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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고를 패서 아궁이에 넣는다. 거기다 학을 삶아 먹는다?
요즘 이런 장면 볼 수 없는 일이라 방송에서 '살풍경'을 주제로 글을 썼다.
왜 그랬을까? 더구나 선비가 이런 짓을 했다는데 이유가 있을거다.
만화방창 봄꽃이 활짝 피었는데 땀에 젖은 잠방이를
새로 핀 꽃송이 위에 걸쳐 말린다? 참 요즘 말로 죽인다 소리 밖에.
지금도 자주 쓰고 있는 '죽인다!' 물론 어감이나 의도한 바가 옛날과 다르지만
죽인다는 말은 예전에도 자주 썼더란거다.
옛 선비들이 죽이는 풍경으로 꼽은 베스트 살풍경을 보자.
요즘과 비교하면 세상 많이 변했구나. 인생살이 뒤집어져도 한참 뒤비졌구나 싶을게다.
만당(晩唐)의 시인 이상은(李商隱)의 《의산잡찬(義山雜纂)》을 보자.
좋은 풍경을 죽이는 장면들, 멋진 흥을 확 깨게 하는 살풍경(殺風景)을
이렇게 꼽는다. 맑은 샘에 발 씻기〔淸泉濯足〕, 꽃 위에 잠방이 말리기
花上曬褌〕, 거문고로 불 때고 백학 삶아먹기〔燒琴煮鶴〕,
소나무 아래서 고관 행차요 길 비키시오 갈도하기〔松下喝道〕
이밖에 여러가지가 있는데, 조선의 선비들이 살풍경으로 꼽은 게 참 가관이다.
선방에서 수도를 오래 했다는 선승이 해동청 보라매로 사냥하는 모습. 어떨까?
토굴에서 장좌불와長座不臥 수도함서 삐쭉 마른 몸보신 하려구
보라매야 토끼 한마리 잡아 와라. 날렸던걸까?
잠시 거문고 패서 아궁이에 넣어 백학을 삶아 먹은 죽이는 풍경을 보자.
만약에 나라면 그리 했을까? 망설였을 거 같다.
썩을놈의 가난 땜에 가마솥 뚜경 여는 소리 들은지 사나흘 됐는데
친구가 술 한병 들구 왔다. 마누라는 궁한 살림에 머리 잘라 삭발한지 오래됐고
책을 팔자니 남은 책도 없다. 친구도 그냥 친구가 아니라 죽마고우에 너 죽으면
내가 못 살지. 했던 벗인데. 얼음장 방안에 벌써 기침을 해댄다.
마지막 자존심으로 세워 둔 빈방의 거문고가 보인다.
학처럼 살겠노라며 겨우 구해 벗 삼은 학 한마리를 두 눈 질끈 감고 잡는다.
그래봐야 얼음장 뎁혀질 것두 아니고, 없는 집에서 깡 마른 학 다리 뜯을게 없을건데
거문고는 아궁이에서 소신공양을 하고 학은 우정을 위해 가마솥에서 순교한다.
살풍경 할 수 밖에 없었던 옛 사람들. 차마 그짓은 말았어야지 하면서도
그리 살 수 밖에 없었던 사연이 있더란 소리다.
조선 선비들이 꼽은 살풍경 중에 꼭 찝어 나무랄 수 없는 살풍경도 나온다.
어여쁜 여인이 꽃 앞에서 훌쩍 훌쩍 우는 모습이다.
꽃들은 저리 곱게 피어 날 보라며 봉오리 활짝 열었는데
옷고름 질끈 고쳐 매며 생이별로 울어야 했던 여심에게도 어찌 사연이 없었으랴.
危語내기란 놀음이 있었다. 그나마 이런 말놀음 할 정도면 먹고는 살만 했나 보다.
위어란, 말만 들어도 위태위태 절벽에 매달린 듯 아슬아슬한 위험상황을 서로 말하며
한번 웃어보는 내기였다.
진(晋) 환현(桓玄)이 은중감(殷仲堪)이란 자와 위태로운 말 놀음 했던 걸 잠시 돌아보자.
눈 먼 장님이 외눈박이 조랑말을 타고서 살얼음판 연못 쪽으로 가고 있다.
살풍경 하면서 불쌍하면서 아슬아슬 애가 타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시대 죽이는 풍경, 살풍경은 어떤 장면일까?
방송글에다 이런 말을 했었다. '무대에서 두 연인이 이별할 수 없다며 끌어 안고
그윽히 바라보는데 객석에서 드르렁 코고는 소리가 날때'
소리로 잡은 살풍경 한 장면이었다.
우리시대 위태롭고 살풍경한 상황 어떤게 떠오르나?
'빙어축제장에 피라미 몇 마리 잡았다고 펄쩍 뛰는데 얼음장이 갈라진다'
'조합장 나간다고 밥 한끼씩 먹은게 들켜 50만원 벌금 세번 내게 생겼다. 농협축협수협
빌어먹을 라면 한개면 차는 뱃속인데, 깡술 마시고 후보랑 멱살잡이 하는 사람들'
'스키나 잘 타지. 멋진 여성 뒤태에 아차! 끝도 없이 미끌어져 발목 삐고 징징우는 사내'
'멀쩡한 사내가 공원벤치에 앉아 있다 좌우를 보며 담배꽁초를 줍는다'
'지옥철 9호선 출근길에 매달린 사내를 푸시맨이 밀어넣는데 앞에 여성이 소리지른다'
위험하고 살풍경한 우리들 모습이 어디 한두가질까?
그래도 난 조금 나은 편이다. 거문고 두대가 아직 등 뒤에 서 있으니 말이다.
(방송원고 끝에다 당나라 이상은 시 몇수 옮겨 봤다. 탐미주의자 이상은 민낮도 훔쳐보자)
♣ 고전코너 ‘고전 사랑방 --- 살풍경을 말한 선비들 고사 ’
남 고전 속에 마음의 양식과 사설 속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찾아 보는 ‘고전 사랑방’
오늘은 ‘살풍경을 말한 선비들 고사’입니다.
여 ‘살풍경’은 지금도 쓰는 말이죠. 우선 경관을 해치는
행동들부터 생각나는데요.
남 풍경은 좋은데 그걸 깨는 사람들 모습을 살풍경하다.
조금 더 심하게 말하면 살기를 띈 풍경일수도 있구요.
여 예전 사람들도 ‘살풍경’이란 말을 지금처럼 썼을까요?
남 원래 ‘살풍경’이란 말은 당나라 시인 이상은이 ‘의산잡찬’에다
기록한 게 전해진 거거든요.
여 당나라 시인 이상은이 찝어낸 살풍경한 장면은
어떤 풍경인지. 궁금하네요.
남 우선 ‘청천탁족’을 살풍경하다고 했죠.
여 이건 무슨 말인지 감이 오네요. ‘청천’은 맑은 샘물이잖아요.
탁족은 발을 담군다. 애고, 맑은 샘물에 발 담근 모습
흥을 확 깨죠.
남 그 다음 살풍경은 ‘화상쇄곤’ 활짝 핀 꽃 위에다가
땀에 젖은 옷을 펼쳐 말리는 겁니다.
여 꽃송이 위에다 옷을 확 덮어 말려요? 아니 아니올시다죠.
남 그 다음 살풍경은 약간 충격적인 풍경인데요. 여기 보세요.
여 ‘거문고 쪼개서 불 때고 학 잡아 삶아 먹기’ 아우 이걸
멘붕이라고 하나요. 완전 깬다고 하나요?
남 그냥 속된 말로 죽인다 소리가 그런 모습 아니겠어요.
시인 이상은이 본 살풍경 중에 이건 참 우스꽝 스런건데요.
‘송하갈도’가있죠.
‘소나무 아래서 오가는 사람들 물렀거라 사또 행차다’
여 아니 길바닥에서 하던 걸 어떻게 산중에서 물렀거라 소리래요?
남 오죽이나 행세하고 싶었으면 산중 소나무 아래서도
영감님 행차시다 물렀거라~~ 했겠어요.
시인 이상은이 말한 살풍경 중에는 보름달이 휘영청
밝았는데 횃불을 잡고 있는 모습도 있구요.
여 꽃 앞에서 징징 거리고 우는 모습도 살풍경이라 했네요.
하긴 이쁜 꽃 앞에서 훌쩍 훌쩍 우는 모습 흥을 깨지요.
우리네 선비들이 말한 살풍경은 어떤 풍경이었을까요?
남 고려말 학자였던 이달충이 말한 살풍경을 보면
그 시대 풍경화 한두장면 엿 볼 수 있죠.
고려말 요사한 승려 신돈한테 공개석상에서 주색을 밝힌다
직언을 했던 인물이거든요.
여 그때 신돈 한마디면 생사가 오락가락했을건데.
요승 신돈에게 주색을 삼가라! 세네요. 이달충 기백을
알만 하네요. 그 이달충은 어떤 장면을
살풍경이라 했을까요?
남 ‘산중에 그냥 스님도 아니고 선승이 매를 날려 사냥한다’
장님이 눈 먼 말을 타고 간다.
여 아주 따끔한 일침이 들어있는 구절이군요.
수도를 오래 한 고승이 해동청 보라매를 날려
매사냥 하는 모습 이건 살 떨리는 살풍경이죠.
남 그렇다면 요즘 보는 살풍경 한 장면 꼽아볼까요?
여 ‘무대에 연인끼리 울며 이별하는데 객석에서 난 코고는 소리’
남 ‘축구 하다말고 우리 선수 뺨이고 머리고 후려치는 우즈벡 선수’
여 살풍경하기만해요? 오늘 하루 살풍경 보시지 말구요. 좋은풍경들~
‘고전 사랑방’ ‘살풍경과 선비들 고사’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남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카페에서 계속 하도록 하겠습니다
유난히 특별한 거, 이쁜 거 좋아 했던 이상은(李商隱)
궁녀랑 사랑했는가 하면 수도하던 여도사와 깊은 수렁에 빠지기도 했다.
문장 꾸미기를 좋아하고 좋은 말로 미학적이요. 그냥 기묘하게 튀기 좋아했던
그는 중국 거문고 50줄 짜리 앞에서 한줄 한줄 살아 온 이야기가 들린다며
결국 50도 못 돼서 사라지고 만다.
제목없음. 그냥 노래 할꺼임 <無題>란 제목으로 남긴 시에는
알아서 느끼라고, 당신 느끼는 만치 가져가라고 내논 수수께끼 상자 같다.
아래 '무제'란 시 한편은 그래도 이해 될만한 구절이 많아 옮겨서
요즘 어감으로 바꿔 번역해 봤다.
<무제(無題)>
相見時難別亦難
우리 만나기도 어려웠지, 이별하긴 심난하구!
東風無力百花殘
동풍 맥 풀리니 꽃들도 시들코들
春蠶到死絲方盡
봄날 누에 죽어야 비단 나오지?
蠟炬成灰淚始乾
촛불 타버린 곳에 촛농 눈물 말라 굳어있구
曉鏡但愁雲鬢改
새벽 거울 속 삐쭉 말라 한숨짓는 얼굴
夜吟應覺月光寒
밤인데 노랜 무슨 노래 달빛조차 차가운데
蓬萊此去無多路
봉래산 한번 가면 다시 올 길 없을건데
靑鳥殷勤爲探看
서왕모 저 청조야 신선 소식이라두 전해 주던가?
이상은
타버린 촛불이 남긴 굳은 눈물을 보면서
애타게 기다렸던 게 누구였을까?
궁녀였을까? 여도사 였을까?
차라리 궁안에서 황제가 부르는 소리를 기다렸던 건 아닐까?
불운한 그는 재주에 비해 그럴싸한 감투도 못 써보고
지역 도지사 한테 겨우 이쁨 받는 정도였으니 한도 많았겠지.
작은 두보라 소두(小杜)라고 했다니.
이왕 이름 낼 거면 자기 목소리로 냈어야지. 그도 한이 될 소리고...
《李商隱 代贈詩》한구절에, 그가 단지 특별하게 이쁜 여성들만 기다린게
아니란 걸 보여준다 “파초 잎은 피질 못하고 정향이 맺혀 있으니, 봄바람
향해 너나 나나 수심 이구나.
[芭蕉不展丁香結 同向春風各自愁]
돌돌 말려 있는 파초잎. 반반하게 펴줘야 할 파초잎이 돌돌 말렸더란 소리다.
그런데 정향이 맺혀 있단 소리는 무슨 말인가?
중국 황실에 계설향(鷄舌香)은 정향(丁香)을 말하는데, 장관급 상서(尙書)가
전각에 올라 일을 아뢸 때 입에 머금었던 향이란다.
결국 이상은 자신도 그 정향을 머금고 돌돌 말린 파초잎 아픔으로
살았더란 소리다. 그러니 사십대 중반에 요절 할 수 밖에.
그는 자신의 운명을 예언하듯이 그 젊은 나이에 이런 시구절을 남긴다.
<낙유원(樂遊原)〉시 구절 중. “해 저문데 울적 한 맘, 수레를 내몰아 높은
언덕에 올라봤네. 석양놀 참 곱기도 하지. 근데 벌써 해지는 황혼이라니...
向晩意不適 驅車登高原 夕陽無限好 只是近黃昏
아마도 촉나라 한 구석에 지내면서 장안 땅을 몹씨도 그리워 했을
이상은은 친구를 그리워 하는 그 구절 처럼 실은
장안의 지엄한 분 부름소리를 간절히 기도 했으리라.
〈야우기북(夜雨寄北)〉 구절 중 “자네 언제 쯤 오는건가,약속 할 수 없단건가?
파산 밤비소리, 가을연못에 넘쳐 나네, 언제나 서쪽 창문 아래 다시 등불켜고
지난 날 파산의 밤비 내리던 그 이야기 해볼건가. 비가내리네 밤새껏
君問歸期未有期 巴山夜雨漲秋池 何當共剪西窓燭 卻話巴山夜雨時
버들 같이 살고 싶었던 걸까? 그가 남긴 '버들'이란 노래에
전에 봄바람이랑 춤자리를 쓸었지 / 曾共春風拂舞筵
맑고 화창한 숲에 놀면서 간장녹인 이별도 봤고 / 樂遊晴苑斷腸天
매미야 넌 어쩌다가 이 가을까지 온게냐? / 如何肯到淸秋節
석양도 서러운데 니가 우니 목이 잠긴다 / 已帶斜陽更帶蟬
그가 말했던 살풍경을 쓰다보니 예까지 왔다.
살면서 오죽 살풍경한 꼴을 많이 보고, 자신도 살풍경하게
살 수 밖에 없었을까 싶다. 그래서 버들도 가을 매미 우는 소리에
목이 잠겼더란 소리다. 그래두 우린 더나 살풍경한 꼴 보면서
우선은 버들처럼 견뎌 볼 일이다. 봄날이면 꾀꼬리만 오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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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살풍경....옛사람들의 살풍경은...냉엄하고 절박한 생존 앞에 행해진 서러운 현실.
물론 소나무 아래서 '물렀거라 행차시다'하는 류의 제대로 살풍경도 있지만
지금 사람들의 살풍경은 꼴불견이란 말이 어울리는 것 같네요.
시인을 추억하는 맘으로 간단히 이상은을 돌아 봤는데
요즘 살풍경 하나 하나 꼽자니 추한 꼴만 나오겠지요.
그래도 요즘 분들 '죽인다/ 쥑인다' 소리 많이들 하며 지내죠.
기분 좋아서 쥑인다. 재미 있어서 쥑인다 소리도 하던데, 그 재미꺼리도 따지고 보면
살풍경 하더군요. 옛 스러운 조금은 운치 있는 살풍경 뭔가 둘러보는 중입니다.
당나라 말년의 시인 이상은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됐네요 벵셉님 덕분에.
불운한 천재시인 이상은, 소두라고 불렸다죠?
두보는 불운하지 않았나요? 이백은요?
그렇지만 특별한 감성과 심미안을 갖고 있으면서
자신의 삶은 잘 풀리지 않아 살풍경한 생을 보내야만 했다면
그것은 형벌이지요. 차라리 둔탱이로나 태어났더라면 죽기보다 더
맘에 안 들게 산다고 느끼진 않았을 것 아니냐고요?
눈물 한방울 보태었습니다 그의 상처받았을 삶에!
주제 따라 가네요. 살풍경 하게시리. 어제는 친구 떠나 울더니.....
우리 시대 살풍경을 바로 볼 눈길이 필요한 때 아닌가 싶구요.
이도 역시 드러내 말하고 싶지 않은 살풍경이지만 사실인데...?
해외 직구로 들어 온 마약에 취해 '쥑인다' 하구 있을 청소년도 있다는 오늘이랍니다.
지금 쓰는 쥑인다 사례들 보면 참 살풍경 하더군요. 맛이 좋아서 쥑인다.
술맛나서 쥑인다. 여자가 어째서 쥑인다. 대박나서 쥑인다.
죽일게 많대는건지. 죽을 일이 많대는건지. 둘 다 많대는거겠지만
다행이, 풍류당에서 소리하며 얼씨구! 내지르는 소리에 그딴 살풍경들
조금 씻는게 아닌가 싶네요.
많이 얻어듣고 배웁니다. 선생님의 '여직' 삶아지지 않은 거문고가 마음 살이의 살림 밑천이군요...^^
구 선생님 2월에 신문에 올리실 글이 기다려 집니다.
욕심 많게 거문고 두대씩이나 놓고 각방쓰며 별거 중이니 이도 서로 못할 짓이죠.
올 봄에는 거문고랑 합방을 하렵니다. 근데 차마 버리지 못한 연습용까지 세대거든요.
어찌 합방하나? 연습용은 남이 버린 걸 수선해 데려 온 거라서 설움이 더나 클텐데
돌아가며 거문고 술대로 오동복판 두들기며 살풍경한 세월을 희롱해 봤음해요.
올해 구샘과 김화백님 붓으로 녹여 낼 살풍경한 세상살이 사연들 기다려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