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 시인의 ‘하늘 고치는 할아버지’를 읽고 제 우산을 살펴보았습니다. 긴 우산이 10개, 접는 우산이 7개있습니다. 참 많습니다. 꽃무늬 우산, 구스타프 크림트의 그림이 그려진 우산, 살이 부서진 우산도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좋아하는 우산은 투명한 비닐우산입니다. 비를 유난히 좋아해서 지금도 비가 오면 투명 우산을 쓰고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빗소리의 리듬을 듣고, 그 리듬에 조응하는 모든 것들에 눈과 귀를 기울입니다. 맑은 날에 비를 생각한다는 일만으로도 복 받은 아침입니다.
시인은 일상의 경험이라는 바탕에 감성의 색실로 수를 놓았습니다. ‘하늘 고칩니다.’를 읽는 순간 데이비드 오길비의 광고가 생각났습니다. 그의 광고 문구처럼 훅하고 들어오는 한 방이 있었습니다. 시 전체가 다 시적일 필요는 없겠지요. 한 줄이 시의 시작이자 마침표가 되기도 하니까요. 너무 들떴습니다. ‘하늘 고칩니다.’를 마음 고칩니다. 로 바꿔 읽어봅니다. 새는 곳은 없는지, 찢어진 곳은 없는지, 부러진 곳은 없는지... 나를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하늘을 고친다고 생각한 할아버지 왠지 행복 예감 밀려오네요. 우산 고치는 일도 재미있게 정성껏 할 것 같고 어린이를 좋아하고, 고장 난 우산을 좋아하고, 하는 일에 자부심도 크고 ... '일상에서 건져 올린 시 한 편~' 마음에 와닿습니다. 소재는 늘 곁에 있거늘, 구태여 노력하지 않아도 보여야 되거늘, 희망을 품어봅니다.
오호, 경계를 무너뜨린다고요. 댓글을 읽는 순간 많은 생각이 회오리칩니다. 파란편지님의 댓글의 품엔 못 미치지만 제 바람은 우산을 가진 사람은 가지지 못한 사람과 함께 썼으면 좋겠습니다. 우산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당당하게 비를 맞고 갈 길을 갔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비는 그치니까요.
첫댓글 '하늘 고치는 할아버지'에 달았던 댓글을 옮겨봤습니다.
다시 보니 새롭습니다.
이걸 요렇게 옮기는 방법도 있네요.
1년 전의 이야기가 아득한 과거처럼 들리네요.
옮기느라 나무늘보님 애쓰셨어요^^
나무늘보님!
이렇게 할 수도 있구나 생각하며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