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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의 하늘을 로마의 불꽃으로 수놓은 밤
- 경기필하모닉 제122회 연주회
2011.6.24.(금) 고양 아람누리 아람음악당
로마의 분수
1. 여명의 줄리아계곡의 분수
2. 아침의 트리토네 분수
3. 한낮의 트레비 분수
4. 해질녘의 빌라 메디치의 분수
로마의 소나무
1. 보르게제장의 소나무
2. 카타콤바 부근의 소나무
3. 지아니콜로의 소나무
4. 아피아가도의 소나무
로마의 축제
1. 키르첸세스
2. 50년제
3. 10월제
4. 주현절
오토리노 레스피기는 과거와 현재의 역사와 이미지를 상징과 표현주의를 통해 음악적으로 표출해 낸 이태리가 낳은 관현악법의 대가이다. 그의 작품은 유명한 바이올린 소나타를 비롯한 독주곡과 실내악, 성악, 오페라 등의 여러부분에 걸쳐 있지만 아무래도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은 새(the birds), 로마 3부작, 고풍스런 춤곡과 아리아, 보티첼리의 그림 등으로 대표되는 관현악 작품일 것이다. 그의 관현악 작품들은 상당수가 표제음악인데 이는 베를리오즈, 드뷔시, 라벨 등 프랑스 작곡가들로 영향을 일정 부분 받은 점도 분명히 있겠지만 이미지만을 위한 이미지 등에 주로 중점을 두었던 프랑스 작곡가들의 궤에서는 일정 부분 벗어나 있다.
레스피기는 제목으로부터 연관되는 소재 즉 역사나 풍물 등에서 적극적인 연계를 통해 작품으로 구현시키는 방식을 보여준다. 흔히 표제음악 등에서 작품 제목만 보고 너무 거기에 연연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지만 레스피기는 음악 자체로 듣는 것도 당연히 괜찮지만 표제와 소재의 사례를 깊이 파헤칠수록 작품과 소재를 더욱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레스피기의 분수, 소나무, 축제로 구별되는 로마 3부작을 공감하기 위해서 작곡가의 노트나 역사적 배경이 도움이 되는건 사실이지만 반드시 많은 정보가 요구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굳이 내가 느끼는 점을 몇가지 말한다면 로마의 분수는 로마에 있는 4가지 분수에서 해뜨기 전의 분수, 아침의 분수, 한낮의 분수, 저녁의 분수로만 생각해도 어떤 느낌으로 작곡가가 얘기하려는지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여명이 생기면서 하루가 서서히 시작하기 전의 느낌과 상쾌한 아침의 시작, 활기찬 오후,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의 분위기 등이 분수라는 이미지와 로마의 풍경을 통해 음악적으로 표출된다.
그러나 로마의 소나무는 소나무에 대한 직접적 표현이 아니다. 각 악장은 소나무 이름을 지니고 있지만 내용의 전개는 병정놀이하는 아이들, 크리스천들이 예배보던 지하묘지, 달밤에 지저귀는 나이팅게일(간호사 나이팅게일이 아닌 새 이름이다), 로마병정들의 행진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오랜 시간 소나무가 그 자리에서 소나무의 시선으로 위의 스토리를 지켜본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이해가 쉬울 듯 하다. 마치 광화문은 조선왕조시대부터 존재했지만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근대화, 월드컵 응원등의 현장을 그 자리에서 오랜 세월 지켜본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레스피기가 묘사한 4개의 소나무들은 음악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관찰자가 되어 지켜본 주체가 되기도 하는 셈이다.
로마의 축제도 마찬가지로 4악장으로 이루어지는데 원형경기장에서 폭군 네로의 지시로 사자의 먹이가 되었던 크리스천들의 묘사와 환호하는 당시 군중들과 팡파레, 일생에 한번 정도 드물게 찾아오는 기독교의 50년제 행사, 한국의 추석이나 미국의 추수감사절에 해당될 포도 수확기에 열리는 10월제, 예수탄신을 축하하는 주현절로 이루어진다.
마에스트로 구자범이 지휘하는 경기필하모닉이 122회 정기연주회로 프로그램을 레스피기의 로마 3부작으로 내세운 것은 마에 구가 5월 취임연주회의 프로그램이었던 R.스트라우스와 바그너, 말러 만큼이나 참신하고 기대되는 것이었다. 서구나 미국 등에서의 이런 프로그램들은 자주 연주되고 생소할 것도 없는 것이겠지만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연주곡들에 대한 편식이 심한 것이 사실인만큼 레스피기의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연주의 수준보다는 로마 3부작을 직접 감상한다는 기대감을 먼저 갖게 한다.
여명의 줄리아계곡의 분수로 시작한 로마의 분수 1악장은 차분하게 시작하되 정확하게 연주하려는 인상을 보여주었다. 마에 구의 지휘와 연주를 몇 번 지켜보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그의 스타일은 카라얀으로 대표되는 레가토 스타일의 쭈우쭉 늘어뜨리는 연주보다는 정확하면서도 힘찬 연주를 선호한다. 마에 구가 곡의 마디마디마다 각 악기의 파트를 향해 몸을 돌려 구체적인 지휘를 보여주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단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매우 정확하고 구체적인 지시에 가깝지만 그가 보여주는 가장 큰 매력은 총주부분과 점증하는 부분에서 아낌없이 질러주는 그 카타르시스일 것이다. 어설픈 연주로 총주를 하게 되면 소음이 될 가능성이 높은데 이를 만회하기 위해선 연습과 수준 그리고 일사불란한 지휘자의 모션에 따르는 수밖에 없다. 아침이 되고 한낮이 되어 약동하기 시작하는 분수와 활기찬 모습은 마에 구의 장점으로 매력적으로 묘사되었다. 경기필은 마에 구와 호흡을 맞춘 지 얼마 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번째의 정기연주회만에 이전 연주회와는 달리 서로간의 맞춤이 더욱 좋아졌고 실수가 더욱 줄어들었음이 확연히 들어왔다. 4악장의 해질녘의 분수는 하루가 마감되어가는 다소 사색적이고 잠겨 들어가는 모습을 묘사했는데 이 표현은 우아함과 서정성의 극치로 가기 보다는 마에 구의 진지한 표현과 어울려 효과적으로 나타났다.
두 번째 곡으로 소나무숲 근처에서 병정놀이하는 아이들의 묘사로 로마의 소나무가 시작되었다. 레스피기 관현악의 화려함과 복잡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을만한 이 곡의 서주에서 경기필은 힘차면서도 소란스럽지 않게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두 번째 곡인 지하무덤에서 마에 구는 로마에 공인되기 전의 크리스천들의 은밀하고도 조심스런 예배와 이제는 무덤이 되어 버린 현장을 진지하게 묘사한다. 3악장에서 달밤의 고요함에 이어지는 나이킹게일의 지저귀는 소리(이 소리는 녹음한 것을 들려주었다고 하는데 악기로 했는지 녹음한 것을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새 소리가 너무 실감나서 다시 확인해야 될 것 같다)는 로마의 저녁, 자니콜로 언덕의 소나무의 밤길을 문득 걸어보고 싶다는 충동을 일으켰다.
소나무의 4악장인 아피아 길의 소나무는 애니메이션 명작인 판타지아2000에서 돌고래가 하늘을 유영하는 부분에 쓰여져서 더욱 유명해진 곡인데 이 애니메이션에서도 묘사되었다시피 로마병정들의 행진이 점차로 점증되어가면서 보여주는 그 힘찬 리듬과 약동과 총주의 묘사는 모든 관현악 총주의 절정의 하나임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분명한 점은 바로 이런 부분의 묘사에서 마에 구는 그의 장점을 아낌없이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소란스러움으로 비칠 수도 있는 이 악장을 행진곡풍의 리듬과 점증법의 총주를 향해 가는 그 부분에서 충분한 연습과 지휘의 통제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갈 정도였다. 4악장의 묘사를 위해 무대 뒤쪽 합창석의 가운데에 트롬본 2대가, 양쪽으로 트럼펫 각각 2대씩 배치되어 입체적인 소리를 보여주었다. 소나무의 4악장이 피날레를 향해 가면서 중규모에 해당하는 고양 아람누리 극장은 천정이 뚫릴듯한 기세와 흥분감으로 클라이맥스란 이런 것이구나란 것을 온 몸으로 느끼게 해 주었다. 어느 외국의 일급 오케스트라가 오더라도 이 악장을 비교적 정확하게 연주할 수는 있겠지만 이런 표현으로 이 정도의 희열을 보여줄 수 있을런지, 나는 알 도리가 없다.
잠시 동안의 인터미션이 끝나고 로마의 축제가 시작되었다. 축제가 시작되었지만 마냥 흥겨운 축제가 아니다. 폭군 네로 시대 당시 군중들의 흥분심리를 이용하여 키르쿠스 막시무스 운동장(콜롯세움과 비슷한 경기장)에 모아놓고 사자들을 내세워 먹이로 내세우며 그걸 군중들로 하여금 구경시키게 만드는 과열되고 광기어린 축제인 셈이다. 그러므로 팡파레의 축제와 크리스천들의 움직임의 묘사는 대비되어 역설적인 심리를 보여준다. 1악장의 마지막에서 8분음표로 이루어진 4번의 총주(혹은 타건)는 이슬로 사라지는 죽음의 묘사일 수도 있고 후에 있을 심판의 경고로 읽을 수도 있다. 이 4번의 타건만 들어보더라도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표현과 해석에 대한 단초를 엿볼수 있다. 마에 구의 경기필은 젊음과 단호함으로 이를 결코 잃지 않겠다는 정의감의 일단을 보여주었다.
2악장인 50년제는 고단한 여정에 오른 크리스천들과 매우 드물게 찾아온 기념일을 축하하는 후반이 맞물려 있다. 마에 구가 표현하는 방식은 보건대 확실히 우아함이나 유려함보다는 진지함으로 해석되어 있다. 레가토보다는 스타카토 식의 표현에, 원숙함보다는 젊음의 진지함과 정확함에 중점을 두는 그의 해석은 이 부분에서 음악팬들의 호불호가 갈릴수 있는 부분이지만 그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매우 정직하고 그다운 해석이라 여겨진다. 오히려 나이를 들어갈수록 어떤 해석의 변화와 발전을 지켜보는지가 내겐 더욱 흥미로운 일이다. 3악장의 포도수확기인 10월제에서 우리의 추석을 연상케 하는 그 축제처럼 흥겨운 묘사를 경기필은 보여주었는데 인상적인 부분은 역시 객원으로 참가한 만돌린 주자의 후반 연주부분이다. 그 작은 악기로 그렇게 즐거운 음색을 내는 것은 10월제에 가장 어울리는 음색일 것이다. 4악장에서의 예수탄신을 기념하는 주현절을 기념하고 이를 함께 즐기는 축제의 표현은 다양한 춤들의 곡들과 흥겨움이다. 이런 신나는 표현에 마에 구와 경기필의 연주는 단연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이런 곡들에 소란스러움을 느끼지 않게 하는 역량은 단원들의 수준을 넘어 지휘자의 통제력이 중요함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곡이 모두 끝나고 관객들은 마치 로마에 와 있는듯한 그 이미지와 연상들에, 흥겨움에 큰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홍보가 덜 되었는지 마에 구의 경기필이 아직 인지가 덜 되어서인지 이틀간에 나누어진 연주에 분산되었는지는 몰라도 관객석이 몇몇 비긴 했지만 그 아쉬움은 에너지를 쏟은 연주와 큰 호응의 박수로 모든 점을 덮어버렸다. 두 번째 곡이었던 로마의 소나무가 끝나고 소나무 4악장을 앵콜해달라고 수백번은 외친듯한 할아버지의 간절한 외침이 들렸는지 마에 구는 트롬본과 트럼펫 주자들을 다시 2층 합창석에 보내고는 앵콜로 화답해 주었다. 이 곡은 그날 연주의 마무리로 손색없는 곡이어서 2번째 곡으로 했을 때 내심 아쉬움이 있었는데 앵콜로 화답해 줌으로써 그 마무리를 화려하게 장식해 주었다.
경기필은 금난새 선생 시절부터 청소년들과 클래식 초보들과 일반인들을 위한 여러 기획공연과 시리즈를 함으로써 나름 존재의 역할을 뚜렷이 해 왔고 이제 마에 구를 맞아서 클래식 매니아 팬과 레파토리의 확대라는 새로운 변화와 발전에 서 있다. 지난 취임 연주회를 통해 그 가능성이 성공적으로 보였고 이날 연주를 통해 짧은 시간 적지 않은 진전이 있었음을 피부로 실감했음은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좀더 많은 연습을 통한 세련된 연주와 관악파트의 발전, 정단원 보충이 아직 많이 필요하고 이것은 좀더 시간이 필요한 부분임에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지휘자도 젊고 경기필도 이제 새로운 도약으로의 기회인만큼, 앞날의 기대는 매우 크다.
금요일날 저녁 시간에 퇴근길의 차량에 밀려서 오랜 시간 걸려서 도착한 고양의 일산 공연장에서 로마의 저녁을 연상케 하는 음악의 불꽃놀이를 지켜볼 줄은 몰랐다. 로마의 온갖 역사와 이미지와 풍경들을 음악이라는 창을 통해서 지켜본 나는 문득 작년에 로마로 1년간 체류하러간 조카를 불현 듯 찾아가고 싶어졌다. 조카도 보고 로마도 보고, 그 녀석이 한국에 돌아오기 전에 가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벌써 궁리하기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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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보님, 레일님, 요하네스 브람스님 어제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역시 해박하신 율리시즈님 답습니다.
정말 감동적인 연주였습니다. 아직도 가슴이 얼얼..
끝까지 목적지 까지 데려다 주시는 배려심에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7월에 또 뵙죠...^^
7월에 뵙죠. 저도요.
레일님 이웃동네 분이라 뵐일이 많을듯... ㅎㅎ.
멋진 리뷰 잘 읽었습니다. 마치 지금도 2층 객석에 앉아있는 느낌이네요.ㅎㅎ
어제 잠깐이지만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합창은 계속 하시는 건가요?
합창대회...본부 전직원이 참여하는 그들만의 리그(?)였어요. 5월 28일로 마무리된겁니다^^
우와~~ 그저 입이 딱 벌어지게 만드는 군더더기 하나없는 최고의 리뷰네요!!
율리시즈님 특유의 해박함과 유려하고 적확한 문체에 한껏 반하게 됩니다.
오늘 수원공연도 가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가보셨다면 두번째 공연도 멋진 스케치 부탁드립니다!! ㅎㅎ
구자범과 경기필의 앞날에, 그리고 율리시즈님의 남다른 열정과 멋진 글에 브라보를 외칩니다!! ^o^v
과찬이세요. 수원도 가고 싶었는데 일 때문에 밤새고 와서 좀전에 일어났습니다. 카라얀님 7월에 뵙기를...
안녕하세요? 어제 초면에 환대해주시고 함께 챙겨주시고 구자범 지휘자님 기다려주셔서 감사했습니다..물론 로비에서 못뵙게되어서 죄송했어요~ㅠ율리시즈님께서 서울야경과 테라스의 바람을 선사해주셨고요 유쾌하신 레일님의 여유감사했구요 요하네스브람스님과 함께 브람스를 공유해서 행복했고요~ 해박한 평화님 영화며오페라며 검색하면 바로 나올것만같아서 깜짝 놀라 황홀했었습니다.
역시 역사와 전통의 고품격 말러카페, 듣던대로 였어요!!^^*
멀리서 오셨는데 좋은 감상에 잘 가셨으니 다행입니다. 만난 분들을 일일이 기억할뿐만 아니라 특징까지 잡아내주는 대단한 혜안을 가지셨어요. 닉네님만큼 인상적이시고 실제로는 더 밝은 분이시고,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역시 율리시즈님의 글이네요. 율리시즈님의 첫인상에서부터 기대하던 딱 그 느낌의 글 너무 감동입니다. 아는 것과 느끼는 것과 사랑하시는 것의 조화가 느껴집니다.
아는 것과 느끼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조화,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하늘나리님은 댓글조차도 에세이군요~
갑자기 그 말이 생각났습니다. 율리시즈님에게 어울릴 것 같은 표현 아닌가요.
고양으로 초대했던 고모님이 클래식은 처음이신분인데.... 고향떠나 일산의 고층아파트에 갇혀 손주돌보며 지나신 지난 십년간의 체증이 한꺼번에 뻥 뚫렸다고 극찬을 하셨습니다.
고양쪽에 친인척이 많이 계시네요^^
클래식 저변확대? ㅎㅎㅎㅎ 고모님 바람쐬시라고 여쭈었더니 너무 좋아하셔서 가을에도 ...
몇년전 딸하고 손잡고 갔던 로마행...곳곳에 아름다운분수들~검푸른 소나무들...레스피기의 곡들을 들으면서,,,행복한여행의 기억이 떠올라 한참이나 행복했습니다..
지금 이 시간은 요하네스님이 제일 부럽네요~
행복하셨겠어요. 로마로 다시 여행하게 해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