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물질을 생산하여 저장하는 알파실험 장비 <출처: Maximilien Brice/CERN>
“반물질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영화 <천사와 악마>를 대답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화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 설치된 강입자충돌기(LHC, Large Hadron Collider)의 양성자 충돌실험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분주한 과학자들과 긴박한 가속기 가동 장면과는 달리 영화의 진짜 이야기는 차분하게 LHC 빔을 옆으로 뽑아내 반물질을 생성하는 지하 비밀 실험에서 시작합니다. 영화 속 범인은 이 반물질을 담은 병을 탈취해 바티칸을 날려버리려고 합니다. 영화의 줄거리 상 핵폭탄을 탈취했다고 해도 충분하지만, 아마도 “반물질”폭탄이란 낯선 물질을 사용하여 관객들에게 신비감을 더해주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반물질에 대한 또 다른 유명한 얘기는 반물질이 세상에서 가장 비싼 물질이란 것입니다. 1그램당 6000조 원 정도 한다고 하니 같은 질량의 다이아몬드보다 1억 배 정도 더 비싼 물질입니다.
최근 CERN에서는 반물질 중 가장 단순한 구조를 가진 반수소(antihydrogen)를 다량 만들어 가두어 놓고, 반수소가 수소와 똑같이 빛을 흡수하고 방출한다는,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를 <네이처>에 발표해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표준모형과 양자역학이 틀리지 않다면 해볼 필요도 없는 실험을 왜 했을까요? 사실 과학의 진보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믿어지는 사실을 의심하고 검증해보는 과정에서 얻어집니다. 사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이 아니다라고 판명이 나면 이전의 패러다임은 사라지고 비로소 새로운 과학이 탄생하는 것이지요. 오늘은 반물질의 성질을 정밀하게 탐색할 수 있는 CERN의 알파실험(Alpha experiment)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원자를 구성하고 있는 입자는 양성자, 중성자, 그리고 전자입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각기 반대되는 전하를 갖는 반입자들이 존재합니다. 양성자(proton)의 반입자는 반양성자(antiproton)입니다. 중성자(neutron)의 반입자는 반중성자(antineutron)이고, 전자(electron)의 반입자는 양전자(positron)입니다. 일관성 있게 전자의 반입자를 “반전자(antielectron)”라 해도 좋겠지만 역사적으로 양전자라고 부른답니다.
전자를 표기할 때는 electron의 첫 자를 따서 간단히 라 쓰고, 때론 전하 부호를 넣어서 로도 씁니다. 양전자는 양전하를 띈 전자이므로 라고 표시합니다. 양전자는 최초로 발견된 반입자로 1932년에 칼 앤더슨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양전자는 쓸모도 많아 병원에서 쓰는 양전자단층촬영장치(PET, Positron EmissionTomography)의 작동에 없어서는 안 될 입자입니다.
마찬가지로 양성자의 쌍둥이 형제로 음의 전기를 갖는 반양성자가 있습니다. 양성자는 proton의 앞 글자를 따서 라고 표시합니다. 그럼 반양성자는 로 쓰면 될 것 같은데, 불행히도 로 써야 합니다. 반양성자의 존재는 양전자보다 훨씬 늦은 1955년이나 되어서야 가속기 실험을 통해 입증이 됩니다. 중성자도 마찬가지로 neutron의 앞 자를 따서 으로 표시하고, 반중성자는 로 표기합니다.
입자와 반입자
반물질이란 바로 반입자들로 구성된 물질을 말합니다. 원자들 중 가장 간단한 구조를 갖는 수소는 양성자 한 개와 전자 한 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치 태양계의 모습처럼 무거운 양성자 주변을 전자가 빙빙 도는 모습으로 수소원자를 그릴 때가 많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장 간단한 구조를 갖는 반물질은 반양성자 한 개와 양전자 한 개로 구성된 반수소입니다. 반수소는 수소원자와 완전히 똑같은 구조를 가질 것이고 오로지 전하만 반대인 상태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반헬륨, 반리튬, 반베릴륨 등 주기율표에 있는 모든 원소의 반물질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반물질로 만들어진 “반세계”가 우주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고요.
반수소는 수소와 같은 구조를 가졌으나 반입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CERN의 알파실험팀은 어떻게 반수소를 만들었을까요? 반수소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반양성자와 양전자를 먼저 만들어야 합니다. 반양성자는 고에너지로 가속된 양성자를 물질과 충돌시켜 만들어 냅니다. 양성자가 물질과 부딪히면 다량의 2차 입자들이 발생하는데, 거기서 반양성자만 골라내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만들어진 반양성자는 운동에너지가 높아 반물질을 만드는데 사용하기 힘듭니다. 다행히 CERN에는 AD라 불리는 “입자감속기”가 있습니다. AD는 Antiproton Decelerator의 약자로 반양성자의 속도를 줄이는 장치를 말합니다. 정확히 가속기가 하는 일의 반대 역할을 하는 장치입니다.
양전자는 나트륨(소듐)의 동위원소 중 하나인 22의 양의 베타붕괴 (beta plus decay)로 부터 얻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때 얻어진 양전자도 운동에너지가 커서 특별한 장치를 써서 감속을 시켜야 합니다. 감속된 양전자를 모아 놓으면 마치 플라스마 상태처럼 자기장 안에 가두어 놓을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충분히 냉각된 반양성자와 양전자를 서로 반대 방향에서 쏘아 서로 만나게 하면 서로가 전기 인력으로 끌어당겨 반수소를 만들게 됩니다. 이는 마치 남녀 스케이트 선수가 빙판 위를 미끄러져 달려가다가 서로 손을 잡으면 회전을 하면서 쌍을 만드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두 피겨스케이트 선수가 마주 오다 손을 잡으면 회전을 하면서 묶인 상태가 된다. 마찬가지로 반양성자와 양전자가 서로 다가가다 전자기력에 의해 끌려 반수소를 만든다. <출처: (cc) Uwe Langer at wikimedia.org>
반수소는 정말로 수소원자와 같은 구조를 가질까?
보어(Niels Bohr)의 수소원자 모델은 아주 간단합니다.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의 궤도 운동을 뉴턴역학으로 풀 듯이, 양성자 주변을 도는 전자의 운동을 뉴턴역학으로 푸는 것입니다. 다만 다른 점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태양과 행성 사이에는 만유인력이 작용하지만, 양성자와 전자사이에는 쿨롱 전기 인력이 작용한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행성과 같이 거대한 물체에는 양자역학적인 효과를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지만, 수소원자의 경우에는 전자의 각운동량이 양자화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보어는 수소원자 속 전자의 각운동량이 플랑크상수의 정수배를 갖는다는 조건()을 넣어 전자가 어떤 특정 궤도에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냅니다. 그리고 각 궤도의 반지름에 따라 전자가 가질 수 있는 에너지가 있어, 궤도 사이를 이동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복사선의 파장을 계산해 낼 수 있었습니다.
보어의 수소 원자 모델에서 가장 낮은 1층인 바닥상태를 1s상태라고 부릅니다. 그보다 한 단계 높은 2층을 2s, 2p 궤도라 부르고, 3층에는 3s, 3p, 3d의 궤도들이 있습니다. 원자의 전자배열 규칙은 고등학교 화학 교과서에도 잘 설명되어 있는데 아예 1s2, 2s2, 2p6, 3s2, 3p6, 4s2, 3d10, ...하고 통째로 암기하는 학생들도 많습니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알파실험에는 반수소를 만들어 자기장 속에 가두어 놓는 장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반수소 저장장치 양쪽에는 레이저 빛을 쏠 수 있는 창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알파실험은 이 창을 통해 반수소에 레이저 빛을 쏘아 1s 궤도에 있는 양전자를 2s 궤도로 천이시키고, 2s 궤도에 있던 양전자가 다시 1s 궤도로 내려오는 양을 측정함으로써 반수소가 완전히 수소와 똑같이 행동한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입증하였습니다.
알파실험 장치. 감속된 반양성자와 양전자를 서로 만나게 하여, 반수소를 만든다. 반수소는 자기장 가둠 장치에 갇혀 있게 되고, 레이저를 통해 들뜸 상태가 된다. 알파실험은 이 장치를 통해 반수소의 1s-2s 궤도 사이의 복사가 수소의 1s-2s궤도 사이의 복사와 완전히 같음을 증명하였다.
영화 <천사와 악마>에서 테러리스트가 훔쳐간 반물질은 8분의 1 그램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정도의 적은 양의 물질로 과연 바티칸을 날려 보낼 수 있을까요? 정말 핵폭탄이나 수소폭탄보다도 더 큰 폭발력을 가졌을까요?
핵폭탄은 핵분열 연쇄반응을 이용합니다. 예를 들어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농축 우라늄235를 사용하는데, 연쇄반응을 일으키기 위한 임계질량 있기 때문에 거의 60킬로그램이 넘는 우라늄이 사용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 연쇄반응에 가담하는 우라늄은 1킬로그램이 채 안되고, 연쇄반응 후 남는 물질을 빼고 핵반응 후 사라진 질량은 0.7그램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사라진 질량 0.7그램을 유명한 의 공식에 넣어보면 64조J(줄)이라는 값이 나오는데, 이는 1만5천 톤의 TNT를 한꺼번에 폭발시킨 것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실로 어마어마한 에너지이지요. 히로시마에 사용된 원자탄은 “꼬마(Little Boy)”라고 불렸는데, 폭탄의 전체 무게는 4.4톤이었다고 합니다. 0.7그램의 질량을 에너지로 전환시키기 위해 많은 부대비용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반물질 폭탄은 원자폭탄에 비하면 여러 면에서 유리한 점이 많습니다. 일단 반물질은 임계질량 같은 것이 없고 그냥 내버려 두면 주변에 있는 물질들과 만나 사라지면서 에너지를 냅니다. 연쇄반응의 효율 같은 것도 없습니다. 반물질이 물질과 만나면 100%의 효율로 에너지로 전환되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반물질 1그램이 물질과 만나면, 정확히 물질 1그램과 같이 사라지기 때문에 실제로는 2그램이 사라진 질량이 됩니다. 그런 면에서 반물질이 에너지로 바뀌는 효율은 200%라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천사와 악마>에서 반물질 실험을 하고 있는 과학자 <출처: 소니픽처스>
따라서 영화 속에서 사라진 8분의 1그램의 반물질이 그대로 자연에 노출된다면, 물질 8분의 1그램과 함께 사라져서 총 4분의 1그램이 에너지로 전환됩니다. 이를 에 넣고 계산해보면 22.4조J(줄)의 에너지에 해당하고, 대략 5~6천 톤의 TNT를 폭발시킨 것이 되니, 바티칸을 날려 보내기에는 충분해 보입니다.
핵폭탄은 연쇄반응의 효율 때문에 수십 킬로그램의 우라늄이나 플루토늄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핵폭탄을 탈취하려면 최소한 지게차도 있어야 하고, 트럭도 한 대 필요합니다. 반면 반물질폭탄은 저장장치만 휴대용으로 만들 수 있다면, 반물질은 1그램만으로도 충분하므로 매우 작게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는 반물질폭탄을 그냥 빼내서 도망갈 수 있었나 봅니다.
알파실험은 한 번 실험할 때마다 반양성자 9만 개와 양전자 백6십만 개 정도를 섞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때 생성되는 반수소는 대략 2만5천 개 정도라고 합니다. 한 번 실험을 할 때 2만5천 개의 반수소를 만들 수 있으니 꽤 많이 만들 수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2만5천 개의 반수소 원자는 몇 그램이나 될까요? 반양성자의 질량은 대략 1.67×10-27㎏이고, 양전자는 2000배나 가벼워서 9.11×10-31㎏정도이니, 2만5천 개의 반수소는 기껏해야 4.2×10-23㎏정도를 넘지 못하는 질량입니다. 따라서 알파 실험을 통해 반물질 1그램을 만들려면 2.4×1019번 실험을 해야 한다는 얘기가 됩니다. 따라서 CERN의 모든 시설을 100% 가동하여 하루에 한 번씩 반물질 생산 실험을 한다고 치더라도 1그램의 반물질을 얻기 위해서는 우주의 나이 137억년보다도 5백만 배나 더 걸린다는 계산이 됩니다. 다른 말로 반물질을 만들어 에너지원이나 폭탄을 만드는 일은 넌센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댓글 흥미로운 내용이네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