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것들의 힘으로
-이처럼 사소한 것들_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펄롱의 새로운 출발로 마무리된다. 허나 지금부터가 사실은 시작이다. 책을 덮고도 나는 한동안 '그의 길'을 따라가는 상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수녀원에서 세라를 데리고 오면서 빌 펄롱은 내면의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는 큰 행복을 느꼈다. 동시에 저 멀리 문 너머 기다리는 고생길을 생각하면 두려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때문에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고통은 이제 사라졌다. 지금부터 어떻게든 잘 헤쳐나가리라는 순진한 기대와 확신으로 현관 문을 힘차게 열었다. 늦도록 걱정하며 기다린 펄롱이 누더기를 걸친 맨발의 아이와 문 앞에 나타난 순간 여섯 여자는 모두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순간 아일린은 들고 있던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떨어뜨렸다. 다섯 딸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밤은 펄롱 집안의 가장 우울한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었다.
펄롱이 이후 감당해야 할 대가는 생각보다 혹독했다. 예상은 했지만 아일린의 분노는 온 가족의 일상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세인트마거릿 학교 입학이 어렵게 된 첫째 캐슬린의 원망은 아버지의 가슴에 비수가 되었다. 둘째 조앤도 합창단에서 이유 없이 잘린 후 울면서 세라에게 분풀이를 했다. 가운데 실라와 넷째 그레이스마저 학교 친구들의 수군거림과 놀림 때문에 학교에 가길 거부했다. 막내 로레타는 위태로운 집안 공기에 눈치만 보며 툭하면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가장 큰 고객, 수도원을 잃게 된 펄롱의 사업은 점차 난관에 봉착했다. 미시즈 케호의 충고처럼 다 한통속이었다. 수녀원과 척지고 나니 성당도, 학교도 도시도 그를 경계했다. 부부는 더 부지런히 일했지만 이웃의 냉담한 반응과 무성한 소문은 가족들에게 큰 상처만 남겼다.
그러나 펄롱가의 가족은 본인들은 느끼지 못하는 변화를 조금씩 겪고 있었다. 세라에 대한 원망, 분노, 의구심이 가족의 일원으로서 함께 사는 시간이 쌓여가면서 점차 호기심, 동정, 사랑으로 바뀌었다. 작게나마 자기 몫을 하기 위해 애쓰는 세라의 모습이 애처롭기도 했다. 세라를 데려오기 전 밤새 뒤척이며 자신과 언쟁했던 남편의 번뇌를 알기에, 주머니 잔돈이라도 생기면 다 나눠주는 아빠를 알기에, 아일린과 딸들은 어느새 이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세라는 점차 새로운 가족 안에서 그들이 보이는 친절과 가르침이 자신의 삶을 이루어 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이 하거나 때로는 하지 않는 사소한 말과 행동(120쪽)이 일상의 감사함으로 다가왔다.
시간이 갈수록 도시에도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았다. 수녀원이 운영하는 막달레나 세탁소의 각종 불법과 잔혹상은 모두가 알았지만 여지껏 누구도 나서지 않았었다. 보고도 눈감았고, 듣고도 묻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며 괜히 척지지 말아야 한다고. 잘못하면 우리 아이에게 불똥이 튈지도 모른다고. 함부로 움직였다간 모든 걸 다 잃어버린다고.
그런데 세상에 맞선 빌 펄롱의 용기는 사람들의 마음에 사소하지만 지워지지 않는 진한 반향을 불러왔다.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 있는 무언가의 존재를 바라보게 하는 이야기였다(130쪽). 점차 더이상 보고만 있지 않고, 내버려두지 않는 이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10년이 흐른 후 마침내 아일랜드 정부는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수녀원의 막달레나 세탁소를 폐쇄시켰다(1996년). 미시즈 윌슨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은 펄롱의 용기로 이어졌고, 이는 그의 가족과 이웃의 변화로 연결되어 결국은 수많은 아이들의 삶을 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한번은 펄롱이 차를 세우고 노인에게 길을 물었다. 노인은 펄롱을 빤히 보았다.
“이 길?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54쪽)
내가 원하는 길은 어디인가. 자기보호 본능에 충실하게 조용히 침묵하는 길? 상처와 시끄러움을 감수하면서도 용기를 내보는 길? 세인트마거릿 여학교와 막달레나 세탁소는 단지 담장 하나 차이였다. 침묵과 용기는 아주 사소한 것들의 차이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힘으로 우리는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갈 수가 있다.
첫댓글 뭐지뭐지.. [이처럼 사소한 것들]보다 더 몰입해서 읽어버렸어요👍
재순쌤의 내공이 빛을 발하는 글입니다!!
너무 멋져요. 재순쌤이 이어가는 [이처럼 사소한 것들] 누구나 공감하며 생각해보았을, 혹은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내용이 책 구석구석에 있는 내용을 근거로 꼼꼼하게 잘 묘사되어 있어요. 재순쌤이 이 책을 얼마나 여러번 읽으셨을지 짐작이 됩니다~
아~ 감탄.. 계속 감탄하며 읽고 있습니다. 재순쌤 이야기가 듣고 싶어 저녁모임을 가야하나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네요ㅎㅎ😄
아아아, 키건 못지 않은 내공을 지닌 고재순 선생님!!! 너무 좋아요 브라보!!! ^^
크~
혜화샘!
이러한 결말이길 소망하는 마음으로 상상해 보았네요 ^^
그 후 도시에는 세인트마거릿 학교도 공립학교로 바뀌고, 불법이 통하지 않는 좋은 학교가 많이 생겼을 거예요 ㅎㅎ
정인샘!
감히 키건님에게 어찌..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제 인생 책이네요.
힘든 시기에 읽고 치유 받은..
키건의 내공이야말로 그 깊이를 알 수 없네요!
와~ 재순샘 이런 글을 쓰시다니요. 선생님의 상상력과 작품을 향한 애정에 감탄했습니다. 엄청난 글을 쓰시고 몸살이 나신 걸까요? 멋져요 👍
미완의 결말을 희망으로 정리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렇지, 그렇지... 결국 꼭 그렇지....하면서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