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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고려의 시련과 자주성의 회복
[1] 자주성의 시련
1) 몽고의 일본 원정에 고려군이 동원됨 -> 그러나 "태풍"으로 인해 모두 실패
2) 영토의 일부를 빼앗김
①철령 이북 땅 관할 -> 쌍성 총관부 설치 (화주)
②자비령 이북 -> 동녕부 설치(서경)
③ 제주도-> 탐라 총관부 설치, 목마장 경영
☞언제 다시 찾나? 동녕부와 탐라 총관부는 충렬왕때 "말로 해서" 철수시켰으나, 쌍성총관부는 공민왕때 "무력으로" 회복함.
3)관제 개편
중서문하성과 상서성 -> 첨의부
이,호,예,병,형,공 의 6부-> 4사
*뿐만 아니라, 왕의 이름에 모두 충(忠:원에 충성하라는 뜻)자를 붙이고, 원의 공주와 강제로 결혼하게 했고, 태자를 원에 인질로 잡아 두었으며, 폐하를 '전하'로, 태자를 '세자'로 부르는 호칭의 격을 낮춤.
4)정동행성 존속 : 몽고(원)과의 연락기구로 씀
*정동행성이란? 동쪽에 있는 일본을 정복하기 위한 행성(이동 행정구역 관할 기관)
5)감찰기관인 순마소를 둠
6)금,은,베를 비롯한 인삼, 약재, 매 등의 특산물을 거두어 감.-> 농민의 고통
7)문화와 풍속의 교류도 빈번 : 고려에서 몽고어 사용, 몽고식 의복과 머리 유행, 몽고식 이름 유행.
BUT!!!! 주권 국가로서의 위상은 굳게 지켜 나감 *^^*
[2] 공민왕의 반원 개혁 정치
1)배경: 14C후반 중국의 정세변화-원이 쇠약해지고, 명이 새로이 일어나고 있음 (원․명 교체기)
2)개혁의 기본 방향: 원에 반대하는 자주적인 정책 (반원 자주 정책)
3)개혁 정치의 내용
① 기철 등의 친원 세력 숙청
② 원이 설치했던 정동행성의 "이문소" 폐지
*이문소란? 원에 반대하는 정치세력을 잡아 감시하던 기관
③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철폐하여 철령 이북의 땅 회복 -> 130 p 지도 꼭 볼것!!!!
④ 인당(<-사람이름)으로 하여금 요동 지방을 공략하게 함
⑤ 원에 의해 격하되었던 관제를 복구
⑥ 몽고풍(몽고식 이름, 몽고식 머리 등)을 없앰
⑦ 대내적 -> 권문세족(친원세력) 억압 -> 정방 폐지
*'정방'이란? 무신정권 시대에 최우가 설치한 기관으로,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기관. 고려 후기에는 왕권을 견제하고 개혁세력인 신진 사대부의 등장을 억제하는 역할을 함.
⑧ '신돈'을 기용하여 "전민변정도감"의 판사로 삼아, 권문 세족이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본래 소유주에게 돌려주고, 양민으로 해방시킴
* 전민변정도감 이란? 전(田:땅)의 주인과 민(民:백성)의 신분을 다시 조사하여 분별하는 기관
4) 개혁정치의 한계
① 원의 압력이 여전히 남아 있음
② 원을 배경으로 한 권문세족들이 왕권을 견제하여 공민왕의 정책 추진을 방해함
③ 신진 사대부 계층은 아직 충분히 세력을 키우지 못하여 권문 세족의 상대가 안됨
④ 신돈이 제거되고 공민왕까지 시해됨
5) 공민왕의 개혁정치의 의의 -> 신진 사대부층의 대거 진출로 조선왕조 건국의 기반이 마련됨.
3. 중세의 사회와 경제
(1) 중세의 사회
[1] 사회 구조의 개편
-고대 사회와 달라진 점: 고대 진골 중심의 혈연중심 사회에서 벗어나, 호족과 6두품 유교 지식인이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하여 보다 개방적인 사회로 발전 but 여전히 신분제
사회
-고려 시대 사회 신분
1) 귀족: 왕족+문무 양반 => 그 중에서도 문벌이 좋은 5품 이상의 고위 관리 중심, 문반이 우대되었으므로, 문반 중심.
☞ '귀족'이란? 귀족은 법률에 규정된 공식적인 신분 명칭은 아니다. 귀족이라는 단어는, "자신의 실력에 의해 성취한 신분이 아닌, 혈통으로 인해 각종 정치적, 사회경제적 특권을 누리를 계층"을 뜻하는 보통명사이다. 다시 말해, 지금의 현대 사회에도, '귀족'은 있을 수 있다. 자신의 노력이나 실력에 상관없이 단지 조상을 잘 만나서 각종 특권을 누린다면 그것은 '귀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 시대의 '문벌귀족'은 높은 관직에 진출한 조상을 두고, 그들끼리의 폐쇄적인 결혼을 통해 하나의 커다란 가문, 즉 문벌을 형성한 사람들이 각종 사회, 경제적 특권을 독점하고 있었으므로, "문벌을 배경으로 한 귀족"이라는 의미에서 "문벌귀족"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2) 중류층 : 대체로 하급관리
① 서리-중앙 관청의 실무(하급) 관리
② 남반-궁중의 하급 관리
③ 향리-지방의 하급 관리
④ 하급 장교
3) 양인 : 농민, 상인, 수공업자
① 농민 : "백정" 이라고 불림, 일반 양인의 대다수(주류)를 구성
☞ 백정이란? 조선시대에는 흔히 "소 잡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하지만 고려시대의 백정은 일반 양인(평민) 농민을 뜻하는 말이다. '정'이라 하면, 16세이상의 남자를 가리키는 말로, 국가의 입장에서는 노동력을 가진, 그래서 농사를 지어 세금을 납부할 능력이 있는 기본적인 수취(조세 징수)의 단위이다. 백(白)은 '하얗다, 없다'는 뜻이다. 결국, 백정은 국가에서 부여한 직분과 역할(직역)이 없는 일반 농민을 가리키는 말이 되는 것이다.
② 상인, 수공업자: 농민보다 천시. 농민보다 소수.
☞왜 상인과 수공업자는 천대를 받았나? 유교적인 가치관에서는 근검절약이 미덕이고, 소비는 곧 사치와 낭비로 직결되어, 죄악시되었다. 더욱이 "이윤을 남기는 행위" 즉, 영리행위는 힘들여 농사일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부당한 이익을 챙기려는 '악덕'으로 규정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는 표면적인 것이고, 국가에서 상업을 통제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상업에 의한 소득은, 국가의 입장에서 정확한 파악이 불가능하고, 따라서 개인이 마음대로 상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놓아두는 경우, 일반 상인이 엄청난 재산을 모아 귀족을 능가하는 부(富)를 축적할 가능성마저 있다. 또한 이렇게 개인이 올린 소득은 쉽게 은폐되어 세금을 정확히 부과하는 것도 불가능하므로 결국 국가 재정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반 상인이 이렇게 재산을 모아 귀족을 능가할 경우, 신분 질서가 흔들리고, 그렇게 되면 왕조 자체도 흔들리게 된다. 따라서 국가는 사회적 신분 관계를 경제적인 생활에서도 그대로 관철하기 위해 상행위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가했고, 따라서 수공업자나 상인들은 아무리 작은 물건을 하나 팔고 사려고 해도 일일이 국가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이를 어길 경우 중형을 감수해야 했다.
4) 천민: ① 노비
? 공노비: 국가 소유의 노비
? 사노비: 개인 소유의 노비
- 솔거노비: 소위 이야기하는 '종'. 주인이 집에 데리고 살면서 각종 노역을 시킴.
- 외거노비: 주인집과 독립되어 가계를 꾸리고, 재산을 모을 수 있다.
겉으로 봐서는 양인 농민과 차이가 없으나, 이런 자유를 누리는 대신, 주인에게 일정한 '신공'(몸값)을 바쳐야 했다.
*일천즉천 : 부모 중 어느 한쪽이 노비일 경우, 자식은 당연히 노비가 됨.
*노비 종모법: 엄마 노비와 아빠 노비의 주인이 서로 다를 경우, 자식 노비는 엄마 노비의 주인 소유가 되는 것. (당시는 분유도 없고, 우유도 없다. 아무래도 엄마가 애를 데려가는 것이 아이를 키우는 데 용이했을 것이다. 또한 엄마는 아이를 가지고 있는 동안 노동력이 현저히 감소되고, 또 아이를 키우는 동안에도 노동력이 감소되므로, 이러한 노동력 감소부분을 감안한 법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② 향, 소 , 부곡민 : 향, 부곡의 주민-농업에 종사하는 것은 일반 농민과 같았지만, 관직 진출에 제한을 받았고, 일반 농민보다 천대받았다. (반항지역 전체를 천민 행정구역으로 만들어버린 결과 생겨난 천민 행정 구역이다.)
'소'의 주민-수공업에 종사하였는데, 역시 천대받았다.
*향, 소, 부곡의 소멸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무신정권 시기 무단정치에 반항하는 하극상의 풍조가 유행하면서 각지에서 천민들의 '반 무신의 난'이 일어났다. 그 중 천민들의 반란은 '신분
해방 운동'의 성격을 지녔는데, 이에 대해 무신 정권이 천민들을 달래주기 위한 차원에서 향, 소 , 부곡을 없애기 시작했고,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면서 '양인 증대책'의 일환으로 완전히 소멸시키게 된다. 물론, 이러한 양인 증대책을 편 이유는 천민들의 민심을 이성계에게 돌리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국가 재정의 확보를 위한 것이었다.
③ 화척, 직척, 재인 등 천역(천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
-화척: 사냥을 하여 산 짐승을 죽이는 도살업에 종사하는 자 (조선시대의 백정)
-진척: 뱃사공 (진[津]-나루터 진, 지금도 '강진' 처럼 '진'으로 지역 명칭이 끝나는 곳은 배가 떠나는 곳이었던 지역이 많다)
-재인: '재주가 많은 사람'이라는 뜻 . 광대, 기생 등을 말한다.
5) 신분제도의 예외
☞고려는 근본적으로 신분제 사회다. 그러나 신라와 같이 한번 타고난 혈통에 의해 완전히 운명이 결정되어 도저히 상승이 불가능한 그런 폐쇄적인 골품제 사회는 아니다. 고려의 위 4가지 신분과 신분 사이의 벽에는 작은 '바늘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 바늘구멍을 통과한 경우, "예외적으로" 신분 상승이 가능했다.
① 향리가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문반직에 오르는 경우
☞ 고려시대는 향리의 지위가 조선에 비해 매우 높았다. 향리는 '외역전'이라는 세습 가능한 토지를 받을 수 있었고,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에서는 지방관과 같은 권력을 행사했다. '호장' '부호장'으로 불리며, 조세징수의 실무를 담당하여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또 조선시대와는 달리 과거시험을 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으므로, 유학을 공부하여 교양을 쌓았고, 행정 실무 능력을 바탕으로 실력을 축적할 수 있었다.
② 군인이 군공(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것)을 쌓아 무반으로 출세하는 경우
③ 고려 후기 무신정변 이후, 향, 소, 부곡을 일반 군현으로 승격시켜 그곳 주민들이 일반 양인이 되는 경우
④ 외거 노비가 재산을 모아 자신의 몸값을 일시불로 주인에게 모두 지불하고 일반 양인으로 풀려나는 경우.
☆ 고려 시대 지배계층의 변화
문벌귀족 -> 무신 -> 권문세족 -> 신진 사대부
[2] 문벌 귀족 (고려 초기 지배세력)
▷ 각종 정치, 사회, 경제적 특권을 누림
-정치적 특권: 5품이상 관료의 자제 중 1명은 과거를 치지 않고 관리가 될 수 있는 것
=> 음서제도
* 참고: 음서제도는 조부, 외조부, 장인이 5품 이상이라도 혜택을 입을 수 있음 (교과서 135p)
-경제적 특권: 관직에 복무하는 대가로 받는 과전 + 5품 이상 관리에게 특별히 주는 세습 가능한 토지( 공음전) + 불법적인 토지 겸병
-사회적 특권: 가문을 배경으로 쉽게 요직으로 승진.
▷최고의 귀족이라고 할 수 있는 왕실과의 혼인을 열망 (대표적 문벌귀족: 해주 최씨, 경주 김씨, 파평 윤씨)
▷수도인 개경에 집결. (죄를 지으면 귀향하도록 하는 것이 '형벌'이 됨)
▷무신 정변(1170)으로 문벌 귀족 사회가 끝장남
[3] 권문세족 (고려 후기 지배세력)
▷무신 집권기 이후에 "원"을 배경으로 등장.
☞무신 집권이 어떻게 끝났나? 몽고(원)이 침략해 오면서 몽고에게 패하여 끝났다. 그러니까, 무신 정권이 끝나면서, 고려는 사실상 원의 반식민지 상태로 접어들었다. 결국 고려 안에서 원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고, 원을 배경으로 등장한 세력이 강력한 권력을 휘두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권문 세족의 성격
① 보수적
☞ '보수적'이란? 지킬 보(保) 지킬 수(守)- 즉, 현재의 것을 지키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이미 누리고 있는 것이 많은 계층의 경우, 지금의 상태를 지키려고 할 수밖에 없으므로, 보통 지배층의 성향은 보수적인 성격을 지닌다.
② 고위 관직을 독점 (첨의부, 밀직사, 도평의사사의 구성원으로 권력 장악)
③ 과거제도 보다 음서제를 활용하여 관직에 나아감
④ 친원적 성향(원나라와 친하게 지냄)
⑤ 불법적 토지 겸병으로 대토지를 소유-대 지주 => 국가 재정 약화
*그러나 지방에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으면서 자신은 수도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아 "부재지주(자기 땅에 살지 않는다는 뜻)"로 불렸다.
⑥ 친 불교적 성향 (유학과 안 친함 ^^)
[4] 신진 사대부 (고려 말 , 조선의 건국 세력)
▷ 등장: 무신 집권기 최우가 설치한 '서방'을 통해 등장
성장: 공민왕 때 '권문세족'을 누르기 위해 공민왕이 정책적으로 등용.
▷성향
① 유교적 소양을 갖추고 행정 실무에도 밝음
② 하급 관리나 향리 집안 출신
③ 지방 중소 지주 출신
④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사전(개인이 가진 대토지)폐지등 개혁 주장
⑤ 새로운 학문인 성리학을 수용하고 권문세족의 친불교적 성향에 반대
☞ 성리학이란? 중국의 송나라 때 주희가 발전시킨 유학의 학풍. 유교를 연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한-당 시기의 유학은 진 시황제의 '분서갱유'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나온 경전의 자구(=글자)와, 의미 해석에 치중하는 "훈고학"이 주류를 이루었고, 당 나라때 "오경정의"가 완성됨으로써 경전 해석이 완성되자, 송 대에 들어서서는 유학을 보다 철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 방법이 유행하게 되었고, 그 대표자가 주희(=주자)이다. 성리학, 다른 이름으로 주자학이라 불리는 이 학풍은 인간의 본성과 우주의 원리를 보다 차원 높게 연구하려는 학풍으로 유학을 새롭게 철학적으로 발전시켜, 신유학(새로운 유학)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는 송대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한 '사대부' 계층의 세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⑥ 공민왕 때 본격적으로 성장하여 결국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는 역성혁명의 주체가 되었다.
☞역성혁명이란?
본래 "혁명"은 사회의 지배-피지배 계급의 구성 자체를 바꾸어 놓아야 진정한 의미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프랑스 대혁명의 경우처럼, 지배층이었던 귀족계층이 숙청되고, 시민(유산계급)이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하게되면 그것은 진정한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양사의 경우, 이러한 폭력적인 방법에 의해 피지배층이 지배층을 과격하게 제거하고 사회 구조를 바꾸는 '혁명'은 근대 후기에 와서 현대로 접어드는 시기에 나타나는 것이고, 대개는 지배층은 그대로 있으면서 단지 국왕의 성씨만 바뀌는 '역성혁명'이 대부분이었다.
(바꿀 역, 성씨 성-> "역성"혁명 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