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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 대한 책임, 관계에 대한 책임>
단 한 줄도 흘림 없이 마음 깊숙이 간직하고 싶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가득한 책, 인간과 세계에 대한 격조 있는 사랑으로 일렁이는 순결한 작가의 영혼, 가장 섬세하면서 가장 용감한 한 영혼이 포착한 신비들. 생텍쥐페리의 작품들은 그러하다. 조곤조곤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상처투성이 전사가 부르는 소박한 노래 같은... 거창할 것도 대수로울 것도 없다고 겸손하게 미소 짓고 있지만 결코 만만하지 않은 메시지들. 반복해서 읽고 또 읽고 싶은 책. 너무 아름다워 언제까지나 동행으로 삼고 싶은 노래.
지난 여름 나는 생텍쥐페리의 저서를 힘닿는 데까지 읽어보리라 마음 먹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생텍쥐페리와 만나보리라 마음을 내게 된 계기는 <어린왕자> 영문 텍스트 읽기였다.
친구들과 영어 스터디 모임에서 <어린왕자>를 영문으로 읽었다. 텍스트가 너무 쉽다고 생각하면 숙고하면서 읽게 되지 않는다. 한글로 읽을 때는 어른을 위한 우화라는 속평에 안주해서 만만하게 대했다. 몇 차례 읽었지만, 세간에서 소비하듯이 그저 관계 맺기의 태도를 가르치는 이야기인 줄 알았다. 쉬운 텍스트라 생각해서 딱히 걸리는 구석 없이 스르르 물 흐르듯이 읽어 제끼면서 무척 낭만적인 이야기로구나 쉽게 생각해버렸다. 나 역시 세간의 카피로 인해 눈멀어 있었던 것이다. 너무 유명해지면 오히려 쉽사리 소비되어버리고 마는구나... 씁쓸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독서교육에서는 조금 어려운 책을 다뤄야 하는 것이구나 새삼 깨닫게 되었다.
더듬더듬 사전을 찾아가며, 문장을 여러 차례 반복해 읽으며 영문으로 접한 <어린 왕자>는 한글로 읽을 때와 완전히 다른 면모를 펼쳐 보여주었다. 특히, 바오밥나무의 위험을 경고하고 그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 세계를 지키기 위해 수행해야 하는 꾸준한 규율을 강조하는 부분은 새삼 낯설고 또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예전의 몇 차례 독서에서는 흘려버린, 그리고 세간에서 소비하는 어린 왕자가 전혀 주목하지 않았던 장면이었다. 그렇지만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해독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열쇠. 바오밥나무의 교훈을 통해서 나는 이 책이 무척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걸 발견하고 다른 방향으로 의미를 짚어가기 시작했다. 1944년, 2차 대전 중 출간된 이 책에서 바오밥나무는 세계를 파괴하는 악, 즉 전체주의를 상징하고 있다. 대표적 행동주의 작가라 할 수 있는 생텍쥐페리는 자신의 작품에서 드러낸 신념대로 전체주의에 대항하여 2차대전에 공군으로 참전, 출전했다가 지중해에서 실종된다. 어린왕자와 전체주의라니... 그 간극이 어떤 맥락으로 연결되는가?
어린 왕자는 자신이 길들인 단 한송이 장미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여우의 가르침을 통해 확인하고 난 후 자신이 떠나온 행성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자신의 행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신이 떨어진지 일주년 되는 날, 그 지점을 찾아가는 여정 도중에 조난당한 비행사와 조우한다. 그리고 다짜고짜 양을 그려달라고 부탁한다. 거대한 바오밥나무의 씨앗이 늘 작은 왕자의 행성을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작은 별을 지키려면 바오밥나무가 걷잡을 수 없이 자라 별을 파괴하기 전에 어린싹을 먹어버리는 양이 필요했다. 자신의 행성을 지켜야겠다는 결단과 실천의 동기는 영원불변하고 거창한 가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 동기는 덧없고 연약하여 보잘것 없어 보이지만 길들인 존재들에 대한, 관계에 대한 사랑과 책임이다. 왕자가 자신의 행성을 떠나 별들 사이를 여행하고 지구에서 방황하다 비행사와 만나기까지, 그리고 비행사와 왕자가 쌓아가는 우정의 이야기는 바로 연약하고 덧없는 아름다움을 지닌 세계의 신비와 그 세계를 파괴하는 악으로부터 세계를 지키는 가장 커다란 힘이 바로 관계에 대한 책임에 있다는 지혜를 깨달아 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어린 왕자는 “자신이 길들인 것들에 대한 책임, 세계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감당하고자 결단한 품위 있는 인간성의 아름다운 상징이다.
길들인다는 것은 상대를 특수하고 고유한 개별자로 만나며 주관적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을 말한다. 예술이란 대상을 이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태도, 예술적 존재방식이란 그렇게 하나의 신비로 만나고 길들여가면서 고유한 의미를 길어올리는 관계 방식에 다름 아니다. 모든 것을 계량하여 동질화시키고 자연과 사물, 나아가 사람까지도 도구화시키는 물신주의, 근대적 과학주의, 폭력적 전체주의적 발상에 저항하는 삶의 태도가 다른 이름으로 예술적 존재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린왕자는 정치적이다.
예술이라는 정의할 수 없는 영역의 모호한 본질에 다가가는 데 <어린왕자>의 구체적 상징들은 내게 무지개처럼 다가왔다. 땅과 구름을 이어주는...
“예술교육” 강의. 늘 힘들고 중요한 수업의 오프닝. 예술이라는 인간의 실천, 교육이라는 실천의 본질이 무엇이며 세계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 것인지 고민하는 초입에서 어떻게 말문을 열어갈까 곰곰 고민하다 내가 느낀 감동에 학생들을 초대하고 싶었다. 예술교육자의 시선으로 <어린 왕자> 다시 읽기를 시도했는데 그 결과는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울림이 있었다. 그 후 쌩텍쥐페리를 제대로 만나보고 싶어 그의 저서들을 섭렵해보기로 했다.
<어린왕자>를 숙고하면서 언제나 감탄하게 되는 지점은 서구의 근대성의 흐름과 완전히 반대되는 생각, 즉, 덧없고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들이 지니는 세계적 의미와 무게를 그토록 구체적으로 사유할 수 있었던 작가의 통찰력이다. 생텍쥐페리는 어떻게 이런 사유에 천착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인간의 대지>와 <야간 비행>을 통해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계속...
<어린왕자>에서 인용해본다.
어린 왕자는 이제 분노로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수백만 년 전부터 꽃들은 가시를 만들고 있어. 양도 수백만년 전부터 꽃을 먹어 왔고. 그런데도 그들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가시를 왜 만들어 내는지 알려는건 중요한게 아니라는 거지! 그건 붉은 얼굴의 신사가 하는 계산보다 더 중요한 건 못 된다는 거지! 그래서 이 세상 아무데도 없고 오직 나의 별에만 있는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한 송이 꽃을 내가 알고 있고, 작은 양이 어느날 아침 무심코 그걸 먹어 버릴 수도 있다는건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거지!"
어린왕자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말을 이었다.
"수백만 개의 별들 중에 단 하나밖에 없는 꽃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그 별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어. 그는 속으로 <내 꽃이 저기 어딘가에 있겠지......>하고 생각할 수 있거든. 하지만 양이 그 꽃을 먹는다면 그에게는 갑자기 모든 별들이 사라져 버리게 되는거나 마찬가지야! 그런데도 그게 중요하지 않단 말야?"
그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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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는 장미꽃을 보러 갔다.
"너희들은 나의 장미와 하나도 닮지 않았어. 너희들은 아직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들에게 말했다. "아무도 너희들을 길들이지 않았고 너희들 역시 아무도 길들이지 않았어. 너희들은 예전의 내 여우와 같아. 그는 수많은 다른 여우들과 꼭 같은 여우일 뿐이었어. 하지만 내가 그를 친구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이제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여우야"
그러자 장미꽃들은 어쩔 줄을 몰라했다.
"너희들은 아름답지만 텅 비어있어"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누가 너희들을 위해서 죽을 수 없을 테니까. 물론 나의 꽃은 지나가는 행인에겐 너희들과 똑같이 생긴 것으로 보이겠지. 하지만 그 꽃 한송이는 내게는 너희들 모두보다도 더 중요해. 내가 그에게 물을 주었기 때문이지. 내가 벌레를 잡아준 것(나비 때문에 두세 마리 남겨둔 것말고)도 그 꽃이기 때문이지. 불평을 하거나 자랑을 늘어 놓는 것을, 또 때로는 말없이 침묵을 지키는 것을 내가 귀기울여 들어 준 것도 그 꽃이기 때문이지. 그건 내 꽃이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는 여우에게로 돌아갔다.
"안녕" 그가 말했다.
"안녕" 여우가 말했다. "내 비밀은 이런거야. 그것은 아주 단순하지. 오로지 마음만 보아야 잘 보인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건 눈에 보이지 않는단다"
"가장 중요한건 눈에 보이지 않는단다" 잘 기억하기 위해 어린왕자가 되뇌었다.
"너의 장미꽃을 그토록 소중하게 만드는건 그 꽃을 위해 내가 소비한 그 시간 이란다"
".....내가 내 장미꽃을 위해 소비한 시간이란다" 잘 기억하기 위해 어린왕자가 말했다.
"사람들은 그 진리를 잊어 버렸어" 여우가 말했다. "하지만 넌 그것을 잊으면 안돼. 너는 네가 길들인 것에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게 되는거지. 너는 네 장미에 대해 책임이 있어....."
"나는 장미에 대해 책임이 있어....." 잘 기억하기 위해 어린왕자는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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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어딘가에 샘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지......" 어린 왕자가 말했다.
사막의 그 신비로운 빛남이 무엇인가를 나는 문득 깨닫고 흠칫 놀랐다. 어린 시절 나는 해묵은 낡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 집에는 보물이 감춰져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것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도 아마 없었을 것이다. 우리 집은 저 가장 깊숙한 곳에 보물을 감추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 집이건 별이건 혹은 사막이건 그들을 아름답게 하는 건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지!" 내가 어린 왕자에게 말했다.
"아저씨도 내 여우하고 같은 생각이어서 기뻐." 그가 말했다.
어린 왕자가 잠이 들었으므로 나는 그를 안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감동되어 있었다. 부서지기 쉬운 보물을 안고 가는 느낌까지 들었다. 마치 이 지구에는 그보다 더 부서지기 쉬운게 없을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창백한 이마, 감겨있는 눈, 바람결에 나부끼는 머리칼을 달빛 아래에서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보고 있는 건 껍질뿐이야.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반쯤 열린 그의 입술이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띠고 있었으므로 나는 또 생각했다. '이 잠든 어린 왕자가 나를 이토록 몹시 감동시키는 것은 꽃 한송이에 대한 그의 성실성, 그가 잠들어 있을 때에도 램프의 불꽃처럼 그의 마음 속에서 빛나고 있는 한 송이 장미꽃의 모습이야......' 그러나 그가 더욱 부서지기 쉬운 존재라는 짐작이 들었다. 램프의 불은 잘 보호해 주어야 한다. 그것은 한 줄기 바람에도 꺼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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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 따라 별들은 서로 다른 존재야. 여행하는 사람에겐 별은 길잡이지. 또 어떤 사람들에겐 그저 조그만 빛일 뿐이고, 학자인 사람에게는 연구해야 할 대상이고. 내가 만난 사업가에겐 금이지. 하지만 그런 별들은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어. 아저씬 어느 누구도 갖지 못한 별들을 갖게 될거야......"
"무슨 뜻이니?"
"밤에 하늘을 바라볼 때면 내가 그 별들 중의 하나에 살고 있을 테니까. 내가 그 별들 중의 하나에서 웃고 있을 테니까, 모든 별들이 다 아저씨에겐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일거야. 아저씬 웃을 줄 아는 별들을 가지게 되는 거야!" "
그리고 그는 웃었다.
"그래서 아저씨의 슬픔이 가셨을 때는 (언제나 슬픔은 가시게 마련이니까) 나를 안 것을 기뻐하게 될거야. 아저씨는 언제까지나 나의 친구로 있을 거야. 나와 함께 웃고 싶을 거고. 그래서 이따금 그저 괜히 창문을 열게 되겠지... 그럼 아저씨 친구들은 아저씨가 하늘을 바라보며 웃는 걸 보고 굉장히 놀랄테지. 그러면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줘. <그래, 별들을 보면 언제나 웃음이 나오거든!> 그들은 아저씨가 비쳤다고 생각하겠지. 난 그럼 아저씨에게 못할 짓을 한 셈이 되겠지......"
그리고는 그는 다시 웃었다.
"별들이 아니라 웃을 줄 아는 조그만 방울들을 내가 아저씨에게 한아름 준 셈이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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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어린 왕자에게 그려준 굴레에 가죽끈을 달아준다는 걸 내가 잊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별에게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양이 꽃을 먹었을까......' 하고 궁금해 하곤 했다.
어느 때는 '천만에, 먹지 않았겠지! 어린 왕자는 그의 꽃을 밤새도록 유리 덮개로 잘 덮어 놓겠지. 양을 잘 지킬테고......' 라고 생각해 본다. 그러면 나는 행복해진다. 그러면 모든 별들이 부럽게 웃는다.
어느 때는 '어쩌다가 방심할 수도 있지. 그러면 끝장인데! 어느날 밤 유리 덮개 덮는 것을 잊었거나 양이 밤중에 소리없이 밖으로 나왔을지도 몰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면 작은 방울들은 모두 눈물방울들로 변한다!
그것은 정말 커다란 수수께끼다. 어린 왕자를 사랑하는 여러분에게는 나에게도 그렇듯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한 마리 양이 한송이 장미꽃을 먹었느냐 먹지 않았느냐에 따라서 천지가 온통 달라지게 될 것이다.
하늘을 바라보라. 생각해 보라. 양이 그 꽃을 먹었을가 먹지 않았을까? 그러면 거기에 따라 모든 것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여러분은 알게 되리라.
그런데 그것이 그다지도 중요한가를 어른들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