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양(學養)'에 대하여: '학(學)'은 지식, 즉 폭넓은 분야를 아는 것을 의미하며, '양(養)'은 개인적 수양, 즉 처신과 대인 관계에서 가장 적절한 방식을 익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혼란한 시기든 평온한 시기든, 불제자들은 세상의 성현이나 군자들처럼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대처하고 방편을 활용하지만, 진심과 존중이라는 근본 원칙만은 절대 변치 않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수행이란 곧 계(戒)·정(定)·혜(慧)를 닦는 과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 계·정·혜는 일상생활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드러납니다. 쉰세 분의 선지식을 찾아 나선 선재동자(善財童子)의 구법 여정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때로는 그가 계율을 어기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행동이야말로 진정한 계율의 실천이었습니다.
◎ 격동의 시대를 살아갈 때 우리는 두 가지 원칙을 굳건히 지켜야 합니다. 첫째는 도(道)를 향한 마음, 곧 진심 어린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며, 둘째는 불법(佛法)을 수호하고 받들어 결코 불법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 타인을 돕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를 해탈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해탈 없이는 타인을 진정으로 돕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 도를 널리 펴는 일은 결코 쉬운 과업이 아닙니다. 법달(法達) 선사는 육조(六祖) 스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법화경》을 10년 동안 부단히 연구하지 않았다면, 설령 육조 스님을 만났더라도 깨달음에 이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무진장(無盡藏) 비구니 또한 한 가지 경전에 집중하여 10년 넘게 정진한 뒤 육조 스님을 만나 비로소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처럼 청정한 마음을 얻으려면 한 가지 경전을 통달하는 데 10년의 세월을 쏟아야 합니다. 집중하는 힘(정력, 定力)을 갖추는 것은 근본적인 전제 조건입니다. 마음이 청정하지 않다면, 설령 부처님이나 보살님이 법을 설하신다 해도 깨달음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 부처님께서 중생을 가르치실 때는 듣는 이의 구체적인 상황과 근기에 맞춰 가르침을 펴셨으며, 고정된 교리만을 설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생이 미혹을 깨고 깨달음을 얻거나, 고통을 여의고 행복을 찾도록 돕는 가르침이라면 무엇이든 참된 불법(佛法)이며 찬탄받아 마땅합니다. 반면, 자신을 내세우며 타인을 비방하거나 가르침과 행동에 종파적 편견을 품는 것은 불법의 전파와 계승에 큰 장애를 초래합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수많은 중생이 불법을 수행할 기회를 박탈하고, 그들의 법신(法身)과 지혜의 생명을 끊어버리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형태의 대승불교를 찬탄해야 합니다.
◎ 부처님의 명호를 염송하는 수행법은 중생이 진정한 이익을 얻도록 돕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 핵심은 몸과 마음, 그리고 물질세계에 대한 집착을 진정으로 내려놓고 지극한 정성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를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부지런히 수행한다면 업장(業障)이 빠르게 소멸할 것이며, 몸과 마음이 가볍고 편안해지고 한량없는 법열(法悅)을 느껴 평화롭고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 불법과의 인연과 복덕의 공덕은 스스로 닦아 나가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는 마장(魔障)이 많습니다. 우리는 이를 극복하여 참된 불법이 널리 퍼지도록 힘써야 하며, 이것이 바로 공덕을 쌓는 길입니다. 반대로 이러한 장애를 부추겨 참된 불법이 사라지게 하거나 전파를 지연시킨다면, 이는 중대한 과오를 범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깊이 유념해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큰 공덕을 쌓았다고 착각하면서도, 부주의함 탓에 자신도 모르게 수많은 잘못을 저지르곤 하는데, 이는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정공법사법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