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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환청
» 루이 브왈리의 ‘타르티니의 꿈’.
20대 초반에 예술인을 꿈꿨던 적이 있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젊을 적의 치기에 불과하지만 당시에는 나름 진지했다. 틈만 나면 시를 쓴다면서 종이에 끄적거리고, 곡을 만든다면서 기타 줄을 퉁기곤 했다. 글을 쓰는 것은 노력하면 어느 순간 나쁘지 않은 형태로 완성되곤 했는데, 문제는 오선지에 악보를 그려내는 것이었다. 시를 쓰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창작의 고통이 컸다. 예술인의 길이 이토록 어렵단 말인가! 고뇌는 깊어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잠을 청하려 누웠는데 어디에선가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듣지만 매우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갑자기 온몸에 전율이 왔다. 음악의 신이 나의 간절함에 응답한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얼른 일어나 오선지를 펼쳤다. 하지만 막상 선율을 옮기려 하니 잘 되지 않았다. 아쉬웠다. 꿈에서 들은 악마의 연주를 악보에 담아 바이올린 소나타를 작곡한 타르티니(Tartini)처럼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이후에도 잠들 무렵 들려오는 음악 소리는 이따금씩 계속되었다. 오선지를 머리맡에 놓고 선율을 옮겨 보려는 노력은 아쉽게도 매번 실패로 끝났다. 그래도 음악 소리가 들릴 때면 내게 남다른 능력이 있는 것 같아 내심 흐뭇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사실 걱정도 있었다. “내가 혹시 이상한 것은 아닐까?” 특히 어설프게 의학 지식을 알던 때라 이렇게 존재하지 않는 소리를 듣는 것이 혹시 병은 아닐까 하며 근심에 사로잡히곤 했다.
밤중에 들리던 음악 소리에 대한 고민은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정신과 수련을 받으면서 풀렸다. 내가 경험했던 것은 ‘입면기 환각’(hypnagogic hallucination)으로서, 즉 잠이 들면서 실재하지 않는 소리를 들은 것이었다. 교과서에는 정상인한테서도 관찰된다고 쓰여져 있어 마음이 한결 놓였다. 하지만 ‘모르는 게 약이요, 아는 게 병’이라고, 입면기 환각이 기면증의 증상이란 것도 알게 되면서 이후 또 다른 염려에 빠지기도 했다.
생각보다 흔한 환청
환청(幻聽)은 문자 그대로 환상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조금 더 기술적으로 표현하면 외부에서 청각 자극이 없는데도 소리를 듣는 현상이다. 인간은 오감(五感)을 갖고 있기 때문에 환청 외에도 환시, 환후, 환미, 환촉을 경험할 수 있는데, 이를 통틀어서 환각(hallucination)이라 한다. 환각은 종종 착각(illusion)과 혼동되곤 하는데, 착각은 외부 자극을 잘못 해석하면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쉽게 말해 밤에 귀신을 봤는데 자세히 보니 허수아비였다면 착시이고, 아무 것도 없었다면 환시인 것이다.
다시 환청 이야기로 돌아가면 당시 잠결에 들은 음악 소리가 너무 신기했던 나는 주변 사람에게 비슷한 경험이 있는지를 물어왔다. 어라, 의외로 많았다. 제일 흔한 답은 무선호출기, 일명 ‘삐삐(beaper)’ 소리가 들리는 환청이었다. 이성 친구에게 ‘1010235(열렬히 사모)’를 보낸 뒤 소리가 들린 것 같아 무선호출기를 확인하면 아무런 번호도 찍혀 있지 않는 식으로 말이다. 또한 내가 경험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형태로 잠에서 깰 때 환청을 듣는 ‘출면기 환각’(hypnopompic hallucination)도 있었다. 이 역시 입면기 환각처럼 정상인한테서도 나타날 수 있다.
또한 정상인이 특수한 상황에 처할 때에도 환각이 나타날 수 있다. 한 예로 밀폐된 공간에 격리되어 감각이 차단되거나 단조로운 자극에 장시간 노출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실제 참가자가 빛과 소리가 차단된 공간에서 불과 15분 만에 여러 종류의 환각을 느꼈다고 보고한 연구 결과도 있다.[1] 다른 예로 소중한 사람과 사별한 뒤에 겪는 환각이 있다. 고인의 얼굴을 보거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애도의 과정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긍정적이고 위로가 된다.[2]
흔히 환각이 정신 건강의 이상 징후로 여겨지는 것과는 뭔가 조금 다른 상황으로 보인다. 실제 18개 국의 3만1261명 정상인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연구에서도 환각의 평생유병률(lifetime prevalence)이 5.2퍼센트(%)인 것으로 나타난 바 있다.[3] 이는 전체 인구의 약 5퍼센트가 평생에 한 번 이상 환각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중요한 사실은 이들이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사회 생활을 잘 하는 사람들인 점이다. 헛것을 보고 듣는다 해도 그것이 꼭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그래도 무시해선 안 될 환청
2001년 개봉한 영화 <뷰티풀 마인드(A beautiful Mind)>는 미국의 천재 수학자 존 내쉬(John Nash)의 삶을 감동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그는 약관인 20대에 탁월한 학문적 성과를 이룩했지만, 30대부터 환청을 듣기 시작했다. 이후 주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비상식적 행동을 보이던 그는 결국 병원에 입원해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게 된다.
[ 영화에서 존 내시가 환청을 경험하는 장면. 언뜻 보면 환시로 보이나 존 내시는 환청만
갖고 있었다.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 때문에 환청 대신 환시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https://youtu.be/O3qyC6Z3t5g]
다른 여러 정신 질환에서도 환청이 나타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환청은 정신분열증의 대표적인 증상으로 여겨진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행동이나 생각에 대해 계속 언급하거나 두 사람 이상이 대화를 나누는 환청만으로도 정신분열증의 진단이 가능했다(진단이 쉽게 내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2013년부터 이 내용은 삭제되었다[4]). 진단 기준으로는 모든 종류의 환각이 가능하지만, 임상적으로는 환청이 가장 많이 나타난다. 환시도 흔한 편이지만 뇌의 다른 기질적 문제가 원인일 때가 종종 있으며, 환후, 환미, 환촉은 매우 드물다.
주변 사람들과 정신분열증에 대한 이야기를 ‘내 입장에서는 신나게(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지루하게)’ 나누다 보면 가끔 환청이 꼭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남들에게 없는 특이한 경험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분열증에 동반되는 환청은 일반적으로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은 성격을 띄지 않는다. 대신 환자를 위협하고, 불쾌하게 만들고, 비난하고, 모욕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런 경험을 6개월 이상(정신분열증 진단을 내리는 데에 필요한 최소한의 기간) 겪는다고 생각해보자. 환자의 심리적 고통은 매우 크지만 가족이나 친구에게 공감을 얻기가 쉽지 않다. 베인 손가락에서 피가 흘러나오거나 혈압 측정기에 200/140이 찍히면 의료인이 아니더라도 ‘이상하구나, 도움이 필요하구나’란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기 마련이다. 이와 달리 환청은 딱히 와 닿지 않는다. 오직 환자에게만 들리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주변 사람들도 ‘별 일 아니겠지. 저러다가 괜찮아지겠지’ 하는 반응을 보이게 된다.
한편 정신분열증 환자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데 들려오는 소리의 원인에 대해 골몰하게 된다. 그러다가 자신의 주변에 도청 장치 혹은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잘못 결론을 내리곤 한다. 주변에서는 황당한 이야기로 치부하지만 환자는 나름 진지하다. 혼자인 방에서 누우려고 하면 ‘눕지 마’ 하고, 밥 먹을까 하면 ‘밥 먹지 마’ 하는 식으로 소리를 계속 듣다 보니 누군가가 자신을 감시하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혹은 자신의 행동뿐 아니라 생각마저 읽힌다는 느낌에 누군가 몰래 자기 몸에 칩(chip)이나 도청 장치를 심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 1988년의 방송 사고 장면. 축구 경기 도중 귀를 다친 한 젊은이가 귀가 먹먹해진 것을
자신의 귀에 도청 장치가 있기 때문인 것으로 잘못 믿으면서 발생한 일이었다.
https://youtu.be/MIberkcgQvU ]
환청이 들리는 뇌는 무엇이 다른가
전공의 시절에 내가 처음 맡은 환자는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었다. 입원한 지 1주일 정도 지나자 그는 면담 때마다 “입원할 때 소리가 들렸던 것은 맞는데, 이제는 전혀 안 들려요. 그러니 퇴원시켜주세요”라는 말을 반복했다. 초짜 주치의인 나는 헷갈렸다. ‘환자 말을 믿어야 하나? 그런데 거짓말이면 어쩌지?’ 막막했다. 혈액 검사나 엑스레이 검사처럼 가시적인 검사 결과를 바탕으로 증상의 호전 여부를 판단하는 다른 과 동료 주치의들이 부러워졌다. ‘환청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당시 경험이 미천했던 나의 소박한(?) 바람이었다.
아쉽지만 환청을 진단하는 검사 방법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그러나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뇌영상학은 환청을 듣는 정신분열증 환자의 뇌가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다. 한 예로 영국 시몬스(Simons) 교수의 2015년 연구 결과를 살펴보도록 하자. 연구진은 환청이나 다른 종류의 환각을 경험한 적이 있는 정신분열증 환자 79명과 그런 적이 없는 정신분열증 환자 34명, 그리고 일반인 대조군 40명의 뇌 자기공명영상(MRI)을 비교해봤다(환각이 없어도 망상, 와해된 언행, 음성 증상과 같은 증상이 두 개 이상일 때도 정신분열증 진단이 가능하다).
연구진은 특별히 대상주위구(paracingulate sulcus; PCS)의 앞부분에 주목했다. 대상주위구는 뇌 피질의 안쪽에 있는 대상구(cingulated sulcus) 위쪽에 평행하게 위치하면서 고랑처럼 패여 있는 곳이다(꾸불꾸불한 뇌에서 안으로 접혀 들어간 부분을 구(溝) 혹은 이랑이라 부른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이전 연구에서 내측 전전두피질(medial prefrontal cortex; mPFC)에 위치하는 대상주위구의 길이가 현실성 평가(reality monitoring)와 연관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5] 환각이 동반된 정신분열증 환자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비현실성이다.
» 대상구(CS) 위쪽에 위치하는 대상주위구(PCS)는 사람마다 다양하게(왼쪽 사진처럼 길거나 오른쪽 사진처럼 짧게) 나타날 수 있다. 출처/각주[6]
연구 결과, 환각을 경험하는 정신분열증 환자 집단의 대상주위구 길이는 그렇지 않은 환자 집단에 비해 약 2센티미터 짧았고, 정상인 집단에 비해서는 약 3센티미터 짧은 것으로 나타났다. 추가적인 분석을 통해 좌반구(left hemisphere)의 대상주위구 길이가 1센티미터 감소할 때마다 정신분열증 환자들이 환각을 경험할 가능성이 약 20퍼센트 증가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 정상 집단(왼쪽 막대), 환각을 경험한 적이 없는 정신분열증 환자 집단(가운데 막대), 환각을 경험한 적이 있는 정신분열증 환자 집단(오른쪽 막대)의 순으로 대상주위구(PCS)의 길이가 감소한다. 출처/각주[6]
사실 정신분열증 환자가 가장 흔하게 경험하는 환청에는 언어 처리 영역을 포함한 여러 뇌 부위가 관여한다. 뇌에서 실제 존재하지 않는 청각 정보가 만들어질 때 짧은 대상주위구를 갖고 있는 정신분열증 환자는 이것이 현실적인지 아닌지를 잘 구분하지 못하면서 환청을 경험하는 것으로 보인다. 비록 정신분열증에서 나타나는 환청이 한 가지 이론만으로 설명되지 않지만, 연구진은 자신들의 발견이 궁극적으로는 정신분열증의 조기 진단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환청을 진단할 검사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정신과 의사가 어떻게 의학적 결정을 내리는지 여전히 궁금할 수 있다. 영업비밀(?)을 살짝 풀어보면, 환자가 보이는 특정 행동이나 정동(affect; 외부에서 관찰되는 정서 상태)에 그 답이 있다. 환자들이 재미있는 환청이 들릴 때에는 혼자서 배시시 웃고, 대화할 때에는 혼자서 중얼거리고, 위협하는 소리가 들릴 때에는 경직된 표정을 짓곤 한다. 물론 임상에서는 이런 단편적인 정보뿐만 아니라 환자에 대한 통합적 이해를 바탕으로 진단을 내리니 혹시라도 정신과 의사를 너무 돌팔이(?) 취급하지 말길 바란다.
조현병으로 개명했어요
정상적인 환청부터 병적인 환청까지 살피는 동안에 고개를 갸웃거린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정신분열증이란 용어 때문이다. “조현병으로 바뀐 것 아니었나?” 맞다. 2011년에 조현병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아직도 조현병이란 용어는 낯설기만 하고, 많은 환자와 보호자에게 병명을 알릴 때 부연 설명을 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정신분열증으로 언급했지만, 이제부터는 조현병으로 쓰도록 하겠다. 그런데 생소하고 잘 와 닿지 않는 조현병이란 이름을 굳이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현병의 의학적 개념의 정립은 독일의 정신과 의사 에밀 크레펠린(Emil Kraepelin)에 의해 처음 이뤄졌다. 환자들이 비교적 젊을 때 병이 발생하고, 황폐화되어 가는 경과를 보였기에 그는 조발성 치매(dementia praecox)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1908년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오이겐 블로일러(Eugen Bleuler)는 병의 경과보다는 증상 자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정신분열증(schizophrenia)이란 이름을 제안했다. 병명의 기원은 그리스어 schizo(split, 분리)와 phrenia(mind, 마음)에서 비롯했는데, 그의 의도는 이름을 새로 붙여 병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 것이었다.
» 정신과 교과서의 조현병 설명 부분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두 이름 에밀 크레펠린(왼쪽)과 오이겐 블로일러(오른쪽). 출처/Wikimedia Commons 아시아에서는 1937년 일본에서 이 병명을 ‘정신분열(精神分裂)’로 번역했고, 이를 우리 나라에서 차용했다.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했다. 블로일러의 의도와는 달리 한자 문화권에서는 마음이 찢어지고 정신이 갈라져 인격이 와해되고 극도로 퇴행하는 병이라는 오해와 편견이 발생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1993년 일본가족협회가 병명 변경을 요청한 뒤 10여 년 간의 노력 끝에 2002년 통합실조증(統合失調症)으로 개명이 이뤄졌고, 홍콩에서도 비슷한 이유로 사각실조증(思覺失調症)으로 이름이 바뀌었다.[7]
우리나라에서는 2007년 환자 가족 동호회의 병명 개정 청원을 계기로 본격적인 이름 변경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30여 개의 명칭이 제안되었으나, 2010년 조현(긴완)증, 사고(긴완, 이완)증, 통합(이완)증이 최종적으로 선정되었다. 조현은 ‘현악기의 줄을 고르다’란 뜻으로 신경계의 조율이 잘 이뤄지지 않아 질환이 발생하는 것을 표현하지만, 의미가 지나치게 어려운 것이 단점이었다. 사고는 핵심 병리인 사고의 이완을 담고 있지만, 질환의 다른 증상을 담지 못해 너무 단편적인 것이 단점이었다. 통합은 분열의 반의어로서 편견이 적지만, 반대로 통합적으로 잘못된 혹은 통합이 되지 않아 덜 떨어진 부정적 인식을 줄 수 있는 것이 단점이었다.
질환에 대판 오해와 편견을 타파하려는 애초의 취지 때문이었을까? 은유적 명칭인 조현증이 환자, 가족, 정신과 의사의 가장 많은 지지를 얻었다. 이후 ‘증’보다는 ‘병’이 더 과학적인 의미가 있다는 의견에 힘입어 최종적으로 조현병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2011년 국회에서 법률 개정을 통해 정신분열증은 부정적 낙인을 일으키던 낡은 옷을 벗고, 환자를 따뜻이 품을 수 있는 조현병이란 새 옷을 입고 다시 태어났다.
» 정신분열증(하얀색 막대)에서 조현병(회색 막대)으로 이름을 바꾼 것만으로도 병명으로 인한 공포심이 줄어들고, 낙인(위험하다, 결혼을 해서는 안 된다, 운전을 해서는 안 된다는 등의 선입견)이 감소한다. 출처/각주[8] 일부에서는 헛갈리게 굳이 이름을 바꿀 필요가 있었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전남대학교 김성완 교수의 2012년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개명의 효과는 긍정적이다.[8] 연구진은 간호대 학생 360명에게 정신분열증과 조현병으로 표시된 설문지를 무작위로 배포한 뒤에 낙인의 정도를 비교했다. 단순히 설문지에서 병명이 바뀐 것만으로도 “위험한 사람이다”, “결혼을 반대한다”, “운전을 해서는 안 된다”와 같은 부정적 시선이 큰 폭으로 감소했다. “해당 병명만 들어도 두렵다”는 생각이 38.1퍼센트(%)에서 11.6퍼센트(%)로 세 배 이상 감소한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어릴 적 읽었던 책에서 오랑캐꽃이 제비꽃의 다른 이름이란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보라색을 좋아하는 내게 제비꽃은 가장 좋아하는 꽃 중 하나였지만, 오랑캐꽃은 정확히 어떤 꽃인지도 모른 채 단어가 주는 부정적 어감 때문에 막연히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이름 짓기(네이밍)의 효과는 크다. 동일한 질환을 일컫는 이름이지만 정신분열증과 조현병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개명을 계기로 조현병 환자가 오랑캐꽃처럼 오랫동안 받아온 오해와 편견이 사라지길 기대해본다.
환청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요즘에는 잠을 청할 때 음악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예술인이 되겠다는 허황된 꿈을 더 이상 꾸지 않아서일까? 하지만 여전히 전화기가 울린 듯한 환청을 종종 겪곤 한다(물론 환청이 아니라 착각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 환청은 평소와 다른 상황에 처할 때에 나타날 수도 있다. 혹여 최근 환청 혹은 다른 종류의 환각을 경험했더라도 일시적이고, 일상적인 삶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 정상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길 바란다.
»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바보들의 배’ 그러나 정신 질환에 동반되는 환각은 이보다 진지하게 접근해야 한다. 한 예로 양극성 장애나 주요우울증을 겪고 있는 환자가 환청을 들었다면 이는 증상의 단계가 심각한 것을 의미한다. 다른 예로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느 날 물건이나 사람이 작아 보이면(왜소 환각; Lilliputian hallucination) 알코올 금단을 겪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환각이 망상, 와해된 언행, 사회적 위축 혹은 의욕 저하(음성 증상)와 함께 6개월 이상 나타나면서 일, 대인관계, 자기 관리 등에 있어서 문제가 발생하면 조현병을 꼭 의심해야 한다.
모든 질환이 그렇듯이 조현병도 치료를 늦지 않게 잘 받는 것이 질환의 경과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넓게는 정신 질환에 대한 막연한 오해가, 좁게는 과거 명칭인 정신분열증이 주는 부정적 편견이 여전히 환자들로 하여금 병원을 방문하고 약을 복용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고 있다. 심지어 조현병 환자를 ‘미친 사람’ 취급하면서 사회에서 격리하자는 시대착오적 주장도 여전하다. 마치 중세 시대에 광인들을 ‘바보들의 배(ship of fools)’에 태웠던 것처럼 말이다.
문득 우리나라에서는 정신 병원이 여전히 바보들의 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어본다. 의료 수가가 지나치게 낮고, 사회 복귀를 돕는 공공기반시설이 턱없이 부족해 많은 조현병 환자가 장기 입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현병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서는 지역사회에 기반을 둔 지원이 매우 중요하다.[9] 우리나라에서 조현병 환자는 약 50만 명으로 추산되는 만큼 이제는 부정적인 시선을 거두고,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 조현병 환자는 격리의 대상이 아닌 우리의 평범한 이웃임을 잊지 말도록 하자.◑
[주]
[1] Mason, O.J. and F. Brady, The psychotomimetic effects of short-term sensory deprivation. J Nerv Ment Dis, 2009. 197(10): p. 783-5.
[2] http://www.nytimes.com/2012/11/04/opinion/sunday/seeing-things-hearing-things-many-of-us-do.html
[3] McGrath, J.J., et al., Psychotic Experiences in the General Population: A Cross-National Analysis Based on 31,261 Respondents From 18 Countries. JAMA Psychiatry, 2015. 72(7): p. 697-705.
[4] Association, A.P.,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DSM-5®). 2013: American Psychiatric Publishing.
[5] Buda, M., et al., A specific brain structural basis for individual differences in reality monitoring. J Neurosci, 2011. 31(40): p. 14308-13.
[6] Garrison, J.R., et al., Paracingulate sulcus morphology is associated with hallucinations in the human brain.
Nat Commun,2015. 6: p. 8956.
[7] 이유상 and 권준수, 조현병, 정신분열병의 새로운 명칭 탄생.J Korean Neuropsychiatr Assoc, 2011. 50(1): p. 16-9.
[8] 김성완, et al., ‘조현병-정신분열병’병명에 따른 낙인 비교. J Korean Neuropsychiatr Assoc, 2012. 51: p. 210-7.
[9] Chatterjee, S., et al., Effectiveness of a community-based intervention for people with schizophrenia and their caregivers in India (COPSI): a randomised controlled trial. Lancet, 2014. 383(9926): p. 1385-94.
최강 의사, 르네스병원 정신과장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사이언스온의 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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