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치기 /김만년
벌초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외삼촌댁에 들렀다. '으이. 차가워!' 등목을 쳐주시는 외숙모에게 간만에 천진스런 비명을 지른다. 냉수 한 잔을 마시고 툇마루에 앉으니 앞산에 장끼가 골이 떠나가도록 운다. 누이와 저 앞산에서 꿩알을 줍고 찔레를 꺾던 일이 어제 일처럼 선연하다. 한때 이십여 가구의 친지일가들이 촌락을 이루고 살았던 약샘마을, 이제는 폐촌이 되고 외삼촌만이 근근이 고향을 지킨다. 어머니의 부지깽이를 피해 달아나던 논두렁 어딘가에 내 유년의 발자국이 지금도 꼭꼭 숨어있을 것만 같다.
외삼촌댁은 여전히 약샘을 이용하고 있다. 달랑 한 가구가 사는 마을에 상수도를 들이는 것도 마뜩찮겠지만 사방 백리에 이만한 약수가 또 어디 있을까도 싶다. 배꼽 감이 또글또글 영글어 가는 감나무 아래에 작은 약샘이 있다. 돌 틈에서 흘러나오는 유서 깊은 석간수다. 샘의 이름을 따서 마을 지명도 약샘마을이 되었다. 집은 무너지고 마을은 폐허처럼 쓸쓸했지만 약샘은 여전히 물이 마르지 않았다. 투명한 돌바닥을 보니 샘을 친 지 얼마 되지 않는 듯했다. 측백나무도 산뜻하게 이발을 한 모양새다. 고향을 지키는 외삼촌의 배려이다.
나는 오래 된 습관처럼 샘가에 가만히 쪼그리고 앉는다. 물속으로 적요한 옛날이 흘러간다. 뭉게구름이 흘러가고 아버지의 고봉지게도 흘러간다. 고모의 물동이가 흘러가고 깨꽃 같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흘러간다. 그네를 타던 열아홉 새파란 엄마의 전설도 함께 흘러간다. 전란의 상처를 딛고 절뚝이며 보릿고개를 넘어오던 이 마을 사람들의 숱한 이야기들이 찰랑찰랑 샘가로 흘러넘친다. 오래된 기억의 저장고처럼 샘은 참 많은 사연들을 내게 들려준다.
그 시절 샘은 아낙네들의 소통의 공간이자 소문의 근원지였다. 새벽이면 쌀을 씻고 저물 무렵이면 아낙들이 삼삼오오 샘가에 모여 빨래를 하거나 허드렛일을 하면서 서로간의 집안 내력이나 일상의 안부들을 교환했다. 시집살이 설움이나 투전판에 드나드는 남편들 흉을 보며 서로 위로받고 위로하며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샘이 일종의 노천 카페 역할을 했던 셈이다. 또 샘은 아낙들의 두레 공간이 되기도 했다. 누구네 집에 잔치나 초상이 있으면 아낙들은 누구 먼저랄 것도 없이 팔을 걷어붙이고 샘가로 모여들었다. 삼발이를 걸고 옹기종기 모여 밥과 국을 끓여냈다. 전을 부치거나 떡쌀을 씻으며 울력으로 이웃 간의 정을 다분다분 나누었던 것이다. 그처럼 샘은 아낙네들의 속풀이 마당이자 소통과 화합으로 가는 징검돌 역할을 했다.
샘 치기는 바닥에 쌀알이나 앙금이 가라앉고 돌에 물이끼가 낄 떄쯤에 수시로 하는데 내가 기억하는 것은 동지와 단오 무렵의 샘 치기이다. 동지 때는 샘을 친 후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치성 의식이 있었는데 명태와 명주 실타래 그리고 팥죽 한 그릇을 소반 위에 올리고 치성을 드렸다. 단오 무렵의 샘 치기는 한 해 농사의 풍요를 빌며 마을의 화합을 다지는 여흥의 성격이 강했다. 어른들은 단옷날에 쓸 돼지를 잡고 장정들은 그네에 쓸 굵은 타래새끼를 꼬아 느티나무에 매달았다. 이때도 샘 치기는 여자들의 몫이다. 여인네들은 합심해서 물을 퍼낸 후 수세미로 이끼 낀 돌바닥을 매끈하게 닦는다. 그리고 해감내를 없애기 위해 갓 따온 호박잎으로 파란 즙이 나도록 돌 틈새를 빡빡 문지른 뒤 고인 물을 말끔히 퍼낸다. 그리고 물이 차서 흘러넘칠 때까지 기다려 주면 된다.
샘을 치는 날이면 나는 혼자 이 샘가에 앉아 있곤 했다. 물이 차오르기를 기다렸던 것 같다. 날이 어둑해질 때까지 샘가에 골똘히 앉아있다 보면 한 뼘 두 뼘씩 물이 고이다가 드디어 찰방하게 흘러넘친다. 물막이를 따라 부유물들이 떠내려가고 나면 비로소 물이 투명해진다. 그때서야 나는 조롱박으로 첫 물을 떠먹는다. 달디 단 그 첫 물 맛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샘물이 차 오르기를 기다렸던 것은 첫 물을 남들보다 먼저 먹는다는 야릇한 성취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첫물맛을 보려고 오금이 저리도록 쪼그리고 앉아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저 그때는 그 기다림이 좋았다.
적요한 한낮, 찾아오는 이 하나 없는 인적 드문 마을이건만 샘은 여전히 투명한 노래를 부른다. 마치 무상설법이라도 하는 양 찰랑찰랑, 부드러운 청음으로 저 혼자 몸을 맑히고 있는 중이다. 샘은 저렇게 흘러넘쳐야 제 맛이다. 넘치지 않으면 부유뮬이 침전되기 때문이다. 침전된 부유물은 오래 지나면 앙금鴦衾이 된다. 앙금이 가라앉으면 약간의 파동에도 물은 탁해진다. 그래서 샘은 스스로 흘러넘치기도 하고 때가 되면 흔쾌히 바닥을 비워주기도 한다. 자정自淨과 비움의 성정이 있기 때문이리라.
사람이라고 이와 다를까. 내 마음속에도 샘이 있다. 미움, 집착의 샘들이 그런 것들이다. 생업에 일희일비하며 일상을 동동거리다 보니 삶의 침전물들을 제때에 비워내지 못하고 산 것 같다. 샘처럼 흘러가게 버려두지도 못했다. 매 순간 애증에 연연하며 누군가에게 상처주고 상처받으면서 살아온 것 같다. 더러는 무연한 말 뿌리에 걸려 긴 밤을 모로 누어 상한 마음을 쓸기도 했다. 쓸어내지 못한 것들은 상처로 남게 마련이다. 상처는 오래 두면 앙금이 된다. 그래서 작은 파동에도 쉬이 마음이 탁해지고 낯빛이 흐려진다. 지난한 생의 부유물들을 제때에 밖으로 내보내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명치 끝 한쪽이 자주 따끔거린다.
등 뒤로 직립의 햇살이 내린다. 물속이 환해져 온다. 어쩌면 하루치의 햇살보다도 짧은 것이 우리네 생일진대 흘려보내지 못할 것은 무엇이고 담아둘 일은 무엇일까? 흘려보내면서 살아야겠다. 샘을 치듯이 가끔은 바닥도 쳐볼 일이다. 한 시절 내 골똘한 기다림이 머물다 가던 유년의 샘, 이제 어른들은 산으로 떠나고 도회로 간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후미진 고향은 풍장風葬에 든 듯 쓸쓸하다. 그러나 퐁퐁, 맑은 물이 샘솟는 저 약샘이 있는 한 나의 고향은 살아있다. 벌컥, 샘물 한 바가지를 들이켠다. 묵은 체증이 싸아하게 내려간다. 오늘은 고향에 와서 마음의 샘을 치고 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