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성의 법칙과 잠재성향>
정신영역에서 한번 형성된 것은 그 무엇도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모든 것은 어떻게든 보존되며 적당한 상황이 오면 재생하거나 재발하게 된다. 이것을 일러 ‘잠재성향’이라 한다. 물리법칙으로 관성의 법칙이 있다. 뉴턴의 운동법칙중 제 1법칙인 ‘관성의 법칙law of inertia’에서 慣性관성을 “외부에서 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운동하는 물체는 계속 그 상태로 운동하려고 하고, 정지한 물체는 계속 정지해 있으려고 한다.” 힘에 의해 속력과 방향이 변하기 전까지 물체는 항상 기존의 운동 상태대로 움직이려고 한다는 의미이다. 움직이지 않는 물체가 힘이 작용하기 전까지 정지 상태로 유지되는 것도 포함한다. 관성(inertia)의 어원은 ‘게으르다, 쉬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iners’이다. 뉴턴은 그의 책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에서 관성을 제1법칙으로 정의했다. 바위는 자연의 힘이든지, 기계나 인간의 힘이든지 간에 누가 건드리지 않은 한 부서져 먼지가 되어 날릴 때까지 거기에 그대로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활력이 없고, 부동이며, 고정이며, 완고하며, 살아있는 것이 아니며, 나태하며,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잠을 자는 중이며 죽은 것이다. 누가 바위의 잠을 깨울 수 있으랴. 사람도 그와 같다. 외부로부터 예기치 않는 충격을 받거나, 아니면 누군가로부터 교육을 받고 가르침을 받지 않는 한, 그래서 자기 스스로 변하려고 마음먹지 않는 한 이제까지 해온 대로 살아갈 것이다. 그것은 ‘산다.’고도 할 수 없고 제 버릇대로, 제 성격대로, 타인이 시키는 대로, 세뇌된 대로 ‘살아지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관성의 법칙에 지배를 받는 바위나 나무토막과 다름이 없다. 그것보다 조금 나은 것으로는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로봇이다. 대다수가 그렇게 살고 있으므로 대중의 정치사회경제활동을 통계 내어 예측할 수도 있고, 조작하거나 통제할 수도 있는 것이다.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외부의 힘에 비로소 움직이는 인간들을 조작하거나 통제하기는 얼마나 쉬운가?
관성의 법칙은 물질계를 지배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영역에서도 통용되며 우리 생활을 거의 무제한으로 통제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사람들은 자신의 습관이나 버릇을 쉬 바꾸지 못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흔히 ‘관성적이다, 타성에 빠졌다.’라는 표현을 쓴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게 그 말이다. 드라마를 만들 때도 시청자들의 관성은 중요한 고려 대상이다. 방송 관계자들은 시청자들은 보던 드라마를 계속 보는 습성이 있다는 걸 방송관계자들은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드라마를 만들 때 초반에 많은 물량을 투입하곤 한다. 처음에 시청자들의 눈길을 잡아 둬야 그 관성으로 일정한 시청률을 확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태양의 후예>, <연개소문>, <주몽>, <태왕사신기>, 그리고 <선덕여왕> 등 대작이라고 부를 만한 드라마들은 대부분을 처음4회 이내에 해외 로케이션 장면을 넣거나 대규모 전투장면이나 화려한 컴퓨터그래픽CG을 배치해 초반에 시청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이렇게 확보된 시청률이 약 20%를 넘어서면 방송사는 으레 방영을 연장할 대비를 한다. 보던 관성이 있으니까 몇 회 더 늘려도 시청자들은 계속 볼 것이기 때문이다.
관성의 법칙은 외부에서 힘이 작용하지 않을 때 성립한다. 이 말을 뒤집으면 외부에서 힘이 작용할 때 관성은 깨진다. 관성을 바꾸고 싶으면 밖에서 어떻게든 힘이 작용해야 한다. 작심삼일로 끝나기 일쑤지만 사람들이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것도 자신의 관성을 바꾸려는 시도이다. 외부의 힘이 없이 자기 혼자서 관성을 바꾸기란 무척 어렵다. 이처럼 개인이든 조직이든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잘못된 습관을 고치기 어려우면 외부의 힘을 적절하게 이용하는 것이 좋다. 외부의 힘에 기대거나 의지하여 자기를 바꾸어보려고 해도 결국은 자기의 주체적 결단과 의지력이 관건이 된다. 자기가 기대하는 변화를 이루어내려면 결국 자신의 의지가 관성을 박차고 나와야 한다. 바위가 깨어나 날아오르려면 자기를 힘차게 던져 올려야 한다. 바꾸기 힘들고, 변하기 어려운 자신의 습관이나 업력만큼의 강도와 절실함이 깃든 의지와 결단이 있어야만 잘못된 길로 가는 관성을 뒤집을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엉덩이를 조금 들썩이다 주저앉고 말 것이다. 세 살 버릇은 대체로 여든까지 가게 마련이다.
부처님께서도 관성에 얽매이고 관성에 부림을 당하며 살아가는 게 중생의 삶이라고 하셨다. 관성이 제일 첨예하게 드러난 것이 탐진치 삼독이요, 열 가지 번뇌이다. 이에 덧붙여 잠들어 있는 관성도 있다. 잠들어 있는 관성은 잠재적 성향의 번뇌이다. 잠재성향을 빠알리어로 ‘아누사야(anusaya)’라 한다. 아누사야는 ‘따라 누운’이라는 뜻이고 무시(無始)이래로 중생의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는 성향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수면(隨眠)으로 옮겼고, 영어로는 underlining tendency로 옮긴다. 자기의 정신적인 흐름에 따라 누워 있다가 적당한 조건을 만나면 표면으로 드러나는 번뇌이다. 아누사야는 언제든지 튀어 나올 준비를 갖추고 있다. 적절한 자극이 가해지면 겉으로 표출 되고 자극을 주는 힘이 사라지면 다시 잠복상태로 되돌아간다. 아누사야라는 번뇌는 출세간의 도에 의하여 소멸 되지 않는 한 언제든지 다시 일어 날 수 있다. 그래서 이 잠재적 성향을 정화하는 게 수행의 전부라고 할 만큼 중요하게 다루어져야한다고 부처님께서 설하신다.
잠재성향 경1(A7:11) Anusaya-sutta
1. “비구들이여, 일곱 가지 잠재성향이 있다. 무엇이 일곱인가?”
2. “감각적 욕망의 잠재성향, 적의의 잠재성향, 견해의 잠재성향, 의심의 잠재성향, 자만의 잠재성향, 존재에 대한 탐욕의 잠재성향, 무명의 잠재성향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일곱 가지 잠재성향이 있다.
잠재성향 경2(A7:12)
1. “비구들이여, 일곱 가지 잠재성향을 제거하고 뿌리 뽑기 위해서 청정범행을 닦는다. 무엇이 일곱인가?”
2. “감각적 쾌락의 잠재성향을 제거하고 뿌리 뽑기 위해서 청정범행을 닦는다.
적의의 잠재성향을 제거하고 뿌리 뽑기 위해서 청정범행을 닦는다.
견해의 잠재성향을 제거하고 뿌리 뽑기 위해서 청정범행을 닦는다.
의심의 잠재성향을 제거하고 뿌리 뽑기 위해서 청정범행을 닦는다.
자만의 잠재성향을 제거하고 뿌리 뽑기 위해서 청정범행을 닦는다.
존재에 대한 탐욕의 잠재성향을 제거하고 뿌리 뽑기 위해서 청정범행을 닦는다.
무명의 잠재성향을 뿌리 뽑기 위해서 청정범행을 닦는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일곱 가지 잠재성향을 제거하고 뿌리 뽑기 위해서 청정범행을 닦는다.”
“비구들이여, 비구의 감각적 쾌락의 잠재성향이 제거되고 그 뿌리가 잘리고 줄기만 남은 종려나무처럼 되고 멸절되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되었을 때,
적의의 잠재성향이 제거되고 그 뿌리가 잘리고 줄기만 남은 종려나무처럼 되고 멸절되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되었을 때,
견해의 잠재성향이 제거되고 그 뿌리가 잘리고 줄기만 남은 종려나무처럼 되고 멸절되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되었을 때,
의심의 잠재성향이 제거되고 그 뿌리가 잘리고 줄기만 남은 종려나무처럼 되고 멸절되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되었을 때,
자만의 잠재성향이 제거되고 그 뿌리가 잘리고 줄기만 남은 종려나무처럼 되고 멸절되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되었을 때,
존재에 대한 탐욕의 잠재성향이 제거되고 그 뿌리가 잘리고 줄기만 남은 종려나무처럼 되고 멸절되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되었을 때,
무명의 잠재성향이 제거되고 그 뿌리가 잘리고 줄기만 남은 야자수처럼 되고 멸절되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되었을 때,
이를 일러 ‘비구는 갈애를 잘라버렸다. 족쇄를 풀어버렸다. 자만을 바르게 관통하여 마침내 괴로움을 끝냈다.’라고 한다.”
잠재성향이 완전히 정화된 사람은 얼음동굴을 깨고나온 雪龍설룡Snow Dragon이다. 大方無隅대방무우-변두리가 없는 넓은 공간-를 유영하고, 刹那永劫찰나영겁-찰나 생멸을 볼 뿐 시간이 없는 경계-에 安穩自在안온자재한다. 그런 사람이 누구인가? 아라한 성자이시며 대승보살이시다.
첫댓글 스님의 법문은
현재를 사는 저희가 배운 내용으로 설명해주시니 이해하기에 모호함이 덜 합니다.
감사드립니다~
관성의 법칙은 외부에서 힘이 작용하지 않을 때 성립한다.이 말을 뒤집으면 외부에서 힘이 작용할 때 관성은 깨진다.
잠들어 있는 관성은 잠재적 성향의 번뇌이다.잠재성향을 빠알리어로‘아누사야(anusaya)’라 한다.
아누사야는‘따라 누운’이라는 뜻이고 무시(無始)이래로 중생의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는 성향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수면(隨眠)으로 옮겼고,영어로는underlining tendency로 옮긴다.자기의 정신적인 흐름에 따라 누워 있다가 적당한 조건을 만나면 표면으로 드러나는 번뇌이다.
아누사야는 언제든지 튀어 나올 준비를 갖추고 있다.적절한 자극이 가해지면 겉으로 표출 되고 자극을 주는 힘이 사라지면 다시 잠복상태로 되돌아간다.
아누사야라는 번뇌는 출세간의 도에 의하여 소멸 되지 않는 한 언제든지 다시 일어 날 수 있다.
잠재성향으로 번뇌할 때가 많습니다.
스님의 법문은 이해하고 되돌아보고 적용해야지 라는 마음이 들게 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수행"을 잊지 않아야 함을 말씀으로 되돌아 보고 새기고 실천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바위가 깨어나 날아오르려면 자기를 힘차게 던져 올려야 한다...
바꾸기 힘들고, 변하기 어려운 자신의 습관이나 업력만큼의 강도와 절실함이 깃든 의지와 결단이 있어야만 잘못된 길로 가는 관성을 뒤집을 수 있다...
관성을 잘 길들여 정정진으로 가는 연줄로 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