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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설교(6)
- 애통하는 자는 복 있다 -
마태복음 5장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천국을 소유한 자는 복 있다 - 그 두 번째 “저희가 애통함으로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예수님은 산상설교 첫 번째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주께로부터 받은 ‘천국을 소유한 복’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여덟 가지를 들어서 말씀하셨는데, 첫째는 ‘심령이 - 영으로 - 가난한 자는 복 있다’에 이어서 이제 그 둘째인 ‘애통한 자는 복 있다’에 대해서 하신 말씀을 듣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나는지요. “애통하는 자는 복 있다?” 이것은 “우는 자가 복 있다”는 말씀입니다. 큰 슬픔에서 통곡하여 우는 자가 복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또한 생각하고 있는 복의 개념과 전혀 다르지 않는지요. “웃는 자는 복 있다”고 해야 하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지요. 앞서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 있다”에서도 왜 “심령이 가난한 자여야 복 있는가?” “심령이 - 영으로 - 부요한 자는 복 있다”여야 맞지 않는가? 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역설적인 표현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듯이 본문에서는 “애통하는 자는 복 있다”를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 있다??
“애통하는 자는 복 있다”라고 말씀하신 ‘애통 한다’는 것을 대개의 경우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도를 오해하여 다른 뜻으로 해석하고 이해를 합니다. 그것은 이 ‘애통’을 자신이 잘못을 행한 때문에 하는 것으로, 그래서 자신이 잘못한 그 죄 때문에 애통하는 자가 복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에서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애통한다는 것만 생각하면 그렇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지 않고 도리어 악을 행한 잘못한 것을 뉘우치는 회개는 자신이 행한 잘못된 행동에 대한 후회와 그 회한 때문에 슬픔을 가지며 눈물이 나게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께서 산상설교에서 “천국을 소유한 자는 복 있다”에서 말씀하시는 것에서 “애통하는 자는 복 있다”고 말씀하심은 그러한 의도에서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 이 말을 하는 것은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자가 복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지은 죄를 늘 인식하며 그 죄에 대하여 회개에 있고 애통에 있다는 것은 구원에 이른 회개에 있는 자의 특성입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죄인의 특성인 악한 죄를 여지없이 늘 드러내는, 사망의 형벌에 있는 자신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주로 계신 사실을 믿는 믿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말이죠. 이런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복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이곳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인 “애통하는 자가 복 있다”는 의도는 그리스도인인 신자가 잘못한 행동을 회개함으로 인하여 갖게 되는 애통이란 관점에 국한된 것이 아닌 그 이상의 것에서입니다. 그러니까 애통하는 자는 복 있다는 것에서의 애통이 잘못 행한 또는 악을 행한 죄에 대한 회개에서 나오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아픔과 그 후회에 따른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울부짖음의 통곡을 갖게 하지만, 결코 그것에만 국한될 수는 없습니다. 만일에 지은 죄에 대한 슬픔에서 갖는 애통이라면, 어떠한 죄를 짓지 않은 상태에서는 애통하지 않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애통하는 자는 그러한 자가 아닌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상태에서 항상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것에서만 아닌 다른 것에서도 애통할 거리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얽매이기 쉬운”(히 12:1) 불신과 우리가 머리카락 수보다 더 많이 저지르는 죄들은 우리 마음의 병이 되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라고 하며 끊임없이 비통해 합니다만,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두들기는 애통의 이유는 이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여기서의 “애통하는 자가 복 있다“는 것은 이것을 말씀하시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 있다!!
“애통하는 자는 복 있다”에서 ‘애통’은 ‘슬퍼하다, 애도하다, 애통하다’를 의미하는데, 흔히 죽은 자를 위해 슬퍼하거나 애통해 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애통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으로 없게 된 참으로 큰 슬픔 속에서 소리를 높여 우는, 곧 통곡하는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자”는 것은 “우는 자”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애통에 있는 자를 복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앞서에서 말하였듯이, 이것은 참으로 의아하지 않은지요. 오래된 것이지만, 예전에 TV 프로에서 “웃으면 복이 와요”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복 있는 자’는 “웃는 자가 복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생각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반전(反轉)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사람의 생각과는 전혀 반대인 애통하는 자, 그러니까 “우는 자가 복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우는 자가 복 있을 수 있는지요.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 지금 곁에 없게 된 큰 슬픔에 있는데, 그래서 크게 소리 내어 울부짖어 그 슬픔을 토해내는 불행에 있는데, 그런 성격과 의도에서 복 있다고 하시고 있는 것인지요.
예수께서 말씀하신 “애통하는 자는 복 있다”는 것은, 곧 “우는 자가 복 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슬픔을 당하여 불행한 자는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불행을 당한 자인데 행복하다니 말입니다. 세상은 결코 불행을 당한 자를 행복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니 세상은 “애통하는 자는 복 있다”는 말을 결코 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당신이 당한 애통할 수밖에 없는 일인 불행을 당신은 더 이상 기억하지 말고 다 잊고서 마음을 강하게 먹고 이제는 앞의 일만 생각하고 살아가라. 그래서 더 이상 불행에 있지 말고 행복해야지!”라고 말합니다. 이게 불행을 당하여 애통하는 자에게 세상이 해주는 최선의 말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불행을 당하여 애통하는 자에게 “당신은 사랑하는 가족이 죽는 재앙의 불행을 당했으니 얼마나 좋겠어요? 당신은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큰 슬픔에 있어 통곡하니 정말 복 있군요!”라고 말해 보세요.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슬퍼하여 애통해 하고 있는 유족으로부터 “지금 이 사람이 제정신에 있는 사람인가? 어디 와서 망발이야!” 하면서 죽인다고 난리를 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을 따른 제자들을 놓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까닭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시는 것은 세상적인 의미에서가 아닙니다. 만일에 세상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이라고 하면, 결코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세상이 아는 의미에서가 아닌, 세상은 알지 못하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애통하는 자는 복있다’고 하신 의도를 올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이것의 배경이 되는 구약성경에서의 애통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참으로 애통에 있는 자이다!’라고 말씀하시게 되는 애통하는 자의 첫 번째가 되신 예수님의 애통하심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구약성경에서의 애통하는 자에 대한 이해
예수께서는 자신이 불러 내서 제자 삼은 자들이 어떤 자인가 할 때, 먼저는 “너희는 영으로 가난한 자들이다. 영으로 가난한 너희는 복되다!. 하늘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영으로 가난한 자’에 있는 복에 있는 제자들인데, 그들이 그러한 복에 있음으로써 그들에게는 ‘애통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애통함을 알기 위해서 이것의 구약적 배경과 그리고 예수님의 애통을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애통도 이것에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하나님께서 예언하게 하시는 말씀을 전합니다. 그는 여기서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슬픈 자를 위로 하겠다”고 ‘마음이 상한 자’, 곧 ‘슬픈 자’로 언급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에서 떠나 있어서 하나님의 징벌로 바벨론 포로가 되어 있는 유다 백성에게 하시고 있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고 있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이 있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와 약속의 땅에서 여호와이신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림에 있는 이스라엘, 곧 야곱의 집을 그 마음을 ‘상한 자, ’애통하는 자‘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며 그 기다림에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떻게 그 마음이 위로를 얻지 못하는 참으로 ’상한 마음, ‘애통하는 마음’에 있었던 것입니다. 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므로 긍휼과 탄식이 없어진다” 라고 예언했습니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기쁨과 즐거움에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 날이 오면 그들의 ‘상한 마음’은 고침을 받을 것이며, 슬픔과 탄식, 곧 ‘애통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위안을 얻어 씻은 듯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애통하심에 있은 것에 대한 이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 백성에게서 그 눈에서 눈물을 씻기실 것이기 때문에 주님을 보내서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칠 것을 예언(사 61:1-3)하셨으며, 그 예언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보내시고 그분에게 하나님의 영(신)을 부어주심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이 예언하신 ‘상한 자’를 고치며, ‘슬픈 자’의 위로가 되시는 일을 하시는 것에 온전히 성취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우리의 애통함을 씻겨주심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하여 우리가 겪어야 할 애통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가 되시는 것에서입니다. 여기서 ‘간고’란 ‘질병’, 또는 ‘슬픔’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질고’란 ‘고통’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예수님은 슬픔을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이처럼 슬픔을 겪고 고통을 아는 자가 되시는 것인지요.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이처럼 슬픔을 겪고 고통을 아는 자가 되셔야 했는지요.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처한 비참한 상태를 아시는 것에서입니다.
예수님은 지상에서 구속 사역을 행하시는 공생애에서의 행적에서 한 특징적인 것으로 ‘우심(울음)’에 있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행적에서 ‘웃으셨다’는 기록은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이 생애에서 단 한 번도 웃으신 일이 없으셨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을 같이 할 때 당연히 웃으심도 있지 않았겠는지요. 그러나 예수님에게서 ‘울음’은 그분이 행하시는 구속 사역과의 연관에서 있는 일이었기에 그것이 있으시는 것에서 그 일과 관련한 가르침을 주시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육체에 계실 때 ‘희노애락’은 세상의 불의 앞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며 행해지는 것에 항상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우심’은 나사로가 죽었을 때 있었으며(요 11:35), 십자가에서의 구속 사역을 위한 죽음을 앞둔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이 있을 때 예루살렘을 보시며 또한 우셨습니다(눅 15:41).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는 “심히 고민하고 죽게 되었다”란 표현은 참으로 큰 슬픔의 고통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한 예수님은 아버지의 원대로 될 것을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갖는 이 모든 ‘슬픔’은 십자가에서 하늘을 우러러 보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면서 큰 부르짖음에 있으심으로 시편의 예언에 응하셨습니다(막 15:34; 참고. 시 22:1). 이 모든 슬픔에서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의 애통하심은 하나님의 저주하시는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악한 죄를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어이 십자가에서 희생제물로 삼고야 마시는 것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의를 입히실 것이었습니다(롬 8:3).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에 있는 제자들에게 있는 애통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가져야 함
훗날 바울 사도는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를 죄 아래서 죽음의 몸에 있는 것에서 보았습니다. 그래서 누가 자기를 그 죄에서 건져 줄 것인지를 애통해 하며 탄식했습니다. 그는 자기 안에는, 곧 자기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 자신을 보고 애통해 했습니다. 그런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서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의 종 되어 있는 자신을 해방시켜 주실 분, 그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가 자신을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롬 7:18-25).
이러한 우리의 몸은 죄로 인하여 반드시 죽을 것이지만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계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계시는 이 성령에 의해서 우리의 죽을 몸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롬 8:10-11). 그러기에 말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처음 열매를 가진 우리는 우리 몸의 온전한 구속을 기다리며 하늘에서 오는 우리가 살 집을 우리 위에 덧 입기를 사모하면서 장막(몸) 집에 사는 종안 우리는 무거운 짐에 눌려 신음하는 애통에 있는 것입니다(롬 8:16-17, 18-28). 우리 속에서 우리를 행동하게 하는 ‘것’, 곧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하는 죄, 그것을 미워하며 그것 때문에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애통하는 자는 복 있다”에서 ‘애통’이 갖는 첫 번째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한데 말이죠. 우리가 몸을 입고 있는 동안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듯이 우리란 존재가 우리 마음에 선한 것이 없으므로 따라서 자신이 원하는 선은 하지 아니하고 원하지 않는 악은 행하는 악한 죄에 있는 것을 보고 죄를 증오하고 그 애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잘못 행한 그 무엇인가 때문에 그 무엇인가를 끄집어 붙들고 이것을 회개하며 울음에 있는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애통’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우리네 교회의 실정입니다. 그렇다 보니 말이죠. 교회는 늘상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여러분들이 OO에게 잘못한 것이나 죄를 범한 것이 있으면 빠짐없이 낱낱이 그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성도를 늘 애통해 하며 울음 속에 있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행한 잘못과 죄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이는 성도가 애통하는 것에 대한 이해도, 회개에 대한 이해도 제대로 갖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말이죠. 단지 소리 내어 실컷 울고 난 뒤에 그 마음에 시원함을 갖고 돌아가게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그는 다시 또 울어야 합니다. 그가 짓는 악한 죄로 인해서....
이제 우리는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애통하는 자는 복 있다”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진의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말입니다. 이 애통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앞서 ‘영으로 가난함’에서, 그래서 다만 하나님의 영으로만 사는 것에서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계시지 않는 사람은 결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따름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영이 거하시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속에 거하시는 이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그를 그리스도를 주로 섬겨 따르게 합니다. 그리고 그가 따르는 주님을 인하여 주님의 제자라는 이유로 모욕당하고 박해받고 터무니 없는 말로 비난받을 때도 주님을 놓지 않는 애통함에 있게 하십니다.
영으로 가난한 자인, 그렇게 천국에 속한 자인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를 세상에 속한 자들은 자기들과 같지 않음으로 배척합니다. 배척이란 따돌리거나 거부하여 밀쳐낸다는 것인데, 이것이 구약의 아벨의 피에서부터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인 예수님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의로운 피가 이후의 모든 세대에게 다 돌아갈 때까지 계속되는 것에서 있습니다(마 23:35, 36). 그런 이유로 예수께서는 본문을 포함한 ‘천국을 소유한 자의 복’을 말씀하시는 마지막과 결론으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마 5:10-11)라고 말씀하셨으며, 이는 또한 종말론적인 세상 끝 날에까지의 일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 의로운 자의 피흘림이 그들을 핍박한 자의 불의를 고발하는 입증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흘릴 의로운 피 안에 있게 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은 그들이 소유한 천국의 의를 세상으로부터 끊임없이 배척당하는 모습에 있게 됩니다. 이는 그들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고 예수님에게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배척을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배척을 당하여 죽임을 당함으로 흘린 피의 의로움은 또한 그를 따르는 제자에게도 함께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한즉 그들도 고난을 당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신들이 주로 받아 섬기며 따르는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죽음을 당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가령 베드로의 죽음이나 바울의 죽음이나 야고보의 죽음이나, 이들 사도들의 죽음은 그들이 능히 주님을 위해서는 죽을 수 있는 용기와 그 용맹함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말해 주시고 있는 그 많은 신앙인들이 자신을 배척하여 대적하는 자들에 의해 칼에 맞아 죽고 몸이 톱에 잘려 죽고 화형을 당하여 죽고 사나운 사자에 물리고 찢겨 죽고 이런 저런 몸서리쳐지는 무섭고 고통스럽고 잔인한 방법으로 죽음을 당하여도 그들이 놓지 않고 꼭 붙들고 죽어간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말입니다. 그들의 주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이요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영원한 도성을 바라봄입니다(히 11:10). 이것이 그들에게 있어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생명을 놓는 죽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는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이 그들의 죽음 너머에 있는 영원한 도성을 가져오고 있음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에게도 로마 황제에 의한 10대 박해 시대까지에서는 그들에 대한 직접적인 박해에서 배척이 있을 때 그들은 세상으로부터는 그들의 생명을 위협하며 빼앗는 불행에 있었습니다만, 그들은 믿음으로 영원한 도성을 바라보는 즐거움에 있었습니다. 오늘날에서 세상에 속한 사람이 천국에 속한 사람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존귀히 여기며 천국의 보배로움을 알고 살아가지,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천국에 아무런 관심도 눈길도 두지 않습니다. 그렇게 전혀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 예수님 안에 있으며 천국 안에서 우리는 죽어가는 것입니다. 마지막 숨이 끊어짐을 당하면서도 우리는 그것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은 그 배척당함이 육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에게 배척당하여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기까지 하시는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은 그분을 따르는 제자인 사도들에게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배척은 직접적인 육체에 박해가 가해져 그들 또한 죽음의 고난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박해에 의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자신들의 목숨을 버리는 죽음의 고난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주이신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눈을 감는다는 것은 자신의 육체를, 그 목숨을 버리는 것이며, 그래서 예수님 안에서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육체는 그 목숨을 내놓음으로 그 육체는 온전히 부정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제자는 자신의 죄와 잘못 때문에 그러한 죽음의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로 섬기며 따르는 믿음으로 인하여 자신과 함께 한 믿음의 형제들의 죽음을 보고 그 불행을 인하여 그 슬픔으로 가슴 아파하고 울부짖음을 가질 뿐만 아니라, 자신 또한 주님과 함께 동일한 고난에 있음으로 죽음을 당하는 불행을 겪음으로 그 앞에 놓인 육체는 심한 울부짖음과 눈물을 쏟게 되지요. 이는 안 당할 일을 당하는 억울함에서겠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지는 죽음에 이르는 고난에 의한 고통을 수납하고 감당하면서 주님을 굳게 붙드는 것에서 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속한 자에게서는 이러한 특성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특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으로 가난한 자”인 것은 이러한 특성이 나타나게 되는 천국에 속한 자인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으로 가난하여 이 애통에 있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를 그들의 주이신 예수께서는 “애통하는 자는 복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까닭을 말씀하십니다. 즉, 어째서, 또는 왜 복 있는가? 하는 것이죠. 그것은 말이죠.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위로를 받을 것’이란 그들의 주께서 자신과 자신의 나라를 인하여 애통에 있는 제자들을 부르셔서 자기 곁 가까이에 두시고 함께 하신다는 의미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저들의 위로가 됩니다. 자신들이 믿음으로 따르며 섬겨온 주님의 곁 가까이에서 주님이 함께 하시는 주님의 나라에 영원히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기에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는 앞 절에서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하신 말씀과 동일한 의미에서 하시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인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안에서 육체의 목숨을 심어 영원한 생명을 거두는 참으로 복 있는 자이며, 이 위로에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좌에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서머나 교회에 다음과 같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지도자에게 이렇게 편지를 써서 보내라. '이는 처음과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의 말씀이다. 나는 네가 주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하였는가를 알고 있다. 또 네 모든 궁핍한 사정도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너는 하늘에 큰 재산을 쌓아 둔 자다. 나는 또 네가 스스로 유대인이요,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반대와 증상을 받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참 유대인이 아니다. 사단의 앞잡이들이다. 그러니 네가 앞으로 당할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악마가 믿음을 시험하려고 너희 가운데 몇 사람을 감옥에 집어넣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열흘 동안 박해를 당할 것이다. 그러나 죽음에 직면하는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내게 충성하라.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겠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일러주시는 말씀을 잘 들으라. 이기는 자는 결코 두 번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