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행 3장 1-10절
설교제목 : 내게 있는 것
덜어내기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봄날이 어느덧 지나고 약간의 움직임에도 땀이 나는 것을 보면 여름이 이만치 가까이 온 듯합니다. 5월의 푸르름처럼 마음이 성숙해가는 시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주 한국융연구원 공개특강 4주차, 이부영 원장님의 “노자 도덕경에 나타난 자기”에 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90이 넘으신 나이에도 여전히 밝은 의식으로 강의하는 모습이 노자스러움 그 자체였습니다. 도덕경의 여러 장을 편하게 설명하시면서 그것을 심리학적 관점으로 풀어가셨습니다. 정신치료자의 자세를 이야기하면서 도덕경 48장을 인용하였습니다. “배운다는 것은 날로 더하는 것이요, 도를 따른다는 것은 날마다 덜어내는 것이다. 덜고 또 덜어서 하는 일이 없게 되면, 하는 일이 없지만 하지 못하는 일도 없게 된다.”“언제나 일을 만들지 않으면서 천하를 취한다” 이를 성인의 경지라고 칭할 수 있습니다.
학문하는 것은 날마다 더하는 일이지만 도를 따르는 것은 덜어내고 덜어내어 무사로써, 무위로써 천하를 취한다는 것입니다. 무언가 분주하게 일하고 배우고 찾아야지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 세상입니다. 노자의 말은 현대인에게 너무나 어려운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덜어내고, 하는 일이 없지만, 천하를 얻는 것은 자연 혹은 자연 그대로인 본성의 창조적 변환과 그 잠재력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갖기 때문에 감히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적 태도입니다. 융은 정신치료자를 환자를 이끌어가는 권위적인 지도자가 아니라 환자와 ‘함께 체험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내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삶을 대하고, 환자를 대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융은 항상 정신 치료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치료방법이나 기술에 앞서 치료자의 자세를 강조했습니다. 배움도 덜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일 듯 합니다. 신앙생활은 첫째도 태도이고, 둘째도 태도이고, 셋째도 태도입니다. 궁극적으로 나의 의지를 덜어내고 신뢰함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열심히 배우되, 자의성을 덜어내어 잠재력을 실현해갈 수 있는 우리의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한마음과 순전한 마음으로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통하여 사람들은 회개하였고, 사람들 안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함께 모였고, 처음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이 생겨났습니다. 신자들은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서로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었고, 함께 기도하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자신을 덜어내어 나누고 함께 식사하는 공동체, 이것이 진정한 교회의 전형입니다. 그곳은 생명과 축제의 장이었습니다. 에클레시아, 회중의 모임으로서 교회의 참다운 형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전조가 이 처음 교회의 모습으로 펼쳐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소유가 미덕이자 힘입니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가진 것을 모두 팔아서 필요한 이에게 나누고 함께 먹는다는 것은 제정신으로는 하기 힘든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들이 한마음과 순전한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그들을 한마음과 순전한 마음으로 연합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너와 내가 다르거나 틀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한마음으로 일치를 경험하였고, 모든 차이와 차별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너와 나를 상하좌우도식으로 경계짓던 것을 한마음으로 일체감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각기 다르지만 서로를 틀렸다고 규정하지 않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서로에게 선물이 되어준 것입니다. 지향점이 동일하고 서로에게 선물이 될 수 있다면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깃듭니다. 순전한 마음으로 기쁨으로 함께 할 수 있다면 평화가 그곳에 충만할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한 소유와 소비가 미덕이고 자랑인 세상에서 참으로 실현하기 어려운 가치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랑과 평화, 생명이 깃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감을 위해 한마음으로 연대할 수 있다면 너를 위해 소비하고 함께 더불어 살고 누군가에게 나를 선물로 줄 수 있는 일이 가능할 것입니다.
따뜻한 시선
베드로와 요한은 오후 세 시 경 기도시간이 되어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오후 세 시는 경건한 유대인들의 기도시간으로 제사장들이 번제를 바치는 시간이었습니다. ‘아름다운 문’이란 뜻의 미문에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과 만납니다. 그는 사람들이 떼메고 오지 않으면 이곳에 올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손을 빌어서 살아야하는 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전 미문에 앉아 성전에 오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며 살습니다. 그의 나이를 4장 22절에서는 마흔 살이라고 합니다. 이 숫자는 40년 고난받는 광야의 생활이자 새로운 변환이 무르익은 수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결정적인 시간이 다다른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를 눈여겨 보고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를 보시오!(4)” 그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을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못 걷고 구걸하는 자를 향하여 동정의 눈빛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이런 자는 하나님이 내린 저주로 장애를 입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기 때문에 경멸과 비난의 눈빛을 보아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제대로 사람들의 눈을 응시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남의 손을 빌어서 살고 빌어먹으며 살아야하는 자는 누군가의 눈을 제대로 응시할 수 없습니다. 삶이 위축되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밖에 없습니다. 초점없이 사람들에게 돈을 구걸할 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따뜻한 눈빛으로 “우리를 보라”고 그를 초대합니다. 내가 너를 온전한 눈빛으로 볼테니 너도 나를 제대로 보라고 호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정과 비난의 눈빛이 아니라 따뜻한 시선으로 진정한 인격체로서 세우고 있습니다.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저는 베드로의 입장과 앉아서 구걸하는 자의 입장을 대비하고 묵상하곤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내 앞에 있는 이들을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봐주는 삶이 있었으면 합니다. 위축되고 초점잃은 눈빛이 아니라 누군가를 제대로 응시할 수 있는 영혼의 당당함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게 있는 것
못 걷는 구걸하는 자는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봅니다. 이런 그의 마음의 시선은 늘상 사람 자체보다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던져주는 동전으로 삶이 환원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의 마음이라도 읽기나 한 듯 선언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6).”
은과 금은 그가 그토록 필요로하는 돈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에게 그가 간절히 구걸하고 있는 물질은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권위, 정체성을 표상합니다. 그 이름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인생을 변환시키고 구원할 능력이 있는 상징이었습니다. 사람들을 일으켜 세울 능력은 예수의 이름, 그 정신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현대 교회에는 은과 금은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과연 있는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려하지 않고, 온갖 성공과 처세술, 삶의 확장 도구을 위한 방편이 교회로 전락한 것은 아닌가?
우리는 은과 금을 갈구하며 치열하게 살고 있지만, 자신의 앉은 뱅이 같은 영혼을 일으켜 세울 예수의 이름이 우리에게 과연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진정으로 접속된 사람은 어떤 삶의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생명력을 발현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내 뒷배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 하나면 삶은 충분해집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은과 금, 곧 자아의 자원도 없는데, 그 이름조차 가지지 못한 자는 남의 손에 인생을 저당잡히고, 늘 의존적으로 살아야하는 구걸하는 인생으로 전락하기 쉽상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토대이자, 생명과 힘을 줄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저와 여러분을 떠받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따뜻한 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선포하면서 앉아서 구걸하는 못 걷는 자의 오른손을 붙잡아 일으켜 세웁니다. 따뜻한 시선 뿐 아니라 따뜻한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킵니다. 누군가의 손을 잡는 것은 참으로 용기가 필요합니다. 내가 선호하고, 애정을 가진 대상과 손잡기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냄새나고, 꺼림칙하고, 보기 싫은 것과 손잡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예전에 필리핀 산족 마을에 선교를 갔습니다. 나무로 지어진 집에,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필리핀 정부에서조차도 소외된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아이들과 첫 만남을 위해 허름하지만 유일한 콘크리트 건물에서 100여명 이상의 아이들과 프로그램을 하고 노는 시간을 가졌습니다(3년 동안 청년들과 찻집과 헌금을 통해 700만원을 모았고, 300만원의 후원을 받아 1000만원으로 유치원건물을 봉헌하였습니다). 아이들이 사랑스럽고 천사같을 줄 알았는데, 막상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당황했습니다. 머리카락은 감지 않아서 떡이지고, 누런 코는 흐르고, 몸은 지저분하고, 그나마 옷입은 아이들의 옷은 냄새로 쩔어 있고, 신발이 없어 지저분한 발을 보면서 아이들을 안아주고 손잡아주려는데, 순간 거부감이 밀려왔습니다. 그런 제 자신의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수줍어하고 천진난만한 산족 아이를 안아주는 순간, 제 마음이 너무 평온해지는 느낌이 들었고, 안긴 아이는 부끄러움과 설레는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사회에서 불결하다고 낙인 찍힌 자들의 친구가 되어주시고, 그들의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예수의 손과 접촉된 이들에게 사건이 일어나고 그들의 병은 치유되고 그들의 삶은 달라졌습니다.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는 행위는 사건을 일으켜 평생 일어서지 못하던 자를 두 발로 일어서서 걷게 합니다. 손을 잡아줄 때 사건이 일어나고, 사건이 일어나는 곳에서 치유와 회복, 건강함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외부세계에서 실제적 접촉의 어려움을 지닌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내면세계에서도 나의 열등하고 보기 싫은 것과 손을 잡는 것은 힘겨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부담스럽게 하고, 꺼리는 내적 외적 대상의 손을 잡아주면 그곳엔 사건이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따뜻한 손으로 시선에서 소외된 이들을 손잡아 줄 수 있는 우리의 인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