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6 총선 직후 제1야당으로 부상한 평민당은 전당대회를 열어 총선전 야권통합을 위해 총재직을 사퇴했던 김대중 선생을 총재로 추대하고 문동환(수석), 박영숙, 최영근, 조윤현, 손주항, 박영록씨를 부총재로 선출했다.
국회의원 선거의 소선거구제 채택은 평민당의 재기를 불러오는 쾌거였다.
김대중은 소선거구제가 유신잔재의 청산이며 국민의 염원이라고 생각하고, 평민당에도 결코 불리하지 않다고 판단, 이를 밀어부쳤다.
제13대 총선이 4월 26일 실시되었다.
김대중은 당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박영숙 총재대행을 비례대표 1번으로 하고 자신은 11번으로 등록했다.
11번까지 당선되기는 쉽지 않는 분위기였다. 일대 도박을 한 셈이다.
평민당은 대선 패배의 슬럼프를 벗고 총선준비에 돌입했다.
박영숙 총재권한대행의 이름으로 1988년 4월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임하면서 국민에게 드리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김대중의 뜻이 담긴 메시지였다.
첫째, 믿을 수 있는 야당의 위치를 흔들리지 않고 지켜나가겠습니다.
둘째, 강력한 견제세력이 되겠습니다.
셋째, 평민당은 안정과 개혁을 동시에 추구하는 정책정당입니다.
넷째, 평민당은 북방외교를 추진하며 통일의 문을 열겠습니다.
다섯째, 평민당은 지방자치제의 실현에 온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주석 17)
김대중은 대선 패배의 좌절과 절망감을 딛고 자당 후보자 지원 유세에 나섰다.
평민당 후보가 있는 곳은 전라도는 물론 강원도ㆍ경상도ㆍ경기도ㆍ충청도ㆍ서울을 빠지지 않고 순회하였다. 대선에서는 패배했지만, 견제세력을 뽑아서 노태우 정권을 감시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16년만에 소선거구제가 부활되어 실시한 총선은 예상외의 결과를 가져왔다.
지역구 224석과 전국구 75석을 합친 총 299석 중 민정당이 125석(전국구 38석), 평민당이 70석(전국구16석), 민주당이 59석(전국구 13석), 공화당이 35석(전국구 8석), 한겨레민주당 1석, 무소속이 9석을 차지했다.
정당정치가 정착된 이래 최초로 집권여당이 과반수 의석확보에 실패한 기록을 남겼으며,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었다. 평민당이 원내 제1야당으로 부상하고, 김대중은 제1야당 총재로 떠올랐다. 평민당은 총선에서도 득표율에서 3위에 그쳤지만, 호남선거구의 전승과 서울지역의 17개 의석을 차지하여 제1야당이 되었다.
김대중은 1972년 유신쿠데타로 의원직을 상실한 이래 16년만에 다시 국회의원이 되어 등원하게 되었다.
5월 30일 13대 국회가 개원하던 날 아침이었다.
일찍 국립묘지와 4.19묘지 참배를 위해 집을 나서는 그에게 말했다.
“시청으로 가시면 안 돼요.”
“… ?”
“국회의사당은 여의도라고요.”
“당신이 농담을 다 합니다.”
“나도 옛날엔 우스갯소리를 잘했다고요.”
“그때의 당신을 아는 사람들은 나를 원망해요. 내가 고생을 많이 시켜서 변했다고요.”
돌아보니 1972년 유신으로 국회가 해산된 후 16년만에 등원하는 셈이었다. 여의도 의사당은 1975년 8월에 준공해 여의도 국회시대를 열었다. 그는 의사당을 무척 그리워했으며, 그래서 대여 투쟁을 할 때 ‘국회등원을 거부하자’라는 제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주석 18)
의회주의자 김대중은 타의에 의해 의회에서 쫓겨난지 16년만에 다시 국회로 돌아왔다.
그 사이 광화문에 있던 의사당은 여의도에 우람한 건물을 지어 이사하고, 40대의 팔팔하던 나이가 어느듯 64세의 노령으로 접어들었다. 2009년 8월 김대중의 국장 영결식이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거행된 것은 의회주의자 김대중에게 적격한 장소였다.
주석
17) <평화민주당 ― 1989년>, 평화민주당 발행, 285 ~ 287쪽.
18) 이희호, 앞의 책, 287쪽.
첫댓글 조윤현이 아니고 조윤형입니다 현재 선진당 조순형의원 형입니다 참고로 유석 조병옥박사 아들입니다
저도 올리면서 '조윤현'이 누구인가? 했는데 잘 지적해주셨네요..본문에 손을 대기는 그렇고, 연포탕님 지적으로 알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