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세덕 산문집 p314-316 생활철학으로서의 화이부동(和而不同)
웬만큼은 다 아는 바와 같이 이규태(李圭泰) 선생은 오랫동안 조선일보의 '이규태 코너'를 통해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종횡무진으로 독자를 폈다 놓았다 한 분이다. 23년 동안 6700편의 칼럼을 통해 내용도 풍부하지만 간결한 문장과 감칠맛 나는 글의 전개로 덜어낼수록 좋다' (Less is more. The less, the better)는 예술의 진리를 진면목으로 보여주어 조선일보가 낙양의 지가를 올리는 데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이규태 선생을 20년 전 대학원 특강에 초청하게 되었는데, 먼저 원장실을 방문한 그분과 30분간 담소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평소 존경해 온지라 담소 끝에 인생좌표가 될 만한 글귀 하나를 부탁했다. 조금 망설이더니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 써주었다. 또 그 훨씬 전 어느 땐가 대학교주최 창립기념세미나 협찬을 받을 겸해서 동아일보사로 홍승면(洪承勉) 당시 편집국장을 찾아 뵈었을 때도 그분의 생활철학이 화이부동임을 알게 되었다. 공자는 자로(子路)편에 갈파하여 이르기를, “군자는 다른의견을 조화시키고 부화뇌동하지 않으나, 소인은 부화뇌동 하면서 남의 단점만 들쳐가며 조화시키지 못한다(君子 和而不同, 小人 同而不和)”고 하였다. 즉 군자는 서로 같지 않되 화(和)하며, 소인은 같으면서도 불화(不和)한다는 것이다. 조화는 이루되 똑같지 않아도 된다. 같아지면 자신의 장점을 오히려 잃기 쉽다. 서로서로 다른 것을 장점으로 알고 힘을 합칠 수 있을 때 시너지 효과가 나온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와 같이 모두 화합하여 잘 지내되 각자의 개성이 잘 존중되는 경우는 자연생태계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즉 각기 다른 여러가지 나무와 식물들이 숲을 이루고 늪을 이루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화이부동은 다양성 속에서의 상생(相生)을 도모하는 것으로, 그렇다고 해서 의(義)를 굽혀 쫓지는 않는다. 자신의 원칙과 주장을 펼치면서도 상대방 주장을 경청하고 수용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남을 생각하지 않는 아집은 대립과 갈등만 조장하기 때문이다. 화이부동은 조화를 이루면서도 같지 아니하고 각각 다른 개성을 가진 악기들이 심포니를 이루듯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견(異見)을 존중하되 잠시 제쳐두고 공동이익을 먼저 추구한다는 구동존이(求同存異)의 사상과도 연관된다. 여기에는 또한 어느 하나 똑같은 모습을 찾을 수 없지만 어느 하나 전체와 어울리지 않는 것도 없다는 뜻도 담고 있다. 또한 이것은 가정으로 보더라도 가지 많은 나무에 각자의 특성을 존중하나 중심과 원칙은 가지고 화목하게 지내라는 교훈도 담고 있다.
자아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면 화이부동은 남과 화목하게 지내되 자기 중심과 원칙을 지킨다는 뜻이고, 군자처럼 언제나 마음을 편안케 가져 사람들과 융화하지만 결코 무정견하지 않고 부화뇌동하지 않는다는 자존감의 정립이기도 하다. 따라서 공존과 독자성을 동시에 추구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공통점은 취하고 차이점은 인정하면서도 조화롭게 바꾼다는 ‘취동화이(聚同化異)와 맥을 같이하기도 한다.
* 생활성서 소금항아리 2022-10-10
루카 복음 11장 29-32절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탄광의 카나리아, 잠수함의 토끼
19세기만 해도 광부들은 카나리아를 데리고 광산에 들어갔습니다. 호흡기가 약한 카나리아는 인간보다 민감해서 유해한 공기를 마시면 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래서 광부들은 카나리아의 울음이 멈추면 서둘러 광산을 탈출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처음 잠수함이 만들어졌을 때 사람들은 잠수함 내부의 산소 농도를 측정하기 위해 토끼 한 마리를 데려다놓았습니다. 산소에 예민한 토끼가 기운을 잃고 비틀대면 대원들은 즉시 잠수를 멈추고 수면 위로 올라갔습니다. 즉 탄광의 카나리아와 잠수함 속의 토끼는 모두가 괜찮다고 느낄때 위험을 감지하는, 그래서 사람들을 일깨우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 역시 탄광의 카나리아, 잠수함 속의 토끼와 같을 것입니다. 요나 예언자는 모두가 괜찮다고 느낄 때 "우린 지금 괜찮지 않아!"라고 홀로 위기를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요나 예언자처럼, 탄광의 카나리아처럼 세상의 불의와 신앙을 위협하는 것들에 민감하면 좋겠습니다. "이 정도면 그래도 괜찮지 않아?" 하며 자주 눈을 감아버리기보다 목숨 걸고 진리를 선포하신 예수님처럼 "아니! 우린 지금 괜않아!" 하고 세상을 향해 외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세상의 많은 것들과 타협하며 지내는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