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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외초등학교 43회 동기회
 
 
 
카페 게시글
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박시춘의 생애와 조명
하창목 추천 0 조회 169 14.04.09 13:4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애수의 소야곡

이노흥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 1938년 오케레코드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 만은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그 누가 불어주나 휘파람소리

 

차라리 잊어리라 맹세하건만

못잊을 미련인가 생각하는 밤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으면

애타는 숨결 마져 싸늘하구나

 

무엇이 사랑이고 청춘이던고

모두다 흘러가면 덧없건만은

외로이 느끼면서 우는 이밤은

바람도 문풍지에 애달프구나

 

 

 

 

 

                                   

 

    

박시춘의  생애와 조명

 박시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오태환

                                                                                      옛 가요 연구가 / 가수

                                                                                                           밀양연예협회 자문위원

 

   

 

    밀양아가씨 박시춘 곡 월견초 작사

 

     옥보다 더 고운 남천강 물에 

     검은 머리 곱게 감는 밀양 아가씨

     흐르는 강물 따라 가 버린 임을

     물새가 울적마다 잊지를 못해

     눈물에 아롱지는 밀양 아가씨

 

 

     표충사 종소리 물위에 흘러

     영남루를 돌아가는 내 고향 밀양

     아랑각 빨래터에 자주 빛 댕기 

     외로운 임 마중에 얼룩이 져도

     남몰래 숨어 우는 밀양 아가씨     

 

 

 

  1971년 밀양출신인 박시춘이 작곡하고 월견초가 작사하여 오아시스 레코드를 통하여 나훈아가 불러 발표한 노래이다. 이 음반 앞쪽에는 두 사람이 만들어 김태희가 노래한 남천강 사랑이 수록 되어있다.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보금자리를 튼 수많은 출향인 들이 남천강변을 거닐든 첫사랑의 로맨스 남천강 사랑과, 그 첫 사랑의 연인인 밀양 아가씨! 지금도 눈물지으며 떠나버린 나를 기다리고 있을 법한 여인과 고향에 대한 연민의 정과 향수! 아련한 추억 등 밀양의 풍경과 내음새를 적절히 표현 하였고 느낄 수 있다. 박시춘은 마음속에 간직한 고향에 대한 애착과 사랑으로 만든 이 노래를 밀양에 바쳤다.

 

남천강의 지명이 밀양강으로 바뀌고 세월 따라 사는 모습도 많이 변했지만 박시춘이 작곡한 명곡들은 쉼 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변함없이 흘러 흘러 사랑 받으며 불리어 왔다.

 

 

한국가요 100년사라 말하는데 2013년은 박시춘이 태어 난지 꼭 100년이 되는 해이다.

생애 삼천여곡을 작곡한 가요계의 대부! 그가 빠지면 우리가요 100년사는 백지와 다름없을 많 큼 박시춘은 위대한 작곡가, 가요계의 대명사, 가요계의 베토벤, 국민 작곡가등 으로 불려 졌으며 전설이며 보물이라 할 수 있다.

 

박시춘은 1913년 10월 28일 경남 밀양군 밀양읍 내일동 226번지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순동(順東)이다.

 

 

선친 박원거(남포)는 가무를 가리켜 기생을 양성하는 권번을 운영했던 분으로 당대의 명창 송만갑, 이화중선, 이동백 같은 인물들과 어울릴 만큼 국악과 노래에 조예가 깊었으며 구전으로 불리던 밀양아리랑 가락을 채보하여 지금의 형태로정리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집안의 이런 환경이 일찍 음악에 눈뜨게 하였다, 밀양 보통학교 운동회 날 서양음악을 연주하는 밴드가 첫 선을 보였는데 북소리는 들렸지만 북치는 사람이 보이질 않았다. 연주가 끝나고 키가 너무 작아 북 뒤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북소리의 주인공은 순동 이었다. 선친 박남포가 박시춘이 보통학교 1학년 때 돌아가시자 가세가 기울어졌고 가난한 어린 순동은 흘러나오는 유성기 소리에 매료되었으며 훗날 유성기소리로 하여금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과 가난의 충격에서 에서 벗어 날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열네 살 되던 해부터 이동영화를 상영하는 당시의 순업대를 따라 다니며 낮에는 북을 치고 밤에는 영사기를 돌리며 기타, 바이얼린, 아코디언 등 악기를 익히면서 유랑극단에 적응 해갔다. 떠돌이 유랑극단 생활이 이서구, 강사랑, 이봉룡, 기타스승 고가마사오 등을 만나게 하였고 시에론 레코드회사를 거쳐 당시 조선 최대의 레코드 회사인 오케레코드의 전속 작곡가로 입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박시춘이 작곡하여 남긴 소중한 보물들은 너무도 많다.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 꼬집힌 풋사랑, 울며 헤진 부산항, 감격시대, 서귀포 칠십리, 이별의 부산정거장, 거거라 삼팔선, 청춘고백등 주옥같은 명곡을 만들어 히트 시켰으며 현인으로 하여금 신라의 달밤, 비 나리는 고모령, 고향 만리, 굳세어라 금순아, 전우야 잘 자라 등을 부르게 하였다. 이외에 전선야곡, 고향초, 삼다도 소식, 봄날은 간다,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우중의 여인, 백지의 연서, 낭랑 십팔세, 돌지 않는 풍차, 벽오동 심은뜻은등 샐 수없이 많은 곡을 작곡한 박시춘 은 오향 영화사를 만들어 육체의길, 가는 봄 오는 봄, 딸 칠형제, 십이인의 야도, 님 은 가시고 노래만 남어, 이별의 강, 울며헤진 염춘교, 등으로 우리나라 영화사에도 큰 획을 그었다. 최고의 가수 남인수, 백년설, 이난영, 이인권, 김정구, 장세정, 현인, 박경원, 도미, 황금심, 백설희, 신세영, 금사향, 오기택, 이미자, 나훈아, 문주란에 이르기까지 그를 그치지 않는 스타는 없었다. 1971년 김부자의 일자상서를 마지막으로 한 그가 쌓아온 금자탑은 찬란하기 그지없다.

박시춘 선생이 남긴 찬란한 명곡들은 일제 강점기 암울한 조국이지만 희망을 갖게 되었고, 우리민족이 일제의 압박을 견디어 살아가게 한 원동력과 위로의 노래가 되었으며, 메마른 가슴을 눈물로 적시우고 하소연 할 수 없는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식어 버린 조국의 아픈 심장에 태양보다 뜨거운 노래를 심었다 할 수 있겠다.

 

맺힌 것을 풀어주는 음악!

슬플 때 울고 나면 시원한 노래! 이별이 그리워 사랑이 되고, 사랑이 그리워 한이 되는, 한은 슬프나 즐겁고, 어두우나 밝았으며 절망스러우면서도 희망 을 주는 노래! 박시춘의 노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민족의 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주는 신호이며 약이었다. 그래서 박시춘 선생과 살아온 세대에게는 박시춘은 감동어린 노래의 화신이었고 마음의 고향 이었다.

 

지난 날 음반이 귀했던 시절! 번화가 레코드 상점에서 가사를 붙여놓고 반복해서 음악을 틀어놓으면 시민들은 오고가면서 노래를 배웠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현재까지 애창되고 있는 박시춘의 노래들은 베토벤의 영웅과 전원 보다 민족을 웃기고 울게 한 훌륭한 명곡이라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오케레코드 전속 작곡가 박시춘, 작사가 조명암, 가수 남인수의 최고의 트리오는 꼬집힌 풋사랑, 눈 오는 네온가, 서귀포 칠십리, 청춘야곡, 무정천리, 여인행로 등을 히트시키는 가요황금기의 주역 이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강압에 의해 만들어진 노래 친일가요 혈서지원, 아들의 혈서. 결사대의 안해, 등이 가수 남인수, 백년설, 이난영, 박향림 등의 입으로 불리어졌다. 일제가 볼 때 최고의 가치가 있는 박시춘 외 가요인들을 어찌 그냥 두었겠는가? 목숨의 위협과 함께 통한의 눈물을 흘리면서 오선지를 채웠으리라.

일제를 찬양하는 친일의 노래를 만든 것은 잘못 되었지만 우리는 당시 시대상황과 한 맺힌 우리의 역사를 토대로 한 창가 유행가인 가요를 이해하지 못하고 친일이니 매국 이니 운운하며 지금의 잣대로 단죄함은 위험한 발상이며 흑백의 논리로 치우침은 더욱 안 된다.

박시춘과 가요인들은 대다수의 곡들로 망국의 한을 노래했고 노래로서 서로 서로를 위로 하며 다가 올 해방을 기대했다. 또 하나의 친일을 찬양하는 노래라 논란이 되던 박시춘이 작곡하여 남인수가 노래한 감격시대는 해방과 함께 일본의 패망을 기뻐하고 해방된 조국을 찬양하며 더 많이 불려졌다. 마치 해방을 예견한 노래처럼......

 

 

해방 후  가거라 삼팔선 을 작곡 하였으며 작곡가 작사가 유호, 가수 현인과 새로운 컴비를 이루어 신라의 달밤, 승리부기, 애정산맥 등을 발표 하였으며, 또 하나의 비극인 6.25가 터지자 국방부 정훈국 문예중대 2소대장으로 전장을 누비며 위문 공연과 제1훈련소가를 비롯한 많은 군가, 승리의 용사, 전우야 잘 자라, 전선야곡, 임 계신 전선 등을 작곡하여 우리 군의 사기를 높이고 조국의 미래를 위하여 싸웠으며,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 최고의 명곡을 탄생 시켰다. 전쟁 중 아군과 적군을 구분해야 할 특별한 경우 신라의 달밤을 모르면 인민군이라 했는데 인민군들도 배워서 많이 애창 했다 전한다.

 

특히 환도직후 박시춘이 작곡하여 남인수가 불러 히트한 [이별의 부산정거장]은 정전이후 포로로 잡혀있던 인민군들도 즐겨 부를 정도로 대단했으며 폐허가 된 국토가 차차 복구되면서 새 삶을 시작한 이들이 피란시절을 되새기며 치열하게 살아가려는 몸부림과 함께 더욱 애창 되었다.

 

 

이별의 부산정거장

호동아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노래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정거장

잘가세요 잘있어요 눈물에 기적이 운다

한만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있지 못할 판자 집이여

경상도 사투리에 아가씨가 슬피 우네

이별의 부산정거장

 

 

서울가는 십이열차에 기대앉은 젊은 나그네

시름없이 내다보는 창밖에 등불이 존다

쓰라린 피난살이 지나고 보니

그래도 끊지못할 순정 때문에

기적도 목이메어 소리 높이 우는구나

이별의 부산정거장

 

 

박시춘은 1940년 여수우체국에 근무하던 여수미인 김예비(현숙)를 신부로 맞이하였다.

 

 

박시춘의 곡 중 비나리는 고모령, 고향초를 즐겨 부르던 여사는 남편이 편안하게 작곡할 수 있도록 내조하였으며 6남매를 훌륭히 키우는 현모양처였다, 한때 박시춘이 제작한 영화 딸 칠형제에 출연함과 동시에 여러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박시춘은 자녀들에게는 엄하면서 자상한 아버지였으며 대인 관계가 부더러웠고 모범적인 연예인 이라 작사가 반야월이 말했다.

 

박시춘은 1963 10월에 창립된 한국연예협회의 초대 이사장과 한국가요작가 동지회 회장을 엮임하며 1982년 대중가요 작곡가로는 처음으로 문화훈장 보관장을 받는 영광을 가졌다.

 

 

1973년 대한극장 공연에서 나는 이노래를 기꺼이, 그리고 영원히 사랑했던 이 땅의 국민들게 드립니다. 라고 말한 박시춘이 1991년 제34회 밀양 아랑제행사중 밀양예총이 주관한 특별 행사 박시춘 송축대전에서 현인, 백설희, 박경원, 진방남, 신세영 등의 원로가수가 참여한 가운데 고향에서 이처럼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주신데 대하여 감사하며 ,세월은 흘렀지만 고향의 세정(世情)만은 남아 변함없다 생각되어 벅찬 감격을 억제할 수 없습니다 . 작곡생활 60년 고달픈 나그네 길 이었지만, 오직 내 노래와 내 고향 밀양이 있기에 고달프지도 서럽지도 않았다 생각합니다. 라는 인사말을 남겼다. 이후 박시춘은 온 국민의 안타까움 속에 1996년 6월 30일 83세의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진주와 함께 대중가요의 메카로 불리는 밀양에는 선생 외에도 고인이 된 작사가 월견초 (본명 서정권)가 있고, 1934년 밀양 삼랑진출신의 가수 남백송과 작곡가 고 유금춘 선생이 있다. 그리고 월견초, 유금춘, 남백송 세분의 합작으로 만든 무정항구를 당시 아리랑 레코드를 통하여 발표하기도 했다. 가요계의 살아있는 전설 작곡가 정풍송. 박정웅 선생과 초창기 은방울 자매 멤버중의 한사람 가수 김향미도 밀양 출신이다. 얼마전 남인수 노래를 가장 잘 불렀던 가수 남월수는 독신으로 밀양 상남면에서 외로이 살다 타계했다.

 

박시춘은 이 땅에 없지만 박시춘이 남긴 노래는 세월따라 노래따라 오늘도 내일도 영원 할 것이다.

 

문화와 예술 그리고 아름다운 노래가 함께 살아 숨 쉬는 도시 밀양에서 박시춘 선생의 영광을 재현하고, 박시춘 가요제 그리고 박시춘 선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박시춘 음악제 또한 세계적 가요제와 음악제로 승화 시켜 가야할 것이다.

 

2014. 1 밀양예총 예총지 기고문     

 글; 오태환

참고문헌; 100년음악 박시춘 / 박시춘 명작집 / 박시춘 학술 심포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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