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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샹그릴라 꿈의 도시, 양주에서
2월 23일 아침에 최부 일행은 광릉역을 떠나 양주부성을 지났는데 부는 곧 옛날 수나라 강도(江都)의 땅으로 강좌(江左)의 큰 진이었다고 했다. 양부에 대한 최부의 설명이다.
<번화가가 10리에 걸쳐있고 10리의 주렴(珠簾)과 24교, 36피(陂)의 경치는 여러 군 중에 으뜸이었고 소위 봄바람이 성곽을 어루만지고 생황(관악기의 하나)의 노래가락이 귀에 가득한 곳이었다. 우리들은 배를 타고 지나갔기 때문에 경관을 볼 수 없었으나, 단지 보이는 것은 진회루(鎭淮樓)뿐이었다. 누는 곧 성의 남문으로 3층이었다. 지나온 곳에 갑이 2개 있었다. 소백역(邵伯驛)에 이르니 역의 북쪽에는 소백태호가 있었다. 노를 저어 호수 주변 2·3리 정도 가니 소백(邵伯)체운소에 이르렀다 물이 넘치고 바람이 어지럽게 불어서 밤에 호수를 건널 수 없어 하룻밤을 머물렀습니다.>
광릉역이라고 했다. 광릉역이라 하면 신라의 최치원이 쓴 시에 등장하는 곳이다. 맞다. 그는 양주에 있었다. 어디 최치원의 시를 보자.
題海門蘭若柳(제해문난야류) 廣陵城畔別蛾眉(광능성반별아미) 豈料相逢在海涯(개료상봉재해애) 只恐觀音菩薩惜(지공관음보살석) 臨行不敢折纖枝(림항부감절섬지) < 해>제목. 해문에서 향기로운 버들을 보고. 광능성 언덕에서 미인 같은 너 버들을 이별하고 멀리 바다 끝에서 서로 만날 줄을 어찌 알았으리요. 다만 관음보살이 너를 아끼는 것이 두려워 떠나가면서 감히 연약한 가지 꺽지 못하겠다.
양주(양저우)의 황금시대는 당나라 때로 상공업과 무역에 종사하는 신라인, 일본인, 동남아시아인, 아랍인이 북적댔다. 특히 당ㆍ송대에 대외 항구로 유명했던 양주의 역사는 한ㆍ중 문화교류의 역사이기도 하다. 신라 때 최치원은 당나라 과거에 급제해 양주에서 8년 동안 관직에 있었다. 최치원이 양주에서 벼슬할 때 남긴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은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그 중 최치원(崔致遠)의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아주 유명한 말이다. 그 일화는 이렇다.
당나라 말기인 당 희종(僖宗: 873~888)이 즉위한 이듬해인 875년, 유명한 황소(黃巢)의 난(875~884)이 발생한다. 전형적인 환관들의 횡포와 수탈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운동으로, 난을 일으킨 황소(黃巢)란 인물은 산동성 하택현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문무를 좋아하였으나 과거 시험에는 계속 낙방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황소의 집은 소금을 밀매하고 있었는데, 난을 일으키자 해마다 계속되는 한발과 수해, 충해로 인하여 고향을 버리고 유랑 생활을 하는 자들이 속속 그들의 휘하로 모여들어 삽시간에 수 천 명의 군사가 모여들었고, 점차 세력을 확장한 반군은 드디어 희종(僖宗) 중화 원년(881) 1월 8일 당시 수도였던 장안(長安)을 점령,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대제(大齊)로 칭하게 된다.
이때 희종은 사천성(四川省)으로 망명하였으나 883년 이후 황소(黃巢)의 세력이 급속히 와해되어 드디어 884년 난이 진압되고, 황소는 호랑곡 전투에서 패한 후 자결로써 일생을 마친다. 이러한 황소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당 왕조는 이 반란으로 인하여 큰 타격을 입어 그 후 23년간 겨우 명맥을 이어가다가 907년에 이르러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된다. 최치원은 황소의 난이 발생하기 일 년 전인 874년, 신라에서 청운의 꿈을 품고 당나라에 당시 17세 나이로 유학을 와 외국나라인 당나라의 과거에 당당히 장원으로 급제한다.
하지만, 외국인의 신분 때문에 변변한 벼슬을 하지 못하다가, 황소의 난이 터져 희종(僖宗)이 사천성으로 피난간 뒤, 조정에서 황소를 치기위해 임명된 토벌총사령관인 고변(高騈)이란 장군의 휘하에서 종사관(從事官)이란 이름으로 벼슬살이를 비로소 시작하게 된다. 이때 고변(高騈)의 명령에 의해 작성한 격문(檄文)이 바로 최치원(崔致遠)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다. 이러한 격문은 전쟁 또는 내란 때 군병을 모집하거나 침략의 부당성을 널리 알리거나 항복을 권유할 때에 많이 이용되었으며, 또한 혁명의 주모자가 그들의 정치적 주장을 알리는 선전매체로도 사용되어, 글이 힘 있고 선동적인 게 특징이다. 이글을 침상에서 읽고 있던 황소(黃巢)가 글의 내용 중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공개 처형하고자 생각할 뿐 아니라 지하의 귀신들도 은밀히 죽이려고 이미 의논했다"는 대목을 보고 놀라, 침상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최치원의 글은 도드라졌던 것 같다. 글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대저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닦는 것을 도(道)라 하고,위험한 때를 당하여 변통할 줄을 아는 것을 권(權)이라 한다. 슬기로운 자는 시기에 순응하는 데서 성공하게 되고,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스르는 데서 패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백년(百年)의 생명에 죽고 사는 것은 기약할 수가 없는 것이나, 만사(萬事)는 마음이 주장된 것이매, 옳고 그른 것은 가히 분별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어찌 옳고 그름을 판별치 못하는가?) 夫守正修常曰道。臨危制變曰權。智者成之於順時。愚者敗之於逆理。然則雖百年繫命。生死難期。而萬事主心。是非可辨。>
현재 양주의 당성(唐城)유지박물관 내에 최치원기념관이 있고 매년 한국에서 최씨 종친회가 방문해 제사를 올리고 있다. 양주는 고려의 정몽주도 다녀갔다. 나는 한양대 국문과 이승수 교수가 ‘민족문화’ 최근호에 게재하였다는 글에서 그를 우연히 만났다.
<‘옛 초나라 산천을 지나가면서/수나라 적 궁궐을 상상해본다/지난날 흥망을 뉘 탄식하리오/오늘날의 번화만 누리면 그뿐…’>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로 시작하는 조선 태종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 같은 정서를 떠올리게 하는데 이시가 바로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1386년 중국 양주(揚州)에서 쓴 시라 한다. 측근에 의해 살해된 수 양제의 사연을 떠올리며 망한 나라의 흥망을 따질 것 없다는 내용이다. 아마도 정몽주 자신은 불과 6년 뒤 고려가 망하고 이방원 부하의 철퇴에 맞아 비극적인 죽음을 맞을 것은 몰랐던 것이리라.
최부의 글에 나오는 ' 10리의 주렴(珠簾)과 24교, 36피(陂)의 경치는 여러 군 중에 으뜸이었고 ' 라는 표현은 그 시대 강남사람이 과거를 보러 갈 때 모두 이곳을 경유하여 가는 데서 생긴 말이라고 한다. 우리네 경상도에서 과거를 보러 올라올 때 죽령은 죽 쒀서 개를 주는 격으로 미끄러져서 안 되고 추풍령은 추풍낙엽이라 곤란하고 책 바위 있는 문경새재로서만이 기대할 만하다 하는 식이었던 것 같다.
그 다음 이어진 말 '봄바람이 성곽을 어루만지고 생황(관악기의 하나)의 노래 가락이 귀에 가득한 곳' 이라는 표현은 양저우의 봄을 노래한 당 시인 야오허(姚合, 779-846)의 양주춘사(揚州春詞), 오율삼수(五律三首)중 끝수의 마지막 두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최치원도 그렇고 야오허도 그렇고 아마 양주는 봄가을 운치가 그만이었던 것 같다. 중국 한시 100수에 들어가는 두목의 기양주한작판관(寄揚州韓綽判官)이란 시에서도 그대로 들어 있다.
기양주한작판관(寄揚州韓綽判官)-두목(杜牧)양주한작판관에게-두목(杜牧)靑山隱隱水迢迢(청산은은수초초) : 청산은 가물가물, 물은 아득하고秋盡江南草未凋(추진강남초미조) : 늦가을강남 땅, 초목은 시들지 않았다二十四橋明月夜(이십사교명월야) : 달 밝은 밤, 양주 이십사교 다리玉人何處敎吹簫(옥인하처교취소) : 어느 곳 미인이 피리를 불게 하는가
여기서 二十四橋는 강소(江蘇)성 양주(揚州) 수서호(瘦西湖)에 있는 다리(橋)이고 그 무렵 두목은 회남절도추관(淮南節度追官)으로 양주(揚州)에 있을 때로 그곳에서 판관(判官) 직을 수행하고 있던 한작과 교유했다. 최부는 그러나 안타깝게 양주를 배를 타고 가기에 진풍경을 제대로 느껴 볼 수는 없었다. 최부는 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진회루 뿐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소백태호를 지나는 때 물이 불어나고 바람이 어지럽게 불어 소백체운소에서 그날 밤을 보냈다. 앞서 말한 바 있는 이섬 현감에 대해 양주위의 백호 조감이란 자가 기억을 하고서는 사건의 시종을 마저 들려주었다.
이섬은 처음에 바람에 떠밀려 양주 굴항채(掘港寨)에 도착하였는데 수채관 장승(張昇)이 백호 상개(桑愷)를 차출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체포하여 잡아서 옥중에 가두었고 그리고 나서 어떤 순검(巡檢)이 풀어주어 서방사(西方寺)에서 편안히 쉬게 하고서는 라” 라고 하고, 배를 타고 가는 곳이 어디인지 심문을 하였는데 그렇게 머무르기를 1개월 가까이 연해비왜도지휘(沿海備禦都指揮) 곽(郭)대인이 이 섬이 진술한 내용에 타고 온 배가 ‘돛 10폭으로는 바람에 견딜 수 없었다.’는 구절을 보고 그가 호인임을 알게 됨으로써 손님으로 대접을 하였다고 했다. 그가 위로를 해주자 최부는 이섬은 단지 길이 멀다고 근심하였지만 내가 슬퍼하는 것은 아버지가 갓 돌아가셨는데 아직 염(殮)을 하지 못했고 어머니는 70에 가까운 노인으로 집에 계시는데 자식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며, 나그네 길은 더욱 멀어 비통한 마음이 하늘이 노랗고 앞이 깜깜하다고 하였다.
양주 땅, 최부는 아쉽게 그냥 지나칠 처지지만 그렇게 무심히 지나칠 땅은 아니다. 이백(李白) 유우석(劉禹錫) 두목(杜牧)같은 시인들이 앞 다퉈 찬가를 바칠 정도로 양저우는 영원한 낭만의 도시였다. 최부도 사실 금기를 깨고 양저우만은 유일하게 시어로서 이미지를 형상화했던 것이 아닌가. "온 성안에 봄바람 흐드러지고 설레는 풍악의 물결소리여"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의 고향이기도 한 강소(江蘇)성 양주(楊州)는 25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문화의 도시다. 남경에서 버스로 약 1시간30분 정도 걸리는 양주는 대운하 등 많은 유적지가 있어 도시 자체가 아름답고 고풍스럽고 깔끔하다. 남경에서 1시간 거리인 진강(鎭江)은 `강중명주(江中明珠)`로 불린다. 예로부터 수상교통의 중심지로 3000년 전부터 문명을 꽃 피운 유서 깊은 고도다.
<"나를 황학루에 남기고(故人西辭黃鶴樓) 안개 낀 3월 친구는 배에 올라 양주로 떠나고(烟花三月下楊州) 이윽고 돛대마저 시야에서 사라져(孤帆遠璟碧空盡) 뵈는 것, 아득히 하늘에 닿은 장강물 뿐이어라(惟見長江天際流).">
이태백이 오랜 친구인 맹호원을 양주로 떠나보낼 때 지은 시다. 양주는 장강과 대운하로 이어져 있어 그때도 마치 유토피아처럼 여겼다. 양주는 대운하의 중심지로 예로부터 풍요로운 문화를 뽐냈다. 양주의 정취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이 수서호(瘦西湖)다. 능수버들과 복사꽃, 살구꽃이 늘어져 있는 수서호는 많은 홍교(虹橋)로 연결돼 있고 주변에는 원림(園林), 정자, 누각, 탑 등이 한데 어우러져 글자 그대로 선경(仙境)을 이루고 있다. 청나라 건륭황제도 남순(南巡)을 할 때마다 매번 이곳을 찾을 정도였고 김일성 주석도 배를 타고 수서호의 아름다운 경치에 탄복했다고 한다.
양주의 또 한 가지 볼거리는 1818년 대부호였던 황지균이 지은 개원이다. 개원의 아기자기한 모습은 중국의 사가원림(私家園林) 가운데 으뜸이란 평가를 듣고 있다. `고기 없는 밥은 먹을 수 있어도 대나무 없는 곳에서는 살 수가 없다`는 말처럼 개원은 대숲이 일품이라고 한다. 푸른 대숲과 그 사이에 있는 집과 연못, 그리고 태호석으로 꾸며놓은 가산(假山)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는데 보지 못한 나로서는 뭐라 말할 처지는 아니다.
그런데 이쯤 알아 둘 것이 있다. 대개 강남이라 하면 장강 아래를 일컫는다. 그들의 의식은 지금까지도 남다르다. 은연중 그들은 장강의 물은 황하와 섞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실 북경 사람과 홍콩 사람은 닮지 않았고 오히려 홍콩 사람은 베트남사람과 닮아 있다. 중국에는 오래 전부터 랑캐라는 개념이 있었다. 중화(中華)의 질서 안에 포획되지 않는 제 문화권에 대해 한족(漢族)은 북쪽을 적(狄), 남쪽을 만(蠻), 동쪽을 이(夷), 서쪽을 융(戎)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민주화 시위로 몸살을 앓는 홍콩은 바로 과거에 양자강(장강) 하류에 터 잡고 살며 그 문화를 일궈온 남만(南蠻), 즉 광동인들이었다.
그들은 황하를 중심으로 문화를 이룬 한(漢)족과는 처음부터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홍콩인들을 포함해 광동인들은 과거 월이라 불렸는데 이들은 북월과 남월로 나뉘었다. 그래서 북월이 곧 이 광동인들이고 남월이 오늘날 베트남이라 불리는 월남(越南)이다. 홍콩의 광동인들과 베트남인들은 사실 먼 친척관계다. 그래서인지 베트남 사람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중국이 홍콩을 무력으로 점령하면 자신들이 해방시켜 줄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치기도 한다.
월남, 즉 베트남은 명나라와 청나라로부터 혹독한 식민 지배를 받았지만 끝까지 투쟁해 독립을 쟁취한 역사를 갖고 있다. 그 이전 송대에는 월남(베트남)이 10만의 병력으로 중국을 선제공격하기도 했다. 월남에는 한때 공산주의로 중국과 관계 개선의 시기가 있었지만 문화, 역사적으로는 뿌리 깊은 반(反)중국 정서가 있다.잘 알다시피 춘추전국시대, 오월동주(吳越同舟), 와신상담(臥薪嘗膽), 일모도원(日暮途遠)과 같은 말들은 치열한 싸움에서 나온 말들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지금까지도 중국 남부에 독특한 문화를 구축하고 있다. 그 일면에는 사람들에게 절대 굴복하지 않는 자존심과 경쟁심이 있다.
홍콩인들에게는 그러한 쟁투의 전통이 있다. 직장에서 경쟁이 치열하고 일과가 끝난 후 마작에서도 치열한 승부 겨루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친지간에 우정도 끈끈하다. 한때 유행했던 홍콩영화들을 보면 홍콩인들은 친구 동료들에게 친절하고 싹싹하다가도 위협적인 상대에게는 사납고 용맹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한국인들이 보기에는 오버액션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실제로 광동 사람들은 자존심이 강해서 함부로 대했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전 세계 차이나타운을 주름잡는 것은 바로 광동인들이다. 그들은 결속력이 대단하다.
그런 홍콩의 조상들이 세운 오, 월에는 명검(名劍)이 있었다. 오나라 사람 간장과 그의 아내 막야가 만들었다는 철검은 그 지역의 이름을 따서 월검(越劍)이라 불렀다. 그 만큼 월나라에서는 우수한 철이 났고, 이를 제련해서 단단하고 잘 드는 칼과 도끼를 만들었다. 그런 홍콩인들의 조상 월족은 중국 한(漢)족과는 처음부터 달랐다. 한족이 황하강을 중심으로 성립된 문명이라면 월족은 양자강이 그 문화의 지리적 토대였다. 월족은 스스로를 황제 하후(夏后)씨의 자손이라고 말한다.
하후는 하(夏)나라 전반을 통치했던 전설의 임금이다. 장자(壯者)는 월인(越人)들이 쌀을 재배하고 몸에 문신을 새겼다는 기록을 남겼다. 홍콩인들과 상하이인들, 그리고 대만 사람들은 상업술이 뛰어나기로 정평이 나 있다. 그들의 상술은 너무나 뛰어나서 북경인들에게는 그들과 교역하는 데 트라우마가 있었다. 어떻게 교역을 하든 결국 광동인들은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 그렇기에 ‘하늘이 무서우랴 땅이 무서우랴, 광동사람 광동말 하는 것이 가장 무섭다’는 속담이 북경을 중심으로 한 중국인들 사이에 유행하기도 했다.
광동의 문화·역사적 전통은 오늘날 홍콩인들에게 공산주의를 거치지 않고 영국을 통한 자유주의적 계몽주의라는 근대화 경험으로 이어졌다. 1841년 영국의 홍콩 섬 점령과 함께 시작된 99년간의 조차지로서 홍콩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는 곳이었다. 총독부가 설립은 됐지만 홍콩에는 복지시설도 없었으며 생산 인프라 조차도 없었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사람과 부두였다. 홍콩인들은 그러한 환경 속에서 영국의 자유방임주의 정책으로 홍콩을 지난 한 세기 최대의 국제 금융허브와 물류도시로 만들어 냈다.
오로지 가진 것은 인적자원뿐이라는 생각은 홍콩으로 하여금 최고의 교육 환경을 조성했다. 그 인적 경쟁력이 오늘날의 홍콩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홍콩은 지난 20년간 세계에서 가장 자유지수가 높은 국가였다. 1984년 홍콩을 중국에 이양한다는 협정이 타결될 때만해도 홍콩의 1인당 GDP는 미국의 반에 불과했지만 오늘날 홍콩의 1인당 GDP는 미국과 맞먹는다.
오죽하면 ‘미국에서 홍콩을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올까. 하지만 그런 홍콩은 이제 갈림길에 섰다. 중국의 ‘일국양제’라는 자치시스템이 이번 친중적 정권 수립의 기도로 불확실의 상태에 빠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위협에 어쩌면 홍콩인들은 과거 자신들의 조상 월나라와 오나라로부터 이어받은 투쟁의 정신이 본능적으로 타오르는지도 모른다. 분명 그들은 언어소통도 잘 안 되는 광동 말을 고집하며 광동인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장강은 황하와 섞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물이 다르다는 것이다. 나는 중국에 민주화가 찾아오면 사분오열되리라 생각하는 사람 중에 하나다. 그들은 속 깊이 뿌리를 잊지 않고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