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기간 동안 공부방을 쉬다가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중학교로 올라가는 애들이 몇 명이나 계속해서 공부방을 할 수 있을지.
오늘 참석한 애들은 중학생이 넷, 초등학생이 넷이다. 사실 놀랐다. 상급학교로 올라가는 아이들은 중학교에 적응하느라 대부분 그만두게 될 줄 알았다. 그럴 수 밖에 없을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계속해서 해보겠다고 온 아이들이 이렇게나 될 줄이야. 하지만 여덟 명의 아이 중 몇 명이나 자발적인 의사로 와서 앉아 있는 걸까? 부모의 반 강제적인 압력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와 있는 애들도 있지 않을까?
글쓰기 공부방을 하는 게 학과성적을 올려주는 거와는 거리가 멀다. 그 시간에 과목 공부를 하면, 학교성적을 다문 몇 점이라도 더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공부방에 왔다는 건 어찌 보면 현실감각이 떨어진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다. 아니면 무모하리 만큼 용감하거나.
한 시간 조금 넘게 1장 "야성의 시대"를 읽었다.그 이후부터는 필사하고, 생각과 느낌을 나눈다. 방학을 쉬어서 자세가 흐트러져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조용히 집중하며 줄거리를 따라간다. 소설속의 이야기를 자기 생활로 가져와 이야기를 나눈다. 제일 먼저 발표하겠다고 나선 아이는 승욱이다. 글을 읽으면서 틀림없이 할아버지에 대한 친밀감, 따뜻함, 고마움을 이야기 하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내 예상대로다. 건우는 그 특유의 하이 유머로 엄마 아빠의 이중적인 면을 예리하게 꼬집는다. 엘리베이트 올라오는 소리만 듣고도 우리 가족이라는 걸 직통으로 알 수 있다고 말할 때는 건우네 가족풍경이 눈으로 그려졌다. 희윤이는 여자 어른들도 덕국(독일)물감 앞에 사족을 못 쓰고 어린 아이처럼 유치하게 굴 때도 있다는 걸 알고 우스웠단다. 하지만 부모는 옛날이나 오늘날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맏며느리의 도리를 저버리고서라도 더 많은 것을 희생하는 분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고. 찬울이는 동풍을 맞으신 할아버지가 우체부를 붙들고 늘어져 한참이나 이야기 하시는 걸 보니 몸이 온전치 못하게 되신 할아버지의 답답함과 외로움이 느껴졌다고 했다. 아진이는 할아버지가 손녀를 바라보는 눈길 속에서 속마음을 표나게 드러내지는 않지만 어린 나이에 아비를 잃은 손녀를 얼마나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사랑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훈훈한 입김과 술냄새는 항상 자기에게 오냐오냐 하면 모든 것을 다 받아 주시던 외할아버지 생각을 나게 했다고. 보민은 맹장염이 터져 돌아가신 작가의 아버지 이야기에 삼촌의 일을 떠올렸으며 항상 사촌언니를 싸고 도는 할아버지의 편애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었다. 찬솔은 두루마기에서 먹을 거를 주섬주섬 내어 주시는 할아버지는 자기에게 맛있는 과자를 사 주시던 외할아버지 떠올리게 했다고. 고원은 모든 것이 자기 관점에서 시작된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옛날 아이들과는 달리 코를 흘리지 않는 요즘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의 비유로 시작했다.
나는 이번 봄방학 마지막에도 학교에서 웹툰 속의 이야기를 마치 현실세계로 착각하여 엄청난 일을 저지른 아이의 사건해결과정으로 바빴다. 그래서인지 인터넷, 스마트 폰, 키즈클럽이라는 말만 들어도 또 무슨 사건이 터진 게 아닌가 하고 걱정부터 앞선다. 아이들이 제대로 자라기 힘든 유혹들이 도처에 널려 있어 겁난다.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면 아이들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사건이 생겨 학교에 오게 되는 부모의 말은 하나 같이 똑같다. 설마 우리 아이가요? 설마 그런 일을 우리 애가요? 학교에서 사흘이 멀다하고 이런 일을 겪다보니 진짜 알 수 없는 게 아이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현실에서 아이들이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그런 세계에서 벗어나 두 세 시간이라도 좋은 책을 읽는 시간을 갖는다면? 함께 모여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며 자기 안의 선하고 좋은 것들을 살려낸다면? 비록 그게 학과 점수와는 거리가 먼 일일지라도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