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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음에 대하여
이원익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 중생들은 욕심, 성냄, 어리석음이란 세 가지 독에 늘 절어 있다고 한다. 마치 기름에 오래 담가 두었던 헌 가죽처럼 이 독들이 속속들이 배어 있어서 웬만큼 헹구거나 볕에 바라지 않고서는 그 독의 일부라도 가시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게 아니고 우리가 설사 죄 없고 깨끗한 몸으로 이 세상에 내던져져서 한 동안 살아가고 있다손 치더라도 일상으로 몸담고 있는 이 현실이라는 게 또한 만만치가 않다. 이런 독들과 구정물이 출렁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물이 더 들었으면 들었지 맑아지기는 여간 어렵지가 않다. 게다가 날이 가고 나이가 들수록 더 욕심꾸러기에다 벌컥벌컥 위태로운 시한폭탄이 되든가 한 발자국 앞뒤도 못 가리는 개망나니 노추나 아니 되면 다행인 것이다.
요새만 그런가 하면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사회 전반에 정의가 통하고 평등이 기려지며 평화가 깃들었던 시대는 아마도 역사상 거의 없었거나 있어도 지극히 짧은 한 순간이었는지 모른다. 특히 한국이, 여기선 예전에 입에 익어 일컫던 대로 우리나라라고 부르자, 그랬던 것 같다. 정말 그럴까? 혹시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애증이 서린 우리나라와 겨레에 대해 가하진 부당한 평가와 폄하와 왜곡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우리 스스로 우리의 부끄러웠던 일들을 들춘다는 것이 못할 짓 같기는 하다. 우리가 먼저 우리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누가 우리를 제대로 사랑할 수 있을까?
하지만 누가 말했듯이 언제나 가장 중요하고도 강한 것은 조국이니 겨레니 사랑이니 애국이니 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것들의 밑바탕이 되는 진실 그 자체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진실이 우선이며 진실의 토대 없이 지어진 집이야말로 또 다른 욕심의 집이요 성냄의 성채며 어리석음의 마천루이다. 만약 그렇게 지어졌다면 반드시 조만간 무너질 건물이요 그럴 경우 그 피해마저 상당할 것임에 틀림없다.
서론이 좀 길어졌다만 우리 한국의 역사에 본받을 만한 애국자와 호쾌한 영웅호걸만 있지 않았음은 이제 초등학생 아이들도 다 안다. 적어도 제대로 생각의 길을 따라가는 청년이라면 역사상 어느 시대에나 매국노와 간신배, 배신자와 소인배들이 훨씬 더 넘쳐났고 그들이 부당하게 우리 역사를 어지럽히고 중요한 기틀에서 순리에 어긋나게 물꼬를 틀어 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나의 어머니와 조국만은 순결하기를 바랐던 순진하고 외골수였던 열혈 청년으로서 이를 알게 된 순간 그는 세 갈래 갈림길에 선다. 그 첫 번째가 포기와 방관의 길이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로구나. 조선 놈 엽전이 뭐 별수 있나, 아이 돈 케어, 내 앞이나 잘 가리며 즐기며 안전하게 살아야지.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좋은 게 좋다고, 따지고 보면 다 우리 잘못인데 누굴 탓하랴! 왜놈들 했던 말에도 일리가 있네. 그리고 뭐 정의가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고….
두 번째 길은 적극적인 부정의 길이요 눈감기다. 그럴 리 없다. 있더라도 그건 극소수 사례일 뿐 우리 역사는 영광과 빼어남으로 가득 찼다. 다른 나라 역사를 다 훑어 봐라. 거긴 배신자가 없고 탐관오리가 없었던가! 미국도 소련도, 일본도 중국도, 이 세상 어느 나라든 제 나라 역사에서 구린 냄새 나는 것은 다 덮어 버리고 묻어 버린다. 역사란 이긴 놈의 이야기다. 자학과 자기비판은 대책 없는 패배자, 향원들의 넋두리일 뿐이다. 대세를 위해서는 좀 잔인할지는 몰라도 이런 앞뒤 안 살피는 골치 아픈 부류들은 분서갱유 해버림이 낫다. 나라에 아무도움이 안 된다. 바로 파쇼의 길이요 아베의 길이다.
세 번째의 길은 무엇인가? 깨침의 길이요 건짐의 길이다. 바로 부처님의 길이요 보살의 길인 것이다. 뜬금없이 이게 무슨 소리인가? 달리 이야기를 풀어 볼까? 그건 달리 말하면 작은 욕심을 벗어난 큰 욕심의 길이요 작은 화를 죽인 큰 성냄의 길이다. 대도를 걸어가는 큰 바보, 큰 어리석음의 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끝내는 어둠에서 벗어나 밝음으로 가는 길이며 싸움을 피해 숨어 버리는 길이 아니라 무엇보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먼저 이기고 은연중에 당당히 드러나는 길인 것이다.
그러자면 그 길은 무엇보다도 우선 진실의 흙과 참의 자갈로 다져지지 않을 수가 없다. 참나, 참 우리, 냉철하고 밝은 눈으로 참 그것을 보고 찾아가는 길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폭력과 단죄보다도 더 강하고 오랜 자비의 마음으로 걸어가는 길이다. 그 모든 참모습을 들여다보며 나와 중생들이 그러한 끔찍한 잘못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도록 내 발을 담그고 손을 맞잡아 동사섭 하는 길이다. 개인과 사회의 깨침을 일깨우고 길동무를 조직하고 보살행을 실천하며 걸어가는 길, 바로 우리 불자들의 길이다.
그런데 우리 불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현실에서 실제로 걷고 있는 길이란 이와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 첫 번째 포기와 방관의 길 아니면 두 번째 폭력과 속임수의 길이다. 그도 아니면 도대체 자기가 지금 무슨 길 위를 걸어가고 있는지 최소한의 자각조차 없어 보인다. 일례로, 모든 고위 공직자는 기독교인이 돼야 한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닌 종교 편향자라든지 우리나라를 통째로 하느님께 바쳐야 된다고 소신(?) 있게 떠벌린 자가 공직자 후보가 되었다고 여론 조사를 해 보면 누구보다도 불자들 사이에 이런 사람들의 인기가 높게 나와 눈을 의심하게 만든다. 대단한 자비심의 발로인가 정신머리를 어디에 전당 잡혀 두고 온 것인가? 이럴 때 내 입에선 예수님이 하셨다는 기도가 저절로 흘러나온다.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지금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나이다….’ 어리석음의 극치다.
나는 이전에 누구처럼, 우리 역사책을 읽다 던져 버리고 싶은 적이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동화처럼 순결하고 영웅적이지만은 않을지라도 어쨌건 그것도 우리 역사며 버릴 수 없는 내 어머니의 이야기가 아닌가! 순결을 잃었다면 잃었을 만큼 다 사정이 있었겠지. 그만큼 그에 따른 눈물이 있고 한과 염원, 아니면 저주가 서렸겠지. 우선 진실을 알고 풀자. 진실부터 아는 것이 자손된 도리요 자식 된 도리, 사람 되고 불자 된 도리다. 던졌던 책을 다시 집어 오늘은 그 부끄러웠던 진실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가 보도록 하자. 그 중에서도 우리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런 삼대패전이란 것을 한 번 맞닥뜨려 보자.
전쟁이란, 살육이란 일단 수치스런 일이다. 그런데 불가피하게 그런 상황을 맞이하였다고 치자. 그런데 그러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지휘관과 집단의 어리석음과 나약으로 말미암아 치욕스럽고 어이없는 패배를 당하고 중생들의 수많은 목숨을 초개처럼 저버리게 하며 정신의 자부심을 다시 추스를 수 없을 만치 망가뜨린 일이 있다면 이는 결코 지나칠 수 없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서 실제로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 가운데서도 비교적 근세의 이야기, 가장 기억하기 괴로운 그 첫 번째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나무 관세음보살.
칠천량을 아시는가? 엽전 열 닷냥이 아니고 칠천 냥이라면 꽤 큰돈일 텐데? 이렇게 나오면 무식한 거고 지금 거제도 서쪽에 붙은 조그만 섬인 칠천도와 거제도 사이의 좁은 수로가 칠천량이다. 여기서 량이란 ‘돌 량’ 곧 도랑 같은 좁은 물길이다. 이 좁은 바닷길에서 지금부터 418년 전인 1597년 8월 27일, 조선 수군이 일본 해군에 절단이 났다는 말이다. 이 한 판 싸움으로 우리 측 거북선 3척과 판옥선 100 여척이 가라앉고 지휘관 포함 조선 수군 2만여 명이 궤멸 당했다. 전라좌수영의 김완은 포로로 잡혀 끌려가고 경상우수사 배설 장군은 전선 12척을 이끌고 겨우 도망쳐 나왔다. 총지휘관인 삼도수군통제사 원균 자신도 도망가다 왜병의 칼을 맞고 죽었다. 충청수사 최호와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끝까지 싸우다 전사한다. 정유재란 때 얘기다.
임진왜란을 종결시키기 위한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교섭이 결렬되자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 선봉대가 조선의 부산을 재침한 것이다. 이어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2군이 지금의 진해 근처인 웅천으로 상륙하여 북진하였다. 재침을 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하삼도를 점령하라 명령하였다. 그러나 보급로를 차단하고 있던 이순신 때문에 어쩔 수가 없던 차에 뜻하지 않은 곳에서 그를 제거하게 되었다. 사연은 이렇다.
서로 불화했던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당시에도 공을 두고 경쟁할 만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재침이 명령되자 가토 기요마사가 제1진으로 건너가게 되었는데 고니시 유키나가는 요시라를 경상 우병사에게 보내어 가토의 도해 정보를 흘려주었다. 하지만 조선 조정에서 이에 따라 가토에 대한 공격 명령을 내렸을 때는 이미 가토 군이 부산에 상륙한 뒤였기에 이순신은 공격 명령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 조정은 꼬투리를 잡아 이순신을 파면하고 대신 ‘할 수 있습니다’를 외쳐 온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에 앉힌다.
원균은 본래 이순신과 사이가 극도로 나빴다. 조정에서는 이를 알고 원균을 다른 지역으로 보내 둘을 떼 놨는데도 원균은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정작 신경 써야 할 자기 일은 따로 있는데도 자신이 맛본 패배에만 집착하고 자신을 누른 상대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는 육군을 지휘하면서도 줄기차게 수군에 대한 상소를 올린다. ‘저 같으면 이렇게 할 것입니다.’ ‘왜 결판을 미루십니까!’ ‘아, 정말 보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저 같으면 벌써 부산포를 들이쳤습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조정에 이 전략이 먹힌 것이다.
이순신의 가장 큰 강점은 싸울 곳을 스스로 고르고 아군이 유리한 상황에서 작전을 펼치는 신중함이었다. 그는 한산도에 조선 수군이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 적의 목구멍 밑에 비수를 겨누고 있음을 보았다. 욕심을 부려 적의 본거지 부산포를 공격하는 건 스스로 비수를 거두는 위험이었다. 하지만 조정은 부산포 공격에 안달이었다. 이때까지 다 이겼는데 부산이라고 왜 못 이긴단 말인가! 그런데 이순신은 움직이지 않는다. 괘씸한 놈! 자신의 졸렬함을 만회라도 하듯 선조는 이순신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고 임금의 의심은 그대로 이순신의 죄가 된다. 그는 파면 당하고 원균이 후임이 된다.
하지만 원균도 바보는 아니라서 한산도에서 부산 앞바다로 나아가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 지를 깨닫는다. 하지만 조정은 계속 성화다. 원균은 결국 출동하면서도 내쳐 부산으로 가지는 않고 가는 시늉만 하다 돌아온다. 그런데 이게 도원수 권율에게 걸려 질책을 당하고 곤장을 맞는다. 왜 네가 줄곧 내뱉은 말대로 안 하느냐고! 합참의장이 해군 참모총장의 볼기를 쳐 버린 것이다.
여기서 원균이 이전의 자기 잘못을 인정하여 주장을 거두고 권율에게 용서를 빌었다면 됐을 것이다. 적과 싸울 때보다도 우리 편과 싸울 때에 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는 반대로 했다. 자포자기였다. 안 될 줄 알면서도 분노와 오기 속에 전 함대에 명령을 내려 버린다. 부산으로 항진하라고.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다’며.
부산으로 나아가다 왜군 수송 선단을 발견하고 다짜고짜 돌격했지만 제대로 잡지도 못하고 대마도 근처까지 흘러 들어간다. 파도는 높고 병사들은 지친다. 여러 배들이 풍랑에 밀려 실종되는 악전고투 끝에 가덕도까지 후퇴하는데 이곳에는 왜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병사들이 내려 물을 긷고 나무를 베는데 갑자기 왜군이 덮쳐 원균은 그 수백 명의 병사들을 두고 도망친다. 그리고는 마의 칠천량으로 조선 함대가 집결한다..
용감할 때 용감해야 하는 건 미덕이지만 물러설 때 물러설 줄 아는 것도 큰 덕목이다. 원균은 이미 실패한 작전이고 병력을 조금이라도 더 보전해서 본영으로 후퇴해야 할 상황이었음에도 이를 무시한다. ‘하늘이 순리를 돕지 않아 어찌하겠소. 이제 오늘 마음을 다하여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칠 뿐이오.’ 경상우수사 배설이 어떻게든 후퇴해서 다음을 기약하자고 하자 원균은 다시 말한다. ‘그저 죽을 뿐. 당신은 너무 말이 많소.’
조선군은 싸울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고 지쳐서 잠에 떨어졌고 일본군 특공대가 함대 사이를 몰래 휘젓고 다녀도 모를 정도로 무방비 상태에 빠진다. 일본군은 함대를 세 겹으로 둘러쌌고 마침내 지난 6년 동안 이순신에게 피눈물 나게 당했던 한을 푼다.
자신의 역량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는 자가 벌이는 획기적 방안이라는 것은 대개 망조로 가는 길이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빨리 인정하지 못하고 미적미적할 때 파국은 시작되고 지도자가 자포자기와 오기의 사이에서 오락가락할 때 그 파국의 문은 열린다. 그리고 마지막의 아둔함은 자신의 퇴로마저도 스스로 막아버리는 것이다.
이순신이 피땀 흘려 모은 세계 최강급의 조선 함대는 이 칠천량에서 하룻밤에 잿더미가 된다. 상황 끝이라고 직감한 경상 우수사 배설의 함대는 일찌감치 전장에서 빠졌고 그 배들이 이순신이 올리는 비장한 상소 ‘아직도 신에게는 열 두 척의 배가 있사옵니다.’의 그 열두 척이 된다.
역사상 두번째의 치욕적인 패배는 북방 여진족과의 싸움이다. 병자호란이다.
쌍령전투라고 들어 보았는가? 아마 못 들어 봤을 것이다. 이런 건 교과서에 안 나오니까. 지금부터 378년 전인 서기 1637년 1월 2일 엄동설한, 지금의 경기도 광주다. 그런데 이건 해도 너무하다. 청나라의 말탄 군사 300명에 조총으로 무장한 조선군 4만 명이 순식간에 궤멸 됐다. 자기들끼리 도망가다 밟혀 죽은 자가 8천명이 넘고 거기엔 총지휘자 허완 장군도 들어있다. 전말은 이렇다.
1636년 청나라의 태종이 조선의 무례한 태도를 문제 삼아 직접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였다. 청군의 갑작스런 대규모 공격에 조선군은 곳곳에서 무너졌다. 순식간에 압록강을 돌파한 청군은 평양을 지나 불과 열흘 만에 조선의 수도인 한양에 육박한다. 이에 놀란 조정은 강화도로 피신을 가려 했으나 이미 청의 기병들이 길목을 막고 있어 하는 수 없이 조정은 남한산성으로 향하였다. 당시 남한산성에는 1만3천 명의 병사들이 있었으나 청의 대군이 곧 성을 포위하여 상황이 다급해졌다.
조정은 팔도에 영을 내려 근왕병을 이끌고 집결하도록 한다. 팔도감사와 병마절도사들은 부랴부랴 관내의 장정들을 긁어모아 임금이 피신해 있는 남한산성을 향해 행군했는데 그 가운데 경상도 병력이 가장 많았던 것 같다. 강행군으로 문경 새재를 넘고 충주를 거쳐 경기도에 진입한다. 경상좌병사는 허완, 우병사는 민영이 이끌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래 조선군 장수들이 고질적인 취약점 중 한 가지는 정보의 부재였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척후병 하나 안 내보내고 쌍령에 이른다. 하지만 청나라 군대는 이미 이런 정보를 훤히 꿰뚫고 대비한다. 남한산성을 포위한 10만 청군 가운데 일부가 쌍령으로 남하한다.
그런데 경상좌병사 허완은 어떤 장수인가? 연려실기술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나이가 많고 겁에 질려 사람들을 보면 질질 짜기부터 했다.’고. 그런 그가 부대 배치를 이상하게 한다. 진의 외곽에는 훈련이 덜 된 조총부대를 배치하고 그 다음에 정예 사수를, 그리고 창검으로 돌격해서 싸우는 살수 부대를 맨 후방에 배치하는데 이건 허완 자신을 보호하겠다는 심사였던 것 같다. 놀란 부하 장수들이 항의해도 소용이 없다. 그리고 쌍령 앞을 흐르는 개천을 해자 삼아 목책을 둘렀는데 문제는 청나라 군대가 낮은 곳으로 돌격해 들어오지 않고 산등성이를 타고 남하해서 고지대로부터 짓쳐들어왔다는 것이다. 낮은 곳 목책은 신경 써서 제대로 높게 쳤겠지만 높은 지역의 목책은 상대적으로 허술했을 것이다.
청군은 조선군의 허를 찔러서 고지대에서 조선군을 내리 몰았다. 많은 수도 아닌 수백 명의 기병이었다. 그런데 조선군 전방의 초보 사수들은 겁에 질려 총을 난사한다. 적에게 제대로 피해도 못 준 채 화약이 바닥난다. 애초에 화약 아낀다고 열 발 정도 쏠 화약만 지급한 것이다. 몇몇 용감한 사람들이 앞에 나가서 활을 쏘며 독전했지만 이미 총알 떨어진 총은 쇠막대기에 불과했다. 조선군은 동요한다. 이 때 그들의 머리 위로 청군의 돌격이 시작된다.
조선군은 높은 데서부터 밀고 내려오는 청군에 쫓기면서 서로를 밟아 죽인다. 한꺼번에 낮은 지대의 높은 목책으로 몰렸고 목책 바깥쪽은 벼랑이었다. 가까스로 목책을 넘은 자들은 떨어져 죽고 주검들이 목책 안팎에 산처럼 쌓이고서야 살아남은 병사들이 그들을 디딤돌 삼고 계단 삼아 목책 넘어 도망갈 수 있었다고 하니 세계적 참사가 아닐 수 없다. 인조반정으로 출세했던 경상도좌병사 허완도 도망가다가 군사들에게 밟혀 죽는다.
그 뒤를 이어 경상도우병사 민영의 진영으로 청군이 달려든다. 민영의 부대는 그래도 허완의 부대보다는 나아서 정예 포수들이 일제 사격을 가해 청나라 군대를 한 때 움찔하게 했는데 여기서도 화약 아낀다고 정예 포수들에게 열 발 정도 쏠 수 있는 양만 지급한 게 문제였다. 곳곳에서 화약 달라는 아우성 속에 화약더미에 불이 붙어 대폭발이 일어난다. 수십 명이 몰살하고 화약도 다 날아가고 만다. 그리고는 또다시 시작된 도망과 압사의 연속이다. 경상도 방방곡곡에서 긁어 모아온 병사들 수만 명이 궤멸 되고 만다. 청나라 군사가 죽인 수보다도 자기들끼리 밟혀 죽은 숫자가 몇십 배나 되는 참사는 이렇게 마무리 된다.
전쟁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었던 허완과 민영의 조선군이 궤멸된 상황에서 남한산성을 구원할 군대는 사실상 하나도 없었다. 남한산성에서 40여일을 버티던 인조는 결국 청태종에게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 된다.
마지막이 현리전투다. 이건 당사자들 중에 아직 생존자들이 있는 현대사인데 교과서에 안 나오기는 마찬가지다.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현리가 무대, 주인공은 일본 육사 출신의 유재흥, 우리말도 잘 알아듣지 못한 우리나라 장군이다. 51년 7월 시작된 정전회담 때 남한 쪽 옵서버로 참관했을 때는 우리말 통역을 대동했다. ‘
상황은 이랬다. 북한점령 막바지에 중공군이 개입하는 바람에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를 거듭하고 결국 서울을 다시 빼앗긴다. 승세를 탄 중공군은 서부 방어선을 무력화하기 위해 4월 공세에 나선다. 하지만 유엔군의 강력한 화력과 방어 덕분에 전선이 뚫리지 않자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는 한국군을 주축으로 편성된 동부 방어선으로 고개를 돌린다.
중공군은 5월에 동부전선으로 전진, 춘계 2차 공세를 시작한다. 공격 목표는 바로 당시 3, 9 보병사단으로 편성된 3군단과 5사단과 7사단이 방어하고 있는 현리 지역이었다. 중공군의 작전은 동부 방어선의 주요 지역들을 파고들어 방어하고 있는 한국군 4개 사단을 포위섬멸 시키고 동부전선을 아예 뚫어버리는 것이었다.
1950년 10월16일 평양으로 북진 중 창설된 3군단의 지휘봉을 잡은 유장군은 이듬해 5월 16~22일 이러한 중공군의 2차 춘계공세 때에 벌어진 현리전투로 병력 60%를 잃은 채 창설 8개월 만에 부대가 해체되는 치욕을 겪는다. 더구나 이 작전 중 유장군은 ‘작전회의에 참석한다’며 경비행기를 이용해 작전지역에서 도주해 버린다. 이에 사단장 등 군지휘관들도 허둥지둥 탈주하는 군기문란을 저질러 병사들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역사상 최악의 참패로 기록된 치욕의 현리전투는 1951년 5월16일 오후 4시에 시작됐다. 당시 오마치 방어선은 인제군 기린면과 상남면 31번 국도에 있는 완만한 고갯길로 인제 현리, 홍천, 정선을 이어주는 관문이자 3군단 유일의 후방 보급로 및 주요 거점이었다. 그러나 전략적 요충지 오마치에 대한 아군의 방책은 허술했고 공세 하루만인 5월17일 중공군 1개 중대에 의해 오마치는 탈취 당한다. 그러나 이는 국군 3군단 해체의 전주곡에 불과했다. 오마치를 빼앗긴 3군단은 퇴로를 열고자 예하 3, 9사단에서 각각 1개 연대를 투입해 재탈환에 나섰지만 오히려 적에게 포위당한다. 퇴로가 끊겼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힌 3군단 병력은 5월17일 오후 날이 어두워지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1436m의 험준한 방태산으로 철수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당시 전투에 참가한 노병과 학도병들은 현리전투에 대해 ‘패전이라고도 할 수 없는 처참한 패주’라고 기억하고 있다. 결국 나흘간 70㎞를 도망친 3군단 병력은 5월19일 오후 중공군의 포위망을 벗어나 평창 하진부에서 겨우 수습됐다. 집결병력은 3사단 34%, 9사단 40%에 불과했다. 수천의 병사들이 아비규환 속에 죽고 그보다 많은 숫자가 공황 속에서 사로잡힌 것이다.
현리전투 생존자인 정병석씨는 한 인터뷰에서 ‘당시 지휘부가 연락기로 탈출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아군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전황이 급박하다보니 박격포 등 중화기는 방태산 바위 밑에 숨긴 채 몸만 빠져나왔다’고 말했다. 당시 3사단 23연대 1대대 4중대 소속 상등병으로 이 전투에 참가한 박한진씨도 ‘지휘부가 먼저 도주하자 지휘체계를 잃은 병력은 중대, 소대 단위에서 10명 규모로 뿔뿔이 흩어졌고 소총을 버린 병사도 부지기수였다’‘일부 장교들은 수치스럽게도 계급장을 떼고 달아났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악전고투 속에 낙오된 국군 상당수는 중공군의 추격으로 희생됐거나 포로로 잡혀 북한군으로 전선에 재투입 돼 아군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을 겪었다’고 말했다. 그는 ‘배고픔과 탈진으로 죽어간 전우도 태반이었다’고 참혹했던 상황을 설명했다. 당시 전투에 참가했다 포로로 잡혀 북한에 끌려갔다 1994년 탈북했던 귀환 국군포로 1호인 조창호 소위는 유재흥 장군과 면담을 추진했으나 2006년 사망할 때까지 거부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리전투에서 참패한 3군단은 미 제8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에 의해 그해 5월 26일 전격 해체됐다. 또 1군단 지휘권도 미 8군이 직접 통제하는 등 작전 통제권이 미군으로 넘겨지는 계기가 됐다. 당시 3군단 해체 과정에서 밴 플리트과 유재흥 장군과의 대화는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밴 플리트가 ‘유 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하자 유장군은 ‘모르겠다’고 대답 한다. 이에 밴 플리트는 ‘당신의 예하 사단은 어디 있소? 모든 포와 수송 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라고 힐문, 유장군은 ‘그런 것 같습니다’라고 답한다. 이에 밴 플리트는 ‘당신의 군단을 해체하겠소. 다른 보직이나 알아보시오!’라고 말했다.
이 사건은 미군 지휘관들이 한국군 장교의 작전지휘 능력을 철저하게 불신하게 된 계기였다. 당시 밴 플리트 미8군사령관은 한국군의 제1군단을 제외한 모든 군단 사령부를 해체하고 일체의 작전지휘권을 미군 장성들에게만 부여하였다. 1군단 또한 육군본부를 지휘선상에서 제외하고 미군 사령부에서 직접적인 지휘를 받도록 하여 이 시점부터 모든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상실되었다. 3군단은 1951년 5월26일 해체되었다.
그런데 불가사의한 일이다. 유 장군으로서는 이전에 자신이 맡고 있던 2군단 전멸에 이어 두 번째 군단 해체라는 치욕을 겪었으나 그 자신 한국군이나 이승만 정부의 지휘체계에서 아무런 징계나 처벌을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승승장구했다는 점이다. 1957년 합동참모본부 의장을 지낸 뒤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 하야 이후 정군대상으로 지목돼 육군중장으로 예편했지만 516 군사 쿠데타 성공 뒤 박정희 정권에 의해 다시 등용돼 타이, 스웨덴, 이탈리아 대사 및 대통령 특별보좌관, 국방부 장관 등을 지냈다. 퇴임 뒤에도 정부 산하 기관의 요직을 지냈다. 1974년 대한석유공사 사장, 1978년 석유화학공업협회 회장, 1991년 성우회 회장을 지냈으며 노무현 정부 때는 작전권 반환 반대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친일파 장교에서 해방 뒤 한국군 장교로 변신해 미군에게 작전권을 빼앗기는 빌미를 제공한 인물이 반환 반대 운동에 앞장서고 군에 있을 때나 군문 밖에서나 영전을 거듭하는 현실은 대한민국의 왜곡된 현대사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전시에는 군인으로, 평시에는 외교 및 국방의 일익을 담당하여 국가에 헌신한 유재흥 장군은 은성태극무공훈장을 비롯한 각종 무공훈장 5회, 수교훈장 2회 등 수많은 훈포장을 국내외로부터 수여받을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지닌 지휘관이자 6.25전쟁의 영웅이었다.’ 이렇게 국방부 산하 전쟁기념관 기록은 91세를 일기로 숨진 유재흥 예비역 육군중장에 대해 ‘전쟁영웅’이라고 묘사했다.
이건 숫제 국어어휘의 혼란이다. 언제부터 영웅에 대한 뜻풀이가 이렇게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군은 이런 평가에 따라 유 장군의 장례식을 합동참모본부장으로 치른 데 이어 국립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했다. 현리전투가 우리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삼대치욕의 하나라면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패장을 영웅으로 묘사하고 국립묘지에 안장한 사건은 어쩌면 현리전투 그 자체보다 더 후유증이 큰 네 번째의 어리석음, 그 어리석음을 길이길이 양산할 대참사의 서곡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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