 미국에 진출시켰지만 이난영 은 늘 혼자였다. 결핵에 걸려 임종을 앞둔 가수 남인수와 마지막 불나비 같은 사랑을 불태우다가 1965년, 결국 49세의 나이로 혼자 쓸쓸하게 최후를 맞이한다. 경기도 파주의 어느 산중턱에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묻혀 있던 이난영은 드디어 2006년 목포 삼학도 자락, 그녀의 고향 언덕으로 되돌아왔다. 목포시가 주선한 수목장 덕분이었다. 운 바람결로 항시 자리잡고 있으리라. 그 바람결은 지금도 '목포의 눈물'을 도란도란 부르고 있을 것이다 |
-줄거리-
친구를 찾아 목포에 내려갔던 대학생 최봉은 우연한 기회에 전옥을 알게 되어 두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전옥은 계모의 간계로 술집에 팔려간다. 한편 서울에서는 사장딸이 최봉을 짝사랑하고 있었다.
사장딸은 전옥을 찾아가서 최봉의 장래를 위하여 그를 단념하라고 강권한다. 심한 충격을 받은 전옥은 술로써 세월을 보낸다.
최봉이 찾아오지만 그녀는 일부러 그를 만나지 않는다. 마침내 전옥은 병으로 몸져 눕게 되었다.
최봉은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그동안의 오해는 풀렸지만, 아! 조용히 숨을 걷는 한 여인의 슬픈 운명이여....
감독: 하한성 주연: 독고성, 황해, 전옥, 최봉
1968년 가수 개인을 추모하는 가요제가 대중가요사상 최초로 개최되었다 "난영 가요제"이다
1969년에는 최초의 노래비가 목포 유달산에 건립되었고 이난영, 남인수의 사랑과 인생, 노래를 소재로 영화"이강산 낙화유수"
까지 제작되면서 그녀는 전설이 되었다. 세월이 한참 흐른 2006년 3월 25일 이난영의 유해는 41년만에 경기도 파주에서 목포
삼학도에 조성된 가수 이난영 공원으로 이장되었다.
현재 목포의 눈물 오리지날SP(유성기)음반은 부르는 돈을 주고도 구할수 없는 명반으로 자리매김 되어있다.
확인하긴 힘들지만 발매이후 5만장의 판매고를 기록 했다는데 이제는 다 어디로 갔는지... 실물구경조차 불가능한 초 희귀
음반이 되어있다. 물론 LP, CD시대에 재 발매된 이난영의 음반들은 무수히 많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은 "목포의 애국가"라고 한다...^^
목포 유달산에 세워진 노래비 모습(2009년 9월27일.일.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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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목포의 눈물 02. 고적 03. 사랑의 고개 04. 오대강 타령 05. 봄강 06. 어촌낙조 07. 봄 아가씨 08. 낙화의 눈물 09. 남포로 가는 배 10. 명랑한 젊은 날 11. 이별전야 12. 추억의 등대 13. 고향은 부른다 14. 올팡갈팡 15. 무너진 황성 16. 파묻은 편지 17. 산호빛 하소연 18. 미소의 코스(남인수) 19. 괄세를 마오 20. 목포의 추억 21. 돈반정반 22. 달없는 항로 23. 남행열차 24. 바다의 꿈 25. 연락선 비가 26. 다방의 푸른 꿈 27. 담배집 처녀 28. 사공의 딸 29. 울어라 문풍지 30. 항구야 울지 마라 31. 항구의 붉은 소매 32. 가거라 똑딱선 33. 서창의 눈물 34. 꿈꾸는 타관역 35. 진달래 시첩 36. 날짜없는 일기 37. 할빈다방 38. 목포는 항구 |
우선 현대적인 의미의 가요가 생성될 무렵의 여성 음악인들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물론 근대니 현대니 하는 용어들은 논쟁적인 어휘다. 또한 그 기점을 어디서부터 잡을 것인가도 모호하다. 현재적인 대중음악의 단초가 마련되는 지점을 거칠게 요약한다면 이는 서양화의 과정 속에서 일어났으며, 서양음악이 (특히 미8군 무대를 통해)유입되면서부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역사의 첫 번째 증인이 김 시스터스이다. 김 시스터스의 이력을 압축적으로 훑어보면, 어린 시절부터 한국에서 악극단(혹은 쇼단)에서 활동했고 미군들을 위한 무대에서 인기를 누렸다. 도미(渡美) 후에는 라스베가스에서 각종 공연과 TV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음반을 발매하는 등의 활약을 했다. ‘한류(?)의 원조’인 셈이다.
김씨스터스
사실 많은 이들에게 김 시스터스라는 이름이 낯설지 모르지만, 이들을 논한다는 것은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일제 식민지 시기의 뼈대와 이후의 서양화되는 줄기를 확인하는 일과 같다. 이것은 이들의 범상치 않는 가계 때문이기도 한데, 이들은 김해송과 이난영 부부의 자녀들이었다. 김해송은 한국의 악극 혹은 한국적 뮤지컬계의 선구자격 인물로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었다(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통해 유명해진 박향림의 노래 ‘오빠는 풍각장이’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
이난영(1965년 작고)은 또 어떠한가. 한과 애상의 비가를 노래하던 ‘식민지 조선의 여성(女聲)’의 대표자인 그녀와 등치되는 곡이 바로 ‘목포의 눈물’(1935년, 문일석 작사․손목인 작곡)이다. 그녀가 검은 드레스를 입고 담배를 입에 문 채 블루지한 ‘다방의 푸른 꿈’(1939년, 조명암 작사․김해송 작곡)을 부르곤 했다는 전설과 김해송 납북 이후 만난 연인이 남인수였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이난영의 오빠 이봉룡은 작곡가로 김 시스터스가 부른 ‘김치 깍두기’의 작곡자다. 어쨌든 부모의 대를 이어 그들 7남매 역시 한국 대중음악계의 주역들이 되었던 셈이다.
조금 더 자세히 김 시스터스의 활동상을 살펴보자. 1.4 후퇴기 부산 피난 시절, 이난영은 김해송이 해방 후 만들었던 KPK 악단을 이봉룡과 운영하면서, 미군 무대에서 자녀들과 위문 형식의 쇼를 만들었다. ‘김 시스터스’라는 이름을 걸기 시작한 것은 1953년경 수도극장(현 스카라 극장)공연부터라고 한다. 김 시스터스의 활약상은 이들이 10대(숙자 19세, 애자, 18세, 민자 17세)이던 1959년 1월, 미국인 흥행사(미국의 한 나이트 클럽의 매니저라고 알려진 톰 볼)의 주선에 의한 미국행으로 확장된다. 이후 라스베이거스에서 활동하며 음반을 내고 TV 프로그램 '에드 설리번쇼(Ed Sullivan Show)'에 수 차례 출연하는 등의 활약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들이 처음 출연했던 날짜는 1959년 9월 29일이라고 한다).
그외의 활약상에 대해서는 다음 기사를 참고하라. 물론 ‘기사’라는 감안해서 읽어야 할 듯하지만.
이들은 라스베가스에서도 유명한 <데저트 인 호텔>의 나이트 클럽에서 일주일에 2만 달라를 받고 공연하고 있다. <프랑크 시나트라> <마리린 몬로> <딘 마틴> 등의 미국 일류 연예인들이 모두 <데저트 인 호텔>의 나이트 클럽에서 활동하였었다. (중략) 김 시스터즈는 그 동안 뉴욕의 <월더프>, 워싱턴의 <쇼햄>, 시카고의 <팔머 하우스>, 댈러스의 <힐튼 호텔> 등 미국의 일류 무대를 순회하였다. 1966년에는 미국의 유명한 희극 배우 보브 호프와 함께 월남을 방문하여 외국의 전쟁터에서 고생하는 미군 장병들을 위문하는 위문단에서 활약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인 66년 유럽 순회공연에 나서서 <로마>, <파리>, <베니스>, <마드리드>, <뮌헨>, <런던>, <몽테카를로> 등 유명한 도시에서 한국을 빛내기도 했는데 특히 몽테카를로에서는 모나코의 왕비인 그레이스 캐리를 위한 특별공연을 하여 열렬한 박수갈채와 장미세례를 받기도 하였다.- 「榮光의 歌姬 김시스터즈 김치켓의 돌격 귀국」 (『가요생활』, 1970년 6월호)
김 시스터스의 멤버는 약간 복잡하다. 전성기의 멤버는 (김)숙자, (김)애자, (이)민자인데 막내인 (이)민자는 앞서 말한 바 있는, 이난영의 오빠 이봉룡의 딸이다. 1973년에는 사정이 있어 활동을 중단한 (이)민자 대신 (김)영자가 합류하기도 했다. 그 뒤 김 시스터스의 형제들(‘김 보이스’ 혹은 ‘김 브라더스’)과 함께 활동하기도 했고 이들 팀이 해체된 이후 1990년에는 '수 & 김브라더스'라는 혼성 그룹으로 활동했다. 이들의 첫 귀국공연은 1970년 5월, 서울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고 두 장의 실황앨범을 발표했다. 이후에도 1975년(대한극장), 1980년, 1990년에 내한 공연을 가진 바 있다.
직접 연주하며 노래하는 보컬그룹의 원류
김 시스터스의 의미는 ‘여성 보컬그룹의 시조격’(나아가 보컬그룹 자체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이보다 앞선 시기에 보컬그룹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에 해당한다는 점에 있다. 그런데 이 당시 ‘보컬그룹’이라는 의미는 여러 의미로 쓰였다. 하나는 말 그대로 중창단 스타일의 ‘시스터스(자매들)’와 ‘브라더스(형제들)’를 지칭하는 말이다. 또 하나는 악기 연주를 중심으로 하는 캄보 밴드(빅 밴드보다 소규모인 악단)로부터 이행해, 악기 연주와 노래를 통합시킨 새로운 형태의 그룹을 말한다. 즉, 후일 ‘그룹 사운드’라는 용어로 통합되기 이전의 과도기적 형태도 보컬그룹으로 불렸다. 이상에서 볼 때, 김 시스터스는 보컬그룹의 다중적 의미처럼 보컬(중창)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엄밀한 의미의 중창단도 아니고, 악단도, 그룹 사운드도 아닌 과도적 형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그들은 선구적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그들이 악기를 직접 연주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실력에 대해 많은 신문․잡지는 이런 식으로 보도했다.
萬能의 재능을 기닌 金시스터즈는 색소폰, 클라리넷, 트럼본, 바이얼린, 벤조, 기타, 실로폰, 만돌린 등 28가지 악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노래와 춤을 췄다. (중략) 淑子는 색소폰, 愛子는 베이스, 民子는 드럼을 맡고 각기 10여개의 樂器를 구사 (후략) (「在美 한국 演藝人 ⑦: 함께 美國人 남편 맞은 金시스터즈」, 『일간스포츠』 1972년 9월 15일 기사)
김 시스터스가 ‘한국의 보컬그룹’의 선구자였음에도 김 시스터스 자체가 한국 대중음악에 ‘직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들의 활동 영역은 바다 건너에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여성 보컬리스트였던 이들이 악기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렀다는 점은 당시 가요계의 정황을 볼 때 혁신적인 것이다. 물론 이들의 음악 역시 악기 연주가 노래에 우선하지는 않았다. 보컬을 우선시했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김 시스터스는 한국어 가사로 된 창작곡을 별로 남기지 못했다. 물론 이 때가 한국 대중음악계에 서양 대중음악이 우후죽순 흘러들기 시작하면서 ‘번안곡’ 형식이 주종을 이루는 1차 수용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 자체가 문제라고 보기는 힘들겠지만, 한국에 많은 영향을 끼치지 못한 요소임에는 틀림없다.
참고로, 이들 이후 나타난 여성 보컬그룹들은 노래만 부르는 중창단의 성격이 강했다. 어떤 측면에서는 김 시스터스 사후 후퇴라고도 할 수 있다. 1960년대 중창단 성격의 여성 보컬그룹으로는 이 시스터스, 김치 캣츠, 정 시스터스, 아리랑 시스터스 등이 있고 1960년대 말 이후의 경우에는 펄 시스터스, 준 시스터스, 리리 시스터스, 퀸 시스터스, 화니 시스터스, 점블 시스터스, 체리 시스터스, 바니 걸스 등이 있다.
한국 음악과 서양 음악 사이 어딘가에서
<킴 씨스터즈 첫 앨범>(LKL, MLP-8022, 196_) 수록곡 |
이제 김 시스터스의 음악에 대해 살펴볼 차례다. 이들의 레파토리는 당시 유행했던 영미권의 팝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재즈, 두왑, 힐빌리, 부기우기, 로커빌리, 여러 초기 로큰롤 양식의 노래들을 다양하게 불렀고, 1950년대 서양 대중음악사에서 풍미했던 ‘걸 그룹(girl group)’처럼 풍성하고 유려한 보컬 하모니를 기반으로 매끄럽고 세련된 관현악 오케스트레이션으로 직조된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이들이 부른 곡을 보면, 세계적으로 장기 공연된(한국에서도 얼마 전까지 상연된) 뮤지컬 <판타스틱스>(The Fantasticks)의 오프닝 곡으로 유명한 ‘Try To Remember’를 비롯해, 얼마 전 작고한 레이 찰스(Ray Charles)의 ‘Hallelujah, I Love Her So’와, 코스터스(The Coasters)의 노래로 코믹하고 흥겨운 힐빌리/컨트리 스타일의 ‘Charlie Brown’ 등에 이른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부른 노래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하와이언 기타를 중심으로 한 달콤한 사운드의 ‘Hawaiian Wedding Song’, 그리고 ‘O Sole Mio’의 개작곡 ‘It's Now Or Never’가 그것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엘비스 프레슬리가 낭만적인 이태리 전통음악(포크)이나 오페라 등을 통해 알앤비나 로커빌리 등을 뛰어넘으며 자신의 영역을 확장시키려는 노력의 산물이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김 시스터스 역시 이 노래를 부름으로써 자신의 영역을 다양하게 확장하려 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까. 그 밖에, 당시 많은 이들이 애창한 바 있는 아일랜드 민요 ‘Danny Boy’, 배우이자 가수였던 도리스 데이(Doris Day)의 ‘Que Sera Sera’ 등 현재 ‘스탠더드 팝’으로 분류되는 많은 음악들을 아우른다.
화려한 네온 싸인 속에서 색동 저고리에 긴 치마를 입고 장고와 가야금 등 한국 고유의 악기로 편곡하여 부르고 퉁기는 현대적 아리랑과 도라지 민요는 미국인들에게 흥미와 구미를 돋구어 주고 경이의 눈초리를 돌릴 수 있게끔 하는 데 부족하지 않았다. 노래뿐만 아니라 한국 고유의 기악으로부터 서양 악기의 드럼, 섹스폰, 아코디온, 하와이언 기타 등등에 이르기까지 자유자재로 다루는 이들의 재능 속에 라스베가스 시민은 이제 완전히 매혹당하고 만 것이다. (「미국서 결혼하는 김 씨스터즈」, 『가요생활』, 1967년 5월호)
이상의 기사에서 알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이들이 한국의 곡들을 편곡해 불렀다는 점이다. 특히 ‘아리랑’, ‘도라지타령’ 등의 민요는 이들의 주요 레파토리였다. 음반이나 공연에서 ‘아리랑’과 ‘봄마지(봄맞이)’는 각각 ‘Arirang’, ‘Korean Spring Song’으로 소개되었다. 이들 노래를 부를 때에는 한복을 입고 가야금이나 장고를 연주하는 것뿐만 아니라 한국어 노래 부분을 등장시키거나 ‘Charlie Brown’처럼 곡 중간에 ‘Why Everybody's Always Pickin' on Me’에 해당하는 ‘왜 전부 나를 가지고 못 살게구나’ 등의 한국말을 재치 있게 삽입하기도 했다.
이상의 한국 곡들에 대한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알려주는 것은 이들이 입은 의상일지 모른다. 많은 보컬그룹 여성들이 그러했듯 몸에 딱 맞는 휘황한 드레스를 입는 것 외에도 한복을 입은 모습들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킴 씨스터즈 첫 앨범(The Kim Sisters: Their First Album)> 커버 사진에서 입은 의상의 느낌이 전해주는 것은 한국적이면서도 한국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가 단지 외양에만 해당할까.
이상의 한국 국적의 노래들 역시 이상하게 한국적이지 않은 인상을 전해준다. 이중 ‘Arirang’에서 장고 및 가야금(과 비슷한) 소리가 등장하는데 그렇다고 한국의 민요와 친화적인 것 같지 않다. 서양적으로 팝화된 느낌이랄까. 또한 ‘Korean Spring Song(봄맞이)’를 비교해보면, 윤석중 작사․문호월 작곡으로 이난영이 1934년 취입(OK 레코드 발매)한 ‘봄마지’ 버전은 다소 빠른 템포에 가성의 목소리 위주인데 반해, 김 시스터스의 ‘Korean Spring Song’ 버전은 풍성하고 세련된 보컬을 대동하고 있다. 그 외에, 동양인임을 의식한 듯한 곡 선정을 볼 수 있는데 ‘China Lullaby’, ‘China Night’ 같은 곡이나 ‘Sayonara’ 등이 그렇다. 하지만 이들의 사운드 역시 중국적이거나 일본적인 것 같으면서 그렇지 않다(이런 것들은 바로 악곡의 국적에 대한 답을 들려준다. 한국어 가사라고 해서, 혹은 한국 악기를(혹은 그것처럼 들리게) 사용한다고 해서 한국적인 사운드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김 시스터스의 음악적 특징은 무엇보다도 보컬에 있을 것이다. 이들의 보컬은 (가령 그들의 어머니 이난영과 같은 이들에게 존재하던)트로트의 꺾는 목이나 민요의 투박하고 거친 질감이 없는 대신 매끈하고 부드러우며 풍성한 느낌의 중저음 톤을 유지한다. 서양 팝 스타일 음악의 수용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런데 자의든 타의든 이들이 한국의 노래를 선택할 때 당시의 트로트적 양식의 노래보다는 조금 더 먼 과거의 민요를 주로 택했던 것 같다(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이난영을 추모하는 앨범들은 예외일 것이다). 물론 민요들을 부를 때조차도 민요의 가창 양식을 택하지 않고, 다층적이고 유려한 하모니 위주로 편성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김 시스터스는 한국 대중음악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이국땅에서도 동양 여자들이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것에 대한 호기심 어린 이색적인 수용 그 이상의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한 것 같다. 그것은 서양의 시각에서 바라본 오리엔탈리즘 때문이기도 하다. 때문에 프로듀서 대(對) 여성 가수 그룹의 관계, 혹은 작곡가 시스템이 부재했다는 점을 들며 당대 서양 팝의 조류였던 ‘걸 그룹’ 사운드와 단순비교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김 시스터스는 가수이자, 연주자이며, 무희의 역할까지 소화해낸 다능의 엔터테이너, 라이브를 기반으로 한 퍼포머였으니까. 그곳이 어떤 장소였든지 간에... 마지막으로 음반에 실린 이들의 인사말을 옮겨 적으며 이 글을 마친다.
조국에 계신 여러분, 그동안 안녕하십니까? 저희들 김 시스터는 여러분께서 항상 아껴 주시고 사랑해 주신 덕으로 매일매일 열심히 공부해서 지금은 미국에 A 클라스에 속한 스타와 싱거들과 어깨를 겨누고 스튜디오에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민요를 재즈 혹은 로큰롤 형식으로 노래 불러 미국 흑인들에게 소개해서 환영도 받습니다. 이번 엘케엘(LKL) 레코드 사의 부탁을 받고 레코딩을 해서 미흡하나마 여러분 앞에 맞이하오니 미흡하나마 배전의 사랑을 베풀어 주시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항상 마음은 사랑하는 조국과 여러분께 달리고 있으며 향수에 젖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에요. 여러분 안강하시길 빌며. (김 시스터스, [김 시스터즈 푸레젠트](LKL, LKL-118, 1969)).
* 참고로 로스엔젤레스의 한 주간지에서 발행하는 한인 관련 소식에 ‘김 시스터즈의 자전적 풀 스토리’가 연재되어 있다. http://www.koreananews.com/1las.htm
* 김 시스터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영화로는 <자유부인>으로 유명한 한형모 감독의 <청춘쌍곡선>(1956년)이 있는데, 이 영화에서 김숙자․애자․민자는 간호사 역할을 맡아 의사 역할을 맡은 작곡가 박시춘의 기타 반주에 맞춰 팝송을 부른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리는 ‘클래식 한국 영화 릴레이’에서 3월 16일(수)에 상영될 예정이니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