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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 케고르가, 코펜하겐 대학에서 다시, 신학을 배우던 시절, 그는 매일, 일기를 썼습니다. 그의 일기 중 하나를 보면, “온 천하가 다 무너지더라도 내가 이것만은 꽉 붙들고 놓을 수가 없다. 나는 이것을 위해 살고, 이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나의 사명을 발견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성도인 우리에게도, 키에르 케고르가 가리킨 “이것”이 있을까?하고 생각해 봤습니까? “이것”이 무엇입니까? 롬 14: 8을 보시면, 사도 바울은, 이것에 대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식사하러 음식점에 들어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고, 식사하던 중이라도 일어나서 인사를 했습니다. 이 광경을 본, 식당의 직원이 한숨을 쉬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그 직원에게, “무슨 근심이라도 있는 겁니까? 왜? 그리 깊은 한 숨을 쉽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직원은, “당신이나 나나 똑같이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당신은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영광스러운 인물이지만, 그에 비해 나는 밥이나 얻어먹기 위해, 날마다 식당의 마당만 쓸고 있는 신세니, 내 자신이 가여워서 한숨을 쉽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셰익스피어는 그 직원에게, “당신은 식당의 마당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지구의 한 모퉁이를 쓸고 있는 겁니다”라며, 위로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멋진 말입니다. 이 말에는, 우리의 삶이 있기에, 더욱 멋있습니다. 위대한 전도자 디엘 무디를 만난 기자가 “목사님, 목사님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전도했습니다. 그렇게, 전도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혹시, 목사님의 전도로, 이 악한 세상이 변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무디는, “하나님은 내게 전 세계를 개혁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세상은, 도저히 구원할 수 없는 난파선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게 구명대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구명대로,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구원해서, 배에 태우는 겁니다”라고 했습니다. 성도인 우리에게는 누구나, 주께서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목회자라고 해서만, 사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장로는 장로로서, 권사는 권사로서, 안수집사는 안수집사로서, 성도는 성도로서, 제각기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사명입니다. 그러다보니, 이 “사명”이라는 말을 이어령 비어령으로 빗대는 분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사명에 대해 말하기 전, 먼저, 복음성가 “사명”의 가사를 소개합니다. “주님이 홀로 가신 그길 나도 따라가오 /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신 그 길을 나도 가오 / 험한 산도 나는 괜찮소 / 바다 끝이라도 나는 괜찮소 /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 아버지 나를 보내주오 / 나는 달려가겠소 / 목숨도 아끼지 않겠소 / 나를 보내주오 험한 산도 나는 괜찮소 / 바다 끝이라도 나는 괜찮소 /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 아버지 나를 보내주오 나는 달려가겠소 / 목숨도 아끼지 않겠소 나를 보내주오 / 세상이 나를 미워해도 나는 사랑하겠소 / 세상을 구원한 십자가 나도 따라가오 /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나를 사랑한 당신 / 이 작은 나를 받아주오 나도 사랑하오”입니다. 이 가사에 성도로서, 우리가 받은 사명이 잘 명시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명을 잊고 살거나 포기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 사명을 마음에 새기고 사명을 이루기 위해, 준비하며 노력하는 가운데, 기도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행 20: 24을 보시면,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주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계속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40절을 보시면,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라고 합니다. 사명자가 당하는, 고난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종류들을 나열해 보면, 너무나도 많습니다. 나를 형성하는 주변의 모든 것이, 고난의 요소이며, 환란의 요소입니다. 그러기에, 고난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고난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픔에 대해, 의사와 상담하고, 의사의 처방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즉, 병이 들었으면, 그 병이 무엇이며,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야 치료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욥기서를 보면, 욥의 친구들이, 무수한 말을 합니다만, 그 말 속에, 욥이 당하는 고난을 밝힐 수 있는 진리가 있습니까? 그들은 모두가, 진리라며 말을 하지만, 거기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그 친구들의 지식만,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고난에 대한 말만 무수하기에, 어떤 이들은, 자신의 실수로 고난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으로 전가합니다. 또, 어떤 이들는, 죄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욥의 친구들도 욥이 고난을 당하는 것에 대해, 욥의 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요 9: 2을 보시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던 제자들이, 길 가에 있는 소경을 발견하고는,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라고 묻습니다. 제자들은, 소경이 된 것에 대해, 그의 죄로 인한 고난이라는 겁니다. 선교사들의 행적을 읽어보면, 이 땅에 도착하자마자 풍토병에 걸려, 사역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 땅에 묻힌 선교사들도 있습니다. 또 자녀를 낳았지만, 어릴 때, 그 자녀를 묻어야 했던 선교사도 있습니다. 1896년 지금의 군산인, 전남의 군창역 부근에, 자신의 거처지를 두고, 전도하며, 예배를 드렸던 선교사가 있습니다. “윌리엄 맥클리 전킨” 선교사로, 우리나라 식으로는, “전위렴”선교사입니다. 그는, 군산 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선교하는 가운데, 8자녀 중, 첫째, 넷째, 다섯째 세 자녀를, 풍토병에 의해, 군산에서 잃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렇게, 초기의 선교사들은, 냉대와 고난 속에서, 자신들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들의 행적을 보면서, “얼마나 힘들었고, 얼마나 아픈 가슴을 안고, 절망하며 통곡했을까?”라는 생각 속에, 그들이 복음을 증거했던 그 역사를 생각했었습니다. 2호선과 6호선 합정역 주변에, “양화진”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가 보셨습니까? 그 곳에 가면, “절두산 천주교 성지”도 있고, “외국인 선교사 묘원”도 있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두 곳 모두 가보시기 바랍니다. 그곳에는 고향을 가지 못하고, 이 땅에 뼈를 묻은 선교사들이 있고, 그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들이 왜? 이러한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까? 욥의 친구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들의 죄 때문입니까? 모든 고난을 죄와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왜?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그 분의 죄 때문입니까? 불교에서는, 고난에 대한 모든 것을, “인과응보”로 받지만, 우리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인과응보는, 전생과 이생에서, 자신이 행한 행위에 대한, 공적과 업의 결과를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내가 죄인이라도, 나사렛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 가는 것이고, 나사렛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지 않으면, 천국가지 못하는 겁니다. 즉, 내가 중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다는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이 왜? 고난을 당했습니까? 왕상 22장에 나오는 미가야의 고난을 보시면, 아합이, 선조인 바아사 때, 아람에게 빼앗긴 길르앗 라못을 되찾기 위해, 전쟁하는 것에 대해, 400명의 선지자들이, 모두 승리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미가야 만큼은, 그 전쟁에서 패할 것이라고 말함으로, 시드기야에게 뺨을 맞았고, 아합에 의해 고난을 겪게 됩니다. 또, 왕상 19장에 나오는 엘리야의 고난을 보시면, 엘리야가 기손 시냇가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을 죽임으로, 이세벨이 그에게 복수하려 합니다. 이로 인해,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라고 합니다. 또, 사도바울은, 고후 1: 5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고 하며, 베드로는, 벧전 4: 16에서,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합니다. 계 2: 10을 보시면, 예수님이 서머나 교회에게,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고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도들은, 초대교회를 세우고 이끌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들이 이 길을 간 것은, 왕관을 쓰는 화려한 자리에 앉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복음 때문에 매를 맞았습니다. 이제, 고난의 중심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거기서, 한 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나를 위해 하늘의 모든 영광을 포기하고, 이 땅에 오신 “구세주”입니다. 그 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린 분입니다. “고난의 톱니바퀴는 잘 굴리면 은혜를 받게 되고 성공하지만, 고난의 톱니바퀴를 원망하고 불평하게 되면, 본인이 그 톱니바퀴에 들어가게 된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산삼이 좋습니까? 인삼이 좋습니까? 산삼은 아무리 오래 되어도, 인삼처럼 크지 않습니다. 만약, 큰 것을 원하신다면, 산삼보다 인삼이 좋습니다. 하지만, 약효로 보면, 인삼이 아무리 커도, 작은 산삼과 비교되지 않습니다. 인삼은, 사람의 보호 속에서 자라지만, 산삼은 깊은 산 속에서, 홀로, 추위와 더위를 견디는 가운데, 비바람 속에서, 힘들게 자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자를 광야로 이끕니다. 그로 하여금, 광야를 경험하게 합니다. 그 곳에는, 고난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만, 만나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있는 그 곳이 광야의 중심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있는 그 곳이 고난의 중심이라 하여도, 우리가 염려하지 않고, 본문 속의 사도들처럼 담대할 수 있는 것은,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41절을 보시면,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을 당하는 사명자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을 읽어보면, 사도들의 삶도, 예수님의 삶처럼, 체포당하고, 투옥되고, 매를 맞는 기록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그들이 받은 사명 완수에 대한, 확신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능욕을 받는 것에 대해, 합당하고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행 16장을 보시면,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가 끌려가서 매를 맞고, 투옥됩니다. 발은 차꼬에 채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4 – 25을 보시면,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능욕했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티마조”입니다. 그 의미는, “망신시키다. 경멸하다. 모욕하다”입니다. 공회원들은, 복음을 전하다 잡혀온 사도들을 능욕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들의 행위에 대해, “기뻐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본문 앞의 33절을 보시면, 공회원들은, 사도들을 죽이자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 사도들을 채찍으로 치고는, 놓아주었습니다. 시 119: 71을 보시면,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합니다. 시인은 여기서, 자신이 경험한 고난에 대해, “유익”이라고 합니다. 그 고난이 어떤 고난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참으로 매서웠던 고난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시인은, 그 고난에 대해, “고난이 유익이다”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더욱 굳건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믿음이 더욱 자랐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한 단계, 한 단계 업 될 때, 어떤 방법으로 되는지 아십니까? 고난을 극복할 수 없다면, 고난을 피하기만 한다면, 그의 믿음은 업 되지 않습니다. 믿음은, 고난을 통해 자랍니다. 마치, 불순물이 섞인 금이, 불 속에서, 불순물을 태움으로, 정금이 되듯, 우리의 믿음은, 고난을 통해, 한 단계, 한 단계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분량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스위스의 심리학자이자 의사인, “폴 투르니에”는, 그의 저서, “창조적 고통”에서, “현대 환자들의 중증은 바로 자기상실감이다. 용기부족이다. 어느 사이에 자기를 잃어버린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는, 자기를 찾아오는 대부분의 환자들이, 자신의 자아를 상실한 모습으로, 찾아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왜? 자아를 상실했는지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폴은, 고난을 말합니다. 그는, “고난은 창조성을 알게 하고, 상실한 자아를 되찾는 계기가 된다”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도로서 살아가면서 겪는 고난을 통해, 우리는, 성도의 모습을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이러한 고난이 있습니다. “성수주일”이 가장 큰 고난입니다. “주일”은, 내게 주어진 날이 아니라, “하나님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은, 주를 위해서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성내천 건너편에 보면, “라메 종”이라는 카페가 있습니다. 이 카페를 보면, 입구에 “주일은 쉽니다”라고 써 놓았습니다. 대부분, 카페나 여행지들을 보면, 월요일이 한가하기에, 월요일에 쉽니다. 그래서, 월요일에는 다닐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앞에 성내천이 있어서, 토요일과 주일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일을 지킨다는 것을 보면, 카페주인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카페 주인에게, 본문에 나오는 사도들의 기쁨이 있을 줄 압니다. 그 기쁨은,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요 16: 20을 보시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러한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기쁨이 없으면,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기쁨의 은혜가 충만한 가운데, 예수님을 믿는 것이, 나의 기쁨이고 축복인 것을, 이 세상에 마음껏 증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42절을 보시면,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고 합니다. 고난을 극복한 사명자에게, 하나님의 반전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들은 석방되자, 복음 사역에 더욱 더 열정적으로, 임했습니다. 그들은, 매일을 하루종일,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전했습니다. 사도들은, 공회가 있고, 성전의 경비대들이 경계하고 있는 성전에서도, 거리낌 없이, 예전과 같이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 가가호호 다니며, 예루살렘을 구석구석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들의 이러한 행위는, 행 1: 8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보시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합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사도들의 열심을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날마다 열심을 내었다는 겁니다. 둘째는, 성전에서도 열심을 내었다는 겁니다. 셋째는, 가가호호다니면서 열심을 내었다는 겁니다. 넷째는,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는 것에 열심을 내었다는 겁니다. 다섯째는, 복음의 밖에 있는 자, 곧, 당시로서는 유대인이요, 오늘날에는, 불신자입니다. 이들을 전도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다는 겁니다. 사도들은 변했습니다. 그들은 본래, 이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행 4: 13을 보시면,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라고 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힐 때, 뿔뿔히 흩어져서 도망친 자들입니다. 막 14: 52을 보시면,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고 합니다. 이랬던 그들이, 지금은,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어디서나 주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이들을 이렇게 담대한 자들로 만들었습니까? 일반 사람들이라면, 공회에서 매를 맞고, 위협을 받았기에, 두려움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여기에, 하나님의 반전이 있는 겁니다. 그것이 뭡니까? 전체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그럼, 우리에게도 이러한 반전이 있습니까? 우리에게도 이들처럼, 담대하게, 하나님을 더욱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반전이 있습니까? 이 반전은, 계 2: 17에서 말씀하는 “흰 돌”과도 같습니다. 여기를 보시면,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자만이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는 죽었다는 것으로,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반전을 일으켰습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에는, 고난과 기쁨과 하나님의 반전이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의 변화와 흐름 속에서도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충성으로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