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사와 수령 밑에는 중앙의 육조체제를 본떠 육방(六房)을 두고 지방 행정의 실무를 담당하게 했는데, 그것이 향리이다.
향리는 아전(衙前)이라고도 하였다. 비록 신분은 낮았으나 수령과 백성의 중간에 위치해 그 세력은 대단하였다. 지방의 중요 사무는 호장(戶長)과 이방·형방이 관장했으며, 이들을 일명 삼공형(三公兄)이라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관청의 기강이 엄해 향리의 부정 부패가 적었다. 그러나 중기 이후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향리가 수령과 결탁, 마음대로 사욕을 채웠다. 사실상 토지나 녹봉을 주지 않은 제도상의 결함이 부정 부패의 요인이었다.
게다가 수령들은 대개 사무에 어둡고 임기가 짧았으므로 고정직인 향리가 지방 행정의 실권을 쥐고 튼튼한 토착세력으로 자리잡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정약용(丁若鏞)은 이러한 수령과 향리와의 관계를 ‘강류부전석(江流不轉石)’이라고 비유하였다. ‘수령은 흘러가는 강물과 같은데 향리는 구르지 않는 돌과 같다.’는 뜻이다.
수령은 행정 이외에 군직을 겸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행정적 속료(屬僚)인 이서(吏胥) 외에 군사 속료인 군교(軍校)·사령(使令) 등이 있었다.
한편, 특정 지역에 토관의 제도가 있었다. 토관을 둔 곳은 평양과 영흥을 비롯, 육진(六鎭)과 경성·영변·의주·강계 등 주로 평안도와 함경도였다. 그 밖의 지역으로는 제주도가 있는 정도였다. 토관은 그 지방의 토착인 중에서 군사적·사회적으로 유력한 사람이 임명되었다.
이러한 토관제도는 중앙 정부가 그 지방의 유력자를 포섭, 안으로는 지방 행정의 효율화와 군사적 방어 조직의 강화 등 변진의 충실을 기하는 한편, 밖으로는 야인(野人)과의 연결을 방지하려는 회유책의 일환이었다.
세조 때에는 경주·전주·개성 등 후방 내륙에도 토관을 둔 적이 있었으나, 곧 폐지되었다. 토관직은 특별직으로서 동반과 서반으로 나누어 정5품에서 종9품까지 임명되었다. 이러한 토관제도는 중기에 접어들면서 폐지되고 토관직이 없었던 다른 6도와 같이 향리로 대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