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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2월 12일 수요일
[(녹) 연중 제5주간 수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빚으시고 에덴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없다며,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데려다 에덴 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돌보게 하셨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2,4ㄴ-9.15-17
5 땅에는 아직 들의 덤불이 하나도 없고, 아직 들풀 한 포기도 돋아나지 않았다.
주 하느님께서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흙을 일굴 사람도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6 그런데 땅에서 안개가 솟아올라 땅거죽을 모두 적셨다.
7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8 주 하느님께서는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 하나를 꾸미시어,
당신께서 빚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9 주 하느님께서는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를 흙에서 자라게 하시고,
동산 한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
15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데려다 에덴 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다.
16 그리고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4-23
그때에 14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15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16)
17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에 들어가시자, 제자들이 그 비유의 뜻을 물었다.
1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도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19 그것이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밝히신 것이다.
20 또 이어서 말씀하셨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21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22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23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날 우리 사회는 ‘웰빙’(well-being)을 숭배하는 사회라고 할 만합니다. 이 낱말을 문자 그대로 푼다면 ‘잘 살기’, ‘잘 존재하기’ 정도로 이해되는데, 이는 곧 인간 존재가 모든 차원에서 건강하고 평안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감을 뜻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사용되는 경우를 보면 대부분 육체적 건강과 미용의 차원에 집중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이 오염되지 않은 물과 공기와 식품을 얻는 데 수고와 지출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육신의 건강을 돌보는 만큼 영적 건강도 돌보는지요? 음식을 비롯한 외적 물질은 건강을 해칠 수는 있을지라도 내적 인간을 더럽히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몸을 지나 몸 밖으로 빠져나감으로써 마음에 닿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배”와 “마음”(마르 7,19)을 분명히 구분하시고, 배가 아니라 마음에 머무르면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 인간을 더럽힌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그것은 물질이 아니라 바로 나쁜 행동을 일으키는 “나쁜 생각”(7,20), 곧 다른 사람을 해치는 행동의 동기들입니다. 사실 안에 있는 것은 언제든 어떻게든 밖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안에 있는 것을 잘 돌보아야 합니다. 보이는 음식과 보이지 않는 마음 사이에서 우리는 어디에 더 신경을 쓰는지요?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마음의 순결을 돌보는 지혜를 청합시다.(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이웃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 영성가께서 지극히 간단하지만 심오한 한 마디를 건네주셨는데, 한 문장의 말씀이지만, 그 말씀이 제 마음에 꽂혀 오래도록 묵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은 이것입니다.
“이웃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십시오!”
이웃, 특히 가까운 이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때로 얼마나 꼬였는지,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편향적인 시선인지 깊이 반성합니다.
동시에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도 너무 지나칠 정도로 혹독하거나 엄격하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관대하거나, 중심을 잡지 못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힘든 부분이 나 자신과 이웃을 바라보는 균형잡힌 시선인 것 같습니다.
때로 나 자신이란 존재 제가 봐도 신기하고 흥미롭습니다. 제 속에 뭐가 그리 내가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때로 태평양보다 더 넓은 마음의 내가 있는가 하면, 때로 송곳 하나 들어갈 수 없을 정도의 속 좁은 내가 있습니다. 때로 시속 500킬로의 테제베같이 성급한 성격의 내가 있는가 하면, 때로 나무늘보보다 더 느긋한 내가 있습니다.
비단결보다 더 고운 너그러운 천사 같은 내가 있는가 하면, 눈빛이며 얼굴이 무섭고 기괴한 사탄 같은 내가 있습니다. 오늘 비록 내가 천사로 산다 할지라도, 내일 사탄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변화무쌍한 우리네 삶입니다. 참으로 종잡을 수 없는 나입니다.
오늘도 제 안에 들어있는 것이 어떤 것들인지 곰곰이 헤아려 볼 일입니다.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이왕이면 선한 것들, 가치있는 것들,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들로 가득 채워나가야겠습니다.
내면에 차곡차곡 쌓아놓으면 부패할 것들, 역한 냄새 풀풀 풍겨, 나 자신을 더럽히는 것들, 주변 사람들 괴롭힐 것들은 자꾸 비워내야겠습니다. 그것은 오늘 예수님께서도 언급하신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20-23)
정녕 인간을 오염시키고 부패시키고 타락시켜 추하게 만드는 것은 외적,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옷 좀 떨어졌다고 그 사람이 더러운 사람이겠습니까? 몸에 흙탕물이 좀 튀었다고 그 사람이 지저분한 사람이겠습니까? 샤워 한 며칠 안 한 사람을 두고 타락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인간을 오염시키고 타락시키는 것은 인간의 내면, 인간의 영혼과 관련된 것, 다시 말해서 죄입니다. 그 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오늘 예수님께서 잘 나열하신 것입니다.
당시 오류와 편협된 사고에 빠진 바리사이들은 깨끗함과 더러움의 기준을 사물의 외적인 상태에 두었습니다. 그 사람의 내면이 어떠하든, 그 사람 영혼의 상태가 어떠하든, 그 사람이 맺고 있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어떠하든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로지 그의 몸 상태가 청결한가 아닌가가 관건이었습니다. 율법의 세칙에 따라 그가 손을 씻어야 할 때 손을 씻었는지, 발을 씻어야 할 때 발을 씻었는지, 그것만 뚫어지게 쳐다 봤습니다.
정녕 깨끗한 사람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깨끗한 사람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깨끗한 사람은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영화 ‘하얼빈’을 보았습니다. 영화는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전 1주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안중근을 독립군으로 이야기하면서 안중근을 고뇌에 찬 인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비록 나라를 빼앗기고, 먼 타국에서 독립운동하며 고난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았던 안중근을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의 이야기는 일본군 포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안중근은 전투 중에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를 만국의 공통 법에 따라서 풀어주자고 하였습니다. 동료들은 그렇게 하면 포로들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보복할 것이라고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안중근은 일본군 포로들을 풀어주었습니다. 일본군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독립군을 공격하였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조직을 배반했던 동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일본군에게 잡혀갔던 동료는 모진 고문을 받고 조직을 배반한 변절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배반으로 독립군의 작전은 노출되었고,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도 큰 차질이 생겼습니다. 조직은 배반자를 처단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안중근은 변절자에게 기회를 주자고 하였습니다. 변절자는 일본군을 죽이고 조직에 합류하면서 영화는 끝납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가톨릭 신자였던 안중근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제자들에게도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새로운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 베드로야! 너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는 3번 똑같이 질문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님! 형제가 잘못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충분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 이는 용서에는 제한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온 아들을 품어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순간에 자비를 청했던 십자가의 죄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안중근은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였습니다. 원수를 사랑하였고, 죄인을 용서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낙원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낙원은 무엇일까요?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따뜻한 바람이 부는 아름다운 동산이 낙원일 수 있습니다. 4계절이 뚜렷하고, 먹을 것이 풍부하고, 정이 넘치는 마을이 낙원일 수 있습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숨을 불어 넣어 주셨던 인간의 ‘마음’이 낙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안중근처럼 이웃을 사랑하고,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마음이 있다면 망국의 한을 품고 먼 타국에서 풍찬노숙할지라도 낙원에 있는 겁니다. 으리으리한 넓은 집에 살면서 맛있는 걸 먹고, 비단옷을 입었을지라도 분노와 욕망으로 더러워진 마음이 있다면 그곳은 이미 ‘실락원(失樂園)’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것들은 내 안에서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잘 다스릴 줄 알면 우리는 외부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악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우리 자신을 잘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욕심, 시기, 질투, 탐욕, 인색, 게으름은 모두 내 안에서 나옵니다. 이 세상을 오염시키는 것은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셨던 인간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 때문입니다. ‘시기, 질투, 교만, 인색, 탐욕, 욕망, 미움, 원망’과 같은 것들은 이 아름다운 세상을 무질서하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악한 것들이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은 밖에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들 내면의 갈등과 우리들 내면에서 나오는 악한 것들의 뿌리를 자를 때 비로소 회복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달렸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5)
하느님께서
나를 있도록 빚으셨으나
나를 어엿이 있게 하는 것은 나요
나를 없게 하는 것도 나이니
내가 있고 없고는
나에게 달렸다
하느님께서
나를 나이도록 빚으셨으나
나를 참으로 나이게 하는 것은 나요
나를 나 아니게 하는 것도 나이니
내가 나이고 아니고는
나에게 달렸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람이도록 빚으셨으나
나를 온전히 사람이게 하는 것은 나요
나를 사람 아니게 하는 것도 나이니
내가 사람이고 아니고는
나에게 달렸다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을 닮도록 빚으셨으나
나를 오롯이 하느님을 닮게 하는 것은 나요
나를 하느님을 닮지 않게 하는 것도 나이니
내가 하느님을 닮고 아니고는
나에게 달렸다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과 하나이도록 하셨으나
나를 비로소 하느님과 하나이게 하는 것은 나요
나를 하느님과 갈라서게 하는 것도 나이니
내가 하느님과 하나이고 아니고는
나에게 달렸다
오늘의 성인
성녀 마리나 (Marina)
신분 : 동정녀
활동연도 : +연대미상
성녀 마리나는 비티니아(Bithynia, 고대 소아시아 북서부 지역)의 에우게니우스(Eugenius)란 사람의 딸이다. 그녀의 부친은 홀아비 생활을 청산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얼마가 지나자 친척집에 맡겨둔 어린 딸 마리나 생각에 마음이 헷갈리게 되자, 원장에게 그 아이는 마리누스(Marinus)라는 남자 아이이니 자신과 함께 수도원에서 살게 해달라고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녀는 부친과 사별할 때까지 그러니까 17세 때까지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그 후에도 그녀는 남자 수도자로서 계속하여 생활했는데, 어느 여인숙 주인의 딸이 마리누스가 자신에게 임신시켰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이 때문에 그녀는 수도원 밖에서 걸식을 하며 살았고, 그 처녀는 아이를 낳아서 마리누스의 아들이니 돌보라고 맡기고 떠났다.
성녀 마리나는 그 모든 것을 침묵으로 일관하며 끝까지 인내하였다. 5년 후 원장은 마리누스의 놀라운 인내와 겸손을 인정하여 5세 된 아들과 함께 수도원에서 다시금 살게 했으나 매우 힘든 일만 시켰다. 그 얼마 후 마리누스는 운명하였고, 시신을 수습하던 중에 마리누스가 여성임이 밝혀졌다. 원장 이하 모든 수도자들과 시민들은 그녀의 위대한 용덕과 인내심을 찬양하였고 엄숙한 장례가 거행되었다.
성율리아노
자선가
전설에 의하면, 그는 귀족이었는데, 실수로 인하여 그는 부친과 모친을 죽였다고 한다.
예기치 못한 이 죄를 보속하기 위하여 그는 아내와 함께 강을 건너는 여울 곁에 살면서 여행자들에게 도움을 베풀거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숙소를 마련하였다.
어느 날, 추위로 인하여 동사 직전에 있는 사람을 구하여 주었더니,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대의 죄를 사했노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하여 자기의 침대에 나환자를 잠 재우기도 하였다.
그는 호텔 경영자, 여행자, 그리고 뱃사공의 수호 성인이다.
[성 줄리앵의 전설]
이 작품은 19세기 프랑스가 배출한 위대한 사실주의 작가 플로베르가 그의 만년에 철저한 고증을 거치고 심혈을 기울인 끝에 1876년에 탈고한 단편소설입니다.
플로베르는 한 가지 사물에는 오직 한 가지 표현만이 가장 적확하다는 신념을 갖고 그러한 표현을 찾기 위해서라면
때로는 몇날며칠이라도 골방에 틀어박혀 고심하였다고 하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질 만큼 성실한 리얼리즘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짧은 단편소설 하나를 탈고하는 데에도 반년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이 작품을 쓴 동기는 작가 고향에 있는 어느 교회의 그림유리를 보고 착상을 얻은 것이라고 하며, 그 줄거리는 자끄 드 보라진의 [황금전설]이라고 합니다.
저는 예수회에 들어 오기 전에 이 소설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고 그후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 있었습니다.
언젠가 한번은 이 소설을 축약하여 전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번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맞아 다시 이 소설 생각이 나게 되었습니다.
전설 따라 구만리를 떠나는 이 여정을 통해 많은 분들이 결코 쉽게 만날 수 없는 뜻 깊은 무엇인가를 발견하리라고 믿고 희망합니다.
복녀 훔벨리나(Humbeline)
활동년도 : 1092-1135년경
신분 : 수녀원장
지역 :
같은 이름 : 훔벌리나, 훔베리나
프랑스 클레르보(Clairvaux)의 성 베르나르두스(Bernardus, 8월 20일)의 여동생인 훔벨리나(Humbelina)는 프랑스의 디종(Dijon)에서 태어나 귀족이던 귀 드 마르시(Guy de Marcy)와 결혼하였고 귀족적인 생활을 하며 살았다. 어느 날 그녀가 오빠를 만났을 때 화려한 옷과 생활태도에 대한 지적을 받게 되자 그녀는 매우 부끄러워하며 마음으로부터 회개의 빛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몇 년 후 그녀는 남편의 허락을 받고서 줄리(Jully)의 베네딕토 수녀회에 입회하였고, 그곳의 원장이던 엘리사벳(Elisabeth)을 계승하여 원장이 되었으며, 엄격한 생활을 통하여 수덕생활에만 전념하여 높은 성덕을 쌓았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1763년에 승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