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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도(追悼)
김 원 우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할머니의 머리올이 병풍 위에 세선(細線)을 그렸다. 여백이 많은 산수화가 그려져 있는 병풍 위에 할머니의 하얀 모발이 던지는 음영은 나에게 화사첨 족*으로 보이지 않았다. 심산(深山)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구름과 천장으로 하느작거리며 올라가는 향 연기가 안개를 피워 올리는 것같이 잘 주화되어 병풍 안의 산촌에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것만 같았다.
촛불을 밝히고부터 할머니는 제상 앞을 떠나지 않고 내가 나르는 제기들이 놓일 자리를 손수 선별하고 있었다. 어동육서(漁東肉西)나 동두서미(東頭西尾) 쯤은 우리 형제가 다 알고 있는데도 당신은 제상의 양쪽 귀를 앉은걸음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제례를 두량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모양이었다. 제사 때만 되면 할머니의 말이나 행동거지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당신 스스로 단정하는 버릇이 있어. 옆에서 보기에도 비장감이 풍겼다. 눈이 아리게 켜져 있는 형광등 불빛이 촛불 따위가 밝히는 어둠을 충분히 뒤덮고 있는데도, 할머니의 슬픔은 촛불이 켜지고 나서야 조그만 당신의 육신 전부에서 배어 나와 제상을 걷어치울 때까지 방 안 곳곳에 자리를 잡는 것이었다.
아까부터 할머니는 신중하게 제기들을 만지면서 무슨 말인지 계속 웅얼거리고 있었다. 들리는가 하면 뚝 끊어지고, 긴 한숨과 함께 맺힌 한이 속으로 잦아졌는가 하면 간헐적으로 이어지곤 했다. 귀에 익은 할머니의 이 웅얼거림이 우리 집안의 기일(忌日)에는 곡(哭)처럼 당연한 한 풍경이었다.
할머니의 한숨이 길어지며 뒤따르는 말이 가녀리게 들려왔다.
“이 상이 마지막 상인가 싶구마는, 이녀러 팔자 명도 길지, 저승귀신이 데불고 갈 사람은 안 데불고 가고 내 손주새끼만…… 후유이……”
할머니는 나일론 저고리 소매에서 때 묻은 손수건을 꺼내 눈자위를 꼭꼭 눌러댔다. 손수건으로 코까지 풀고는 그것을 다시 소매 끝 속에 훔쳐 넣었다. 할머니가 쟁반에 소복이 담긴 나물을 받아 제상 가운데 놓았다. 그러고는 뼈만 남은 손가락으로 무채나물을 입에 집어넣으면서, 내가 보기에는 채가 고르지 못하고 길이대로 썰지 않아 중동무이*가 된 새로 맞은 손주며느리의 칼솜씨를 탓할 만하건만 오히려 맛을 나무랐다.
“야들아, 나물에 깨소금을 낫게 안 치고설랑, 참기름 많이 쳐서 느끼하믄 안 좋아했구마는…….”
늘 제사 때만 되면 듣는 당신 아들의 식성을 일깨워주는 말인데, 낚시를 하다 객혈(喀血)을 쏟고 젊어서 운명하셨다는 할아버지의 식성은 한 번도 들려주는 법이 없었다. 더구나 오늘은 천만부당하게도 아버지의 식성을 일깨워줄 필요가 없는데 입에 익은 말이 저절로 나오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제삿날만 되면 할머니는 모든 게 못마땅했다. 깨소금이 듬뿍 쳐졌으면 간이 짜다든지, 간이 맞으면 쇠고기를 너무 많이 다져 넣었다는 식으로 핀잔 아닌 흘리는 말을 꼭꼭 디밀어 놓는 할머니에게는 언제라도 제사를 모시는 우리들의 예(禮)가 부족한 셈이 되고 만다. 나물을 집어 먹은 엄지와 검지를 번갈아 입에 넣어 빠는 할머니의 손등에 거뭇한 저승꽃이 군데군데 앉아 있는 것이 내 눈에 붙잡혔고, 촛불이 무슨 낙화 같은 그 꽃 색깔의 번들거림을 제법 돋보이게 하는 것만 같았다. 아마도 그 번들거림은 살갗의 탄력이 약해져서 주름까지도 마모시킨 흔적이리라.
벽에 기댄 채로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며 머리를 숙이고 있는 어머니는 할머니의 거동에는 곁눈질도 주지 않았다. 제삿날이면, 아니 제상이 놓여지고부터 신들린 듯 조금씩 실성해가는 할머니의 언행을 어머니는 관망한다기보다 헐뜯듯이 주시하는 쪽이었는데 올해부터는 나란히 참척*을 본 죄인의 처지가 되어버려서인지 아까부터 아예 넋을 놓고 있었다.
할머니가 손끝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중얼거렸다.
“후유이…… 이런 상이라도 모시는 기 올해가 마지막인가 시푸다. 여름 한 철 나면 두어 해가 한목에 지나간 것 같구마는.”
형이 말했다.
“할무이, 오늘은 욱이 제삿날임더.”
형의 눈자위가 충혈된 것같이 보였고, 덩달아 짜증 섞인 울먹임이 내 목울대를 잠기게 했다.
할머니가 형을 돌아보지도 않고 이내 말했다.
“안다. 알고말고로, 아죽 내가 노망 안 했다. 휴이…… 더부 오기 전에 죽어야 될 낀데.”
“할무이는 그 죽는다는 말 좀 그만 하이소. 늙어서 죽고 싶다는 말 쳐놓고 빈말 아닌 말이 없담더.”
나는 혹시나 당신이 섭섭하게 들을까 봐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형수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탕수*와 밥을 다반에 얹어 들어왔다. 형수는 그냥 우두커니 서서 탈진한 사람처럼 말이 없었다. 시집온 지 오 년째가 되었으니 형수는 이제 시가의 풍습에 익숙할 만한데도 제삿날이면 행동이 굼떴고, 말이 줄어들면서 묻는 말에 대답도 자제하는 것 같았다. 제사에 온 정성으로 열중하는 할머니의 신들린 듯한 열기에 비해 형수의 멍청한 표정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장로의 딸이라서 교리를 앞세워 할머니의 귀신 숭배를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그런지도 몰랐다. 평소에는 층층시하에서 집 안을 그런대로 꾸려가는 원만한 성격임에도 이런 유교적인 제례에는 추호도 양보를 못 하는 기독교인의 아집을 형수가 좀 지나칠 정도로 고수하려고 한다면 나로서는 가타부타할* 처지가 못 되긴 하나, 나는 단연코 할머니 편이었다.
하나같이 중년에 홀로된 시할머니와 시어머니 사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알력을 무마시켜야 하고, 게다가 범 같은 두 시동생의 눈치도 살펴야 하는 형수의 고된 시집살이에서 한쪽 봉사만이라도 내물리게 해야 할 양반은 시어머니 쪽인데도, 어머니는 일찍이 “살(煞)이 끼었다”는 말을 믿어 할머니의 언행 일체에 대해서는 아예 태무심함으로써* 본(本)을 보이는 분이었다. 한 분밖에 없는 출가한 누님도 친정에 들르면 “요즘 처녀치고 올케가 심덕(心德)이 무던한 애”라고 형수를 칭찬하곤 했는데, 막상 그런 칭찬에 민망해야 할 쪽은 우리 박씨네 핏줄일 것이었다. 그러나 가족관계에서 민망한 구석이 자주 생기면 분란이 일게 마련이고 시끄러운 법이다. 이 민망스러움의 자연스런 지양은 한숨과 함께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불교 신자가 아니면서도 “관세음보살”을 찾던 어머니의 시름이 사라지고, 일요일 오전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교회를 찾는 고부간의 의좋음과 그렇게 만든 형수의 역량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시아버지 없는 시집살이를 대가족과 함께 불평 없이 살아내는 형수의 푹한 심성을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이라고 단정해버린다면, 그것은 그녀 자신의 인격을 모독하는 것이 될지 모른다. 물론 신앙이 인격을 도야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겠지만, 그것이 생활을 영위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의 구석구석까지를 완전히 지배하는 신앙생활이야말로 기독교 신자의 간절한 희망이겠으나, 실제로 종교가 삶을 옹글게 장악하기는 어렵다. 아무려나 형수의 신앙심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언젠가부터 그녀는 집으로 찾아오는 친척들에게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꼬박꼬박 성경책을 선물로 건네주곤 했다. 언제라도 지퍼가 달린 가죽포장 속에 신구약성서와 찬송가가 합본된 새것을 여벌로 준비해두는 배려는 내가 보기에도 아름다운 셈속이었다. 이 배려를 배냇신자라는 근본이나 자신의 신앙의 확고함을 과시하려는 의도라기보다는 좋은 말씀을 나누어 새기면서 내세의 존재를 믿게 하려는 전도 욕구의 자연적인 발현이라고 요약해버린다면 그녀의 인생관은 자로 잴 수 있을 만큼 곧은 길이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뿐만이 아니다.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모교의 교양학부 시간강사 노릇도 하는 파리한 영어선생인 형의 박봉을 개의치 않고 형수는 어김없이 십일조 헌금을 흔쾌히 바치는 눈치였는데, 여벌 성경을 비치해두는 비용이 그 헌금액 속에 포함되어 있는지 어떤지는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나 관심사 중의 하나이다.
언젠가 나는 형수가 내 아내 될 여자에게 무슨 다짐을 하듯 내놓는 말을 엇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내가 미혼 때였으므로 그렇게 지나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까워서 십일조 헌금을 안 하면 그 주일에는 꼭 그만큼 돈 쓸 일이 생기데. 이상해. 애가 아파 병원에 가야 할 일이 생기든가, 집안에 우환이 생기든가…….”
학장이 신부(神父)인 여자대학의 선후배 사이인 아내와 형수는 종교를 독실하게 믿는 자세뿐만 아니라 둘 다 만혼을 하게 된 처지도 비슷했고, 어떤 분위기에 쉽게 동화되지 못하는 폭 좁은 성격도 닮았다.
그러나 형수의 좀 지나친 신앙심 때문에 내가 몹시 기분이 상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재작년 추석 제사 때였다. 기제사*가 아니므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차례를 함께 모시는 셈이었다. 기제사라면 우리 집안에는 음력으로 동짓달에 있는 할아버지 제사 하나밖에 없다. 사변 통에 행불자가 된 아버지는 아직도 호적에 번연히 눈을 뜨고 있으므로 지방 따위를 붙일 날짜는 차치해두고라도* 명절 때 우리들 형제가 변변히 큰절을 올릴 형편도 아니다. 할아버지께 올리는 큰절이 끝나면 할머니는 밥 한 그릇을 따로 받아 대청 끝에 제상을 엇비스듬히 놓아두고 수저를 옮겨놓곤 했는데, 그것이 아마도 당신 아들의 명복을 비는 격식인 것 같았다. 아무튼 그날 제상이 놓이자 형수는 기존의 제례 행위를 약식화하자는 다짐을 할머니 이하 형에게까지 받아냈는지 성경을 가족들 앞앞에 한 권씩 놓아두고 있었다. 연신 입에서는 응얼웅얼하는 소리를 읊조리는 할머니가 제기의 자리를 바꿔놓는 동작을 끝내자 손을 깍지 낀 형수가 기도를 하기 시작했고, 그 기도소리는 할머니의 응얼거리는 음성에 비해 너무나 당당하고 똑똑한 음향이었다. 뒤이어 찬송가도 두 곡씩이나 형수가 낭랑하게 선창을 했으므로 형 이하 우리 형제는 큰절을 못하고 말았다. 막상 그런 간단한 제례 행위를 당하고 보니 한 여자의 힘이 미치는 넓은 생활반경에 대해 나는 속으로 감탄해 마지않았다. 정확히 말한다면 나의 입장은 유교적인 관념에 얽매여 있지만 그것을 고수한다기 보다는 방기하는 편이었고, 그렇다고 수다스러운 기독교인들의 내왕이나 기도 행위를 수수방관하고 있는 편도 아니었다. 그러나 어쩌랴. 제상 앞을 마냥 무르춤하니 지키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제사를 마칠 때 내성적이긴 하지만 성정이 가파른 일면도 있는 동생의 얼굴이 더욱 차가워 보였다. 병자의 얼굴을 차다고 할 때는 창백하다는 의미보다는 처연한 쪽이라는 게 더 적확한 표현이고, 내가 동생의 얼굴에서 냉소가 흐르고 있다고 느꼈을 때는 병자의 얼굴을 보는 나나 동생은 잠시 서로 당황한 표정을 다른 가족들에게 내비쳤다는 뜻이 된다.
형수는 나와 동생의 기분을 읽었던지 어색한 말을 던졌다.
“삼촌들은 절하이소.”
조상을 승배는 하되 내 앞에서 우상에게 경배하지 말라는 말씀이 성경의 어느 귀퉁이에 적혀 있는지 알려면 손쉬운 일이겠으나, ‘내 앞’이란 직설적 논리가 벌써 절대성을 강요하는 만큼 그것은 곤혹스러운 억압이었다. 어쨌든 그 교리는 종교의 절대성을 위한 전제인데, 그런 도그마*를 준수하기가 전통을 깨뜨리는 것보다는 항상 어렵지만 그것이 흔히 종교에 깊숙이 침잠해 있는 신자들의 어떤 무지막지한 과시 벽(癖)을 난공불락으로 만드는 모태일 것이었다. 그러니까 비신자인 나와 동생에게는 “절하이소”란 말을 어색하게 흘렸을 것이고, 기독교는 인정하나 교회라는 조직과 그 제도만큼은 부정하고 있는 형에게는 ‘귀신에게 경배 생략’이란 제례를 설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제상을 치우고 우리 가족이 늦은 아침밥을 먹고 나서 동생과 나는 함께 쓰는 문간방으로 건너왔다. 병 때문에 금연을 강요당하고 있는 동생이 책상 위에 있는 내 담배를 말없이 꺼내 피우며 말했다.
“작은형, 역시 우리 풍습으로는 상 앞에서 너부죽이 절을 해야 제사 지낸 기분이 들어.”
말끝을 흐리면서 텅 빈 것 같은 웃음을 띠는 동생의 표정에서 나는 시한부 삶을 살고 있는, 그래서 생에 대한 애착을 향처럼 바싹 마른 자신의 몸뚱어리를 불쏘시개로 삼아 선선히 태우고 있는 동생의 여유를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건강하기 때문에 물론 그런 여유가 없었다. 동생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다시 말을 덧붙였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은 종교인이 할 소리인 것 같애. 난 종교를 안 가졌으니까 죽어도 그런 담백한 말은 할 수 없지만.”
그즈음 동생은 황달의 재발 기미를 지나 복수(腹水)가 차오르기 시작하는 간경변* 증세를 드러내어 본격적인 투병 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그런 중병을 앓고 있는 환자의 막힘없는 사고가 내게는 오히려 정상으로 받아들여졌고, 섬뜩한 죽음의 조짐을 쉬이 떨쳐버릴 수 없었다.
우두커니 서 있는 형수에게서 나는 밥과 탕수를 받아 할머니에게 건넸다. 일 년 전에 요절한 막내 시동생에 대한 추도가 시할머니에게는 어떤 식의 정성으로 구현될까를 따지듯이 바라보는 형수와 그 옆에 서 있는 아내의 눈초리가 평소보다 더 찬찬해 보였다.
탕수 국물을 수저로 조금 떠서 맛본 할머니가 말했다.
“기름이 너무 뜬다.”
평소에는 기력 탓도 있긴 하지만 거의 말이 없는 분이 유독 제삿날이면 다변(多辯)이 되시는 할머니의 푸념을 중간에서 자르는 사람은 어머니였다.
“욱이야 이녁 아들처럼 음식이야 가맀나.”
가는귀가 어두워서인지 할머니는 어머니의 타박을 못 들은 모양이었다. 한숨을 길게 내쉰 할머니가 수저를 밥그릇 가운데에다 꽂았다. 그리고 나물 위에 얹힌 젓가락을 구운 조기 위에 놓으려다가 사솔산적* 위에 올려놓았다. 얄따란 찬송가책만 한 산적 위에는 참깨가 너무 많이 박혀 있었다.
어머니가 다짐하듯 단호히 말했다.
“대문은 열렸는가 내다보고 너거도 앉거라.”
어머니는 형수와 내가 열린 방문 가에 서 있는 것을 얼핏 바라보았고, 뒤이어 대청 끝에서 얼굴을 내민 아내를 보자 안심이 되는 듯 시선을 거두었다. 아내의 대청 밟는 발소리가 나고, 이내 “대문은 열렸어 예”란 대답이 들려 왔다.
어머니가 더 큰 소리로 말했다.
“청문(廳門)도 활짝 열어놔라, 귀신이 들어오고로.”
그 귀신이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동생이길 바랐다. 설혹 오늘이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제삿날일지라도 생면부지*의 내 조상보다는 망자(亡者)에 대한 애정의 비중을 따져서도 동생 쪽이 훨씬 큰 편이기 때문이었다. 앞으로는 명절제사 때도 나는 당연히 동생의 영혼을 기리는 데 집착할 것 같다는 생각이 얼핏 떠올랐다.
“애들은 자나?”
어머니가 두 조카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형수 대신에 내가 얼른 대답했다.
“예, 잠더.”
제상 앞에 펼쳐놓은 발 고운 돗자리 한 자락을 깔고 앉아 있는 형이 형수를 힐끔 쳐다보고 말했다.
“옷이나 안 갈아입고…….”
그 말에 나는 형수 옆에 앉아 있는 아내를 훑어보았다. 한복 대신에 구멍이 일정하게 뚫린 분홍색 수(繡) 원피스를 입은 아내의 모습이 내 잘못인 것 같았지만 새 며느리는 자신의 복장쯤이야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할머니의 느리기만 한 제례 행위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할머니가 밥그릇 옆에 놓인 냉수에다 밥을 두 숟가락 퍼 담으며 또 엉뚱한 말을 중얼거렸다.
“이녁 막내이 손자 건사나 잘해주소이.”
냉수 대접 안에 뜨는 밥알을 잠시 바라보다 한숨을 푹 내쉬며 할머니가 덧붙였다.
“이녀러 자석은 죽었는 동 살았는 동, 서방 복 없는 년이 자식 복이나 있겄나마는.”
할머니의 말에 나는 공연히 나 자신이 불효자식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옆에 앉은 어머니의 얼굴을 외면하니 아내가 보였다. 고개를 곧추세운 당당한 아내의 시선은 무슨 시위라도 하는 듯 여겨졌고, 혼전에 몇 번 본 내 동생에 대한 추모보다 이미 형수에게 들어 알고 있을 터인 한 가정의 제례 풍경을 이제야 육안으로 확인하는 것 같은 도전적인 자세였다. 그것은 차라리 전통의 파기를 희구하는* 눈씨로 비쳐 나는 이 초라한 제사를 엎어버리고 싶었고, 서방이 아내보다 먼저 죽는다는 우리 집안의 내림과 그 기우(杞憂)가 새삼 떠올라 양미간을 모았다. 그러나 이제 나도 살림을 이룬 만큼 이내 얼굴을 폈다. 그리고 아내가 내 동생의 명복을 빌어주지는 못할망정 공손히 주목이라도 해주었으면 하고 속으로 빌었다.
형이 향을 촛불에 붙여 향 촉대에 꽂는 것을 보고 할머니가 말했다.
“귀신이 향냄새를 맡아야 온다. 많이 태와라.”
향이 꽃 수술처럼 붉게 타고 있었고, 향을 사른 뽀얀 토막재들이 떨어진 꽃잎처럼 향로 속의 모랫바닥 위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어머니가 불쑥 말했다.
“옛말에 부모는 열 자식 거느려도 자식은 하나 부모도 못 모신다캤다.”
“지방도 못 붙이고 절도 없으니 제사가 이상하긴 이상하네.” 하고 형이 말했다.
코를 훌쩍 들이마시며 어머니가 받았다.
“그래서 몽달귀신이라 안 카나, 일찍 죽은 놈만 설븐 기다.”
지난여름이 막 시작될 무렵에 동생은 예상했던 대로 생을 마감했다. 예상은 했었지만 역시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동생이 복수가 너무 차올라 남방셔츠의 자락을 못 여미는 배를 앞세우고 종합병원으로 갔을 때, 우리 가족의 무심함을 비난하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내두르는 의사들의 싸늘한 시선을 형과 나는 멀뚱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미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환자가 신음처럼 내뱉는 소리는 의사 전달이랄 수도 없었고, 이틀간을 병원에서 나고 시신이나 다름없는 동생의 몸을 집으로 옮겨놓자 병자는 말문마저 닫고 눈물만 하염없이 흘려댔다. 간경변이란 진단이 내려지기 전에 눈동자는 물론이고 머리 밑까지 노랗게 변하는 황달이란 병을 앓았고, 그전에 얼굴이 검게 타면서 자주 코피를 흘리는 병약한 체질을 탓함이 없이 동생은 시험준비에 부대끼며 살았다. 모세관이 약해서 코로 열을 토하는 것쯤으로 동생의 코피를 자가 진단해버리는 우리 식구들의 가난에 찌든 정신 상태를 외부에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쨌든 이삼 년에 걸친 투병과 동생의 집념은 서로 미묘한 긴장 속에서 환자의 일상생활을 간신히 지탱해주고 있었는데, 법대 합격과 동시에 입대라는 보상은 한쪽의 팽팽한 끈이 탁 끊기면서 죽음이라는 몸의 회신으로 나타났다. 아마도 군 복무까지 견뎌내려는 젊음의 씩씩한 인내력이 병의 심화를 더욱 부채질하여 동생은 국군통합병원에서 입대 육 개월 만에 의병제대*했다. 또한 제대 후 복학을 서두르며 무절제한 생활을 한 것이 결정적인 잘못이었고, 오로지 하향(下鄕)을 위해 버틴 것 같은 전(前) 학기 동안의 객지 생활은 자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동생은 교양학부 과정조차 못 마친 것을 늘 서운해하며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그해 여름을 두문불출*로 배겨내는 데 꽤나 애를 먹는 눈치였고, 담배도 과감히 끊고 있었다. 오로지 건강한 신체로 매사를 때우며 살아가는 청춘을 쉽게 넘겨버리지 못하고 동생은 하향 일 년을 채우지도 못한 채 죽었다.
자전거를 타고 온 중머리 노인이 종이 등에 촛불을 밝히고 긴 여름 해가 넘어가는 어둑한 골목길을 빠져나갈 때, 나는 박복한* 사변둥이가 겪은 삶의 가난을 저주하며 울었다. 못질을 할 때 널이 울리는 소리가 투명하게 초여름 하늘 위로 사라져서, 나는 그 소리가 동생의 영혼이 비상하는 것으로 들었다. 아가리가 벌어지자마자 순식간에 동생의 몸이 담긴 널빤지 관은 아무 곳에도 보이지 않았고, 범선의 키 같은 쇠붙이가 달린 네모반듯한 쇠문이 줄느런히*, 도열해 있는, 번들거리는 납빛 벽면만이 내 시야를 가로막았다. 대리석 바닥이 끈적거리는 화장터의 긴 복도를 통곡하며 걸어가는 형을 나는 애써 부축했다. 신문지로 싼 하얀 봉지들이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배밭을 장의차는 덜컹대며 굴러갔다. 금호강의 물빛이 누렇게 타오르던 동생의 안색을 닮아 있었다. 형과 나는 강물이 가슴에 차오를 때까지 걸어가서 아직도 열기가 식지 않은 뜨거운 동생의 뼛가루를 뿌렸다. 강물에 실려 가는 뼛가루와 같이 내 사지(四肢)는 갈가리 흩뿌려지는 듯했다.
해가 바뀌고 나는 남이나 다름없는 아내를 배필로 맞아 한 세대를 이룬 것 외에는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는데 벌써 일 년이 지났고, 동생이 남긴 여러 가지 따뜻한 흔적은 우리 식구에게까지도 엷게 퇴색해가고 있었다. 살려고 발버둥치던 동생의 패기조차도 드러낼 수 없는 나는 이제 고운 분말 같던 동생의 뼛가루의 열기보다 더 식어빠진 월급쟁이가 되어 제상 앞에서나마 사자(死者) 의 혼을 달래보려는 미물이 되고 말았다.
제사의 끝은 항상 마무리가 빨랐다. 할머니가 수저를 제상 위에 내려놓자 형 이 병풍을 걷었고, 어머니가 훌쩍임을 그쳤다. 형수가 제기들을 모으는 일방 아내는 그것들을 다반에 담아 부엌으로 날랐다. 늘 그렇듯이 어머니가 일 갈피를 서둘러 챙겼다.
“제사상은 치우고 우리 산 사람 묵을 상이나 어서 차려라. 빨리 묵고 일찍 자자.”
“제삿밥은 내가 묵을란다. 일찍 죽고로”라고 할머니가 말했다.
“누나는 이럴 때 한번 와보믄 병나나?”
“다 저거 살기가 바쁘믄 동생 하나 죽은 것쯤은 생각도 안 난다.”
어머니가 말을 받았고, 수저도 들지 않고 말을 이었으므로 나는 아직 제사가 끝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된다. 다섯 시다, 추도예배가.”
할머니는 그런 말에는 아예 귀를 막고 산다는 듯이 제삿밥을 달게 먹고 있었다. 눈물이 글썽이는 눈동자가 탕수에 한 번, 나물에 한 번, 수저에 한 번 하는 식으로 침착하게 가늠하면서, 이가 빠져 인중이 더욱 길어 보이는 할머니의 우물거림에는 조금 전의 실성한 중얼거림이 과연 어디에서 나왔을까 하고 의심할 정도였고, 경인(庚寅)생이라고는 믿지 못할 정도로 정정해 보였다.
어머니가 탕수로 입을 적시고 수저를 놓자 어느새 져녁밥도 끝난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내는 이미 부엌에 가고 없었고, 형수도 뒤미처 일어서자 쪽문으로 어머니가 식기들을 건네주었다.
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너거들은 욱이 방에서 자거라.”
동생이 죽고 난 뒤부터 나와 함께 기거하던 문간방을 어머니는 ‘욱이 방’으로 호칭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동생의 시신은 염포*로 묶여졌고, 불과 삼 개월 남짓 전에 아내와 나는 신혼여행 후의 첫 밤을 거기서 밝혔었다. 전세로 마련한 아홉 평짜리 서민아파트로 제금*을 나던 날 나는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는 것은 뒷전이었고, 문간방에서 묻어 나오는 동생의 체취가 내 목덜미를 잡아끄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골목을 빠져나가면서도 철망 너머의 ‘욱이 방’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어머니가 청* 끝에다 요와 홑이불을 내다놓고 돌아와서 나에게 물었다.
“아파트 문은 잘 잠구고 왔나?”
“낮에 전화로 친정 엄마가 왔다 캅디더.”
“처갓집 식구들 너무 자주 들락거리게 하지 마라. 내가 따로 일러두겄다마는.”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어머니는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너거 처남댁은 당최 너무 수선스러워 탈이드마는 니 처는 늘 뚱하게 부어 있어 탈이다. 성미도 다 천차만별이기는 하지마는……”
할머니가 말을 받았다.
“입에 맞는 떡이 쉽나? 인력으로 안 되는 기 죽은 거하고 사람 성미 아이가.”
할머니의 말에 이제 고부간의 의사가 일치되었는지 어머니는 말이 없었고, 아내가 타박을 맞는 것이 흡사 내 탓인 것 같아 내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다. 과묵하긴 하지만 나이 탓도 있어 매사를 눈치로 다독거려나가는 아내의 성격에 대해서는 오히려 내가 욕심을 부리려는 참이었는데, 어머니에게 기선을 제압당한 꼴이 된 내 처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어머니의 팔자가 거세어 당신의 아들과 생이별 수(數)를 끼고 있다고 믿는 할머니 밑에서 평생 시집살이를 하는 어머니는 당신의 며느리들에게는 ‘시집 산다’는 소리가 안 나도록 신경을 쓰는 눈치인데도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는 정말 무슨 살이 끼었는지도 몰랐다.
형이 시종 말이 없다가 조카들이 자고 있는 건넌방 속으로 슬그머니 들어갔다.
나는 제사 때문만은 아닌 주눅이 들어 풀이 죽은 상태로 문간방으로 돌아왔다. 요가 벌써 깔려져 있었고, 요 위에 동그마니 개어져 있는 홑이불을 나는 발로 걷어찼다. 뒤이어 바지와 와이셔츠를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 요 위에 누었다. 대문과 붙은 담 쪽으로 난 창문에 칠흑 같은 밤하늘이 내려와 있는 걸 보자 왠지 몹쓸 곤혹감이 엄습해 와서 얼른 돌아눕자 동생이 쓰던 앉은뱅이책상이 내 시선을 잡아챘고, 나는 안절부절못하면서 나의 죽음도 조만간 닥칠 것이란 불길한 상념을 반추했다.* 몸보다 마음이 더 곤한데도 잠은 까맣게 달아났다. 부엌에서 그릇 부딪치는 소리도 잠잠해지고 개숫물 쏟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큰방에서는 할머니와 어머니가 벌써 잠이 들었는지 기척도 없었다. 부엌문 닫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건넌방의 미닫이문을 여는 소리도 들렸다. 형수가 조카의 잠자리를 보살피는 소리도 들려오는데 벽 하나 저쪽의 형은 숨죽인 죄인처럼 인기척도 없었다.
불을 끄기 전에 원피스의 등을 가르며 지퍼를 내리는 아내의 뒷모습에는 이런 번거로운 제사가 귀찮다는 투가 완연히 비쳤다. 잠시 보이는 아내의 흰 속내의에 감춰진 볼록한 유방의 융기가 동생의 굳어버린 간을 떠올리라고 채근했다. 불을 끄고 살며시 홑이불로 몸을 감싸며 내 옆에 눕는 아내를 나는 와락 끌어안고 악력(握力)을 다해 유방을 한 손에 거머쥐었다. 아내는 나의 미친 듯한 손아귀를 아기 다루듯 가만히 자신의 배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둔부를 내 허벅지에 닿으며 돌아눕는 아내의 감촉에서 나는 또 복수가 차오른 동생의 복부를 떠올렸다. 동생의 검게 타오르던 얼굴이 막무가내로 덮쳐왔고, 나는 신음소리를 내며 가슴에 머리를 처박았다. 어설픈 잠이 눈꺼풀을 덮기 시작했다.
자갈을 밟으며 바장이는 어머니의 채근이 열어놓은 미닫이문 틈으로 들려왔다.
“빨리 갔다 오자. 와 이래 꾸물대노? 여 밤잠 깊이 잔 사람 없다.”
형과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촉촉한 습기가 온몸을 감싸는 듯한 대기 속을 어머니가 앞장서고 형수와 아내가 뒤따랐다. 좁장한 골목으로 꺾어들자 형이 담배를 빼물고 나서 라이터를 몇 번이나 켜댔고, 나는 가래를 끌어 올려 어둠 속에다 힘껏 뱉었다. 축대 공사를 하여 주택단지를 반듯반듯하게 만들어놓은 빈 공터가 여기저기 널려 있는 언덕길을 형과 나는 숨을 몰아쉬며 올라갔다. 저만치 우뚝 올라앉아 있는 교회의 첨탑 위 십자가에 붉은 등이 촘촘히 불을 밝히고 있었고, 돔 같은 두 개의 검은 교회 입구가 내게는 퀭하게 뚫린 동생의 동공 같아 보였다. 어머니의 양 옆에서 가지런히 걸어가는 두 며느리가 성경이 든 백을 바꿔 쥐어가며 시어머니의 한쪽 팔을 번갈아 붙잡고 있었다.
형이 별 관심도 없는데 말없이 걸으려니 제수를 본 형 제간에 의(誼)라도 갑자기 상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지 건성으로 내게 물었다.
“바뿌제? 신문에 보니 섬유류가 워낙 호황이라대.”
“잔업을 해도 수요를 못 대는 모양임더. 서울에서 부장이 본사로 자꾸 올라오라는데…….”
“가지, 뭐, 어무이하고 너거 형수는 요새 교회도 꼬박꼬박 같이 다니고 의가 좋다. ……할무이도 아직은 강단이 있어 보이니 집 걱정일랑 접어두고 서울살림을 한번 벌려보지 그러나.”
“거기 간다고 월급 많이 주는 거 아니고…… 욱이나 살아서 학교 댕기면 밥해주고 뒷바라지해주는 명분이라도 설 낀데…….”
교회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으므로 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래 됐으믄 얼마나 좋겠노. 지금쯤 고시 공불 해쌓을 낀데.”
새벽 예배에 나온 신자들이 군데군데 앉아 있었고, 기다란 나무의자가 나란히 놓여져 만들어놓은 통로를 우리 가족은 어머니를 선두로 해서 일렬로 걸어갔다. 높낮이를 달리하여 키가 중심부로 갈수록 커지도록 만들어놓은 촛불 네 개씩이 성단(聖壇)의 좌우에 켜져 있었다. 간밤에 제상 앞에서 들었던 할머니의 웅얼거림 같은 소리가 온 사방에서 들려왔다. 할머니의 그것과는 “아버지시여―” “주여―”라는 소리가 똑똑히 영탄조로 들리는 것이 달랐다. 본당 옆에 붙어 있는 목사 댁으로 통하는 문에서 하얀 고무신을 신은 키 작은 목사가 성경을 옆구리에 끼고 들어서자 어머니가 엉거줌하니 일어서며 목례했다. 목사도 제일 앞줄에 다섯 명의 우리 가족이 앉아 있는 한가운데에서 성경을 두 손으로 모두어* 잡고 고개를 깊이, 오래도록 숙였다 들고 천천히 계단 세 개를 밟고 올라갔다.
한가운데 앉은 어머니가 옷소매에서 손수건을 꺼냈고, 형수가 옆에서 성경을 펼쳤다.
목사의 낭랑한 목소리가 본당의 벽을 울렸다.
“오늘 새벽 예배는 우리 교회 여성신도회 총무이신 서 집사의 막내시동생 일주기를 맞아 추도예배를 올리는 자리가 되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이 자리를 마련해주신 데 감사하며 고인 가족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내리시길 우리 다 같이 기도합시다. 먼저 성경 말씀, 「요한복음」 삼 장 봉독하겠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으니…….”
아내가 옆에서 「요한복음」 삼 장을 펼치며 비신자인 내 무릎 쪽으로 성경책을 바싹 밀었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으로 첫 구절을 가리켰다. 아내의 손가락짓에 나는 엉뚱한 생각을 떠 올리기 시작했고, 목사의 봉독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독교 신자의 확실한 믿음을 드러내는 증거는 교회 출석의 빈번함과 장례 행위의 간소함에 두고 있는지 모른다. 주일예배를 어김없이 찾는 것이 신앙의 척도로 그릇 알고 있는 신자들에게 그것이 생활을 일정하게 방해한다고 우길 필요는 없다. 성경만은 꼭 들고 교우들의 집을 다달이 심방하는* 신심 나누기 행위를 막을 명분도 사실상은 서지 않는다. 그런 번거로운 걸음품을 말리면 이쪽이 어거지로 쇄국을 고집하던 대원군으로 몰릴 소지가 있다. 장례 절차가 유족에게 부활을 믿게 하는 데 모여야 한다고 믿는 신자들의 수선스러움과, 스스
로는 말할 것도 없고 주위 사람들에게까지도 내세에 대한 신념을 더욱 철저히 심으려는 말의 수다와, 터무니없이 긴 4절까지의 찬송가를 두 번 세 번씩 합창함으로써 상가를 어지럽혀야만 망자의 영혼이 하나님의 나라로 간다고 믿는 미신 따위를 우상에게 경배를 허락지 않는 기독교인들에게 자기모순이라고 설명하려 들면 이쪽이 자가당착*에 빠진다. 똥구덩이에 굴러도 그쪽보다야 좋다는 이승을 떠난 사자의 시신을 모시고 전도하는 행위를 나는 경멸하면서도 참았다. 동생의 장례식에서 나는 많이 울었는데, 그의 박복한 생이 서러워서 이기도 하지만 우리 가족끼리 오롯이 나누려는 슬픔을 잠시도 용납지 않으려는 듯이 설쳐대는 신자들의 순방 걸음에 진력*이 나서 종내에는 울분이 들끓었기 때문이었다. 요단강 건너가서 사자를 만난들 어쩔 것이며, 그의 혼의 부활을 누가 보장해줄 것인가.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하나님이 병자와 약자에게는 너무나 냉담한 것 같았다. 사실 그랬지 않은가?
목사가 성경책을 덮고 기도를 시작하자 어머니의 흐느낌 소리가 들렸다. 자연히 우리 가족은 목사의 푹한 위로의 말씀을 어머니의 울음 때문에 귀 밖으로 흘려듣게 되었다. 간간이 들리는 “똑똑한 삼촌” “영원히 우리 하나님 품에 안긴” 등의 말이 나의 귓전을 울렸다. 교우들은 하나같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어둠에 싸인 본당 구석구석이 너무 고요하여 괴기마저 서리는 것 같아 나는 섬뜩했다. 목사의 기도가 끝나자 찬송가 합창이 뒤를 이었고, 오늘 밤 다시 추도예배를 올리니 이 시간에 참석지 못한 교우들에게 알려달라는 간곡한 당부를 끝으로 목사가 단에서 내려왔다.
목사가 우리 가족 앞으로 다가오자 이번에는 형이 먼저 일어섰고, 목사는 “잊으세요”라고 말하며 형에게 악수를 청했다. 뒤이어 나도 목사의 힘없는 손을 잡았다. 교우들이 하나 둘 교회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목사를 선두로 통로를 빠져나갔다. 목사가 마지막으로 나에게 “분가한 소식 들었어도 가보지 못해 죄송합니다. 인근 교회에 나가도록 하십시오”라고 말해서 나는 진땀을 흘렸다. 나는 목사에게 약간 웃어 보이고 계단에 발을 내려놓았다. 도저히 응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고, 잠을 설친 탓인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칠월을 사흘 앞둔 초하(初夏)의 여명이 서늘한 바람과 함께 언덕길을 벗겨가고 있었다. 흩어져서 내려가는 교우들의 걸음걸이가 언덕길이라 빨랐다. 형과 내가 어머니 앞에 섰고, 형수와 아내가 어머니 뒤를 따랐다.
어머니가 등 뒤에서 말했다.
“몸들이 곤할 끼다. 빨리 아침 해 묵고 출근할 사람 출근하고 너거들은 목욕 가라. 어제 보니 덕산탕 물이 좋더라. 갱물이 아니고 수돗물인 갑더라.”
어머니의 말에 나는 걸음을 멈추며 화장한 동생의 뼈를 금호강에 수장할* 때 내 가슴까지 차오르던 싯누런 강물을 떠올렸다. 형도 동생의 영혼이 실려 가던 강물을 떠올렸는지 걸음을 늦췄다. 싸늘한 새벽 기운에도 불구하고 내 등골에서 식은땀이 축축하게 배어 나왔다.
집에 돌아오니 할머니가 청 끝에 오두마니 쪼그리고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우리 새벽예배객 일행을 맞았다. 할머니가 노환으로 정말 올여름을 못 넘기고 돌아가시면 제사상 앞을 앉은걸음으로 왔다 갔다 하며 응얼거리던 그이의 음성을 영영 들을 수 없어 우리 집안의 제례 풍습이 더욱 쓸쓸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우리네 생활에는 늙은이가 당연히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나는 동생의 방에서 오래도록 되씹어보았다.
『세대』 181호(1978. 8); 『방황하는 내국인』 (솔 1996)
* 2006년 6월 작가가 부분 수정함.
김원우(金源祐)
1947년 경남 진영에서 태어나 경북대 영문과와 서강대 국문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7년 『한국문학」 에 중편소설 「임지(任地)」 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뒤 자기 시대의 풍속과 세태, 중산층의 허구적인 삶과 의식 등을 깊이 있게 탐구한 중편소설을 즐겨 써왔다.
「무기질 청년」 은 무기력한 개인의 삶과 의식을 통해 삶의 불투명성을 보여준 그의 대표적인 중편소설이다. 소설집 『인생 공부』 『세 자매 이야기』 『안팎에서 길들이기』 『객수산록』, 장편소설 『짐승의 시간』 『모노가미의 새 얼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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