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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19일 화요일 <순종 2>
[김용호] [오전 4:37] 굿모닝입니다~^^ 오늘도 힘차게 달립시다~!!
어제에 이어 순종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먼저 어제 수다를 요약하면~
1. 순종의 대상 :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순종해야 하는 것은 성경의 약속과 명령에 대해서인 바, 그것은 새로운 피조물들이 모인 하나님의 나라 한 몸 공동체의 수립과 성장과 확산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2. 순종의 심화 : 엄청난 영성을 필요로 하는 바,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평생 순종의 심화를 향해 나아가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오늘의 수다입니다.^^
3. 순종의 현장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순종의 삶의 현장은 어떠한 모습으로 진행될까요? 서구 기독교인들은 이 면에서는 참 편합니다. 교황이든 신부든 목사든 소위 성직자들에게 순종하면 그만이니까요. 배가 산으로 가든 바다로 가든 개의치 않고 말이지요.
물론 가끔 반골 기질을 가진 자들이 나타나 자기 식의 정의를 부르짖으며 말썽을 일으키기도 합니다만 대세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대두, 20세기 진보기독교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진리의 내용 면에서는 그리 달라진 것도 없습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몇 가지 서로 다른 주장들이 나오면서 가톨릭과 개신교로, 그리고 보수 기독교와 진보 기독교로 분열된 것뿐이지요.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교리와 성직자에게 무조건 순종하기에 더불어 세속의 가치와 인간의 양심에 순종하기가 추가되었습니다. 진보 기독교 덕분이지요.
그리고 제3의 순종이 지난 세기에 대두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께 순종하는 순종입니다. 순복음 교단과 은사 운동, 성령 운동이 출현한 결과입니다.
이상의 세 가지 순종을 간략히 묘사하자면, 교회 권력에의 순종, 세속 가치에의 순종, 성령에의 순종인데 이 세 가지 순종의 공통점으로 두 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순종이라고 주장함. 각각 나름대로의 성경 해석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요.
2. 내면적으로는 자기 바벨탑을 쌓기 위한 순종임. 모두가 개인 차원의 순종이기 때문에 이 순종조차도 자신의 현세와 내세의 생존과 번영 추구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순종의 실제적인 모티브인 것이지요. 자신의 안일을 위해서든 명예를 위해서든 영생복락을 위해서든 겉모습은 조금씩 달라도 속내는 다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자신의 싸르크스를 위한 순종이 되고 맙니다. 순종의 본질이 이렇기 때문에 순종의 현장도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선교를 위한 순교, 타인을 위한 희생도 있는데 너무 싸잡아 매도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지요.
(잠 16: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항상 성령께 묻고 응답을 받아 행동한다는 직통 계시류도 그 심령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가 순종과 관련된 문제의 핵심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고전 13:1-2)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이처럼 성령의 역사로 강력한 은사를 행하는 것도 그 자체로 순종의 현장이라고 평가될 수는 없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순종이 죄가 되는 현장들입니다. 육신적 가치를 위한 순종, 정신적 가치를 위한 순종, 종교적 가치를 위한 순종이기 때문이지요. 바벨탑을 쌓기 위한 순종이니 결국 죄가 되는 순종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순종의 현장의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요?
첫째는 푯대에의 순종입니다.
둘째는 푯대를 공유한 제자들 사이의 순종입니다.
셋째는 때때로 임하는 로기온에의 순종입니다.
자기 자신의 안일과 명예와 쾌락을 위해 순종을 거부하는 싸르크스의 끝없는 준동과 싸우면서 안에서는 양육과 구제에, 밖에서는 전도와 활용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순종의 현장인 것이지요.
성경적인 순종은 꼭두각시처럼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지체들이 하나가 되어 한 마음으로 능동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정확한 푯대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로기온도 우리를 꼭두각시로 만드는 로기온이 아니고 우리의 능동적인 행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도 바울이 성령께서 공동체에 주신 환상을 해석하는 장면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편 제자들이 사안별로 한 마음이 되는 과정에서 지체들 사이에서 수동적인 모습이나 피동적인 모습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은 능동적인 자발적 순종으로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불타는 사명감에 따른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의견이 다르다 해도 효율성에 대한 의견 차이만 있기 때문에 고집을 부릴 의견 자체가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또 하나 생각할 것은 양육 과정에서의 순종입니다. 양육이 자발적 순종으로 진행되기 위한 전제는 큰 자가 본이 되는 것입니다. 푯대를 향해 나아가는 길에서 본이 되는 큰 자의 양육에 자발적으로 순종하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육 과정에서 자발적 순종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큰 자가 본이 되지 못 할 때와 어린 자가 본 받기를 꺼릴 때입니다.
큰 자가 본이 되지 못 하는 경우(out of Christ 상태가 오래 지속되는 경우)는 공동체가 그 사람에게서 양육의 사명을 제해야 할 것이고, 어린 자가 본받기를 꺼릴 때에는 양육을 중단하고 그 어린 자의 푯대부터 다시 점검하면서 계속 함께 갈지의 여부를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큰 자들은 본이 되어달라는 어린 자들의 요청에 식은땀을 흘리며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이지요.
(막 9: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한편 세상에 나가서는 뱀처럼 지혜롭게 세상 권세에 순복하면 됩니다. 문제는 세상 권세에 종류가 많고 서로 싸우고 있다는 것인데 순종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의 주장에 동조해주면 됩니다. 그런데 만약 두 권세가 싸우면서 나에게 입장을 밝히라고 하면?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면서 씩 웃어주면 대개는 해결됩니다. 소경들의 싸움에 우리가 나설 일이 없는 거지요. 그냥 피할 궁리만 하면 됩니다. 우리의 목적은 전도 또는 활용이니까요.
만약 하나님이 명령하시면 그 자리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장렬하게 삶을 끝내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요. 요즘 세상에 그럴 일은 드물겠지만 왕따가 되는 난처한 상황은 있을 수 있습니다. 요령껏 합시다~ ㅋㅋ
[김용호] [오후 12:51] 순종과 관련한 사도 바울의 명쾌한 말씀을 올립니다. 로마서 6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함께 부활함으로써 의로운 존재로 재탄생하는 신비를 언급한 다음 바로 이어서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순종을 언급합니다.
(롬 6:15-18)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성령께서 하시는 신비한 재창조와 인간이 하는 순종을 의인이 되는 두 과정으로 나란히 놓고 있는데 그 순종의 핵심은 "교혼의 본"에 대한 순종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훈의 본"의 핵심은 개인적으로는 새로운 피조물, 집단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 한 몸 공동체인 것이지요.
따라서 성경적인 순종의 이유 그리고 목적은 새로운 피조물이 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 한 몸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한 마음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성장시키고 확산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지요. 그리고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노아 가족을 살려주신 이유이며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종말 이후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하나님은 역사하시고 인간은 순종함으로써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를 세우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 일을 가장 방해하는 원수는 바로 생존과 번영을 희구하는 우리의 싸르크스임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오늘도 열심히 우리의 육체(싸르크스)와 함께 정(파쎄마)과 욕심(에피뒤미아)을 열심히 십자가에 못 박고 순종의 길로 함께 나아갑시다. 주님의 교회 화이팅~!!
[정진호] [오후 3:35]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가 제다카와 미쉬파트가 행해지는 특수 공동체를 만드시기 위함이라면 그것이 일단
은 이스라엘이 되는 거지요? 이스라엘을 그래서 세우고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시면서 율법을 준행하며 제다카와 미쉬파트가 행해지기를 원하셨는데 그러나 결과는 미쉬파흐와 제아카만 가득한 거였구요.
[김용호] [오후 3:42] 그렇습니다. 모세 율법은 쩨다카와 미쉬파트의 상세한 매뉴얼이었던 거지요.
[정진호] [오후 3:44] 노아 때는 공동체를 만들지 않고 그냥 놔두었더니 포악이 횡행해졌고 그래서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 공동체
를 만들어서 율법을 주었더니 역시 포악이 횡행해졌고... 그러나 이스라엘이 신약의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모형으로서의 의미가 되는 거구요.
[김용호] [오후 3:46] 노아 이후도 모두가 노아의 후손 공동체였다는 점은 아브라함의 후손 공동체와 같은 점입니다. 다만 아브라함
후손 공동체는 외인들에게 둘러싸인 공동체었지요.
노아 후손들만 남겨도 실패,
아브라함 후손들만 뽑아서 율법이라는 상세한 매뉴얼까지 주어도 실패,
이래도 실패, 저래도 실패.
[정진호] [오후 3:48] 노아, 아브라함, 예수님을 통해서 점점 더 선명하게 구원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거 같아요.
[김용호] [오후 3:49] 예. 단계별로 심화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심화의 과정을 성경의 계시를 통해 명확히 설명
해주시는 거지요. 최후의 단계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시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까지 보내신 것인데 2000년이 지난 아직까지 비리비리~ 그러나 아직 신약시대가 끝난 것은 아니지요. 몇 년이 남았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요.^^
[정진호] [오후 3:52] 구약 백성이 쌓으려고 했던 바벨탑은 율법을 열심히 지키면서 이스라엘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살려고 하는 것
인데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은 지킬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려주셨지요?
[김용호] [오후 3:53] 그렇습니다. 동시에 율법이 그런 육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도 밝히셨구요.
[정진호] [오후 3:53] 율법을 지키려고 했던 결과가 서로 물고 먹는 모습으로 나온 거구요.
[김용호] [오후 3:54] 예. 오히려 율법을 사람을 해치는 데에 사용하지요.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과 2장에서 세 가지 유형으로 설명
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율법을 지키지도 않고 또 지키지 않는 자를 칭찬하느냐~
남들에겐 지키라고 하면서 너는 오히려 안 지키느냐~
안 지키는 자를 오히려 칭찬하느냐~
노아의 경우는 온 세상에 자기 혈육들만 살게 해주어도 안 되었고, 아브라함의 경우는 살벌한 율법을 주어도 안 되었고, 신약의 경우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여시고 성령께서 새 마음을 심어주시는데도 아직 안 되고 있다 하겠습니다.
[정진호] [오후 4:05] 사도들의 초대교회를 통해서 시작은 이미 되었다고 봐야겠지요. 그 이후 진전이 그동안 없어서 문제지만요.
[김용호] [오후 4:07] 맞습니다. 사도들 개인 차원에서는 진행이 되었는데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가 실제로 세워지는 데에까지는 진행
되지 못했지요. 싸르크스가 성령을 훼방하고 있기 때문인데 윤리도덕과 휴머니즘을 방패삼아 성령을 훼방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신약의 본격적인 계명들을 윤리도덕과 휴머니즘으로 왜곡시킴으로써 훼방하고 있는 거지요.
[정진호] [오후 4:08] 고린도 교회라든지 빌립보 교회 등등이 아주 불완전하지만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실제로 세워지고 있는 걸로
보는 건 어떨까요? 아주 미성숙하지만요.
[김용호] [오후 4:09] 양면성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좀 더 치밀한 분석이 요구된다 하겠습니다. 가장 정확한 규정은 계시록의 일곱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입니다. 요한 사도가 아직 생존해 있을 때의 초대교회 공동체들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지요. 칭찬과 꾸지람이 교차되고 있습니다.
[정진호] [오후 4:12] 그 이상을 우리가 진도 나가야 할 책임이 있네요.
[김용호] [오후 4:13]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지요. 사도들의 서한에 구체적인 기준들이 모두 증언되어 있
으므로 우리가 진리를 새롭게 발견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거기에 순종만 되면 되는 거지요. 싸르크스에게 속지만 않고 정확한 회개와 정확한 간구를 하면 됩니다.
그를 위해 푯대의 정확한 규명이 필수적인 전제가 됩니다. 푯대를 정확히 알고 우리 자신을 정확히 알고 그리고 초대교회를 포함한 기독교 2000년의 다양한 오류들을 정확히 분석해 참고로 삼으면 우리가 길을 잃을 확률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 우리가 성령을 훼방하지 않을 수 있게 되지요.
그러고 보면 모든 종교가 창시자에 의해 단번에 진리가 제시된 데 비해 성경은 실제 역사 속에서 진리가 계속 심화되면서 제시되고 있는 유일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실제 인간의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계시되어온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정진호] [오후 6:11] 노아의 믿음을 본 받자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 받자 하는 것들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지 새삼 생각이 드네요. 그
림자를 본 받자는 건데 참...
이런 내용이 생각나네요. 노아가 배를 만들 때 얼마나 사람들이 조롱을 했겠나? 뚱딴지 같이 홍수 심판이 온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 취급하지 않았겠나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믿고 묵묵히 배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김용호] [오후 6:18] 우리와 비슷하네요. ㅜ.ㅜ
[정진호] [오후 6:18] ㅎㅎㅎ
[김용호] [오후 6:20] 서구 기독교도 노아의 방주를 교회의 모형으로들 봅니다. 구원의 방주~ 그런데 실제로는 아무 현실감이 없지
요. 죽은 다음의 일로 제시되니까요. 현실과는 무관한 구원의 방주~ 그러나 우리는 다르지요.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는 실제로 새 삶이 있는 방주입니다. 새로운 관계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삶~ 그 방주를 우리가 지금 만들고 있습니다. 묵묵히~
[정진호] [오후 6:30] 오!
[김용호] [오후 6:31] 그건 불가시 교회라며 우리를 비웃는 서구 기독교인들을 못 본 체하면서요.
실제로 방주를 만든다고? 미쳤군~^^
[정진호] [오후 6:32] 우리야 말로 노아의 후예네요.
[김용호] [오후 6:34] 예. 그들의 삶 속에 신약의 모형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본받자고 한다면 주객이 전도된 것이지
요. 그들은 모형에 불과하고 새로운 피조물과 하나님의 나라가 진짜니까요. 그것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 솔로몬 등등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말미에 저들은 약속을 받지 못했으나 우리로 인해 저들이 온전케 된다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저들이 보였던 모형이 우리로 인해 현실에서 실제로 성취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저들이 온전케 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온전케 되는 것은 우리인데 우리 때문에 저들까지 온전케 된다니요? 오늘의 퀴즈입니다~^^
[정진호] [오후 7:32] 그들을 본 받는다는 것은 그들의 믿음을 본 받자는 건데 그 말 자체는 틀렸다고 보지는 않아요. 다만 무엇을 믿
자는 것인지가 중요한 거지요.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믿자는 거라고 하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믿는 것이 되어야하는데 그들을 본 받자고 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믿음은 우리의 생존과 번영을 책임져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죽으면 천국을 보장하시는 하나님일 거란 것이 문제이겠지요.
[김용호] [오후 7:36] 그들 나름의 신실함(피스티스, 믿음)과 순종의 태도를 본받자는 것은 육에 속한 저들에게는 맞는 말입니다. 저
들이나 그들이나 그리스도의 신실함(피스티스)을 받지 못한 것은 피차 마찬가지니까요. 그리고 약속의 내용이 다른 것도 하나님의 뜻이지 저들의 책임은 아니니까요.
[정진호] [오후 7:38] 그들의 순종하는 태도를 본받자는 정도로 이해하면 될 거 같네요.
[김용호] [오후 7:39] 예. 그렇습니다. 옛사람으로서는 대단한 수준인 것은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서구 기독교인들에게는 저들과 그
들이 받은 약속의 차이도 인식이 안 될 테구요. 가족 잘 먹여 살리는 것은 동일한 약속 아닌가? 이러고 있으니까요^^
오늘의 퀴즈에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주석 세 가지를 확인했으나 도움이 되는 내용은 없고 한글 번역본들이 오히려 참고가 되네요.
[정진호] [오후 8:23] 그건 전에 내가 질문했던 내용인데요. 우리에게 약속이 성취될 때 비로소 구약의 인물들이 구원사에서 자리매
김을 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느냐는 것이 저의 질문이었어요. 즉 우리에게 약속이 성취되어야 비로소 구약의 인물들과 우리가 퍼즐조각을 맞추는 것을 완성하는 것으로 그들과 우리는 구원사에서 한 배를 타고 있다는 거지요. 저의 생각에 전도사님은 동의하신 걸로 이해했구요.
[김용호] [오후 8:27] 와~ 좋은 접근입니다. 지금 확인한 주석들보다 탁월한 해석입니다. 지금 또 동의할게요.^^
[정진호] [오후 8:28] 그 당시는 우리가 세 번째 믿음의 사람이 될 때로 접근했었지요.
[김용호] [오후 8:29] 맞습니다. 그 방향으로 접근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번 주 설교에서 그 점에 초점을 맞추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
다.
[정진호] [오후 8:31] 구약의 인물이 비록 약속이 성취되지 않은 인물들이었지만 그들이 성경에서 존중 받기위해서라도 우리가 세 번
째 믿음의 사람이 반드시 되어야 하지요.
[김용호] [오후 8:31] 그렇습니다. 현대어성경의 번역이 그런 뉘앙스입니다.
(히 11:40)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보다 더 좋은 것을 준비해 두신 것을 그들에게도 주시려고 기다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엄청난 의역인데 가장 맘에 드는 번역입니다. 개역성경은 ~
(히 11: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현대어성경의 번역이 맘에 든다고 해서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다리라고 하셨다는 건 지나친 의역이지요. 영어 성경들은 NET까지 대개 개역성경과 동일한 번역인데 RSV와 공동번역이 비슷한 또 다른 뉘앙스네요. 올릴게요.
(히 11:40) since God had foreseen something better for us, that apart from us they should not be made perfect.
(히 11:40)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더 좋은 것을 마련해 두셨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를 제쳐 놓고는 결코 완성에 이르지는 못하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 번역에 참여한 신학자들 정말 존경스럽네요.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을지 눈에 선합니다. 맞느냐 틀리느냐를 떠나서요.^^
이렇게 깊은 고민들을 하면서 왜 이신칭의론을 극복하지 못했는지가 또 아이러니네요. 이신칭의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외에는 구약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인데 말이지요.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피스티스와 그 결과물인 성령의 열매가 신약의 핵심인데....
인간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구약의 인물들에게 주어진 구원체계와 조금도 다르지 않거든요. 그들에게도 짐승 피로 죄사함을 받는 제사 제도가 있었고 말이지요. 구약은 인간이 최선을 다하기를 요구하는 계약이고 신약은 인간 존재를 재창조하신다는 계약인데, 그 참~~
[정진호] [오후 8:50] 신약을 구약과 동일 개념으로 보았다는 거네요.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피는 단지 짐승의 피를 대신하게 되는 것
뿐이겠네요.
[김용호] [오후 8:51] 예. 이신칭의론의 황당함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정진호] [오후 8:51] 그럼 예수님이 좀 불쌍하지요. 겨우 그런 역할을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되니까요.
[김용호] [오후 8:51] 그렇지요. 홈런입니다~!!
[정진호] [오후 8:52]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겨우 그런 역할이라는 게 설득력이 떨어지네요.
[김용호] [오후 8:53] 제가 서구 신학자들을 어둠의 천재들이라고 했는데 새삼 또 실감이 납니다. 인간의 믿음을 벗어나지 못한 결과
라고 볼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낮에 말씀드린 것처럼 성령의 역사와 인간의 순종이 만나야 하는 것인데 인간의 믿음과 인간의 순종과 인간의 노력만 이야기하고 있으니 구약의 세계를 못 벗어나는 거지요.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이 있었다는 것만 다를 뿐 실제로는 달라질 것이 없는 거지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