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문화운동을 르네상스Renaissance라 한다. 르네상스는 ‘재생’ 즉 다시 살려낸다는 뜻이다. 이때 다시 살려내려는 대상은 고대 그리스 ‧ 로마의 학문과 지식이다. 르네상스 정신은 인문주의 운동이었던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 정신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사람들은 고전 학문의 가치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 지동설이 등장했고, 상업은 성장하고 봉건제는 몰락했으며,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었다. 또 종이 ‧ 인쇄술 ‧ 항해술 ‧ 화약과 같은 신기술이 발명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교황들 가운데 가장 사치를 좋아한 인물이 레오 10세였다. 레오 10세는 교황청의 재산을 탕진했다. 그는 전임 교황 율리오 2세가 시작했다가 완성하지 못한 성 베드로 대성전 개축 사업에 흥미를 느꼈다. 349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운 성 베드로 대성전은 역사적으로 전세계 가톨릭의 중심이었지만, 아주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외적의 침입 등으로 많이 낙후되어 있었다.
레오 10세는 교황청의 재정난도 해결하고 베드로 대성전 개축 비용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免罪符’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면죄부 판매는 이슬람에게 빼앗긴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벌인 11세기 십자군 전쟁 때에도 참전 군인과 군대 비용 후원금 납부자들에게 발급한 바 있고, 율리오 2세 때에도 이미 실시된 적이 있는 제도였다. 면죄부는 헌금을 하면 죄罪를 면免하게 된다면서 교회가 신자들에게 판매한 문서符였다.
당시 가톨릭 교회는 신자들에게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를 의무화했다. 교회는 천국과 연옥과 지옥이 있는데, 영세를 받은 신자는 지옥에는 가지 않지만, 죄를 면하게 해주는 선행이 충분하지 못하면 연옥에 가서 고통을 받는다고 강조했다. 사람은 누구든지 얼마간의 죄를 짓는 법이므로 모두들 불안해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면죄부였다. 교회는 면죄부를 사면 죄가 없어진다면서 그것을 신자들에게 판매했다. 1년치 죄를 면하려면 1년짜리 면죄부를 구입해야 했고, 10년치 죄를 면하려면 10년짜리 면죄부를 사야 했다. 나중에는 조상의 죄를 면하게 해주는 면죄부도 등장했다. 내가 100년짜리, 200년짜리 면죄부를 사면 지옥에 떨어져 있는 나의 조상이 천국으로 옮겨진다는 것이었다.
당시 일반 신자들은 성경을 읽을 수 없었다. 라틴어 성경뿐이었고, 기타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거의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은 성경의 내용을 알 수 없었다.
비텐베르크 대학 신학교수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조의 교회 비판 대자보를 게시하여 부패한 교회와 면죄부를 비판했다. 그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일반 신자들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가톨릭 교회는 1521년 그를 파문했다. 결국 교회는 종교개혁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찬성파는 개신교회로, 반대파는 천주교회로 분열되었다.
우리나라에도 면죄부 비슷한 문서가 있었다. 종교의 부패가 아니라 정치권력의 부패라는 점에서 주체는 달랐지만 발행 방법과 목적은 닮은꼴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공명첩空名帖이라 불렀다. 관직 이름은 적혀 있고 사람 이름은 없는 정부 발행 빈 문서를 사서 거기에 본인 성명만 기입하면 그것이 자기 벼슬이 되었다.
이것은 임진왜란 때 처음 발행되었다. 이때는 주로 전쟁에서 공을 세웠거나 국가에 곡식을 헌납한 사람에게 벼슬을 주면서 사용했다. 물론 군공軍功의 크기와 납속納粟(바친 곡식)의 양에 따라 관직의 등급을 달리했다. 정부는 높고 낮은 관직별로 백지 임명장을 제작해놓고 기다리다가 해당자가 나타나면 중앙정부 고관이나 지방 수령이 그것을 당사자에게 전달했다.
서양 면죄부에 여러 종류가 있었듯이 공명첩도 다양했다. 공명첩의 대표격인 관직 임명장 성격의 공명고신첩空名告身帖, 관청 동원 노동을 면제해주는 공명면역첩空名免役帖, 천민을 양인으로 풀어주는 공명면천첩空名免賤帖, 그리고 공명면향첩空名免鄕帖이 있었다. 공명면향첩은 조선 후기 들어 의무경찰 비슷하게 격하된 향리에게 그 일을 종사하지 않아도 되도록 풀어주는 문서였다.
서양 면죄부처럼 공명첩 발행에도 점점 부패 정도가 심해졌다. 심지어 사찰 중수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발급하기도 하고, 관원들이 사사로이 남발하기도 했다. 그렇게 된 것은 관리청인 이조와 병조의 관리 소홀 탓이었다. 게다가 서양의 면죄부와 이름까지 비슷한 면역첩 ‧ 면천첩 ‧ 면향첩은 신분 상승 효과가 있었지만, 고신첩은 명예직에 불과해서 잘 팔리지 않아 강제로 떠안기는 경우도 허다했다.
아무튼 공명첩은 의도된 바는 아니었지만 조선 후기 신분 제도를 흔드는 데에 한몫을 했다. 이는 서양 면죄부가 뜻밖에도 종교개혁에 이바지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 글은 현진건을 현창하기 위해 펴내는 월간 <빼앗긴 고향>에 게재할 원고입니다. 여러분들도 투고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