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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이만큼이나마 명맥을 이어온 데는 대종교(大倧敎) 덕이 크다.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알게 될 것이다. 신도 수와 상관없이, 대종교라는 이름이 품어온 신앙과 역사의 집 안에는 아직 피지 못한 씨앗들이 남아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어떤 종교를 믿든, 어디에 살든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낡은 종갓집에 핏줄이 닿아 있다는 것을 말이다.
대종교는 나철(弘巖 羅喆 1863~1916)이 1909년에 다시 열었다. 동학, 증산교, 원불교와 함께 근세 민족종교라고 불리지만, 대종교는 스스로를 '창시'가 아닌 '중광(重光)'이라 말한다. 고려 중기 몽골 침략 이후 맥이 끊긴 단군 신앙을 약 700년 만에 다시 살려냈다는 뜻이다. 음력 1월 15일을 '다시 빛낸 날', 중광절로 삼아 기린다.
이름도 독특하다. 大宗敎가 아니라 大倧敎. '마루 종(宗)'이 아니라 '상고 신인 종(倧)'을 쓴다. 신선, 혹은 천신을 가리키는 글자다. 이 세상을 만든 환인(桓因), 가르친 환웅(桓雄), 다스린 단군(檀君). 이 셋이 결국 한 몸이며, '한배검'이라 불린다. 기독교의 삼위일체와 겹쳐 보이지만 계보가 다르다. 나철은 교주가 아니라 '중광의 대종사(大宗師)'로 불린다. 새로 만든 게 아니라 잊힌 것을 다시 불러 모셨다는 의미다.
단군 신앙의 흔적은 오래됐다.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동예의 무천(舞天), 신라와 고려의 팔관회(八關會). 제천의식은 면면히 이어졌다. 불교와 도교와 유교가 위로부터 스며들면서 단군은 점점 뒤로 밀렸지만 민중 속에 뿌리가 남아 있었고, 20세기 벽두 나라가 무너져 내리던 시절 대종교라는 이름으로 다시 떠올랐다.
나철은 1863년 전남 보성 벌교 출생이다. 서른을 앞두고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 부정자(承文院 副正字)를 지냈다. 1895년 징세서장(현재의 국세청장)에 임명됐다가 곧 사직하고 낙향한다.
이후 1904년부터 오기호(吳基鎬 1863~1916), 이기(李沂 1848~1909) 등 호남의 우국지사들과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해 구국운동에 나선다. 1905년 6월 오기호, 이기, 홍필주(洪弼周 1857~1917)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한·청·일 삼국 친선동맹을 호소했으나 헛수고였다. 일왕 궁궐 앞에서 사흘 단식 농성도 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인 1906년에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항의했으나 역시 벽이었다. 귀국 후 폭탄이 장치된 선물상자를 구입해 을사오적(이완용·이지용·박제순·이근택·권중현)을 처단하려 했지만 실행에 이르지 못했다.
1907년 1월 암살단을 꾸렸다. 거사 날짜까지 잡았으나 단원들이 체포되면서 전모가 드러났다. 나철은 동지들의 고문을 덜어주기 위해 스스로 자수하여 10년 유배형을 받았다. 이듬해 고종의 특사로 유배에서 풀려났다.
1908년, 나철은 마지막으로 일본 외교전에 나섰다가 도쿄에서 전혀 다른 만남을 갖는다. 백두산의 백봉(白峯)이라는 신사가 보냈다는 두일백(杜一伯)이라는 노인을 만난 것이다. 단군교포명서를 받고 단군교 입교의식을 치른 것이 훗날 대종교 중광으로 이어지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이미 단군교의 소그룹이 은밀히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나철은 그 자리에서 외교적 독립운동을 완전히 포기했다. '나라는 망해도 도가 살아남으면 된다[國亡道存]'는 말이 심장을 파고들었다. 그래서 1909년 음력 1월 15일, 서울 종로구 재동에서 오기호·강우·유근·이기·정훈모 등의 동지들과 함께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를 공표했다. 이날이 중광절이다.
교세는 빠르게 불었다. 1910년 6월 기준 서울에만 2,748명, 지방에 1만 8,791명이 입교했다. 그러나 같은 해 동지였던 정훈모가 친일로 돌아서며 '단군교' 이름에 매달려 따로 나가 살림을 차렸다. 나철은 이를 계기로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고 꿋꿋이 항일의 길을 걸었다. 정훈모의 단군교는 훗날 일제의 해산령에 의해 사라진다.
1914년, 일제의 압박이 극심해지자 나철은 총본사를 만주 화룡현 청파호(靑波湖)로 옮겼다. 짧은 기간 안에 30만 명의 신자가 생겨났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놀란 일제는 1915년 종교통제안을 공포하며 대종교를 노골적으로 말살 대상으로 삼는다.
1916년 음력 8월 15일, 나철은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들어가 '오늘 세 시부터 사흘간 단식수도하니 누구라도 문을 열지 말라'는 글을 써 붙이고 수도에 들어갔다. 사흘 뒤, 제자들이 문을 뜯고 들어갔을 때 그는 이미 폐기법(閉氣法)으로 숨을 멈춘 뒤였다. 스스로 호흡을 끊는 죽음. 세 가지 유언[殉命三條]을 남겼다. 대종교를 위하여, 한배님을 위하여, 천하를 위하여 목숨을 끊는다는 내용이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일제가 대종교에 특별히 날을 세운 이유는 따로 있었다.
홍암 나철은 일본에 네 차례 건너가 외교항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일본 측 인사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대화(大和, 일본)의 옛 사기를 살펴보건대, 일본 민족의 근본과 신교의 본원이 다 어디로부터 온 것이며, 신사(神社)의 삼한기(三韓几)와 궁내성의 오십한신이 다 어디에서 왔으며, 의관문물과 전장법도, 그리고 공훈을 세운 위인들이 다 어느 곳으로부터 왔는가." 일본 신도의 뿌리가 한국의 신교에 있다는 선언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제는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결합된 국가신도를 지배의 최고 언어로 만들었다. 그들이 조선 땅에 신사를 세운 것은 종교 전파가 아니라 영혼의 점령이었다. 일본의 조상신을 조선인의 조상이라 납득시킬 수 있다면, 내선일체도 황민화도 강요가 아니라 귀환이 된다. 그런데 바로 그 신도의 뿌리가 조선의 신교에 있다고 주장하는 종단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제의 대종교 처방은 처음부터 달랐다. 불교와 기독교는 관리하고 이용했지만, 대종교는 처음부터 박멸의 대상이었다. 1915년 종교통제안으로 불법화했고, 나철이 포교 허가를 신청했지만 끝내 거부됐다. 총독부 내부 문서에는 대종교를 "단군교라는 이름을 바꾼 것으로, 신도·불교·기독교와 동일하게 취급할 수 없다"고 명시했다.
일제는 종교를 대할 때 입맛에 따라 처방을 달리했다. 그 차이가 말해주는 것이 많다.
불교에는 1911년 사찰령(寺刹令)을 공포하여 30본산 체제를 구축했다. 전국 사찰을 30개 교구로 묶고, 주지 임면권을 총독부가 쥐었다. 재산권도, 인사권도, 운영권도 총독부 손으로 넘어갔다. 사법(寺法) 서문에는 일본의 축제일과 역대 천황의 제일을 넣게 했다. 조선 불교는 그렇게 총독부 위탁 기관 비슷한 무언가가 되었다.
당시 불교계 내부에서 이 체제에 대한 구체적인 저항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친일 승려 권상로는 사찰령 반포가 총독의 '밝은 정치'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기까지 했다. 1930년대 이후 일제가 침략전쟁을 본격화하자, 불교계는 총독의 훈시에 따라 전사자 위령법회와 시국강연회를 개최하고 각 사찰에 위문비 건립을 독려했다. 전쟁에 적극 협력하는 '후방 수호'가 불교의 역할로 자리 잡았다.
기독교에는 달콤한 회유와 정교한 압박을 교차로 썼다. 서구의 뒷배를 믿고 한동안 버티던 개신교는 1925년 서울 남산에 조선신궁이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신사참배 강요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가톨릭은 로마 교황청의 훈령에 따라 일찌감치 순응했다. 감리교는 1936년에 굴복했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주도하던 장로교마저 1938년 9월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제27회 총회에서 무릎을 꿇었다.
결의문이 채택되자마자 총회 임원들은 점심도 걸러가며 평양신사로 달려갔다. 총회 부총회장이었던 김길창은 그 선두에 서서 참배를 이끌었고, 이후 열렬한 친일 행각으로 승승장구했다. 초대 감리교 감독 양주삼은 "기독교인은 종교인이기 이전에 국민"이라며 신사참배를 적극 찬성했다.
해를 거듭하면서 교회 안에는 일본 신도의 신단인 가미다나(神棚)가 들어섰다. 예배 전에 궁성요배(宮城遙拜)를 하고 황국신민서사를 낭독한 뒤 찬송을 불렀다. 1942년에는 '조선장로호'라는 이름이 붙은 해군 전투기가 일제에 헌납됐다. 하나님의 사제들이 침략전쟁의 포탄값을 모아 바쳤다. 주기철 목사처럼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다 옥사한 이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거스르는 소수의 이야기였지 교단의 선택이 아니었다.
유교도 마찬가지였다. 콧대 높던 이 땅의 유학자들은 몇몇 한말 의병장과 목대 꼿꼿한 나홀로 선비들을 마지막으로 제대로 힘 한 번 못 써 본 채, 대동학회 등 어용단체에 휘둘리며 가뭇없이 스러졌다.
그런데 대종교는 달랐다. 타협도 굴복도 없었다. 만주로 총본사를 옮기고, 총칼을 들었다. 일제가 끝끝내 박멸하려 한 종교가 어느 쪽이었는지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말해진다.
나철이 조천(朝天)한 뒤 2대 교주가 된 무원 김교헌(茂園 金敎獻, 뒤에 金獻으로 개명 1868~1923)은 경기도 수원 출신으로, 성균관 대사성(大司成)까지 오른 인물이다. 1909년 대종교에 입교한 뒤 마지막 날까지 항일구국에 한 몸을 바쳤다.
그는 총본사를 동만주 화룡현으로 옮긴 뒤 교단을 정비하고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항일투사 양성에 힘썼다. 그리고 서일(白圃 徐一 1881~1921)이 조직한 비밀결사 중광단(重光團)을 후원하여 1918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발전시켰다.
1919년 2월 1일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 이른바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9인의 독립지사 중 25명이 대종교 출신이었다. 이 선언은 국내 3·1운동보다 앞선 것이며, 항일무장투쟁을 명시했다는 점에서 기미독립선언서와 성격이 달랐다.
또 하나의 핵심 인물 서일은 함북 경원 출신으로, 10년간 소학교 교사로 일하다 한일합방 후 만주로 망명했다. 1911년 중광단을 조직하고, 1912년 나철을 만나 대종교에 입교한 뒤 맹렬하게 시교하여 수만 명의 신자를 모았다. 중광단은 대한정의단으로, 다시 북로군정서로 발전했다. 서일이 총재를 맡고 김좌진이 사령관이 된 이 조직이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의 주축이었다.
청산리 전투(1920.10.21~26)는 독립군 약 1,500명이 일본군 약 5,000명과 맞붙어 대승을 거둔 전투다. 당시 전과에 대해서는 한국 측과 일본 측 기록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임시정부 발표 기준으로 일본군 전사 약 1,257명이라 했으나, 실제 수치를 둘러싼 역사학계의 논쟁은 지금도 이어진다. 어느 쪽 수치를 취하더라도, 열세한 무력으로 버텨낸 것은 사실이다. 전투에 참가한 독립군의 다수가 대종교인이었으며, 이들에게 총을 드는 것은 기도의 연장이었다.
일제는 청산리의 패배에 분노하여 간도참변(庚申慘變, 1920~1921)을 일으켜 대종교도 다수를 포함한 수천 명의 조선인 민간인을 학살했다. 분통 끝에 병을 얻은 김교헌은 1923년 쉰여섯에 숨을 거뒀다. 서일은 1921년 밀산으로 이동한 뒤 예상치 못한 마적단의 기습으로 진중이 초토화되자, 동지들을 잃은 죄의식을 안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 1921.6.28)도 빼놓을 수 없다. 연해주 이만(스보보드니)으로 건너간 독립군 부대가 공산계열 한인 무장세력과의 알력 끝에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것이다. 이 참담한 기억은 이후 여러 독립운동 세력 사이의 균열을 깊게 만들었고, 결국 민족분단이라는 귀결에 한 줄기 물꼬를 댔다.
3대 교주 단애 윤세복(檀崖 尹世復 1881~1960)은 경남 밀양 출신으로, 1924년에 교통을 이어받았다. 수천 석의 가산을 정리해 만주로 망명하여 사재를 들여 교당과 학교를 세웠고, 흥업단·광정단 등을 조직해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일본군의 만주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1932년 괴뢰국 만주국이 수립되자 대종교는 비밀결사화했다.
그리고 1942년, 임오교변(壬午敎變)이 일어났다. 일제는 대종교를 조선 독립군 단체로 지목하고 윤세복 등 25명의 핵심인물을 체포했다. 치안유지법을 걸어 대부분을 만주 액하 감옥에 가두었고, 고문과 구타 끝에 열 명의 간부가 목숨을 잃었다. 대종교에서는 이들을 임오십현(壬午十賢)으로 기린다.
권상익·이정·안희제·나정련(나철의 맏아들)·김서종·강철구·오근태·나정문(나철의 둘째 아들)·이창언·이재유.
이 중 백산 안희제(白山 安熙濟 1885~1943)는 경남 의령 출신의 거부였다. 부산 백산상회를 경영하며 독립운동에 자금을 댔고, 발해 옛 수도 동경성 부근에 발해농장을 개발하여 1931년 만주로 망명한 발해학교를 세워 민족 역사교육을 실천했으나 임오교변의 참화를 피하지 못했다. 고문 끝에 풀려난 지 한 해 만에 목단강 변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
1919년 상해임시의정원이 처음 구성될 당시 의원 35명 중 28명이 대종교 교도였다. 1945년 광복까지 임시정부 각료를 지낸 대종교인은 37명에 달했다. 사회주의 계열이 주도한 마지막 몇 해를 빼면, 1910년대부터 광복까지 해외 무장독립투쟁 단체들 가운데 대종교 출신이 평균 70~80%를 채우고 이끌었다.
이상설·이회영·박은식·신채호·정인보·주시경·지청천·홍범도·김좌진.
교과서에서 배운 그 이름들이 대종교인이었다. 개천절은 상해임시정부에서도 국경일로 채택됐으며, 광복 후 대한민국도 이를 이어받아 국경일로 제정했다.
1922년 1월 21일,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서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초대 위원장을 지낸 우사 김규식은 '조선혁명운동'이라는 제목의 발표를 통해 대종교를 유럽 무대에 처음으로 소개했다. "조선 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섬기는 대종교 신자들은, 조상의 잃어버린 땅을 되찾으려는 결심을 굳게 한 애국적인 젊은이들이 많이 있다."
대종교의 신학 구조는 '세검한몸(三神一體)'이다. 조화신 환인, 교화신 환웅, 치화신 단군. 이 셋이 결국 한 몸인 한배검(天祖神)을 섬긴다. 기독교의 삼위일체가 떠오르지만 계보가 다르다.
경전 체계는 계시경전인 삼일신고(三一神誥)·천부경(天符經)·참전계경(參佺戒經)과, 도통경전인 신리대전(神理大全)·신사기(神事記)·회삼경(會三經) 등으로 구성된다. 삼일신고가 가장 중시된다. 대종교의 사상적 핵심인 삼일원리(三一原理)는 유·불·선 삼교가 그 안에 녹아 있다고 본다.
대종교의 중광가(重光歌)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찾아보라 가닥가닥 한배빛 선가(仙家)에, 천선종조(天仙宗祖)·석가의 제석존숭·유씨의 상제임여·야소의 야화화와 회회의 천주신봉, 실상은 한 한배님." 도교·불교·유교·기독교·이슬람의 신을 일일이 호명하며 그 실상이 모두 하나인 한배님이라 선언한 것이다. 20세기 초, 종교다원주의가 신학계의 화두가 되기 반세기 전의 이야기다.
이런 포용성은 교리에만 머물지 않았다. 나철이 남긴 유훈 "타 종교의 믿음과 대종교의 신앙을 하나로 보라"는 말은 실제로 살아진 원칙이었다. 불교 고승 운허 스님(이시열)이 대종교의 교질을 받았고, 한용운은 나철의 유고집을 간행하려 했으며, 기독교 배경을 지닌 주시경·안재홍·이동녕·우덕순이 대종교로 귀의했고, 안창호·이동휘 같은 이들은 기독교인으로 남으면서도 대종교 사상에 깊이 공감했다. 대종교는 신앙 공동체이기 이전에 민족 연대의 마당이었다.
구원론의 핵심은 삼진(三眞)과 삼망(三妄)의 개념이다. 성품[性]·목숨[命]·정기[精]라는 삼진을 타고나지만, 살아가면서 마음[心]·기(氣)·신(身)이라는 삼망이 삼진을 흐린다. 삼망을 억누르고 삼진으로 돌아가는 것이 수행의 방향이다. 실천 수행인 삼법수행은 눈을 감고 마음을 비우는 지감법, 호흡을 고르는 조식법, 경전을 소리 내어 읽는 금촉법으로 이루어진다.
대종교가 독립운동에 기여한 것은 총칼만이 아니었다. 더 오래가는 흔적을 언어에 남겼다. 주시경(周時經 1876~1914)은 감리교 신자였다가 대종교에 귀의한 뒤 한글 연구에 남은 생을 바쳤다. '한글'이라는 이름 자체가 그가 만든 것이다. 그의 제자들이 훗날 조선어학회를 만들었다. 김두봉은 대종교인으로, 1916년 나철이 구월산에서 순명할 때 시봉한 여섯 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극로, 최현배도 같은 흐름 안에 있었다.
일제는 이 연결고리를 정확히 파악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과 대종교 임오교변을 두 달 사이로 일으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조선어를 지키는 이들이 주로 대종교인이라는 판단에서 비롯된 동시 작전이었다. 언어와 신앙이 민족정체성의 두 기둥이라는 것을 적도 알았고, 지키는 쪽도 알았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33명이 검거됐다. 임오교변으로 교주 윤세복 등 25명의 핵심인물이 체포됐고 10명이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 중에는 나철의 두 아들 나정련·나정문도 있었다.
1945년 8월, 윤세복은 만주 액하 감옥에서 무기수로 수감 중이었다. 임오교변으로 갇힌 지 3년이 지나 있었다. 살아남은 지도자들이 귀국하면서 교단은 다시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 1946년 광복 1주년 기념식에서는 대종교 총본사에서 채화된 성화가 남산 꼭대기에 점화됐다. 그해 개천절 성화는 총본사에서 채화되어 마니산 참성단까지 봉송됐다.
가시적인 성과들도 잇따랐다. 미군정 교육심의회가 1945년 12월에 홍익인간을 대한민국 교육이념으로 채택했다. 이 결정에는 초대 문교부 장관이 될 안호상(安浩相 1902~1999)을 비롯한 대종교계 지식인들이 깊숙이 관여했다. 안호상은 1994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36년 일제 식민지 교육잔재를 하루빨리 씻고 민주주의 교육을 구현하자는 생각"에서 홍익인간을 주장했다고 회고했다. 홍익인간은 1949년 교육법 제1조에 공식화됐고, 교육기본법으로 넘어온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교육의 기본 이념이다.
5대 종단의 하나로,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6대 종교 가운데 제1호 종단으로 등록된 대종교는 1950년대 후반까지 교도 수가 60만 명을 넘어섰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그로부터 두 세대가 지나지 않아 이슬람교보다 신도가 적은 군소 종교로 밀려났다. 지금은 4천 명 안팎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최근 학계의 연구들은 이 질문을 단순한 '교단의 실패'가 아니라 구조적 맥락 안에서 다룬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역설적이게도 대종교의 가장 큰 강점에서 나왔다.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는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를 정확히 짚는다. "독립투쟁이 종교적 실천의 제1목표였던 만큼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면 될수록 교단적인 결속이 더 굳게 이루어질 수 있었지만, 독립이 된 후에는 목표 변경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교단 통합을 위한 상징적 표상의 제시는 어려워지게 마련이었다." 비밀결사 형태의 조직 원리로 35년을 버텨온 종단이 갑자기 평화시의 포교 조직으로 전환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만주의 기반은 완전히 초토화됐다. 간도참변 이후 쌓아올린 것들, 임오교변으로 조직의 뼈대가 꺾였다. 귀국한 지도자들은 빈손이었다. 해방 직후의 혼란한 정국에서 적산을 차지한 건 친일 세력이었고, 대종교 인사들은 그 흔한 건물 하나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다.
정치적 환경도 가혹했다.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 강력한 반공·친미 이데올로기가 지배 담론이 됐다. 자주적 민족주의를 뼈대로 삼는 대종교는 체제의 논리와 어울리지 않았다. 대종교 인사들은 초기에 정부에 등용됐다가 권력이 안정되자 일회용으로 쓰이고 밀려났다. 좌우대립과 한국전쟁은 남은 인적 물적 토대마저 파괴했다. 납북자와 행방불명자가 속출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급속한 서구화가 결정타였다. 일제가 35년 동안 체계적으로 진행한 민족교육 말살정책의 결과, 해방 후 새로 자라난 세대들에게 우리 고유의 것은 이미 '뒤처진 것'으로 각인돼 있었다. 거기에 서구 문명과 외래 종교가 물밀듯 밀려오면서 단군과 한배검을 모시는 종교는 '미신에 가까운 무언가'로 취급받기 시작했다.
대종교가 세운 대학들도 대종교의 기원을 지웠다. 홍익대학교는 대종교 지도자 이흥수(松巖 李興秀 1896~1973)가 사재로 세웠으나 자금난으로 재단이 바뀌면서 1960년대 이후 대종교를 떠났다.
단국대학교는 독립운동가 장형(梵隱 張炯 1889~1964)과 조희재 여사가 세웠으나 교명에만 흔적이 남아 있다.
경희대학교의 전신 신흥대학은 신흥무관학교의 정신을 이으려 이시영이 세웠으나 재단이 바뀌며 이름도 바뀌었다.
국학대학은 초대 학장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1893~1950)까지 모두 대종교 인물이었으나 우석대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에 흡수됐다. 씨를 뿌리고 물을 댄 사람들과 지금 수확을 거두는 사람들이 전혀 다른 셈이다.
독립운동사 서술에서 대종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 기여에 비해 여전히 낮다. 교과서에서 청산리 전투를 배우면서 그 전투의 정신적·조직적 기반이 대종교였다는 사실을 배우는 학생은 드물다.
한글날을 기념하면서 주시경이 대종교인이었다는 사실, '한글'이라는 이름 자체가 대종교적 세계관과 연결돼 있다는 맥락을 아는 이는 더 드물다. 홍익인간이 어디서 왔는지 묻는 사람도 거의 없다.
연구자들이 최근 주목하는 또 하나의 각도는 남북통일 문제다. 남과 북이 공유하는 거의 유일한 민족의 기원이 단군이며, 대종교의 단군 신앙은 이질화되어가는 남북 문화 사이에 공동의 가치 지평을 놓을 수 있는 드문 자원이라는 논지다.
"대종교의 단군신앙은 남북통일의 관점에서 볼 때 중요한 종교적 의미를 지니며, 급속도로 이질화되고 있는 남북의 문화와 종교의 공동가치를 구축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연구자들은 말한다. 1995년 안호상이 정부 허가 없이 방북하여 단군릉에 참배한 것은 노인 한 사람의 일탈이 아니라 이 오래된 염원의 표출이었다.
불교가 안방을 차지하고, 유교가 대청마루를 썼고, 기독교가 거실을 꾸몄다. 이 모두가 이 땅을 풍성하게 했다. 그러나 그것들 모두가 얹혀 있는 주춧돌과 터가 있다. 대종교를 비롯한 민족종교들이 지켜온 것이 그 터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도 집을 받치고 있는 것들이 있다.
서울 서대문구 홍은중앙로3길 89 북한산 자락, 대종교 총본사는 아직 거기 있다. 소박하고 알려지지 않은 건물 안에 『대종교중광육십년사』가 있고, 임오십현의 이름이 있고, 나철이 구월산에서 남긴 유서 세 조각이 있다.
독립운동사에서 대종교를 지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미 모르게 됐으니까. 하지만 기록은 지워지지 않는다. 누군가가 계속 꺼내고, 쓰고, 남기는 한 말이다.
홍익인간. 지금 이 순간에도 대한민국 교육기본법 제2조에 박혀 있는 그 네 글자가 어디서 왔는지를 다시 물을 때가 됐다. 그 물음이 불편하다면, 그게 바로 시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