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런저런 덧업슨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감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속성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갈망을 멈추는데 있다.
이것이 불교 명상의 목표이다.
명상을 할 때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깊이 관찰하여
모든 감정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며,
그런 감정을 추구하는 것의 덧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 추구를 중단하면 마음은 느긋하고, 밝고, 만족스러워진다.
즐거움, 분노, 권태, 정욕 등 모든 종류의 감정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일단 당신이 특정한 감정에 대한 추구를 멈추면 어떤 감정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공상하는 대신에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다.
그 결과 완전한 평정을 얻게 된다.
평생 미친 듯이 쾌락을 찾아 헤매던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의 평정이다.
그런 사람은 바닷가에 수십 년간 서 있으면서
모종의 '좋은 '파도를 받아들여 그것이 흩어져버리지 못하도록 애쓰는 동시에
모종의 '나쁜 파도는 밀어내어 자신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만들려고 애쓰는 사람과 마찬가지다.
이 사람은 날이면 날마다 해변에 서서 무익하 노력을 거듭하면서 스스로의 마음을 괴롭힌다.
그러다 마침내 그는 모래에 주저앉아, 파도가 마음대로 오고 가게 놔둔다. 얼마나 평화로운가!
현대의 자유주의적 문화의 입장에서 이런 사상은 너무나 낯설었다.
그래서 서구의 뉴에이지 운동은 불교의 통찰을 처음 대했을 때 이를 자유주의적 용어로 바꿔버렸다.
완전히 거꾸 받아들인 것이다.
뉴에이지 문화는 주로 이렇게 주장햇다.
"행복은 외적인 조건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우리 내면의 느낌에 좌우되는 것이다.
부나 지위와 같은 외적 성취에 더 이상 매달리지 말고 내면의 느낌에 귀를 기울여야한다."
혹은 보다 간결하게 이렇게 주장했다. "행복은 내부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생물학자들의 주장과 정확히 일치하는 슬로건이다.
하지만 부처의 가르침과는 거의 반대라고 할 수 있다.
행복이 외적 조건에 달려 있지 않다고 하는 점에서
부처의 생각은 현대 생물학이나 뉴에이지 운동과 궤를 같이 하지만,
부처의 가장 심원하고 중요한 통찰은 따로 있다.
진정한 행복은 주관적 느낌이나 감정과도 무관하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가 스스로의 주관적 느낌을 중요하게 여기면 여길수록
우리는 더 많이 집착하게 되고, 괴로움도 더욱 심해진다.
부처가 권하는 것은 우리가 외적 성취의 추구뿐 아니라 내 내면의 느낌에 대한 추구 역시 중단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주관적 안녕을 묻는 설문은 우리의 안녕을 주관적 느낌과 동일시하고,
행복의 추구를 특정한 감정 상태의 추구와 동일시한다.
많은 전통철학과 불교를 비롯한 종교는 이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한다.
행복을 얻는 비결은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ㅡ자신이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를 ㅡ 파악하는 데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감정, 생각, 호불호를 자신과 동일시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이들은 분노를 느끼면서 '나는 화가 났다. 이것은 나의 분노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감정을 피하고 또 다른 감정을 추구하느라 일생을 보낸다.
그들은 자신과 자신의 감정은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특정한 감정을 끈지길게 추구하는 행위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함정이라는 사실도 모른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행복의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 전제는 오도된것일 수 있다.
사람들의 기대가 충족되었느냐의 여부, 쾌락적 감정을 즐기는가의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주된 질문은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느냐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고대의 수렵채집인이나 중세의 농부보다
이런 진실을 조금이라도 더 잘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가 있을까?
학자들이 행복의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우리는 아직 초기 가설을 만들어내고 적절한 연구방법을 찾는 단계에 머물고 있다.
확고한 결론을 채택하고 논의를 마무리 짓기에는 너무 이르다. 논의는 아직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수많은 접근법을 되도록 많이 알고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대부분의 역사서는 위대한 사상가의 생각, 전사의 용맹, 성자의 자선, 예술가의 창의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책들은 사회적 구조가 어떻게 짜이고 풀어지느냐에 대해서, 제국의 흥망에 대해셔,
기술의 발견과 확산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개인들의 행복과 고통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의 역사 이해에 남아 있는 가장 큰 공백이다.
우리는 이 공백을 채워나가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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