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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시가 태어나는 자리
-박미산
1, 사랑과 용서 “불타는 오디나무의 노래”
불타는 오디나무의 노래
- 미래에게
나는 끝을 압니다
가지 끝에 앉아 그 사내는 말합니다
당신은 모르실겁니다 그래서 두렵기도 하고요
난 그 끝을 다녀왔거든요
오늘도 같이 있지만 홀로 밤을 지새우게 되네요
어둡고 잎이 무성한 노래를 불렀어요
당신은 늘 무시했어요, 귀머거리가 된 것처럼
들어보세요
달에 홀린 피에로* 같이
온밤을 강풍에 매달려 절규하며
원시적인 무조음밖에 낼 수 없는 내 노래를
매력적인 화음을 내고 싶은데도 말이에요
메아리를 울려줘요, 당신
우린 한 몸이면서도
늘 불협화음을 내지요, 8월의 짝사랑
마르면서 타들어가 뿌리까지 뽑힙니다
끝을 보아버린 검자줏빛 미소가
가지 사이에 박힙니다
활활 타는 심장만이 있고,
만질 수도,
키스도 할 수 없는 불꽃.
* 쇤베르크의 연가곡.
-『루낭의 지도』, (채문사)
한 편의 시가 탄생하는 과정은 시인마다 다를 겁니다. 저 같은 경우는 직접 체험을 바탕으로 창작되는 시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간접 체험을 통해서 쓰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한 시는 절실함이 덜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어느 순간에 풍경을 보거나 사람을 보는 순간, 내가 경험했던 일이 동시에 머리를 스치는 경우가 나의 시가 태어나는 자리입니다. 그럴 경우 단숨에 시를 쓰게 되는데, 2008년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너와집」이 그렇게 태어난 시입니다.
「너와집」처럼 한 번에 쓴 시가 있는 반면에「불타는 오디나무의 노래」같이 15년 만에 쓴 시도 있습니다. 「불타는 오디나무의 노래」는 조카의 이야기입니다. 첫 조카 미래는 온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했지요. 저의 둘째 아이 이름이 '미래 다음에 왔다'는 뜻의 '차래'로 지을 정도로 모두 조카를 사랑했습니다.
미래는 충남대학에 다녔습니다. 1993년 8월 끝자락 밤에 아이들 큰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조카 미래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과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 말을 남기고는 전화는 끊겼습니다. 우린 정신없이 대전으로 내려갔습니다. 미래가 얼굴과 온몸에 붕대를 감고 충남대학 병원에 누워있었고, 옆방엔 미래를 짝사랑하던 학교 선배가 미래와 마찬가지로 누워있었습니다. 미래와 그 남자는 병원에 입원한 지 8시간 만에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무모한 사랑이었습니다. 남자 선배는 미래가 미국에 유학 간다는 것을 알고 수차례 학교를 찾아와 자기의 사랑을 받아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는 도서관에 있는 조카를 불러내서 재차 사랑을 받아달라고 애원했으나 조카가 외면하자 그녀를 껴안고 미리 준비해온 시너에 불을 붙였다고 합니다. 짝사랑을 받아주지 않은 미래를 향한 그 선배 사랑이 이러한 참사를 낳았습니다. 다음날 우리는 신탄진 강가에 조카의 뼛가루를 흘려보내고 조카를 가슴에 묻었습니다.
이 끔찍한 사랑을 시로 쓰려고 했으나 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건이 너무 충격적이고 그 남자에 대한 미움이 컸기 때문이었던 것이겠죠. 세월이 흐르면서 그 남자의 입장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했던 그는 생의 의미를 찾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같은 동아리에서 4년간 늘 곁에 있었던 그녀를 향한 애틋한 마음이 무시되었을 때,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는 그녀와 함께 사랑의 하모니를 부르고 싶었는데, 혼자 불협화음만 내는 노래를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러느니 차라리 사랑하는 사람과 저세상으로 함께 갈 것을 원했을 것 같았습니다.
15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미래의 입장이 아닌 그 남자의 입장으로 되돌아가서야 한 편의 시가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 남자에 대한 미움과 증오가 옅어지면서 「불타는 오디나무의 노래」가 태어난 것입니다.
한 인간에게 가장 깊이 가 닿을 수 있는 것이 사랑과 용서인 것처럼 사랑과 용서만이 우리를 치유의 길로 이끌어 가는 것 같습니다. 영성이 깃들이지 않은 무생물이라 하더라도 뭇 생명 속에 있는 슬픔과 사랑을 따뜻한 가슴으로 바라보는 것이 진정 시인의 길일 것입니다.
저는 체험과 시가 둘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생활 속에서 경험한 체험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 된다고 믿습니다. 릴케도『말테의 수기』에서 “시는 체험이다. 한 행의 시를 위해 시인은 많은 도시, 사람, 물건들을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릴케는 체험이 뒷받침되지 않은 시를 경계했습니다. 저도 릴케처럼 진정한 시는 체험을 통해 상징과 환상을 거쳐 완성되고, 또한 사랑과 용서가 있는 자리에서 태어난다고 생각합니다.
2, 시간의 흐름 “너와집”
너와집
갈비뼈가 하나씩 부서져 내리네요
아침마다 바삭해진 창틀을 만져보아요
지난 계절보다 쇄골뼈가 툭 불거졌네요
어느새 처마 끝에 빈틈이 생기기 시작했나 봐요
칠만 삼천일을 기다리고 나서야
내 몸속에 살갑게 뿌리내렸지요, 당신은
문풍지 사이로 흘러나오던
따뜻한 온기가 사라지고
푸른 송진 냄새
가시기 전에 떠났어요, 당신은
눅눅한 시간이 마루에 쌓여 있어요
웃자란 바람이. 안개가, 구름이
허물어진 담장과 내 몸을 골라 밟네요
하얀 달이 자라는 언덕에서
무작정 기다리지 않을 거예요, 나는
화티에 불씨를 다시 묻어놓고
단단하게 잠근 쇠빗장부터 열 겁니다
나와 누워 자던 솔향기 가득한
한 시절, 당신
그립지 않는가요?
-『루낭의 지도』, (채문사)
저는 마음이 힘들 때나 일이 안 풀리거나 시가 찾아오지 않을 때면 산에 오르곤 합니다. 산을 타다 보면 어느새 힘든 일이나 잡생각이 사라집니다.
등산이 좋은 건 모든 것을 잊고 오직 산만을 탈 수 있다는 점이다. 무념무상의 상태가 되면 어느 순간 시가 찾아옵니다.
히말라야를 등반할 때였습니다.
우기에 갔기 때문에 진종일 비가 초록에서 초록으로 건너뛰며 춤을 추고 거머리도 춤을 추면서 내 목덜미와 종아리에 후두두 날아와 박히더군요. 히말라야원숭이도 재빨리 저를 할퀴고 달아나면 비릿한 피 냄새와 비릿한 초록 냄새가 정글에 넘쳐납니다.
몇 날 며칠 등반하다 보면 가파른 산비탈보다 내가 먼저 기울어집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나 자신이 사라지고 산 중턱의 오방색의 깃발처럼 텅 비고 색 바랜 내가 휘날리는 그런 순간이 찾아옵니다. 나의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순간, 그 순간이 시가 찾아오는 시간입니다.
신춘문예에 떨어지고 나서 나는 한겨울에 설악산을 찾았습니다. 야간 기차를 타고 새벽에 오색약수터로 해서 설악산에 올라가다 내려오는 도중에 길을 잃었습니다. 영하 20도가 넘는 산에서 보이는 것은 발 디딜 곳 없는 빙벽과 눈보라와 아이젠 소리뿐,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 아이들, 남편이 머릿속을 지나가고 추위가 몰려왔습니다. 밤은 깊어가고 소리를 질러 봐도 돌아오는 건 얼어붙은 메아리였습니다. 오밤중에 부르튼 발을 이끌고 겨우 길을 찾아오는데 개소리가 들렸습니다. 얼마나 반갑던지.
누렁이 소리 덕분인지 깊은 산을 타서인지 그해에 나는 문예지로 등단하여 시인이 되었습니다. 문예지에 등단했는데도 원고청탁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등단만 하면 원고 청탁이 물밀 듯 들어오는 줄 알았던 저는 다시 신춘문예에 도전하기 위해 좀 더 큰 산을 타기로 했다.
겨울 설악산을 타다가 너무 고생했기에 이번에는 6월에 지리산 종주를 했습니다. 지리산은 설악산보다는 완만했으나 능선을 넘으면 또 능선이 나타나면서 좀처럼 정상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산장에서 2박하고 새벽에 정상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천왕봉이 코앞에 있는데 이틀 동안의 강행군으로 발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주저앉아 있는 나에게 갑자기 인도에서 만났던 파티마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내 발바닥에서 잔뿌리가 돋아나고 바싹 말라 꺼칠해진 입술에서 이파리가 스멀스멀 뻗어 나왔습니다. 쑥쑥 자라는 과거의 그녀가 싱싱하게 만져졌습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천왕봉을 가볍게 올랐습니다. 2007년 경향신문 최종심의에서 떨어진 「파티마는 천왕봉에서 나를」이 그때의 경험을 쓴 시였습니다.
세 번째 신춘문예에 도전해서 실패했던 저는 시간 날 때마다 동네 뒷산에 올랐습니다. “너와집”은 동네 뒷산을 산책하다가 영감이 와서 쓴 작품입니다. 저랑 아주 친한 친구가 있습니다. 남편이 일찍 돌아가시고 친구 혼자 아들 둘을 키웠는데, 어느 날 갑자기 구완와사가 왔어요. 그래서 그 친구를 데리고 밤마다 산책했습니다. 산책하는 도중에 언젠가 태백으로 사진 찍으러 갔을 때 신리의 너와집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신리의 낡은 너와집도 처음에는 튼실하고 아름다웠을 겁니다. 그 친구처럼,
시 “너와집”을 사람들은 굉장한 ‘사랑 시’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사랑하는 제 친구의 아름다운 모습이 구완와사로 무너진 것을 보고 쓴 시입니다. 우리 인간은 유한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들도 결국은 늙어가다 사라집니다. 마치 너와집처럼,
산에서 내려와 바로 쓴 시가 너와집입니다.
저는 보통 시를 쓸 때 퇴고에 퇴고를 거듭합니다. 그런데 이 시는 퇴고 없이 한 번에 썼습니다. 이 시로 200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게 되었습니다.
갱년기 우울증을 겪던 저는 이 시로 갱년기를 날려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이 이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결국 산이 갱년기에 생기는 우울증을 이겨내게 했으며 나에게 빛나는 순간을 안겨 준 셈입니다.
동네 뒷산에 다니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중풍을 맞아서 반신불수의 몸으로 산을 오가는 사람, 살을 빼고자 하는 아주머니들, 데이트하는 사람들, 배드민턴 치는 사람들, 개와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 등. 그 사람들을 소재로 저는 많은 시를 썼습니다. 결국 사람 사는 세상을 그리는 게 시인의 몫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나이가 들어서 시를 썼기에 시간의 흐름을 가장 많이, 그리고 자주 느낍니다. 푸른 송진 냄새 가득했던 너와집처럼 우리도 눅눅한 시간이 쌓여 웃자란 바람이. 안개가, 구름이 허물어진 내 몸을 골라 밟아 갈비뼈가 하나씩 부서져 내리고 쇄골뼈도 툭 불거지겠지요.
3. 고통을 승화시키는 힘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 들어 볼래요, 엄마
나는
아파트 놀이터 옆
빛 고운 살구나무가 되고 싶었어요, 엄마
봄 햇살에 엄지손가락을 빨며 서있었는데
자줏빛 가지를 친친 감으며 기어 올라왔어요, 뱀이
연둣빛 여린 잎새를 으깨고
미처 돋지 못한 꽃눈도 뭉갰지요
한낮의 고요함 속에서
힘껏 가지를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았어요
구름 조각이 기나긴 시간을 옮기고
어둡고 축축한 달이 부풀어
둥글게 무덤을 만들었을 때
엄마의 따뜻한 젖이 그리워졌어요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는 않아도
입속에 번지는 젖비린내는 나의 유적(遺蹟)이잖아요
난 선한 눈망울을 주렁주렁 매단 살구나무가 되고 싶었어요
탐스러운 가지로 피리를 만들어
푸른 달밤에 나란히 앉아 맑은 노래를 부르고
엄마를 편히 앉힐 의자가 되고 싶었는데
그래도 내 꿈은 사라지지 않았어요
나무 그늘에서 낮잠 한번 주무시고 나면
눅눅한 장마가 지나고, 환한 봄날이 다시 올 거예요
그 때, 나는 꽃눈을 활짝 틔워 달고
미연이와 지승이*와 아파트 놀이터에서
시들지 않는 노래를 부를게요, 엄마
이제 울지 말아요.
* 미연과 지승: 용산과 제주에서 성폭력 당한 후 살해된 아이들.
-『루낭의 지도』, (채문사)
“불타는 오디나무의 노래”와 “너와집”은 저의 개인적인 체험에서 우러나와서 쓴 시이고, 이 시는 원고청탁으로 쓴 시입니다. 용산 가족공원에 시비가 있습니다.
2008년 등단한 해, 여성가족부에서 아동 성폭력 예방의 날에 낭독할 시를 써달라는 청탁이 왔습니다. 2006년 2월 22일 용산의 초등학교에서 한 여아가 성폭력을 당한 후 살해된 사건을 계기로 무고하게 죽은 여학생을 추모하고 성폭력을 근절하자는 취지에서 2월 22일을 ‘아동 성폭력 예방의 날’로 정해서 해마다 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여성가족부의 의뢰를 받고 시를 써서 2008년 대방동 여성회관에서 시 낭독을 했습니다. 시 낭독을 하는데 객석 여기저기에서 흐느끼는 소리에 낭독을 겨우 하고 내려왔습니다. 그 시가 용산 가족공원에 시비로 세워졌습니다.
동일한 제재를 취하더라도 시인마다 그것을 동일하게 표현하지 않습니다. 시인마다 각자 심미안과 개성이 있고, 사물을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서정시가 객관 세계의 어떤 대상을 통해서 얻은 감흥이라고 볼 때, 우리는 대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태도가 어떤 것인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대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태도에 따라 ‘살구나무’라는 제재를 갖고도 시인마다 다르게 표현합니다.
이 시에 나타난 핵심적 이미지인 '살구나무’는 우리에게 단순하게 감각체험만을 재생시키는 정신적 이미지가 아닙니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시적 의미, 관념, 주체 등을 빗대어서 표현한 대상물입니다.
즉 '살구나무'는 우리 독자들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짚어내야 할 시적 의미들을 표상하고 있는 비유적 이미지입니다. 복숭아, 자두, 살구는 오래전부터 우리의 고향집 마당 한자리에 자리 잡고 있던 과실수입니다. 연주황색 과실의 부드러운 과육은 더없이 과즙이 풍부하고 새콤달콤합니다.
살구의 연주황색과 부드러운 과육은 마치 아이의 살 같습니다. 아이들의 얼굴과 피부, 그리고 새콤달콤한 맛이 미처 자라지 못한 아이들 같은 살구. 화자는 봄 햇살에 엄지손가락을 빨며 서 있었는데, 뱀이 자줏빛 가지를 친친 감으며 기어 올라왔어요. 뱀은 힘껏 가지를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았어요. 화자는 살구나무의 탐스러운 가지로 피리를 만들어 푸른 달밤에 나란히 앉아 맑은 노래를 부르고 엄마를 편히 앉힐 의자가 되고 싶었는데 결국 엄마를 앉히지 못하고 말았지요.
그러나 ‘그래도 내 꿈은 사라지지 않았어요’라는 화자의 진술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화자는 고통스럽게 이승을 떠났어도 엄마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시는 고통 위에서 피지만, 그 고통을 승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4. 한 편의 시가 태어나는 과정
날아라, 수만 개의 눈으로
나는 꽃과 입 맞추는 자
당신의 어깨 뒤로 태양이 뜰 때
목부용 꽃 앞에 가만히 떠 있네
연둣빛 숨결을 내쉬며
미로를 헤집던 가늘고 긴 부리
이슬 젖은 나뭇잎을 뚫고 세상의 폭포를 지나가네
공중비행하며 세상을 바라보네
결코 지면에 앉는 일이 없지, 나는
맨발로 하늘을 가르는 작은 벌새
온몸이 팽팽해지고 용기가 넘치네
두려움 모르는 나의 날갯짓에
검은 그늘 번뜩이는 매도 떠밀려가고 만다네
나는 지금 꽃의 나날
연분홍 봄을 보며 독도법을 익히리
비바람 천둥번개가 북적거리는데
배 밑에는 짙푸른 여름이 깔려 있네
천변만화의 계절을 갖기 위해
나는 꽃과 입 맞추는 자
꽃이 있다면 계절의 뺨은 늘 환하네
-『태양의 혀』, (채문사)
이 시도 고대신문 60주년을 맞이하여 청탁받아서 쓴 시입니다. 시를 청탁받을 때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시 읽을 대상이 누구인가? (연령, 환경, 매체 등)
둘째, 어떤 제재를 갖고 올 것인가? (객관적 상관물)
셋째, 제재의 이미지와 의미를 연상하는 과정
넷째, 시상 전개 구상의 과정
다섯째, 집필과 퇴고의 과정을 거쳐서 시 한 편을 완성합니다.
1, 고려대학 신문에서 청탁이 왔으니 시를 읽을 대상은 젊은 학생들입니다.
2, 대상이 정해졌으니 어떤 제재를 갖고 올까? 많은 고민 끝에 벌새를 택했습니다. 벌새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입니다. 작지만 지상에 앉는 법이 없지요. 꿀을 먹을 때도 날갯짓을 하고 쉬지 않고 수만 리 길을 날아가기도 합니다.
3. 벌새를 택한 것은 젊은 학생들을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은 지금 한창 피어나는 꽃의 나날입니다. 그 꽃과 작은 벌새의 이미지는 젊은이들과 딱 맞는 이미지입니다.
4. 시상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이미지의 배열과 통합, 확산과 집중, 시적 정서의 발단과 고조 등에 대하여 면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날아라, 수만 개의 눈으로”의 시상 전개는 벌새가 - 세상의 폭포를 지나가고- 맨발로 하늘을 가르며 공중 비행한다- 온몸이 팽팽해지고 용기가 넘치는 벌새의 날갯짓에 검은 그늘 번뜩이는 매도 떠밀려가고 만다- 벌새는 지금 꽃의 나날, 연분홍 봄을 보며 독도법을 익힌다- 벌새의 배 밑에는 비바람 천둥·번개가 북적거리는데도 짙푸른 여름이 깔려 있다는 시적 전개를 펼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벌새는 20대 젊은이의 이미지이면서 메타포입니다. 그런데 요새 젊은이들을 보면 이러한 패기가 없어서 안타까워요.
오히려 60이 넘은 제가 시에 대한 열정이 벌새처럼 가득하답니다.
저는 지금 꽃의 나날입니다. 천변만화의 계절을 갖기 위해 나는 꽃과 입 맞추는 자입니다.
꽃들의 발소리
아타카마 사막
아무도 살 수 없는 불모의 땅이었다
몇 천 년 만에 폭우가 내렸다
내 생애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넘실대는 활자를 품고
달의 계곡을 걷기 시작했다
모래 바람이 부풀고 있다
싹트던 문장들이 낙타 등에서 곤두박질쳤다
발길에 채이고 짓밟히며
죽음의 계곡으로 떨어졌다
찢어지고 젖어 알 수 없는 문자들
이름 한 번 얻지 못한 사막 깊은 곳에서
뜨겁게 달궈진 시가 훗날 발굴될 수 있을까
빗방울을 발목에 걸고
내일 또 내일을 걸어야겠다
흔적 없이 또 사라질지라도,
-『흰 당나귀를 만나보셨나요』, (채문사)
저는 제가 시를 쓸 줄 몰랐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품었던 문학의 꿈은 소설 쓰는 일이었습니다. 시는 천재만이 쓰는 건줄 알아서 시인은 꿈도 꾸지 못했지요. 그런데 제 생애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이 생겼습니다. 아무도 살 수 없는 볼모의 땅 이타카마 사막에 비가 내리듯 저에게도 뜨겁게 달궈진 문장이, 시가 싹을 틔웠습니다. 이름 한 번 얻지 못해도, 흔적 없이 사라질지라도 저는 빗방울을 발목에 달고 내일 또 내일을 걸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시인은 어떠한 마음으로 시를 써야 하는지 또한, 시를 쓰는 시인의 자세는 어때야 하는지, 시가 찾아오는 순간, 그리고 시의 힘, 시를 창작하는 과정, 그리고 앞으로 저의 계획을 이야기했습니다. 제 강연이 여러분들의 시 창작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으로 제 강연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