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가타 릿샤쿠지4 - 산 속에 자리한 릿샤쿠지 (立石寺) 절을 보고 야마가타로!
2022년 11월 4일 야마가타(山形) 역에서 센다이행 仙山線(선산선) 기차를 타고는 3정거장 야마데라
(山寺) 역에 내려 릿샤쿠지 (立石寺) 절의 본당인 곤폰주도를 보고 가파른 산에 만든 수없이 많은
돌 계단을 숨을 헐떡이며 한시간을 올라 드디어 거의 정상에 이르러 아름다운 여러 불당을 구경합니다.
릿샤쿠지(立石寺)는 헤이안(平安)시대 전기에 천태종(天台宗)의 승려인 자각대사
(慈覚大師, 지카쿠다이시) 에 의해 860년에 창건된 역사가 있는 절 입니다.
일본을 대표하는 가인(歌人)・마츠오 바쇼(松尾芭蕉) 노래 무대가 되기도 했으며 1000단이 넘는 긴 돌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데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돌계단 끝에 오르면 산 아래를 조망하며 절경을 즐길수 있습니다.
릿샤쿠지에서는, 사계절 각각 다른 절경을 볼 수 있으니...... 사람들이 계절마다, 1년에
4번씩이나 거듭 방문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는 릿샤쿠지의 매력은 놀랍습니다.
일본 내에서 북쪽 지방에 해당하는 야마가타현에 봄이 찾아오는 것은
4월 하순인데...... 그 시기가 되면 산벚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연한 빛을 한 핑크의 벚꽃과, 녹색 산의 대조는 가히 절경이라...... 산을
오름으로써 볼 수 있는 산벚꽃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가 있습니다.
“고요함과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의 소리” 라는 마츠오 바쇼가 읊었던 한 구절에 추억을
더하고 싶다면, 서늘한 여름에 방문하는게 좋은데.... 여름이라 해도 산 속에는 나무
그늘이 있어 시원하고 고요한 공기 속, 귀를 귀울이면 새소리며 바람 소리가 들려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릿샤쿠지가 가장 아름다운 색을 띄는 것은, 곱게 물든 단풍으로
뒤덮이는 가을 시즌이라고 할 것이니.... 단풍은 매해 11월경에 만개를 합니다.
산 전체가 붉은색이나 노란색으로 물들고, 바위나 미도와 어우러지는 모습은 가을에만 볼 수
있는 경관인지라 산 속을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가을의 릿샤쿠지라고들 말합니다.
또한 겨울 릿샤쿠지에는 눈이 많이 내려 마치 예술작품 같은 경치를 자랑한다는데..... 깊은 눈 속에
위치한 사찰은 일본 특유의 정취가 깊은 아름다운 경치는 이 곳에서만 볼수 있는 절경이라 합니다.
여기 산 정상에서 저 아래에 펼쳐진 시가지를 내려다 보니 마치 남산 타워에 올라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남산(南山) 이라면 생각나는게 있으니 동아일보 조종엽 기자가 쓴 기사에
히로세 레이코가 지은 “제국의 소녀들” 이니, 바로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 소녀들 이야기 입니다.
“짙은 남산의 푸르른 소나무를 올려보면서… 맑은 한강의 여울을
멀찌가니 바라보면서… 빛나며 번성하길 가르침이여.”
저 노래는 아주 평범한 교가(校歌) 같지만.... 1908년 경성고등여학교 (1945년 해방후
폐쇄되었다가 1946년 이 건물에서 경기여고가 개교했음) 개교식에서
부른 노래다. 이 학교는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다녔던 조선 제일의 엘리트 여학교 였다.
식민 통치와 여성에 관해 연구한 일본 홋카이도정보대 명예교수가 경성고녀에
다녔던 이들을 인터뷰해 식민지 조선에서의 경험과 인식을 조명했다.
구조적 강자였던 일본인 소녀들의 삶은 풍요로웠다. 대지주 등 조선에 와서 부유해진 집안의 여식
으로 부족한 게 없었다. 학교에서는 영어와 미술, 수영, 구기, 음악 등 다양한 과목을 배웠다.
성대한 운동회와 음악회가 열렸고, ‘내지’(일본 본토) 로 호화로운 수학 여행을 갔다.
‘현모양처’라는 규범에 갇혀 억압적인 본토와 달리 학교 분위기는 개방적
이었고, 진취적이었다. 여성 비하적 발언을 하는 교사에게 집단 항의를 하기도 했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따로 있었다. 조선인과는 생활권 자체가 분리돼 있었고, 접점은
‘오모니(어머니)’ 나 ‘기지배’ 로 불렸던 식모 등 고용인이 거의 전부였다. 모두가
‘너무나 맛있었다’ 고 기억하고 있는 김치를 제외하면 조선의 문화도, 조선인도 깔봤다.
조선인이 일본어를 하는 것에도, 창씨개명에도 의문을 갖지 않았다. 조선을 그냥 일본이라고 여겼고, 식민지
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패전 직후 태극기와 만세 소리의 물결을 접하고
나서야 조선인이 얼마나 강렬하게 독립을 열망했는지, 일본의 지배가 얼마나 조선인을 괴롭혔는지 깨달았다.
풍요로운 생활기반을 뿌리째 잃어버리고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는 냉대에 직면했다. 시간이 흐른 뒤에는 “독립
을 빼앗은 후 언어와 문자 등 문화까지 빼앗아 간 식민정책 속에서, 부끄러울 정도로 무지한 채로 살았다”
고 반성했다. 저자는 “일본에서 이러한 자성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의 존재 의의를 생각하고 싶었다” 고 했다.
미군정은 이들 일본인들이 두고 간 집과 논이며 밭과 공장과 회사등을 몰수해서 적산가옥 이라
부르면서 민간에 팔아서 그 재원으로 3년간 군정통치 자금으로 썼으며..... 1948년
이승만 정부도 이런 정책을 이어 받았으니 당시 국세 1위는 농지세일 정도로 기업이
전무해 회사원도 없이 모두 실업자들인지라 세금 거둘데가 없던 정부에는 귀중한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재산을 잃고 무일푼으로 일본에 돌아간 이들이 일본 정부에 보상을 요구하니
패전후 일본 정부도 재정난이 극심했던지라 돈이 없으니, 한국에 가서 미군정청
이나 한국 정부에서 받으라는? 원래 전쟁에서 사유재산은 점령군이라 하더라도
빼앗지 못한다는게 국제법이지만......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우니 저들은 알거지가 됩니다.
릿샤쿠지에는 많은 미도(御堂, 불상을 안치한 당집)가 있는데, 그중 몇개는 부처를 실제
로(?) 만날수 있다고 하는데, 우선은 산 아래에 릿샤쿠지의 본당인 “곤폰주도”.
이니...... 이 곳에는 방문객이 참배할 수 있는 “쇼후쿠보테이손” 을 모시고 있습니다.
자신의 몸에 상태가 안 좋은 부분을, 쇼후쿠보테이손의 몸을 어루만지며 소원을 빌면 좋아질 수
있다고 하는데..... 많은 참배객들에게 만져진 쇼후쿠 보테이손의 큰 몸은 반짝거리니
절경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는 아까운 릿샤쿠지인지라 부처를 실제로 만져보면서 참배한다나요?
릿샤쿠지 절을 보다가 문득 동아일보에 실린 “한국은 문화대은의 나라”… 日 대표적
친한파 불교 종교인인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창가학회(創価学会·
소카각카이) 명예회장이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5세다.“ 라는 기사가 떠오릅니다.
‘가치를 창조하고 배운다’ 는 뜻인 창가학회는 일본에서 신자가 800만명이 넘는 대형 신흥 불교다.
한국을 포함해 192개 국가· 지역에선 SGI(창가학회 인터내셔널)란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엔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라는 창가학회의 기도문이 잘 알려져 있다.
1928년 도쿄도에서 태어난 이케다 명예회장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일본 민중에게
“현세의 행복을 추구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 라는 평화주의를 설파한 인물이다.
19세 때인 1947년 창가학회에 입회했고 32세 때 회장에 올라 신자 수 5000명도 안 되는 단체
를 큰 조직으로 성장시켰다. 1964년에 그가 주도해 창당한 공명당은 현재 자민당과
함께 일본을 이끄는 연립 여당이기도 하다. 1975년에는 해외 포교를 위해 SGI 를 설립했다.
이케다 명예회장은 ‘전쟁 경험 세대의 마지막 친한파’ 로 꼽힌다. 군국주의 전쟁의 참혹함
을 목도한 일본 지식인들은 전후에 평화헌법을 지지하는 최대 세력이었고
그도 그중 한 명이었다. 전쟁을 경험 못 한 아베 신조 전 총리 등 전후 세대와는 다르다.
이케다 명예회장은 생전 “한국은 일본에 문화대은(文化大恩) 의 나라” 라고
말하며 일본 학생들에게 세종대왕· 이순신·유관순·안창호와 같은
한국의 위인을 가르쳤다. 재일교포에게 참정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도 했다.
그는 생전 SGI 기관지인 화광신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출병(임진왜란)은 조선에서 받은 문화적
은혜를 짓밟는 침략이었다” “일본은 한국과 우정을 맺고, 한국을 존경하고, 한국의 마음을
배움으로써 평화와 번영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등의 글을 남겨 일본 우익으로부터는 공격을 받았다.
1997년 한국 대통령 선거 때 한국 SGI가 현실 정치에 참여해 김대중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를 지지한
것도 그의 지론에 따랐다고 알려졌다. 당시 한국 SGI의 회원 수는 120만명, 유권자는 60만~
80만명으로 추정된다. 당시 대선에서 김 대통령은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약 30만 표 차이로 이겼다.
한일 가교의 공로를 인정받은 고인은 2009년 한국에서 국가훈장(화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한 6자 회담의 제도화 등을 제안했다. 영국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 등 글로벌
지성들과의 대담으로도 유명하다. 1970년대 토인비 박사와 대담집 ‘21세기를 여는 대화’ 를 냈다.
냉전이 극에 달한 1970년대 중반엔 중국 저우언라이 총리, 구(舊)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
과도 대담했다. 이후 미하일 고르바초프(전 소련 서기장), 후진타오(중국 전 국가주석),
코피 아난(전 유엔 사무총장) 등 각국 지도자와도 ‘평화’를 주제로 대담했고
이렇게 출판한 책만 70여 권에 이른다. 일본에선 노벨평화상 후보로 꼽혔던 인물이기도 하다.
요미우리신문은 19일 자 신문의 1면 머리기사로 그의 부고를 전하며 “고인은 본인의 자전적 소설인 ‘인간
혁명’ 에서 ‘전쟁만큼 잔혹한 것도, 비참한 것도 없다’고 썼다” 고 보도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엑스 (X·옛 트위터) 에 “이케다 회장의 부고를 접하고 깊은 슬픔을 견딜 수 없다” 라고 썼다.
그러고는 다시 수많은 계단을 걸어 산을 내려와서는 절아래 마을 寺下村(사하촌) 에 도착하는 데.....
일본 말로는 데라시타노무라 寺下の村 또는 후모토노마치 ふもとの町 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높은 산을 힘겹게 올라갔다 내려왔으니 배가 고픈지라 야끼만두와 당고를 사서 먹고는 그래도 정식 식사를
해야 하는지라 수타로 음식을 만든다는 식당으로 들어가서는 뜨거운 소바를 한그릇 시켜서 듭니다.
이 소바는 생면을 끓여서 만든다고 하는데 양은 우리 생각과는 달리 아주 많으며.... 덧붙여 목이
마르니 생맥주 나마비루 까지 한잔 시켜 쭉 들이키니 비로소 갈증이 잦아드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5분여를 걸어서 야마데라 역으로 가서는 240엔 씩에 기차표를 끊어서 역사에서
조금 기다리다가 센다이에서 오는 기차를 타고는 20여분만에 야마가타에 도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