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씨(辛氏)의 성씨 연원/ 글_신규탁 연대교수
신씨들의 시조 신경(辛鏡; 1107년생-?)은 고려 인종조에 문과에 올라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 평장사(金紫光祿大夫 門下侍郞 平章事)에 이르렀고 시호(諡號)는 정의(貞懿)다.
영월(寧越)신씨(辛氏)와 영산(靈山) 신씨(辛氏)의 시조인 신 경(辛鏡)의 선대 조상은 중국 농서(隴西)사람으로 당(唐)나라 천보(天寶; 742-756) 연간(신라 경덕왕 때)에 엄시랑(嚴侍郞)과 함께 신라에 제례(祭禮) 음악을 전파하는 사신인 파사악(派斯樂)으로 왔다가 영월 땅에 정착했다. 당나라의 법전인『당육전(唐六典)』에 의하면 당시 당나라 조정에는 태상시(太常寺) 산하에 태악서(太樂署)라는 부서를 두어 중앙과 각 지방의 제사 및 연회에 사용되는 음악을 관장하게 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정묘보(丁卯譜)』(1807년)과『신해보(辛亥譜』(1851년)의 서문과 발문을 비롯하여 『갑자보(甲子譜』(1924년) 서문, 그리고『경진보(庚辰譜』(2000년)즉 『영월신씨대종보』등 여러 족보에 실려 오늘에 전한다.
임진왜란 후 족보를 병화로 잃고 재편수하는 과정에서, 중국 송나라에서 8학사(學士)가 고려에 와서 모두 이름을 경(鏡)으로 했고 팔경대(八鏡臺)에서 의형제를 맺었다는 ‘8학사론(八學士論)’은 역사적인 근거가 없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보장왕에게 주청을 드려 당나라에서 8명의 도학사(道學士)가 왔다는 설을 모방한 것이다. 8학사를 주장하는 문중은 모두 14개나 되지만 어느 하나 근거도 없고 앞뒤가 맞지 않는다.
신씨들의 연원은 신라 경덕왕 시대 영월(寧越) 땅에서부터 시작되지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무자보(戊子譜)』서문에서도 밝혔듯이 평장사(平章事) 신경(辛 鏡) 이전에도 조상이 있지만 그 뿌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역대 족보들마다 평장사(平章事) 신경(辛鏡)를 시조로 기세(起世)하면서도 맨 첫 머리에 5세 8공의 선조를 기록하였다.
다행스럽게도 2000년 영월신씨중앙종회에서 발간한 『경진보(庚辰譜)』에서는 이 분야 전문가들이 『고려사』등에서 고증하여 신운조(辛雲晁), 신방(辛方), 신충(辛忠) 등 옛 조상을 밝히고, 나아가 『구당서』와 『신당서』를 비롯한 중국의 역사 기록을 고증하여 옛 조상들을 밝혀놓았다. 1918년 시조 신경(辛鏡)의 4세손인 태사공 신몽삼(辛夢森; 1166년-?)의 무덤에서 발견된 지석(誌石) 앞면에 “태사영주신공모지묘”(太師寧州辛公某之墓)라고 적혀있다.
당시 당나라 행정 편제에 의하면 영주(寧州)는 농서(隴西) 관내에 있었다. 이런 등으로 미루어 보아 신씨들의 시조가 당나라 때에 영월로 와서 정착한 것이 사실과 부합하고 영월 엄씨(嚴氏)들의 족보 기록과도 일치한다.
고려 말을 지나 조선 초에 들어서면서 조선에도 본관(本貫) 제도가 정착이 되어갔고, 이와 더불어 각 문중마다 족보의 편찬도 시작되었다. 현재로서는 성종 임금(재위 1469-1494년) 당시에 편찬된 안동 권씨의 『성화보(成化譜)』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존한다.
신씨(辛氏)의 경우는, 쌍매당 이첨(李詹 ;1345-1405년)의 문집에 의하면 『신씨가보(辛氏家譜)』가 있었음은 알 수 있지만 그 원형은 전해지지 않는다. 현존하는 최고(最古) 기록인 천계(天啓) 8년(1628년)에 간행된 『세보요약(世譜要略)』에 의하면 “신씨들 중에는 영산(靈山)을 관향으로 하는 집도 있고 영월(寧越)을 본관으로 하는 집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1668년에 간행한 『갑술보(甲戌譜)』서문이나 1684년에 간행한 『갑자보(甲子譜)』 서문들에서 보이듯이, 1600년대에는 이미 영산과 영월이 분관되어 있었다. 이것은 풍양 조씨 조종운(趙從耘; 1607-1683)이 필사한 『씨족원류(氏族源流)』에서도 입증된다.
그러면 신씨가 영산과 영월로 분관된 것은 언제인가?『씨족원류』에 의하면, 영산관향의 가장 오래된 선조로서는 신희(辛喜)를 필두로 그의 아들에 지화(辛至和) 다시 그의 아들에 신천(辛蕆; 덕재공)과 신혁(辛革; 초당공) 형제들의 계통이 정연하게 채록되어 있고, 영월 관향의 가장 오래된 선조로는 신온(辛蘊)의 후손인 신중해(辛仲諧; 禮賓卿)와 신중석(辛仲碩; 守門下侍中) 형제들의 계통들이 정연하게 채록되어 있고, 또 영월 관향으로 신비(辛毗)를 필두로 하는 계통들이 실려 있다.
그런데 임진왜란의 병화로 족보를 잃게 되자, 영산지역 살던 상장군파 신씨들이 1708년에 이른바 『무자보(戊子譜)』를 편수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신천(辛蕆;)과 신혁(辛革)을 각각 영산 신씨 덕재공파와 초당공파의 파조(派祖)로 기록했고, 신온(辛蘊)을 영월 신씨 부원군파의 파조(派祖)로 기록했고, 신비(辛毗)의 부(父)에 신군재(辛君才)를 놓고 군재의 부(父)에 혁(革)자와 막(莫)를 조자(造字)하여 만든 신한(辛 革莫)을 두어 판서공파의 파조(派祖)로 했다. 이로부터 역대의 족보는 시조 신경(辛鏡)의 8세손인 지화(至和)의 아들 4형제에 천, 혁, 온, 한(蕆, 革, 蘊, 革莫)을 두어 4파를 분류하고, 5세손에서 갈려나간 신주계(辛周繼)를 상장군파의 파조(派祖)하여 5파 분류의 체제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간의 많은 연구들에 의하면 신씨(辛氏)가 영월과 영산으로 본관을 분리하여 기록하기 시작 한 것은 6세인 신백련(辛百鍊)과 신백한(辛百閑)임이 드러났다. 1500년대에 족보를 만들면서, 영산에 뿌리를 내린 신백련(辛百鍊)과 신희(辛喜)의 자손들은 영산으로 관향을 삼았고, 평양과 황해도의 장단, 개성, 서흥, 배천(白川), 경기도 파주 안성 등지에 살았던 신백한, 신온과 신한, 신중해와 신중석의 자손들은 신라 신시랑(辛侍郞)의 입향지(入鄕地)인 영월 땅을 숭모(崇慕)하여 영월로 관향을 삼았다.
이 결과는 『씨족원류』가 1991년 비로서 세상에 알려짐에 따라, 신온(辛蘊)의 자(子)로 신중해(辛仲諧; 禮賓卿)가 밝혀지고, 신중해(辛仲諧)의 자(子)로 신홍성(辛洪成; 사재경)이 밝혀지고, 신홍성의 딸이 전주 최씨 집으로 시집을 가고, 현존하는 전주 최씨의 족보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어서 밝혀진 성과이다.
<글; 신규탁(연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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