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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산 금돌산성을 사적으로 승격하기 위한 자료를 장기간 수집하고 정리했습니다.)
백제 공격로에 나타난 백화산 금돌산성과 사라정에 대한 고찰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성덕대학 바이오실용과학계열 교수
정 의 선
(상주의 진산(鎭山) 혹은 명산(名山)으로 기록된 백화산(白華山)의 위상은 현실에서 어떠한가?
선조들이 남긴 상주의 진산(鎭山)이란 명칭조차 백화산(白華山)에 연계하기를 경계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래도 백화산을 알리고 역사를 되찾는 작업을 지속했지만 과연 어디까지 왔을까? 라는 회한으로 이 글을 쓴다. )
들어가며
상주(尙州) 3명산(三名山)은 1454년 문종 1년에 완성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상주목(尙州牧) ‘명산(名山)條」에 사불산(四佛山), 백화산(白華山), 구봉산(九峰山)을 들었고 상주(尙州)를 상산(商山)이란 별호를 쓴 것은 『상산지(商山誌-蒼石本)』「고적(古蹟), 부곡(部曲)條」에 “尙書에 설(契)을 商나라에 봉하였다. 商은 태화(太華)의 남쪽에 있다. 우리 고을을 상산(商山)이라 한 것은 그 곳이 백화산의 남쪽에 있기 때문이다. (尙書 契封于商 商在太華之陽 吾州之商山 以其在白華之南也) “ 라고 상주를 상산(商山)이라 별호를 쓴 것이 백화산의 남쪽에 있기 때문이라며 백화산을 상주의 진산(鎭山) 혹은 명산으로 여겨온 유래를 명시했다.
백제 공격로에 있어 백화산 금돌산성의 역할은 태종 무열왕이 한 달여 머문 전진기지로 해석되고 있다. 역사서에 나타난 『삼국사기(三國史記) 김유신(金庾信) 전』에서 “大王 率將士 行至沙羅之停”의 사라정(沙羅之停)을 음리화정(音里火停)으로 보는 견해가 많지만 현재 상주 청리면의 음리화정(音里火停)에서 상주 백화산 금돌산성과는 거리가 멀고 과연 1,500년 전에도 지금의 경상북도, 충청북도라는 행정적인 경계 개념이 자리 잡고 있었을까 하는 문제점을 가지고 백제 공격로에 있어 금돌산성의 삼국통일 당시 위상(位相)과 사라정(沙羅停)의 위치를 고찰해 보고자한다.
1. 상주의 역사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는 상주에 사벌국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 및 열전에 의하면 신라 점해왕(247~261)때에 신라에 속해 있던 사벌국이 태도를 바꾸어 백제에 귀부 하였고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강화 했으나 왕은 듣지 아니하므로 석우로 장군을 보내어 정복했다고 적혀있어 사벌국은 백제와 신라의 영토 확장에 눌려 서기 249년 신라에 병합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B. C 1세기경 함창지역에 고령가야국이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신라 점해왕 때에 신라에 병합된 사벌국은 법흥왕 12년(525년)에 사벌주(沙伐州)를 설치하여 이등(伊登)을 군주로 삼았다. 신라는 지방구획을 5州로 나누고 지방장관을 군주라 했다.
* 전국 5州 설치 현황
① 上州(상주), ② 下州(창영), ③ 한산주(경주), ④ 실직주(삼척), ⑤ 비래홀주(안변)
진흥왕 13년(552년)에 군사조직으로 5州에 6정(停)을 두어 상주정(上州停)에 1개 군단(軍團)을 설치하였다.
진덕여왕 2년(648년)에 김유신장군을 상주행군 총관(摠管)으로 임명하여 신라가 백제와의 싸움에 전방기지로 활용하는 등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태종 무열왕(660년)이 김유신, 품일, 흠춘의 군사를 백제정벌에 출전시키는 등 금돌성(今突城)에 한달여 머물다가 백제의자왕의 항복 보고를 받고 부여 소부리성으로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
* 백제 정벌의 전진기지 역할
문무왕 13년(673년) 상주정을 귀당(貴幢)으로 승격 개편하여 삼국통일 이후도 정치.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신라의 군사편제는 정(停)과 당(幢)으로 조직되었는데 이것은 군영(軍營) 군단(軍團) 부대(部隊) 등에 해당되었고. 대당(大幢)은 수도인 경주부근에 귀당(貴幢)은 지방의 중요한 군관구(軍管區)에 두었다.
사벌국은 3세기 후반 신라에 복속되었으며, 여타 소국도 비슷한 시기에 신라에 통합된 것으로 보인다. 524년(법흥왕 11) 이 지역에 상주(上州)가 설치되고 군주가 파견되었다는 것은 신라의 영토를 상하로 양분한 한 영역의 통치 중심지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군현체제가 성립되면서부터 상주에는 음리화현(音里火縣)·달이현(達已縣)·지내미지현(知乃彌知縣) 등이 영속되었다.
그리고 고동람군(古冬攬郡)이 함창지역의 가해현(加害縣)·관현(冠縣)·호측현(虎側縣) 등을 관할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557년(진흥왕 18) 상주의 주치(州治)가 감문(甘文)로 옮겨진 뒤 상락군(上洛郡)이 되었고, 614년 진평왕 36(眞平王) 주치가 일선주(一善州)로, 그 뒤 687년(신문왕 7) 9주제도가 시행되면서 다시 주치로 되어 사벌주가 되었으며, 757년(경덕왕 16) 사벌주는 상주(尙州)로, 음리화현은 청효현(靑驍縣)으로, 달이현은 다인현(多仁縣)으로, 지내미지현은 화창현(化昌縣)으로 개명되는 등 주치(州治)가 감문(甘文)― 일선주(一善州)―사벌주(沙伐州)로 바뀌고 진흥왕 13년(552년)에 군사조직으로 5州에 6정(停)을 두어 상주정(上州停)에 1개 군단(軍團)을 설치했는데 주치(州治)가 다시 사벌주로 온 것은 삼국통일 이후 687년(신문왕 7) 9주제도가 시행되면서 다시 주치로 되었고 757년(경덕왕 16) 사벌주는 상주(尙州)로 개칭되었다는 것이다.
본격적인 행정 도시로 상주(尙州)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은 삼국 통일 후인 687년 신문왕 7년에 일선에서 다시 치소가 옮겨 옴으로서 부활했고 동시에 상주성(尙州城)이 축조되었다. 사벌주는 경덕왕 대에 행정체제가 개편되면서 상주(尙州)라는 별호가 내려졌고 사벌주에 소속된 군현은 오늘날 낙동강 상류지역인 안동시 임하면 일대를 경계로 서 쪽으로는 영주시 일부, 청송군 일부, 예천군, 문경시, 의성군, 군위군, 김천시 일부, 충북의 청원·보은·옥천·영동· 황간 일대가 관할에 속하였다.
음리화정 [ 音里火停 ] 687년(신문왕 7) 이곳에 사벌주(沙伐州)를 설치하고 청효현(靑驍縣:뒤에 청리현으로 개칭)을 두었던 것으로 미루어 사벌주를 관할하던 군대였음을 알 수 있다. 군대를 통솔하기 위해 중앙에서 군관을 파견하였는데 대대감(隊大監) 1명, 소감(少監) 2명, 대척(大尺) 2명, 삼천당주(三千幢主) 6명, 삼천감(三千監) 6명을 두었다.
2. 660년 전후 삼국통일 당시의 신라와 백제의 상주 인근 전투상황.
1) 조천성(助川城) 전투
655년 김흠운(金歆運)은 내밀왕(奈密王)의 8세손으로 태종 무열왕의 사위다. 아버지는 달복(達福) 잡찬이다. 흠운은 어려서 화랑 문노(文努)의 문하에 드나들었다. 때로 낭도들의 이야기가 ‘아무개가 전쟁터에서 죽어 지금까지도 이름을 남기고 있다.’라는 데 이르게 되면, 흠운은 감개무량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마음과 기운을 북돋아 흠모해 본받으려는 얼굴빛을 보이곤 하였다. 같은 문하에 있던 승려 전밀(轉密)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만약 전쟁에 나가게 되면 반드시 돌아오지 않을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영휘(永徽) 6년(655)에 태종대왕이 백제와 고구려가 변경을 막고 있는 것을 분하게 여겨 그들을 치고자 계획했는데, 군사를 내보낼 때 흠운을 낭당대감(郞幢大監)으로 삼았다. 이에 흠운은 집안에서 자지 않고 비와 바람을 다 받으면서 사졸들과 함께 고락을 같이 하였다. 백제 땅에 다다라 양산(陽山) 아래 군영을 세우고 조천성(助川城)으로 나가 치고자 했는데, 백제 사람들이 밤을 타고 빠르게 달려와 동틀 무렵 보루를 기어올라 들어왔다. 우리 군사들은 깜짝 놀라 엎어지고 자빠져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적들은 이 어지러운 틈을 타고 급히 쳐들어오니 나는 화살이 빗발처럼 쏟아졌다. 흠운이 말을 비껴 타고 창을 잡고서 적을 기다리니, 대사(大舍) 전지(詮知)가 그를 설득해 말하였다.
“지금 적들이 어둠 속에서 공격해 와 지척에서도 서로를 분간할 수 없으니, 비록 공께서 죽는다 할지라도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공께서는 신라의 존귀한 골족이고 대왕의 사위인지라, 만약 적병의 손에 죽는다면 백제에게는 큰 자랑거리요 우리에게는 크나큰 수치가 될 것입니다.”
흠운이 말하였다.
“대장부가 이미 나라에 몸을 바친 이상 다른 사람들이야 알거나 모르거나 매한가지이거늘 어찌 감히 명예를 바랄 것인가!”
흠운이 굳건히 서서 움직이지 않자 휘하가 말고삐를 잡아 쥐고서 돌아갈 것을 권하였다. 흠운은 칼을 빼들어 휘둘러 뿌리치고 적들과 싸워 몇 사람을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 여기에서 대감(大監) 예파(穢破)와 소감(少監) 적득(狄得)도 함께 싸우다 죽었다.
이때 보기당주(步騎幢主) 보용나(寶用那)는 흠운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말하였다.
“그는 혈통이 귀족이고 가세가 영화로워 사람들이 사랑하고 아끼는 처지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절개를 지켜 죽었거늘, 하물며 이 보용나는 살아도 이익 되는 것이 없고 죽는다 해도 손해될 바가 없다.”
말을 마치자 드디어 적들에게 달려들어 서너 명을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 대왕이 그 말을 듣고 깊이 애통해 하였으며, 흠운과 예파에게 일길찬의 관위를 추증하고 보용나와 적득에게는 대나마의 관위를 추증하였다. 그 당시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양산가(陽山歌)’를 지어 그들을 애도하였다.
?∼655(태종무열왕 2). 신라 태종무열왕 때의 무장. 관직은 소감(少監)이었다.
655년 태종무열왕이 백제와 고구려가 함께 신라의 변경을 침범함을 분하게 여겨 정벌을 모의하고 군사를 출동시킬 때 낭당대감(郎憧大監) 김흠운(金歆運)을 따라 소감으로 출전하였다.
신라군은 양산(陽山:지금의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아래에 진영을 치고 조천성(助川城:지금의 영동군 양산면 비봉산성)을 공격하다가 김흠운이 전사하자, 적득도 대감(大監) 예파(穢破)와 함께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뒤에 태종무열왕에 의하여 대나마(大奈麻)의 관등에 추증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卷 第四十七 金歆運)
奈密王八世孫也 父達福迊飡 歆運少遊花郞文努之門 時徒衆言及某戰死 留名至今 歆運慨然流涕 有激勵思齊之貌 同門僧轉密曰 此人若赴敵 必不還也 永徽六年 太宗大王憤百濟與高句麗梗邊 謀伐之 及出師 以歆運爲郞幢大監 於是不宿於家 風梳雨沐 與士卒同甘苦 抵百濟之地 營陽山下 欲進攻助川城 百濟人乘夜疾驅 黎明綠壘而入 我軍驚駭 顚沛不能定 賊因亂急擊 飛失雨集 歆運橫馬握槊待敵 大舍詮知說曰 今賊起暗中 咫尺不相辨 公雖死 人無識者 況公新羅之貴骨 大王之半子 若死賊人手 則百濟所誇詫 而吾人之所深羞者矣 歆運曰 大丈夫旣以身許國 人知之與不如一也 豈敢求名乎 强立不動 從者握轡勸還 歆運拔劍揮之 與賊鬪 殺數人而死 於是大監穢破 少監狄得相與戰死 步騎幢主寶用那聞歆運死曰 彼骨貴而勢榮 人所愛惜 而猶守節以死 況寶用那生而無益 死而無損乎 遂赴敵 殺三數人而死 大王聞之傷慟 贈歆運-穢破位一吉湌 寶用那-狄得位大奈麻 時人聞之 作陽山歌以傷之
2) 다시 도비천성(刀比川城)에서 대승한 김유신
삼국사기 권제42 (열전 제2) 김유신/61세(서기655년)
永徽六年乙卯 秋九月 庾信入百濟 攻刀比川城克之 是時 百濟君臣 奢泰淫逸 不恤國事 民怨神怒 災怪屢見 庾信告於王曰 百濟無道 其罪 過於桀紂 此誠順天弔民伐罪之秋也
영휘 6년 을묘(655) 가을 9월에 유신이 백제 땅에 들어가 도비천성(刀比川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 무렵 백제의 임금과 신하들은 심히 사치하고 지나치게 방탕하여 국사를 돌보지 않아 백성이 원망하고 신이 노하여 재앙과 괴변이 속출하였다.
유신이 왕에게 고하기를 백제는 무도하여 그 지은 죄가 걸주(桀紂)보다 심하니 이때는 진실로 하늘의 뜻을 따라 백성을 위로하고 죄인을 정벌하여야 할 때입니다.
*도비천성(刀比川城:忠北 永同郡 양산면 가곡리의 飛鳳山城)
위와 같이 상주 백화산을 중심으로 특히 영동 지역에서의 성을 뺏고 뺏기는 치열한 전투가 반복되었고 전선이 영동 양산까지 확대되어 영동군 황간면은 백화산을 배후에 둔 전략적인 군사 요충지로 부상했을 것이다.
3. 사라정(沙羅停)의 위치
학계에서 음리화정(音里火停)과 동일시되는 상주정(上州停)은 주치(州治)와 변동 없이
757년(경덕왕 16) 음리화현이 청효현(靑驍縣-현 청리면)에 계속 존치되었을까하는 점이다.
군대(軍隊)의 위치는 전선의 흐름에 따라 전진 혹은 후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치(州治)가 감문(甘文)― 일선주(一善州)―사벌주(沙伐州)로 바뀌고 진흥왕 13년(552년)에 군사조직으로 5州에 6정(停)을 두어 상주정(上州停)에 1개 군단(軍團)을 설치했는데 주치(州治)가 다시 사벌주로 온 것은 삼국통일 이후 687년(신문왕 7) 9주제도가 시행되면서 다시 주치로 되었는데 상주라는 행정적 개념이 없이 주치(州治)마저 수시로 바뀌는 현실에서 음리화정(音里火停)과 동일시되는 상주정(上州停)도 늘 그 위치에 존재하지는 않고 신라 백제와의 전선 상황에 따라 변동했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또 249년 첨해 이사금 1년에 사벌국이 신라에 반기를 들고 백제에 귀부하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이에 신라는 석우로를 파견했고 사벌국은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멸망하고 말았다. 사벌국이 패망하고 얼마 뒤인 294년 유례 이사금 10년에 사도성(沙道城-영덕)을 쌓고 사벌주의 호민(豪民) 80여 호를 그곳으로 강제로 이주시켰다는 점이다.
하6월 왜(倭)가 계림을 침구하여 사도성(沙道城)을 함락하였다.
동사강목에는 임자년 신라 유례왕 9년, 고구려 서천왕 23년ㆍ봉상왕(烽上王) 원년, 백제 책계왕 7년(진 혜제 원강 2, 292년)
왕이 일길찬(一吉飡) 대곡(大谷)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이를 구하고 사도성을 개축하여 사벌주(沙伐州) 호민(豪民) 8십여 호를 이주시키게 하였다.
하면 신라에 전적으로 복종하지 않은 사벌주 호민(豪民) 80여 호를 사도성(沙道城-영덕)으로 강제 이주할 정도로 백제에 호의적이었다는 해석이 나온다.
삼국사기(三國史記) 卷 第四十五 列傳 第五 (昔于老)
奈解尼師今之子(或云角于水老之子也) 助賁王二年七月 以伊湌爲大將軍 出討甘文國破之 以其地爲郡縣 四年七月 倭人來侵 于老逆戰於沙道 乘風縱火 焚賊戰艦 賊溺死且盡 十五年正月 進爲舒弗耶〔耶 當作邯〕 兼知兵馬事 十六年 高句麗侵北邊 出擊之不克 退保馬頭柵 至夜士卒寒苦 于老躬行勞問 手燒薪櫵暖熱之 羣心感喜如夾纊 沾解王在位 沙梁伐國舊屬我 忽背而歸百濟 于老將兵往討滅之 七年癸酉 倭國使臣葛那古在館 于老主之 與客戱言 早晩以汝王爲鹽奴 王妃爲爨婦 倭王聞之怒 遣將軍于道朱君討我 大王出居于柚村 于老曰 今玆之患 由吾言之不愼 我其當之 遂抵倭軍 謂曰 日之言戱之耳 豈意興師至於此耶 倭人不答 執之積柴置其上 燒殺之乃去 于老子幼弱不能步 抱以騎而歸 後爲訖解尼師今 味鄒王時 倭國大臣來聘 于老妻請於國王 私饗倭使臣 及其泥醉 使壯士曳下庭焚之 以報前怨 倭人忿 來攻金城 不克引歸
655년 김흠운(金歆運)이 조천성(助川城:지금의 영동군 양산면 비봉산성)을 공략하다 전사하고 을묘(655) 가을 9월에 유신이 백제 땅에 들어가 도비천성(刀比川城)을 공략했다는 것은 충북 영동군의 양산면은 백제 점령지였으나 원래 신라 영역이라는 것이 '신라에 반기를 들고 백제에 귀부했다.'는 기록에서 추측된다. 249년 첨해 이사금 1년에 사벌국이 신라에 반기를 들고 백제에 귀부한 이후 계속 백제 영역이었을지도 모르는데 김유신 장군의 전공으로 다시 신라 영역이 되었고 660년 삼국통일 당시에는 최전선 국경을 더 접경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상주 백화산과 경계를 나란히 한 충북 영동군과 황간면의 역사를 보면,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
永同郡 本吉同郡 景德王改名今因之 領縣二
陽山縣本助比川縣景德王改名今因之
黃澗縣 本召羅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영동군은 본래 길동군인데 경덕왕이 고친 이름으로 지금까지 그대로다. 2현을 거느리니, 양산현은 본래 조비천현인데 경덕왕이 고친 이름으로 지금까지 그대로다. 황간현은 본래 소라현인데 경덕왕이 고친 이름으로 지금까지 그대로다.
부언하면 충북 영동군 황간면은 신라(新羅)의 소라현(召羅縣)으로 소라라는 명칭은 광평촌(廣坪村) 앞을 흐르는 내를 소라천(召羅川)이라 하는데, 이 강물의 이름을 따온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통일신라 제35대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 황간현(黃澗縣)으로 개칭하고 영동현(永同縣)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高麗) 현종(顯宗) 9년(1018) 경상도(慶尙道) 경산부(京山府, 현 慶北 星州)에 소속되어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공민왕(恭慾王) 3년(1354)에 다시 경산부에 내속(來屬)하였고, 공양왕(恭讓王) 2년(1390)에 감무를 설치하였으며, 금산군(金山郡)에서 금화부곡(金化部曲)을 이속시켰다는 것이다. (금화부곡: 지금의 김천시 봉산, 대항면 일원)
1) 충북 영동군 황간면 마산리 전설
마산리에 전해오는 전설에 따르면 북살미 산에서 보면 동내가 마(馬)자와 같다고 하여 마산리라 하였다는 설과 나라에서 필요한 말을 기르던 곳이라 하여 마산리라 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어느 설이 맞는지는 명확하게 판가름 할 수는 없다. 기르던 말이 모두 죽자 나라에서 죄를 물어 말을 기르던 사람들이 모두사형을 당하여 마을이 소멸되었다고 전하여온다. 약 600년 전 마을이 형성되어 살아오다 해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괴질이 발생하여 사람들이 죽어나감에 마을을 지나던 한 고승이 비명에 죽어간 원혼들의 제를 지내주어라 하여 지금의 뒷산 장수나무에 제를 지내 오던 것을 제를 지낼 때마다 비가 내려 기우제로 지내다 1960년을 마지막으로 지냈다. 말이 도망가지 못하게 장수나무에서 마산앞들의 둥구나무와 골란의 둥구나무를 기준으로 삼각형의 토담으로 성을 쌓은 흔적이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명밭골(명마를 기르던 곳) 잠마당골(망아지를 기르던 곳)의 지명이 지금까지 불리고 있음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2) 1930년 5월10일 중외일보 ‘황간과 중모, 우차부 결의’ 기사.
원문은 당시 기사 내용대로 맞춤법에 관계없이 올린다.
“충북 황간과 경북 중모 사이에 이십리되는 거리를 두고 매일 우차(牛車)가 오십여대식 통행하여 상업의 편의를 도아주든중 지난 사월이십이일부터 오륙일간이나 일절 우차의 왕래가 없서 구루마 한대를 볼 수 없게되어 상인들측에서는 잡화물을 태산 가티 싸어두고 운반치 못 하야 만흔 손해를 당하여가며 장차로 전개되여갈 사건을 더욱 우려하는 가운데 잇더니 일부에서 점차로 문데가 해결되여 지금은 우차가 여전히 통행하게 되엿는데 이제 자세한 사실을 듣건대 수년전에도 중모와 황간에 구루마가 합하여 동맹파업을 한 일이 잇섯스나 내부에 결속이 굿지못하야오든바 황간면란곡리에 안금석,김을출, 동면 남성리 강동식 모동면 룡호리 림윤식,박신구, 동면 수봉리 최룡수등 제씨의 발의로 지난 사월 이십여일 란곡리 최모의 주점에서 우차부 오십여명 모이여 아레와 가티 일치하게 결정하고 만약 규측을 위반하는 자에게는 구루마 한대에 대하야 위약금을 밧치기로 하얏다더라.”
위와 같이 1930년대에도 충북 영동군 황간면과 경북 상주 모동면은 하루에 짐을 부리는 우차가 오십여 대 교류하는 밀접지역이었고 역사적으로 사벌국이 백제에 귀부한 다음 신라에 정복되기까지 백제에 속해있는 지역이었는데 다시 신라로 편입되었고 또 황간면 소재 마산리의 전설과 같이 말을 길러 국가에 진상하는 지역이었다면 삼국 통일 당시 상주의 주치(州治)가 수시로 변동 되었듯 상주정의 위치도 변동되었고 상주라는 지금의 행정적인 개념이 성립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백화산 일대를 광의적인 개념으로 소라현(召羅縣)으로 통칭했을 수도 있다.
中牟縣은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모서면 일대에 있었던 옛 고을로 본래 신라의 도량현(刀良縣)으로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 도안현(道安縣)으로 개칭되어, 화령군(化寧郡)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초인 940년(태조 23)에 중모현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018년(현종 9)에 상주의 속현으로 합속되어 조선시대에도 상주목의 모동면·모서면을 이루고 있었다. 이와 같이 중모현(中牟縣)이라는 명칭도 고려 때 비로소 사용되었고 삼국시대 때의 경계선도 모호했을 것이다.
이 소라현(召羅縣-현재 황간면)이 역사서에 기재된 사라정(沙羅停)일 가능성이 있고 광의적으로 현재도 백화산의 5/1 면적 정도이 충북 황간면의 경계이듯 백화산 일대를 군단이 있는 사라정(沙羅停)으로 지칭하여 『동사강목(東史綱目) 第4上記』에 “금돌성(金堗城), 지금의 상주(尙州) 백화산(白華山) 으로 나아가 주둔하였다.” 고 하였고 『삼국사기 권 사십이 김유신 열전 제2』에 “大王率將士 行至沙羅之停” 으로 수록될 가능성도 있다.
참고로
북사(北史-중국 당(唐)의 이연수(李延壽)가 편찬한 사서(史書)로 중국 각 왕조(王朝)의 정사(正史)로 인정받는 25사(二十五史) 가운데 하나이다. 북위(北魏), 서위(西魏), 동위(東魏), 북주(北周), 북제(北齊), 수(隋) 등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420~589) 북조(北朝)의 여섯 왕조의 역사를 기전체(紀傳體)로 서술하였다. 북위(北魏)가 건국된 386년(北魏 道武帝 登國 원년)부터 수(隋)가 멸망한 618년(隋 恭帝 義寧 2년)까지 233년 동안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으며, 본기(本紀) 12권, 열전(列傳) 88권 등 모두 100권(卷)으로 되어 있다. )
或稱魏將毋丘儉討高麗破之, 奔沃沮, 其後復歸故國, 有留者, 遂爲新羅, 亦曰斯盧. 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 兼有沃沮·不耐· 韓濊之地. 其王本百濟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國. 初附庸于百濟, 百濟征高麗[校勘 155], 不堪戎役, 後相率歸之, 遂致强盛.
일설에 의하면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毋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격파하니, 고구려인들은 옥저沃沮로 도망갔다가 그 뒤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는데, 이때에 따라가지 않고 남아 있던 자들이 마침내 신라新羅를 세웠다고 한다. 신라는 斯盧라고도 한다. 그 나라는 화하·고구려·백제의 족속들이 뒤섞여 있으며, 옥저沃沮·불내不耐·한예韓濊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그 나라의 임금은 본래 백제百濟 사람이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가 마침내 그 나라의 임금이 되었다. 당초에는 백제에 부용附庸하였는데, 백제가 고구려를 정벌하여 고구려 사람들이 군역軍役을 견디지 못하고 무리를 지어와 신라에 귀화하니, 신라는 마침내 강성하여졌다.
遂爲新羅, 亦曰斯盧 -신라는 사로(斯盧)라 한다. 는 구절이다.
(수서)나 (통전)도 모두 이와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三國史記 卷 第三十四 地理一
新羅彊界 古傳記不同 杜佑通典云 其先本辰韓種 其國左百濟高麗二國東南 東濱大海 劉煦 唐書云 東南俱限大海 宋祁新書云 東南日本 西百濟 北高麗 南濱海 賈耽四夷述曰 辰韓在馬韓東 東抵海 北與濊接 新羅崔致遠曰 馬韓則高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此諸說可謂近似焉 若新舊唐書皆云 卞韓苗裔在樂浪之地 新書又云 東距長人 長人者人長三丈 鋸牙鉤爪 搏人以食 新羅常屯弩士數千守之 此皆傳聞懸說 非實錄也 按兩漢志 樂浪郡距洛陽東北五千里 注曰 屬幽州 故朝鮮國也 則似與계林地分隔絶 又相傳 東海絶島上有大人國 而人無見者 豈有弩士守之者 今按新羅始祖赫居世 前漢五鳳元年甲子 開國 王都長三千七十五步 廣三千一十八步 三十五里 六部 國號曰徐耶伐 或云斯羅 或云斯盧 或云新羅 脫解王九年 始林有계怪 更名鷄林 因以爲國號 基臨王十年 復號新羅 初赫居世二十一年 築宮城 號金城 婆娑王二十二年 於金城東南築城 號月城 或號在城 周一千二十三步 新月城北有滿月城 周一千八百三十八步 又新月城東有明活城 周一千九百六步 又新月城南有南山城 周二千八百四步 始祖已來處金城 至後世多處兩月城 始與高句麗百濟地錯犬牙 或相和親 或相寇초 後與大唐侵滅二邦 平其土地 遂置九州 本國界內置三州 王城東北當唐恩浦路曰尙州 王城南曰良州 西曰康州 於故百濟國界置三州 百濟故城北熊津口曰熊州 次西南曰全州 次南曰武州 於故高句麗南界置二州 從西第一曰漢州 次東曰朔州 又次東曰溟州 九州所管郡縣無慮四百五十(方言所謂鄕部曲等雜所 不復具錄) 新羅地理之廣무 斯爲極矣 及其衰也 政荒民散 疆土曰蹙 末王金傳以國歸我太祖 以其國爲慶州.
尙州 점解王時取沙伐國爲州 法興王十一(二?)年 梁晉通六年 初置軍主爲上州 眞興王十八年 州廢 神文王七年 唐垂拱三年 復置 築城周一千一百九步 景德王十六年 改名尙州 今因之 領縣三 靑驍縣 本昔(勝覽作音 恐皆靑之訛)里火縣 景德王改名 今靑理縣 多仁縣 本達已縣(或云多已) 景德王改名 今因之 化昌縣 本知乃彌知縣 景德王改名 今未詳.
삼국사기 신라 지리지를 보면 신라의 도읍이었던 월성이나 금성이 어느 주에 위치하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고 경주(慶州)는 고려 때 붙여진 이름이고 원래 신라 어느 주에 있었는지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王城東北當唐恩浦路曰尙州(도읍 동북쪽에 있는 당은포로가 곧 상주이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계미년 신라 지증왕 4년, 고구려 문자왕 12년, 백제 무령왕 3년(북위 선무제 경명 4, 503
동10월 계림이 국호를 ‘신라(新羅)’라고 정하고 비로소 왕을 청하였다.
신하들이 말하기를,
“시조가 나라를 세운 이래로 국호를 정하지 못하고, 혹 사라(斯羅)ㆍ사로(斯盧)ㆍ신라(新羅)라고 칭하였는데, 신들이 생각건대 신(新)이란 것은 덕업(德業)이 날로 새로움을 말함이요 라(羅)란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니, 국호를 ‘신라’라고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한 예로부터 나라가 있으면, 모두 제(帝) 또는 왕(王)이라 일컬었는데, 지금까지 나라를 세운 지 22세(世)가 되는데도 방언으로만 칭하였을 뿐 존호(尊號)를 정하지 못하였기에, 이제 여러 신하들이 한결같이 뜻을 모아 삼가 신라 국왕(新羅國王)의 존호를 올립니다.”
하매, 왕이 이를 따랐다.
을사년 신라 법흥왕 12년 (고구려 안장왕 7년, 백제 성왕 3년 525년)
○ 신라가 사벌주(沙伐州)를 설치하고 상주(上州)지금의 상주부(尙州府)라 불렀다.
정축년 신라 진흥왕 18년 (고구려 양원왕 13년, 백제 위덕왕 4년 557년)
○ 신라가 사벌주(沙伐州)를 폐하고 감문주(甘文州)를 설치하여 청주(靑州)라 불렀다.
이찬(伊飡) 기종(起宗)을 군주(軍主)로 삼았다.
임신년 신라 진흥왕 13년 (고구려 양원왕 8년, 백제 성왕 30년 552년)
○ 신라가 상주정(上州停)을 두었다. 대아찬 이등(伊登)을 군주(軍主)로 삼았다.
갑술년 신라 진평왕 36년 (고구려 영양왕 25년, 백제 무왕 15년 614년)
○ 신라가 사벌주(沙伐州)를 폐하고, 일선주(一善州)를 설치하였다. 지금의 선산(善山)이다.
일길찬(一吉飡) 일부(日夫)를 군주로 삼았다.
연표를 보듯 상주의 주치는 바뀌거나 심지어 사벌주(沙伐州)를 폐하고, 일선주(一善州)를 설치하는 등 변동이 많았다. 왕권의 이동이나 백제와의 전투 상황에 따라 수시로 바뀐 것과 같이 신라가 본격적인 국호를 503년 지증왕 4년에 정하기전까지는 사라(斯羅)ㆍ사로(斯盧)ㆍ신라(新羅)라고 칭하였는데 혁거세 21년(서기전 37)에 궁성을 쌓아 금성(金城)이라고 하였다. 파사왕 22년(101)에 금성의 동남쪽에 성을 쌓고 월성(月城)이라 하고 혹은 재성(在城)이라고도 하였는데 둘레가 1,023보(步)였다. 신월성(新月城) 북쪽에 만월성(滿月城)이 있으니 둘레가 1,838보였고, 또한 신월성 동쪽에 명활성(明活城)이 있으니 둘레가 1,906보였으며, 또한 신월성 남쪽에 남산성(南山城)이 있으니 둘레가 2,804보였다. 시조 이래로 금성에 거처하다가, 후세에 이르러 두 월성에 많이 거처하였다는 기록이 신라 지리지에 실려 있다.
금성과 월성이 동일하다면 금성의 동남쪽 몇 리라는 거리 표시가 필요할 것이다.
이에 국호도 뚜렷하게 정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수도인 왕성마저 초기에 금성(金城)에서 금성의 동남쪽에 성을 쌓고 월성(月城)으로 옮겼다는 것은 금성과 월성을 동일하게 보는 학계의 시각과 전혀 달리 보는 관점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王城東北當唐恩浦路曰尙州(도읍 동북쪽에 있는 당은포로가 곧 상주이다)를 해석하면 월성으로 지칭되는 경주에서 동북쪽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상주 왼쪽 서남(西南)변에 왕궁이 위치해야 王城東北當唐恩浦路曰尙州라는 지칭이 성립되는데 오류일까 하는 점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제5(卷第五) 신라본기(新羅本紀) 제5(第五) 선덕왕(善德王)
삼국유사(三國遺事) 권제일(卷第一) 기이(紀異) 편(篇)의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
吾嘗聞西南邊 내가 일찍이(嘗) 들으니(聞) 서남쪽 변경(邊境)에도
亦有地名玉門谷者 옥문곡(玉門谷)이라는 지명(地名)이 있다고 한다.
옥문곡(玉門谷)위치를 비정하는 서남쪽 변경(邊境)과도 똑 같은 오류가 반복함을 본다.
사로(斯盧) 즉 신라의 초기 국호는 서나벌(徐那伐) 혹은 사로(斯盧) 혹은 사라(斯羅)이었고 후에 계림(鷄林)으로 고쳤다가 신라(新羅)가 된다. 그리고 도읍도 금성과 월성 등 두 군데가 존재한다. 현재 사학계에서는 사로국의 위치나 계림국의 위치를 비슷한 곳으로 보고 금성도 월성과 비슷한 곳으로 보지만 신라 6부의 연혁을 보면 조선(朝鮮)의 유민(遺民)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뉘어 살며 6촌(六村)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이고,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 진지촌(珍支村) (혹은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하였다.)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인데, 이것이 진한(辰韓) 6부(六部)가 되었다. 고허촌의 우두머리 소벌공(蘇伐公)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 옆의 숲 사이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앉아 울고 있었으므로 가서 보니 문득 말은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만 있었다.
그것을 쪼개니 어린아이가 나왔으므로 거두어서 길렀다.
나이가 10여 세에 이르자 남달리 뛰어나고 숙성(夙成)하였다. 6부 사람들은 그 출생이 신비하고 기이하였으므로 그를 받들어 존경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그를 임금으로 삼았다. 진한 사람들[辰人]은 박[瓠]을 박(朴)이라 일컬었는데, 처음에 큰 알이 마치 박과 같았던 까닭에 박(朴)을 성으로 삼았다. 거서간은 진한의 말[辰言]로 왕을 뜻한다.(혹은 존귀한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라고도 하였다). 박혁거세가 임금이 되는 기록인데 다시 부언하면 고허촌의 소벌공이 박혁거세를 발견하여 그를 임금으로 삼았다는 기록이다.
9년(서기 32) 봄에 6부의 이름을 바꾸고 그에 따라 성을 내려주었다. 양산부를 양부(梁部)로 고치고 성은 이(李)로 하였고, 고허부를 사량부(沙梁部)로 고치고 성은 최(崔), 대수부를 점량부(漸梁部)<또는 모량부(牟梁部)라고도 하였다.>로 고치고 성은 손(孫), 간진부를 본피부(本彼部)로 고치고 성은 정(鄭), 가리부를 한기부(漢祇部)로 고치고 성은 배(裵), 명활부를 습비부(習比部)로 고치고 성은 설(薛)로 하였다.
그런데 신채호 선생은 위 기록은 순서가 뒤바뀌었다고 한다. 즉, 고허부를 사량부로 고친 것이 아니라 원래 이름이 사량부였는데 후대에 고허부로 고쳤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사량부는 한자의 음을 빌려 쓴 것이나 고허부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소벌공이 박혁거세를 뽑아 임금으로 삼았던 곳은 사량부이다. 사량부 혹은 사량촌((沙梁村)입니다. 村이란 옛 우리말로 '벌' 혹은 '불'이다. 따라서 사량촌의 옛말을 추측하면 "사량벌"이다. 즉, 소벌공이 박혁거세를 발견하여 임금으로 삼았다던 사량촌의 옛말인 "사량벌(沙梁伐)"이 곳 "서나벌(徐那伐)"이고 뒷글자 "벌"을 생략한 이름인 "사량"의 전음이 사로(斯盧) 즉 "사라(斯羅)"로 해석할 수 있다.
沾解王在位 沙梁伐國舊屬我 忽背而歸百濟 于老將兵往討滅之
다시 말하면 249년 점해왕 때 沙梁伐國은 후대 지칭 신라에 속했는데 백제에 귀부함으로 석우로가 토벌했다는 것은 사로(斯盧) 즉 사라(斯羅)라고 지칭되는 시절에는 중심 역할을 하다 왕권이 계림(鷄林) 중심의 신라(新羅)로 이동하니 백제에 귀부하지 않았는지 추측을 한다. 이때 사로(斯盧) 즉 사라(斯羅)라고 지칭되는 신라는 沙梁部로 통칭되는 沙梁伐國 즉 사벌주(沙伐州)가 중심지역이 아닌가 여겨지며 자연스럽게 군단 이름도 이 지역에 속한 사라정(沙羅停)으로 지칭되지 않았나 추정해본다.
혁거세는 BC 57년에 사로6촌 세력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즉위하여 왕호를 거서간(居西干)이라 하고 국호를 서라벌이라 했다. 서라벌은 서나벌(徐那伐), 서벌(徐伐), 서야벌(徐耶伐)이라고도 한다.
서나(徐那)·서라(徐羅)·사야(斯耶)는 사로(斯盧)·사라(斯羅)·신라(新羅)와 같은 말을 다른 한자로 표기한 것이며, 상읍(上邑)·수읍(首邑)의 뜻으로 풀어 백제의 소부리(所夫里)와 같이 수도의 의미로 파악하기도 한다. 또 '신'자는 '새'[新·鳥]와 같은 음이며 '쇠'[金]와도 통하는 것으로 파악하여, 신라 초기에 국왕이 거처하던 금성(金城)과 동일한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벌'(伐)은 신라의 지명 어미에 많이 붙는 것으로 '원'(原)·'국'(國)·'성'(城)을 의미하며 '불'·'화'(火)로 표기하기도 한다.
『신 동국여지승람(新東國輿地勝覽 第28 상주목-제영』하륜(河崙)의 시에, “사벌의 옛 왕기는 아직도 좋은 경치이고, 서라(徐羅)의 남은 풍속은 스스로 순박한 풍토로다.” 하였다.
서라벌을 경주라고 단정하기보다 서라벌의 어원을 따지면 沙梁伐國 즉 사벌주(沙伐州)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참고 사항으로 제시한다.
사탁부(沙涿部)·사훼부(沙喙部)라고도 한다. 여기서 량(梁)·탁(涿)·훼(喙)는 모두 도(道)와 독(督)으로 읽혔으며, '돌'로 소리 난다. 그 뜻은 도랑을 낀 어떤 지역, 즉 들의 집단을 의미한다. 종래 사량부의 사(沙)를 '새로운[新]'의 뜻으로 해석하여 사량부를 양부(梁部)에 대응한 '새로운 양부'라고 이해하기도 하였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출처] 사량부 [沙梁部 ] | 네이버 백과사전
4. 백제 공격로는 금돌산성으로부터 출발
진군 방향은 백화산 금돌산성의 역사 속 상징성과 중요성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신라군의 진군 방향은
첫째, 경기이천⇒ 충주 ⇒ 충북괴산(사라정?) ⇒ 보은(삼년산) ⇒ 옥천 ⇒ 대전 ⇒황산벌
둘째, 경기이천⇒ 청주 ⇒ 보은(삼년산) ⇒상주(사라정?) ⇒ 황간 ⇒ 영동 ⇒ 금산 ⇒황산벌
2가지 학설이 상충하고 있다.
첫 번째 진군 행로는 경기 이천까지 북상한 신라군이 회군하다 충북 보은 무렵에서 태종 무열왕(太宗 무열왕)은 금돌산성으로 가고 신라 5만 병력은 보은, 옥천을 거쳐 황산벌로 진군했다는 것인데 이병도의 금돌산성 위치를 충북 괴산으로 추론한 점에서 시작한다.
(이병도 국역(國譯) 삼국사기(三國史記) 627p
이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김유신(金庾信) 전』에서 “大王 率將士 行至沙羅之停”의 沙羅之停을 충북 괴산으로 추정한 점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돌산성이 상주 백화산에 있음은 『동사강목(東史綱目) - 第4上』에 “今 尙州 백화산(白華山)”으로 주석되고 기타 문헌에서 고증하고 있음으로 신라 5만 병력이 상주 백화산에서 진군했음은 틀림이 없다.
물론 5만 전 병력이 경기 이천까지 북상했다 다시 상주 백화산으로 회군하여 진군했다는 것은 무리수가 있기 때문에 5만 전 병력이 아니라 일만 남짓의 선발대가 경기 이천까지 북상하여 백제가 아니라 고구려를 공략한다는 전술적 기만을 한 다음 재빨리 남하하여 속속 각지에서 집결된 5만 병력으로 총 공세를 펼쳤다고 추측된다.
(唐軍 총 병력은 122,711명인데 1,900척의 배로 왔다면 이를 영접한 신라군의 배는 100여척이니 지상에서 대기 중인 태종 무열왕의 호위병력 포함 일만여 병이 아닐까 추론한다. 당시 唐과 新羅의 병선은 비슷했을 것이고 설령 병선이 규모면에서 앞섰다 했을 지라도 唐의 병선보다 더 큰 규모를 선보이지 못할 위치이니 통합 일만 병력으로 추론하는 것이다.)
신라군이 금돌성에서 출발했다면, 신라 지역의 소라현(지금의 황간면)~길동군(지금의 영동읍)~조비천현(지금의 양산면)을 거쳐 남부여 진잉을군(지금의 금산읍)~진동현(지금의 금산 진산면)을 통과해 벌곡천 상류로 들어왔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신라군은 지리적으로 가깝고 군사적으로 비교적 저항이 적은 덕목재, 웅치, 물한재(덕곡리고개)를 통해 금남정맥을 넘어 황산벌로 향할 수도 있다.
이 진군 방향은 다음과 같은 유래와도 일치한다.
1) 영동 품관사(品官寺)의 유래
품관사(品官寺)는 영동군 영동읍 부용리 7-2번지 금성산(錦城山) 동남쪽 산허리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 법주사의 말사이다. 금성산은 일명 부용산(芙蓉山) 혹은 품관산(品官山)이라고도 한다. 절이 자리한 금성산의 반대쪽에는 영동향교(永同鄕校)가 있고 절 아랫마을인 부용리는 영동역에서 2㎞ 정도의 거리이고, 마을 앞에는 경부고속도로를 가로 질러서 영동천(永同川)이 흐른다. 품관사는 충북 영동의 고찰이다. 충북 영동군 영동읍 부용리에 가면 관창(官昌)과 관련(關聯)된 설화(說話)가 아직도 생생히 그날을 말해주고 있다.
관창(官昌)은 아버지 품일(品日)을 따라 백제(百濟) 정벌(征伐)을 위해 진군(進軍)할 때 이곳 부용리를 지나갔다고 한다.
당시 신라군(新羅軍)이 출정(出征)하면서 부용산 골짜기 ‘중갱이골’에서 야영(野營)을 하였고, 아들 관창(官昌)을 잃은 품일장군(品日將軍)이 개선(凱旋)하며 돌아올 때 역시 이곳을 지나면서 아들 관창(官昌)의 명복(冥福)을 비는 심정(心情)에서 ‘중갱이골’에 절을 짓고 아버지 품일(品日)과 아들 관창(官昌)의 이름을 따서 품관사(品官寺)라 하였다고 한다.
지금 품관사(品官寺)가 있던 자리에는 금성사(錦城寺)란 낯선 이름의 사찰(寺刹)이 있다. 1980년 단국대학교 발굴조사단이 발굴한 기와의 명문에 송나라 연호인 태평(太平)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976~983년에 중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고종(재위 1863∼1907) 때 영동군의 현감으로 부임한 김재순(金在舜)이 법당을 세우고 절을 중창하였는데, 1982년 편찬된 《충청북도사지》에 당시의 설화가 전해진다. 설화에 따르면, 김재순이 부임 첫날밤에 부처가 나타나 승강곡(僧疆谷)의 흙 속에서 자신을 꺼내달라는 꿈을 꾼 뒤 중갱이골의 한 밭에서 석불좌상을 발굴하고, 이를 봉안하기 위해 절을 중창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937년에 불상을 도난당하였다. 1957년 중창하면서 절 이름을 금성사로 바꾸었다.
관창의 겉모습은 우아하였다고 한다. 그는 젊어서 화랑이 되었는데, 다른 사람과 사귀는 것을 잘하였으며,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에 능했다고 한다. 어떤 대감(大監)이 그의 이런 모습을 보고 태종(太宗) 김춘추(金春秋, 602~661)에게 천거해서, 660년에 당나라 장수와 함께 백제를 공격할 때 부장(副將)으로 삼게 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16살이었다.
660년 7월 9일, 지금의 논산군 연산면인 여산(麗山) 들에 이르러 양쪽의 군사가 서로 대치하였다. 하지만, 김유신이 이끄는 4만의 신라군은 계백이 이끄는 5천의 백제군에게 연전연패를 당하고 말았다. 전세가 백제군에게 유리하게 흘렀다. 이를 뒤집기 위해 김유신의 동생인 김흠순(金欽純)은 아들 김반굴(金盤屈)에게 “신하 노릇을 하기에는 충성만한 것이 없고 자식 노릇을 하기 위해서는 효도만 한 것이 없다. 위태한 것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과 효를 모두 할 수 있다”라는 말을 하니, 반굴이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하고는 곧바로 말을 달려 백제 진영으로 가서 싸우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金欽純(김흠순); 흥무왕 김유신의 아우,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太宗王八年 四月 條에는 『將軍欽純…』同書 권42 金庾信傳 龍朔元年 條에는 『伊湌欽純(一作欽春)…』이라 했는데, 金純은 欽純의 誤字임을 指摘한다. 三國史記 卷四七 金令胤傳 『 金令胤, 新羅沙梁人, 級湌盤屈之子, 祖欽春(或云欽純) 角干, 眞平王時, 爲花郞 仁深信厚, 能得衆心, 後文武王, 陟爲冢宰, 事上以忠, 臨民以恕, 國人翕然稱爲賢相, 太宗大王七年, 唐帝, 命大將軍蘇定方, 伐百濟, 欽春, 受王命, 與將軍庾信等, 率精兵五萬以應之, 秋七月, 至黃山之原, 値百濟將軍階伯, 戰不利, 欽春召子盤屈曰, 爲臣莫若忠, 爲子莫若孝, 見危致命, 忠孝兩全, 盤屈曰, 唯, 乃入賊陣 力戰死…』-김영윤(金令胤)은 신라 사량부(沙梁部) 사람으로 급찬(級湌:9등관) 반굴(盤屈)의 아들이다. 조부 각간(角干) 흠춘(欽春)<또는 흠순(欽純)이라고도 하였다.>은 진평왕 때 화랑이 되었는데, 어짐이 깊고 신뢰가 두터워 뭇 사람의 마음을 얻었다. 장년이 되어 문무대왕이 그를 올려 총재(冢宰)로 삼았다. 윗사람을 충성으로 섬기고 백성에게는 관대하여 나라 사람이 모두 어진 재상이라 칭하였다. 태종왕 7년 경신(660)에 당 고종(唐高宗)이 대장군 소정방에게 명하여 백제를 치게 하였을 때 흠춘이 왕명을 받들어 장군 김유신 등과 함께 정예 군사 5만을 이끌고 나갔다. 가을 7월 황산(黃山:連山)벌에 이르러 백제 장군 계백을 만나 싸움이 불리하여지자 흠춘이 아들 반굴을 불러 말하였다. 신하로서는 충성이 제일 중요하고 자식으로서는 효가 제일 중요하다. 위험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과 효가 모두 이루어진다.반굴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답하고는 적진에 들어가 힘껏 싸우다가 산화하였다.
그 모습을 본 좌장군 품일도 자신의 아들 관창을 불러 말 앞에 세우고 “네 나이가 비록 16살이지만, 그 뜻과 기백이 용맹하니 오늘 싸움에 있어 네가 능히 3군의 모범이 되겠느냐?”라고 물었다. 관창 또한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하고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 단창(短槍)을 들고 백제 진영에 달려 들어갔다. 관창은 백제병사 몇 명을 죽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사로잡히게 되었다. 백제 진영에 끌려간 관창은 백제 장군 계백의 앞에 서게 되었다. 갑옷을 해체 당한 채 사로 잡혀 온 관창의 모습을 본 계백은 그의 나이가 어리고 용맹한 것을 장하게 여겨 차마 죽이지 못하고 “신라를 대적할 수가 없구나. 오히려 소년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장수에 있어서야”라고 탄식하면서, 관창을 보내 주었다. 계백은 너무 어린 나이의 관창을 보고 차마 죽이지 못했던 듯한데, 전쟁에 나서기 전 자신이 죽이고 온 아들의 모습을 관창에게서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계백의 아량으로 살아 돌아 온 관창은 아버지 품일에게 “제가 적진에 들어가 장수의 목을 베지 못하고 기도 뺏어 오지 못한 것은 죽음을 두려워 한 것이 아닙니다. 두 번 째 들어가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하고, 마치자 우물물을 손으로 떠서 마신 후 다시 적진으로 달려 들어가 날쌔게 싸웠다. 하지만, 결국 다시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계백도 두 번째이고 백제군의 사기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관창을 살려 보낼 수는 없었다. 계백은 그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붙들어 맨 후 신라 진영으로 돌려보냈다. 품일은 아들 관창의 머리를 잡고 소매를 피를 닦으면서 “우리 아이의 얼굴과 눈이 살아 있을 때와 같구나. 나라 일을 위하여 죽었으니, 후회할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신라의 3군이 이를 보고 모두 비분강개하여 다 죽기를 결심하고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진격하니, 백제의 군사가 대패하였다. 계백은 전사하고 좌평 충상(忠商) 상영(常永) 등은 사로잡히고 말았다. 관창의 얘기를 들은 신라 태종무열왕은 그에게 6두품 이상만이 오를 수 있는 제9관등의 급찬(級飡)으로 올려주고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관창의 집에는 당견 30필과 20승 포 30필 및 양곡 100석을 장례비용으로 보내주었다.
현재 논산시 연산면 북쪽 3리 황산성(일명 성황산석성(城隍山石城))의 동쪽 산자락에는 관동(官洞)이라는 산골짜기가 있는데, 관창이 이곳에서 죽었다고 전한다. 그가 죽은 이곳이 이후 ‘관창골(官昌洞)’로 불렸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창’이 생략되어 ‘관골’로, 다시 현재에 와서는 ‘관동’이 되었다고 한다.
(品日執其首拭血曰吾兒面目如生能死於王事無所悔矣三軍見之慷慨有立志皷噪進撃百濟大敗)
이런 지명과 품관사 절의 유래를 통해 백제 공략 때 적어도 좌장군 품일은 관창을 대동하고
영동 승강곡(僧疆谷)― 중갱이골을 지나거나 야영을 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三國史記 卷 第四十七 列傳 第七 (官昌)
官昌(一云官狀) 新羅將軍品日之子 儀表都雅 小而爲花郞 善與人交 年十六 能騎馬彎弓 大監某薦之太宗大王 至唐顯慶五年庚申 王出師 與唐將軍侵百濟 以官昌爲副將 至黃山之野 兩兵相對 父品日謂曰 爾雖幼年有志氣 今日是立功名 取富貴志時 其可無勇乎 官昌曰 唯 卽上馬橫槍 直擣敵陣 馳殺數人 而彼衆我寡 爲賊所虜 生致百濟元帥階伯前 階伯俾脫冑 愛其少且勇 不忍加害 乃嘆曰 新羅多奇士 少年尙如此 況壯士乎 乃許生還 官昌曰 向吾入賊中 不能斬將搴旗 深所恨也 再入必能成功 以手掬井水 飮訖 再突賊陳疾鬪 階佰擒斬首 繫馬鞍送之 品日執其首 袖拭血曰 吾兒面目如生 能死於王事 無所悔矣 三軍見之 慷慨有立志 鼓噪進擊 百濟大敗 大王贈位級湌 以禮葬之 賻其家唐絹三千匹 二十升布三十匹 穀一百石
2) 백제 공격의 병력 이동과 장군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무열왕 (三國史記 卷第五 新羅本紀 第五 太宗武烈王)
“夏五月二十六日 王與庾信眞珠天存等領兵出京 六月十八日 次南川停
定方發自萊州 舳艫千里 隨流東下 二十一日 王遣太子法敏 領兵船一百艘
迎定方於德物島 定方謂法敏曰 吾欲以七月十日至百濟 南與大王兵會
屠破義慈都城 法敏曰 大王立待大軍 如聞大將軍來 必蓐食而至
定方喜 還遣法敏 徵新羅兵馬 法敏至 言定方軍勢甚盛 王喜不自勝
又命太子與大將軍庾信將軍品日欽春等 率精兵五萬 應之 王次今突城
秋七月九日 庾信等進軍於黃山之原 百濟將軍階伯擁兵而至 先據嶮
設三營以待 庾信等分軍爲三道 四戰不利 士卒力竭 ...... 十八日 義慈卒太子皮熊津方領軍等 自熊津城來降 王聞義慈降 二十九日 自今突城至所夫里城遣弟監天福 露布於大唐
왕은 김유신, 眞珠. 天存을 대동하고......
즉 ‘신라가 백제를 침공함에 무열왕 7년(AD 660년) 태자 법민에게 명하여 대장군 김유신장군, 품일, 흠춘 장군과 더불어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싸우도록 하고 무열왕은 금돌성으로 행차하였으며 그 후 태자 법민이 백제 의자왕의 항복을 받은 후 무열왕은 7월 29일에 금돌성으로부터 소부리성에 이르러 제감천복을 당나라로 파견하여 승전을 알렸다.’는 것이다.
동사강목(東史綱目) 第4上記
하6월 신라 왕이 남천정(南川停)에 나가 주둔하고, 태자 법민(法敏)과 김유신을 보내어 덕물도(德勿島)에서 당나라 군사와 만나게 하였다.
신라 왕이 김유신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남천정에 나가 주둔하고 있다가, 소정방 등이 군사를 이끌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오는데 함선이 천리에 뻗쳤으며 덕물도 지금 인천부 서해 가운데 있다에 진을 치고 있다는 말을 듣고, 태자 법민(法敏)과 대장군 김유신ㆍ장군 진주(眞珠)ㆍ천존(天存) 등을 보내어 병함(兵艦) 1백 수(艘)를 거느리고 정방(定方)과 합치게 하였다. 정방은 기뻐하며 7월 10일에 왕과 만나기로 기약하고 곧장 의자(義慈 의자왕)의 도성을 무찔렀다. 법민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정방의 군세(軍勢)가 대단히 성대하다.’ 하니 왕이 기뻐하여 다시 법민을 보내어 유신(庾信) 및 장군 품일(品日)ㆍ흠춘(欽春)과 함께 정병(精兵) 5만을 거느리고 응전하게 하고 금돌성(金堗城)지금의 상주(尙州) 백화산(白華山). 으로 나아가 주둔하였다.
삼국사기 권 사십이 김유신 열전 제2
請師 波珍湌金仁問 與唐大將軍蘇定方․劉伯英 領兵十三萬 過海 到德物島 先遣從者文泉 來告 王命太子與將軍庾信․眞珠․天存等 以大船一百艘 載兵士會之 太子 見將軍蘇定方 定方謂太子曰 吾由海路 太子登陸行 以七月十日 會于百濟王都 泗沘之城 太子來告 大王率將士 行至沙羅之停
태종대왕 7년 경신(660) 여름 6월에 대왕은 태자 법민(法敏)과 더불어 백제를 치기 위하여 대군을 동원하여 남천(南川: 利川)에 와서 주둔하고 있었다. 그때 당에 들어가 군사를 청한 파진찬(波珍湌: 4등관) 김인문(金仁問)이 당나라 대장군 소정방(蘇定方), 유백영(劉伯英)과 함께 13만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덕물도(德物島:현재의 경기도 덕적도)에 도착하였고, 부하 문천(文泉)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려왔다. 왕은 태자와 장군 유신(庾信), 진주(眞珠), 천존(天存) 등에게 명하여 큰 배 100척으로 군사를 싣고 만나게 하였다. 태자가 장군 소정방을 만나니 정방이 태자에게 말하기를 나는 바닷길로 쳐들어가고, 태자는 육로로 쳐들어가서 7월 10일에 백제의 왕도(서울)인 사비성(泗沘城: 부여)에서 만나자.라고 하였다. 태자가 돌아와서 대왕에게 고하였다.
대왕은 장수와 병사를 거느리고 행군하여 사라정(沙羅停)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동사강목, 김유신열전을 종합하면 경주를 떠날 때 김유신, 진주(眞珠), 천존(天存) 장군이 등장하고 장군 품일(品日)ㆍ흠춘(欽春) 등은 본격적인 백제 공략 때 출병함을 볼 수 있다.
품일(品日)ㆍ흠춘(欽春) 장군 등은 경기 이천 행군로에서 빠져 후속부대를 집결하는 역할을 했고 그 전진기지는 상주 백화산을 주축으로 하는 사라정(沙羅停)이란 군단일 것이다.
南川停은 경기도 남부 지역인 利川(이천)이다. 여기엔 신라의 6개 停(정=군관구) 가운데 서북방 영토를 관할하던 군관구 사령부가 설치되어 있다. 그렇다면 신라군이 굳이 이천까지 북상했던 이유는 백제와 고구려 모두를 혼란에 빠뜨리려 했던 계략이었던 것 같다. 실제론 백제를 치려고 하면서 겉으론 고구려를 공격하는 체하는 교란전술이었던 것이다.
이런 신라군의 병력 전개는 우선 고구려의 수뇌부로 하여금 羅唐 양군이 자국을 남북에서 협공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게 했을 터이니 고구려로서는 백제를 위해 구원군을 보내고 싶더라도 가볍게 動兵(동병)을 할 수 없게 된다. 羅唐 양군은 고구려군의 기동을 묶어 놓고, 백제에 대해선 그 주력군을 公州(공주) 계선에 집결토록 강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羅唐 양군은 戰場(전장)을 주도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공격군으로서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했던 셈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덕적도에서 羅唐 연합군의 수뇌부는 백제 공략을 위한 구체적 전략을 수립했다. 羅唐 양군은 7월10일 금강 하류 伎伐浦(기벌포:충남 장항)에서 합류하여 백제의 도성 泗城(사비성=부여)을 공략하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당군은 海路로 이동했던 만큼 백제군의 저항에 걸릴 염려가 별로 없었던 반면 백제의 영토를 가로질러 진격해야 하는 신라군은 그만큼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전략이었다.
전략에 따라 무열왕은 태자 법민, 대장군 김유신, 좌장군 品日(품일), 우장군 欽純(흠순) 등에게 精兵(정병) 5만을 주어 사비성을 향해 진격토록 했다. 무열왕 자신은 今突城(금돌성: 지금의 경북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백화산)에 거가를 머물렀다. 7월9일 김유신 軍은 황산벌(지금의 논산시 연산면·부적면)에 이르렀다.
무열왕을 따라 남천정으로 갔다가 다시 남하한 김유신은 여기서 대기 중이던 5만 규모의 精兵(정병)을 攻擊梯隊(공격제대)로 삼아 백제로 진격했고, 무열왕은 남천정까지 데리고 갔던 병력을 豫備梯隊(예비제대)로 삼아 상주의 백화산에다 진을 치고 공격제대의 뒤를 받치고 있었던 것 같다.
삼국사기에는 남천정까지 북상했던 병력의 주요 지휘관이 金庾信, 眞珠, 天存인데, 김유신 휘하 공격제대의 좌·우익 장수는 欽純(흠순)과 品日(품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상주 백화산에 진을 치고 예비제대로 대기한 부대의 實兵(실병) 지휘관은 眞珠와 天存이었고, 김유신이 거느린 공격제대의 주력은 品日(품일)과 欽純(흠순)의 부대였다고 판단된다.
신라군이 고구려를 칠 것처럼 북상했다가 갑자기 창끝을 백제로 돌렸던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왜냐하면 김유신 軍의 진격을 막으러 나온 계백 軍의 규모가 5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기만전술이 2백75년 후 고려 태조 王建(왕건)의 후삼국 통일 전쟁에서도 그대로 응용되었다는 점에서 그 전략적 탁월성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서기 935년 王建(왕건)의 고려군은 開京(개경)에서 남하하여 天安(천안)에다 전선 사령부를 설치하고 여기서 후백제를 공격하려는 것처럼 陽動(양동)작전을 벌였다. 이에 후백제의 최고 실력자 神劍(신검)은 공주 방면의 금강 계선에 방어 군을 집결시켜 고려군과 일대 결전을 전개하려고 했다.
그러나 고려군의 주력은 전격적으로 一利川(일리천:경북 구미시) 방면으로 남하하여 낙동강을 도하하려 했다. 이에 신검은 백제의 방어 군을 황급히 낙동강 상류 西岸(서안) 방면으로 돌려 대적했으나, 병력의 열세에다 방어진지조차 구축하지 못한 상황에서 참패했다. 이것이 후삼국 통일에 있어 최후의 결전이 된 一利川 전투의 시말이다. 일리천 전투의 패전 후에 신검은 이렇다 할 접전 한번 해보지 못하고 후퇴를 거듭하다가 황산벌에서 그를 추격한 왕건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맺는 말
사라정(沙羅停)에 대한 고증이 없어 학계에서 위치 비정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하지만
사라정(沙羅停)은 광의로 해석하면 신라가 본격적인 국호를 503년 지증왕 4년에 정하기전까지는 사라(斯羅)ㆍ사로(斯盧)ㆍ신라(新羅)라고 칭한 현 상주 인근을 포함하는 오늘날 낙동강 상류지역인 안동시 임하면 일대를 경계로 서 쪽으로는 영주시 일부, 청송군 일부, 예천군, 문경시, 의성군, 군위군, 김천시 일부, 충북의 청원·보은·옥천·영동· 황간 일대를 관할하는 포괄적인 지명 사라(斯羅)ㆍ사로(斯盧)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신라 진흥왕 13년 (고구려 양원왕 8년, 백제 성왕 30년 552년) 신라가 상주정(上州停)을 두었다. 대아찬 이등(伊登)을 군주(軍主)로 삼았다는 점에서 당시 주치(州治)의 변동이 심했다는 것을 유추하여 삼국통일 당시에는 충북 영동군 황간면의 옛 이름. 소라현에서 보듯 백화산을 중심으로 하는 군단을 통칭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는 황간 마산리의 전설과도 부합한다.
또 백제 공격로는 백화산 금돌산성을 전진기지로 5만 신라 병력이 출진하고 영동 부용리 품관사의 유래와 전설을 종합하여 적어도 품일은 아들 관창을 대동하고 이 지역에서 야영했거나 삼국통일 무렵 백제 공략 때 지나갔음이 여실하다.
백화산 금돌산성이 차지하는 당시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고 역사에서 기록된 사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도 정확한 금돌성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이는 금돌성이 있는 백화산의 지명이 일제 때 삭제되어 2007년 12월26일자로 국토지리정보원에 새롭게 제정 고시된 원인을 찾을 수 있는 단초를 찾을 수 있고 사라(斯羅)ㆍ사로(斯盧)라고 지칭된 초기 신라의 근원을 찾을 수도 있는 근원이 될 것이다.
교과서에서 배운 역사만 정사(正史)가 아님은 지난 과거에도 있었고 늘 작은 단초로 새롭게 조명하는 역사가 진실임을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 느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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