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교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에 위치하며, 옥천역에서 북동쪽으로 3km 떨어져 있다. 향교 입구에는 향수로 유명한 정지용 생가가 있다. 조선 1398년(태조 7년) 현유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을 위해 창건되었다. 1440년(세종 22년)에 명륜당을 지었으며,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다시 세운 후 여러 차례 수리하였다. 1954년에 유림총회에서 황폐한 향교 재건을 결의하고 1961년에 복원하였으며, 1966년과 1974년에 보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건물은 대성전, 서무, 동무, 내삼문, 홍도당, 명륜당, 사주문, 창고, 고직사 등이 있다. 소장도서로 판본 15종 58책, 사본 11종 26책 등이 있다. 그중 유안, 청금록, 청금속록, 선안, 교안, 향교중수사실 등은 조선 후기 향교 및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전학후묘의 배치 형태로 명륜당은 정문 역할을 겸하고 있다. 대성전에는 5성, 10철, 송조 6현의 위패가, 동무, 서무에는 우리나라 18현 위패를 봉안하고 봄, 가을에 석전을 지낸다. 옥천향교는 1981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로 지정되었다.
육영수(陸英修生家)생가
육영수 여사의 생가는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에 위치해 있다. 육영수 여사는 대한민국 제5대, 제7-9대 대통령을 지낸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으로,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입니다. 그녀의 생가는 그녀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곳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유적지로 평가받고 있다.
이 생가는 전통적인 한옥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현재는 복원되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습니다. 집은 단아한 기와집으로,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의 전통적인 한국 가옥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집 내부에는 육영수 여사의 유품과 함께 그녀의 생애를 소개하는 전시물들이 마련되어 있어, 방문객들이 그녀의 삶과 그 시대의 역사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다.육영수생가는 1974년 육 여사 서거 이후 관리가 소홀해지면서 생가는 폐가의 길을 걷는다. 육여사 서거 후 네 해째. 1979년 10.26사건으로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방치되어 오다가 1999년 유족들이 건물을 완전 철거하면서 생가는 기단과 초석과 함께 터만 남게 된다. 이후 옥천군에서 2000년 9월, 육영수여사 생가 복원계획을 세우고, 민간이 주체가 된 “육영수여사 생가복원추진위원회”를 발족하여 육 여사의 회고에 근거하여 2002년 생가지 지표조사를 마친 다음 2003년부터 2010년까지 37억 5천만 원을 들여 건물 13동을 복원했다.
육영수(陸英修 : 1925 ~ 1974)
육영수 여사는 1925년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에서 아버지 육종관씨와 어머니 이경령 여사 사이에서 1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옥천읍내 죽향국민학교를 마치고 상경하여 배화여고를 졸업한 뒤 옥천여자중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50년 전란으로 부산에 피난중일 때 육군중령 박정희와 혼인하여 슬하에 지만·근혜·근영 등 1남2녀를 두었다. 1961년 박정희 장군이 5.16군사 쿠테타를 주도하여 성공한 뒤 1963년 10.15 총선거에서 6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연임됨에 따라 대통령 부인으로 11년간 내조하였다. 검소한 안 살림과 우아한 품위로 대외적인 활약을 하였으며, 숨어서 남이 못하는 일을 많이 하여 덕망을 쌓았다.
세계적인 영부인으로서 또한 국모로서 부족함이 없는 너무나 휼륭하고 존경스러운 육영수 여사는 1974년 8.15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거행된 제29주년 광복절 기념식장 단상에서 박정희 대통령께서 경축사를 하시던 중 북한의 지령을 받은 저격범 문세광이 쏜 총탄에 머리 관통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겼으나 5시간이 넘는 수술 끝에 생을 마쳤다.
정지용(鄭芝溶, 1902년 6월 20일 ~ 1950년)生家
“잊혀져가는 우리 고향의 정경을 오롯이 그려낸 국민시인 정지용. 그의 시 향수가 그러하듯 초가삼간 그의 생가는 그의 삶의 흔적은 질박하게 품어놓는다. 생가에서 한 폭의 맑은 수채화처럼 다가오는 정겨운 시를 기억하며 그의 삶의 흔적을 더듬어보자.”
정지용 생가는 해금조치 직후 조직된 '지용회'를 중심으로 그 이듬해 복원했다. 정지용은 6 · 25발발 와중에 행방불명되고 정부는 그를 월북작가로 분류해 그의 작품 모두를 판금시키고 학문적인 접근조차 막았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1988년에 그의 작품은 해금 되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지용회는 해금조치가 있은 후 그의 생가를 허물고 지은 집의 벽에 그 자취만이라도 전하고자 ‘지용유적 제1호’임을 알리는 청동제 표시판을 붙여놓았다. 표지판은 생가복원 이후 생가 부엌 외벽의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지용 생가 방문을 항상 열어두어 찾는 이에게 그의 아버지가 한약방을 하였었음을 가구로 알리고 있다. 시선가는 곳 마다 정지용의 시를 걸어놓아 시를 음미할 수 있도록 배려해 놓았다. 생가의 사립문, 집 마당 언저리의 우물, 담벼락 아래 소박한 장독대. 당시의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부엌 등 생가를 돌아보노라면 잊혀져가는 고향집 풍경이 정겹게 다가온다. 생가의 툇마루는 방문객들이 걸터앉아 문학의 향기를 음미할 수 있는 여유로움을 누릴 수 있는 곳으로 기념촬영의 포인트이기도 하다.
정지용문학관
1996년 문을 연 정지용문학관. 이 문학관은 정지용 문학의 실체를 보고, 느끼고, 감상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문학 전시실과 영상실, 문학교실 등이 마련되어 있다. 문학관을 들어서면 전시실로 들어가는 입구 로비에서 밀랍인형 정지용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벤치에 앉아있는 정지용과 기념촬영을 할 수 있는 포토존이다. 전시실은 정지용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과 문학사의 전개 속에서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게 시대적 상황과 그의 문학을 시대, 연도별로 정리해놓았다. ‘한국현대시의 흐름과 정지용’에서는 시문학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정지용 시인이 차지하는 비중을 알아볼 수 있다. 그 외 정지용 시, 산문집 초간본 등 원본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실 중앙은 멀티미디어 기반의 문학체험을 할 수 있도록 독특한 아이템으로 가득 차있다. 이곳에서는 관람객이 정지용 문학을 재미있게 체험 할 수 있다. 배경 영상과 음악위에 자막으로 흐르는 정지용 시인의 시를 낭송해 볼 수 있는 시낭송실은 흥미성과 오락성을 겸비하고 있어 관람객에게 인기가 높다.
향토자료전시관
향토자료전시관은 우리조상의 얼이담긴 유물과 유물을 전시보존 한 전시관으로 각종 부조유물, 탑신제당, 물레방아등 전시물이 1500여점이 전시되어있다.군민의 다양한 문화시설공간으로 활용하고있고 매주 월요일은 휴관한다.
위치:충북 옥천군 안내면 장계1길 57-1 (장계국민관광지 내)
1층:역사유물전시실,선사시대 유툴,그릇,기와,돈,고문서,목판,인물
2층:생활과 민속전시실,의.식.주,농업,민속과 신앙,인물,고문서 등 전시
부소담악(赴召潭岳)
“옥천군 군북면 추소리 부소무니 마을 앞 호반에 암봉들이 700m 가량 병풍처럼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이 암봉들의 파노라마는 우암 송시열이 소금강이라 예찬했을 정도로 예부터 옥천 제일의 선경을 자랑한다.”
부소담악은 부소무니 마을 앞 물위에 떠있는 산이라 하여 ‘부소담악’이라 불리운다.2008년 국토해양부가 전국의 하천, 호수, 계곡, 폭포 등 한국을 대표할 만한 아름다운 하천 100곳 중의 하나로 선정 되었다. 환산에서 바라본 부소무니 마을과 그 앞의 부소담악. 마을 언저리 북쪽의 산봉우리가 남동쪽으로 동물 꼬리모양의 암벽으로 이루어진 줄기를 뻗어 내리고 있다. 700m 길이의 물위로 솟은 기암절벽을 따라가노라면 다양한 부소담악의 비경을 감상할 수 있다. 부소무니 마을에서 조망되는 부소담악 풍경. 호수위로 반추된 풍경이 부소담악의 또 다른 멋을 느끼게 한다.
추소정
부소담악의 능선부에 세운 추소정에 오르면 파노라마처럼 멋진 풍광이 펼쳐진다. 고요함, 아름다움, 평화로움... 추소정은 호수 깊숙이 들어가 누릴 수 있는 마음의 평화가 유독한 곳이다. 추소정에 오르면 추소초등학교 뒷산인 문필봉이 우뚝 시선을 자극하고 그 아래 호반마을 부소무니가 평화로운 풍경으로 다가온다. 2008년 12월 17일 현판식을 마치고 일반에게 공개된 이 정자는 마을 이름을 따서 ‘추소정’이다.
사진제공:이석염,이재실
편 집:박성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