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산(文殊山221.1m)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와 동림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 정상부는 경사가 완만하고, 남북으로 길며, 남서쪽에 있는 안골고개 방향으로 완만한 경사의 능선이 이어진다. 산의 동쪽에는 능골고개가 있고, 남서쪽에는 안골고개가 있다. 산의 북서쪽 골짜기에는 포은 정몽주선생묘소(경기도 기념물 제1호)가 있고, 그 앞에 영묘재, 연안이씨 행적비, 포은 신도비 등이 있으며, 남쪽에는 문강재, 한국등잔박물관 등이 있다. 서쪽 능원천 건너에는 충렬서원(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호)이 있는데, 충렬서원 사우(祠宇) 중건 상량문(上樑文)에 "아랑 위 들보 걸린 동쪽에는 선생의 큰 대업 우리 동방에서 으뜸이니 선생의 면목 알기를 바라거니 달 오르는 동쪽에 문수산(文殊山)도 높도다."라고 쓰여 있다. 북쪽으로는 국도 43호선이 동서 방향으로 수지구와 오포읍으로 지나고 있다,
향수산(香秀山 457.7m)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가실리, 신원리와 모현읍 능원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 주 능선은 북동쪽과 남서쪽, 동쪽으로 뻗어 있으며, 400m 내외의 봉우리들이 연속되어 있다. 산의 북서쪽에 레이크사이드 컨트리클럽이 있고, 남서쪽에는 신라 애장왕 때 처음 지어졌다는 백련사(白蓮寺)가 있다. 산의 남동쪽에는 글렌로스골프장, 호암미술관, 삼성연수원, 삼성인력개발원, 캐리비안베이, 페스티발월드, 에버랜드 등의 위락 시설들이 밀집되어 있다.
선장산[2](禪長山 349.7m)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와 동림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 366봉에서 약0.9km 거리의 국립지리원 지도상 무명봉인데 오래전부터 선장산으로 알려져 있는 산이다.
▶산행일ː 2024년 10월 17일(목)
▶산행지ː 문수산(文殊山△221.1m) 깜봉봉(242.4m) 선장산2(禪長山△349.7m) 할미봉(된봉350m)
소향수산(403m) 향수산(香秀山 457.7m) 향수산2(342m) 경기용인
▶코스ː 능원초-굴다리-정몽주선생묘-문수산-안골고개-깜봉산-소리고개-368고지(된봉왕복)-선장산2-된봉(빽)-
소향수산-전망데크-향수산-향수산2-한남정맥-향린경찰초소-후먼시아.뒤-물푸레7.8.9단지(04:24)
▶난이도ː B+
▶누구랑ː 벙개팀 2명
▶시 간ː 12:00∼16:24(휴식.점심.목욕포함 04ː24분)
▶거 리ː 약 13.83㎞ (오르내림포함 약 14.83km)
▶날 씨ː 맑고. 구름조금 (가을날씨)
☞정몽주묘역입구(정류장)ː경기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23-1
☞물푸레7.8.9단지(정류장)ː경기 용인시 기흥구 청덕동 599
◈교통편◈
▶갈때ː구포역(07:05)→동대구(08:53)→동탄역(10:22)→동탄역(GTX)→성남역(1151번)→능원초(하차)
▶올때ː물푸레 7-8-9단지(1241번)→구성역(동탄행)→동탄역(18:42)→동대구(구포행 20:21)→구포역(21:36)
포은 정몽주 선생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산 3에 있는 고려 말 문신 정몽주의 시신을 안장한 묘소.
1972년 5월 4일에 경기도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됐다.
1392년 이성계의 5남이자 훗날 조선 태종이기도 한 이방원과 술자리를 가지고 난 이후 귀가를 하던 정몽주가 이방원이 보낸 수하가 휘두른 철퇴에 맞아 개성 선죽교에서 피살되면서 원래 개성 근교 풍덕군(현재의 북한 개풍구역)에 안장된 묘소를 용인으로 이장하여서 오늘에 이른 묘소이다.
죽기 전 정몽주는 이방원과 만나 술자리를 나누던 중 이방원이 하여가를 읊게되자 고려를 망친 반역자 집단으로 들어오라는 권유의 시 구절임을 인식하여 그에 반대하고 거절한다는 화답으로 단심가를 읊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 백주대낮에 말을 타고 귀가를 하려고 선죽교를 건너는 중 이방원이 보낸 부하가 휘두른 철퇴에 직격으로 맞고 낙마하여 집으로 도망가던중 피살됐다.
정몽주의 시신은 개성 선죽교에서 피투성이가 된 이후 개성 근교에 있는 풍덕군(개풍군) 야산에 안장되었으나 이후 고향인 경상북도 영천으로 이장을 하던 중 고인의 명정[1]이 용인땅을 지나가던 도중 수지구에서 풍덕천동 ~ 죽전동 대지고개로 진입할 때 떨어지면서 영천 이장을 포기하고 용인을 장지로 결정하여 부인 경주 이씨의 시신과 합장하면서 조성되었다. 현재는 포은대로로 조성이 되어 있다.
단분으로 봉분된 묘소에 비석, 상석, 망주석 등이 설치되었으며 원래는 둘레돌이 없었던 묘소였지만 1970년 3공화국 시절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둘레돌이 추가로 설치되었다. 1980년에는 주변에 있는 민가 3채를 이전하여 묘역 성역화에도 나섰다.
조선 전기의 문신 저헌(樗軒) 이석형(1415∼1477) 선생의 묘소이다. 세종 23년(1441)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14년간 집현전에서 여러 관직을 맡았다. 세조 2년(1456) 사육신 사건을 전해 듣고 그들의 절의를 상징하는 시를 지어 익산동헌에 남겼는데, 다른 관리들이 죄를 물어야 한다고 하였으나 세조가 막아주었다. 그후에도 세조의 총애를 받아 황해도 관찰사·사헌부 대사헌 등의 요직을 거쳤으며, 성종대에는 손성좌리공신으로 연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저서로는『대학연의』,『대학연의집략』,『저헌집』등이 있다. 그의 묘는 포은 정몽주의 묘역 오른쪽에 있는데, 묘역 안에는 묘비·문인·석·향로석·상석(제사지낼 때 음식을 차려 놓도록 무덤 앞에 마련해 놓은 돌) 등의 석물이 잘 갖추어져 있다. 묘역 오른쪽 아래에는 인조 2년(1624)에 세운 신도비(神道碑:조선시대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가에 세워 주던 비)가 있는데, 비문은 이정구가 짓고 신익성이 글씨를 쓴 것이다. (출처 : 문화재청)
정몽주 증손녀 사위인 이석형의 묘가 포은의 묘 옆에 위치한 연유는 포은의 묘를 영천으로 이장할 때 바람에 날린 명정이 떨어진 곳은 지금 이석형의 묏자리였다. 포은의 손녀인 이석형의 부인이 이곳이 명당이란 말을 듣고 친정집보다는 시댁 가문을 일으키려고 일꾼에게 술먹이고 밤새 이곳에 물을 길어다 부었다. 다음날 포은을 모시려고 보니 물이 가득 차 있어 할 수 없이 옆 언덕도 좋다기에 묘를 썼고, 뒤에 그 자리에는 남편인 이석형을 모셨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5대손인 이귀는 인조반정에 성공하여 정사공신1등에 연평부원군이 되고, 6대손은 정사공신 2등인 이시백(李時白, 후일 영의정), 이시방(李時昉, 후일 판의금부사)이다.
인조반정 : 신립장군의 아들 신경진(후일 영의정), 신경인, 신경유, 김여물의 아들 김류(후일 좌의정), 정몽주의 손녀 사위인 이석형의 5대손 연평부원군 이귀(후일 대사헌, 좌찬성), 이귀의 아들 이시백(후일 영의정), 이시방(후일 판의금부사, 두 아들 모두 정사공신 2등에 책록), 최명길(후일 영의정), 김자점(후일 영의정, 이귀의 사돈) 등과 같이 광해군을 몰아내는 인조반정의 성공으로 정사공신1등에 책록됨. 반정의 성공으로 인조반정에 참여한 사람 및 후손은 후일 고위관직에 오름.
이귀의 묘와 신도비(충청남도 유형문화재89호, http://blog.daum.net/dbsqkqh/1612)는 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 만수리에 있음.
♣.삼가 고개를 숙인다.♣
우리는 죽음 앞에 경건하다. 웬만해서는 허물을 말하지 않는다. 누군들 삶에 얼룩이 없겠는가.
죽음 앞에서는 더는 거론하지 않는다. 한평생 짊어졌을 삶의 무게를 헤아리며 삼가 고개를 숙인다.
고단했던 한 생애를 내려놓고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기도한다.
오늘도 많이 웃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