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헌님께서 글을 삭제하셨네요.
본인께서 삭제하셨을 텐데 저는 조금 섭섭한 마음입니다.
물론 이태헌님의 의견은 전적으로 존중합니다.
무엇을 안다는 것과 사무치게 알아지는 것은 다른 것 같습니다.
아는 것 같은데도 잊어 먹고 실천도 안되고...그러니 반복해서 듣고 생각해보고....특히 교수님 강의는 여러번 들을 때마다 새롭더군요. 그만큼 내용이 농축된 강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태헌님께서 올려주신 20년전 ‘인도불교의역사’ 영상은 너무 좋았습니다. 이미 올려져 있었지만 최근에 들어보지 못한 영상 다시 들을 수 있게 소개해주셔서 좋다는 댓글도 있었습니다.
교수님의 넷도량의 목적은 학문을 연마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수님께서 워낙 연구를 심도있게 하셨고 많은 자료를 올려놓으셨기 때문에 불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시는 분들도 많이 가입을 하셨겠지만, 교수님의 카페 개설 의도는 불교를 제대로 알고 실천하고 싶은 일반인에게 정확한 지도를 제시해주시려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문답게시판을 들어가보면 박사과정 지도제자라도 지도교수에게 할 수 없을 것 같은 세부적이고 학문적인 질문을 집요하게 시도하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런 분의 열정을 교수님은 높게 보셨습니다. 그러나 교수님께서는 그런 질문은 이 카페의 목적이 아니라고도 하셨습니다. 다만 그런 질문 중에서 “다수에게 도움이 되는 질문”은 취사선택하여 상세히 답변을 해 주셨더군요. ㅠㅠ
이러한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이 넷도량은 학문연구가 일차 목적은 아닌 곳입니다.
교수님께서는 모르는 것을 타인에게 물어 그냥 들은 것을 자기 것으로 하는 학문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일일이 경전을 찾으시고 필요한 언어를 습득하시고 해외 싸이트에서 책을 귀한 책을 구입하셨습니다. 승랑을 쓰실 때는 중국 방문을 하여 현장 답사도 하셨고, 응용불교 논문을 쓰실 때는 심지어 미국 타임지에 회원가입까지 하여 50여년 전 기사를 찾아보기도 하셨습니다.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그런 노력을 직접 하셨습니다.
교수님 영상 곳곳에 그런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참으로 힘들고도 진실하게 공부하셨다는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님께서는 항상 ‘교만한 불자’를 경계하셨고 어렵게 알아내신 학문의 열매를 아낌없이 법보시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간화선 불교가 수승하지만, 최상승만 추구하는 교만한 불자를 만들지 않을까도 걱정하셨습니다.
그런 문제의식에서 체계불학을 고안하셨고 결국 쫑카파스님의 보리도차제에서 체계불학의 전범을 보시고 수용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의 넷도량의 목적은 학문연구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체계적으로 불교를 이해하고 실천하여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데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러니 문답게시판이 아닌 회원게시판에서는 우문우답 우문현답 현문현답 현문우답 모두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넷도량 어딘가에 답이 있을 수도 있는데 못 찾고 헤멜수도 있고, 남이 한 질문을 또 할 수도 있겠지요. 잘 아시는 분은 조금 답답할 수도 있겠지만 저를 포함해서 초심자가 척척 알아내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문답게시판이 아닌 회원게시판에서는 회원간의 소통을 위한 문답은 괜찮을 것 같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해봅니다.
체계불학을 알고 실천하고 싶은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는 백배 천배 낫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께서 그동안 혼자 답변해 주신 것을 기억한다면 기꺼이 도반을 위해 답(소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답이라기보다는 소통이라고 해야 맞겠습니다.
우문현답, 우문우답, 현문현답, 현문우답....무엇이 되었든 회원님들께서 회원게시판의 문답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으실테니까요.
회원게시판은 회원들의 자발적인 상호 소통이니 "체계불학에 관련된" 좋은 의도의 질문이나 소개글이라면, 서로 의견을 주고 받을 수 있지않을까요?
교수님께서 문답게시판에서 질문의 횟수와 내용을 제한하신 것은, 교수님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시간과 건강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곳에서 교수님과 같은 답변을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교수님께서 남기신 주옥같은 가르침이 이곳에 있으니 그것을 바탕으로 서로 좋은 영향력을 주고받아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 체계불학 넷도량의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년에 한번이든 한달에 한번이든 일주일에한 번이든 하루에 한번이든...자유롭게.
교수님의 넓은 품에서 자유롭게 공부하고 이야기 나눌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쓰다 보니 왜 또 청정님이 떠오를까요?
전에 읽은 청정님 글을 재현하는 듯한 생각도 드네요.
청정님 혜량하시구요.
이태헌님의 좋은 글이 삭제되어 아쉬운 마음에 제 생각을 올렸습니다.
아는 것도 별로 없는 사람이 그냥 회원으로서
두서 없는 말을 했습니다.
무슨 주장은 아니고 그냥 소소한 지나가는 말이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좋은 날 되시길 바랍니다.^^
_((((()))))_
첫댓글 마도로스님,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답글을 진작에 올리려 하였으나, 어찌 하다보니, 이제서야 올리게 되었습니다.
좀 두서 없는 글이 될 듯합니다.
쓰다보니 길게 되어 나누어 올립니다.
마도로스님, 글이란 쓰임이 다하면 그뿐이니, 마음쓰시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글보다 마음이 더욱 소중합니다.
넷도량은 마도로스님 말씀대로 실천을 위한 공부도량입니다.
그리고 체계불학은 연구불학이 아니고, 모든 불자들을 위한 신앙과 수행을 위한 불학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런 실천을 위한 체계불학을 말함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교수님 말씀에 의거하여 생각하면,
연구불학의 무분별적 유입으로 신행의 혼란이 일어나고, 신행에 혼란이 일어나면 실천에 힘이 안붙기 때문입니다.
신행에 도움이 되어야할 불학이 거꾸로 해가 되기 때문이지요.
강하게 말해서 이것을 뒤집어 엎는 것이 체계불학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기존의 연구 불학의 결실을 모아 초기부터 금강승에 이르기까지
모든 불교를 하나의 체계로 일관되게 관통시켜
혼란이 없고, 확고부동한 믿음과 순서에 맞게 수행을 하도록 하는 불학이 체계불학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처음부터 완전한 체계불학은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시도를 이미 쫑까파 스님께서 하셨고,
교수님은 그것을 롤모델로 삼아 거기에서 빠진 남방불교 대승불교 그리고 선불교를 통합한 보다 더 강력하고 큰 체계를 이루어보자 하신 것 같습니다.
이 큰 지도를 만든다는 것이 어찌 쉽겠는지요?
그러나 한번 그 초안적 체계불학을 만든다면, 시간이 가면 자연 만들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실천불교를 이끄는 불학이라, 반드시 현장에서 변화를 몰고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도로스님 말씀대로 사람들의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지요,
@청정 삶의 현장에서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모두 죽은 학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금의 연구학문은 그런 점에서 삶을 변화시킬 수 없기에, 오래전부터 체계불학의 필요성은 절대적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체계불학의 구심점이 어디에 있는지 저는 모릅니다.
말하자면 어디에서 누가 체계불학을 연구하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교수님도 제가 과문해서인지 어디에서 누구와 체계불학을 함께 연구하고 있다고 하신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혼자 연구하신다는 것인데, 혼자 연구하신 것이라면 여기 홈에 있는 자료들과 교수님의 모든 책, 그리고 학부에서 강의하신 것(학부생들에게 전해졌겠지요) 밖에 없을 것입니다.
결국 가시적으로 드러난 것은, 여기 홈의 영상과 글과 저술하신 25권의 책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청정 교수님은 지금은 생각이 안나지만 어느 인터뷰에선가 나의 연구는 모두 체계불학이라고 하신 기억이 납니다.
또 교수님의 글을 읽다보면, 교수님은 초안적 체계불학을 완성하시지 않았나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전재적 자질을 타고난데다 노력도 엄청하셔서 가히 불학의 경지에 오르신 듯하니, 아마도 체계불학의 초안은 잡으신 것이 아니가 조심스레 생각해 봅니다.
바람이기도 합니다.^^
@청정 마도로스님의 글을 읽다보니, 보리도차제론의 순서를 무시한 공부는 마구니가 된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순서를 무시한 공부는 모두 제 욕심을 이루는 도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공부는 자기가 바뀌고 끝내는 없어지는 것인데, 내가 펄펄 살아있는데 무슨 공부가 되겠는지요?
공부가 자기를 위한 장식품에 불과한 것이니, 공부도 망치고 자기도 망칠 것입니다.
남에게 전하면 남도 망치고 불법도 망칠 것입니다.
생각만해도 무서운 일입니다.
불법을 잘 알고 실천하면 자기가 바뀌고 자기가 바뀌면 삶이 변한다고 합니다.
삶이 변하면 굳이 남에게 전할 것도 없겠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문제는 스스로 불법을 잘 알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청정 모르면서도 묻지 않고,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것은 공부심이 없어서입니다.
그러나 이미 공부하려는 마음이 있는 이라면,
모르는데 묻지 않을 수 없고, 아는데 실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르는데 묻지 않고 아는데 실천하지 않으면, 공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물어야 알고, 실천해야 자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알게 하고 실천하게 하는 것은 스승이고, 앎을 돕고 실천을 돕는 것이 도반입니다.
지금 넷도량이 갖추어졌고,
스승은 안 계시지만 교수님의 영상과 글과 책이 스승을 대신하고, 함께 공부하는 도반들이 있습니다.
저는 도반들의 역할이 앎을 돕고 실천을 돕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청정 애기를 바꿔서,
교수님이 계셨을 때는 스승과 도반과 도량이 갖추어져 여법한 넷도량이었습니다.
지금은 혼자 알아서 이곳에 와서 공부해야 합니다.
보이는 바로 보면 도량에 혼자와서 자리펴고 공부하는 상황이랄까요?
교수님께 직접 배우면 맞춤식 배움이라 말할 것이 없으나,
안계시니 누구나 교수님의 영상과 글과 책으로 마구잡이식 공부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알고 실천하여 맞는지 확인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앎과 실천을 돕는 도반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그러나 공부하는 넷도량이 있습니다.
중언부언하여도 결론은 선방처럼 홀로 조용하게 공부할 것이냐? 여럿이 함께 공부할 것이냐?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이미 일차적으로 의견 조율이 되었습니다.
가시적으로는 홀로 자리펴고 앉아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마도로스님, 항상 도반님들과 함께 공부한다 생각하여 주십시오.
최소한 저라도 항상 함께 공부하겠습니다.
공부가 일취월장 하시기를..._((()))_
청정님의 긴 정성스런 댓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회원님 누구도 섭섭한 마음이 들어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에 올린 글이었습니다.
청정님 글을 읽으니 제가 넘겨짚고 혼자만의 기우였다는 생각이듭니다. 교수님께서 "감성이 이성을 앞선다"고 하시더니 제가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교수님께서 이루어 놓은 연구 결과가 가장 많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 체계불학 카페와 저서이고 결국 공부는 혼자하는 것이라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홀로 자리펴고 앉아서 공부한다는 말씀에 빵 터지네요.^^
감사합니다.
좋은 날 되시길 바랍니다.
_((()))_
마도로스님, 역시 제 마음을 알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지금도 자리펴고 앉아 공부합니다.^^
누구말대로 나의 공부가 우선입니다.
내 마음이 좋으면 세상이 좋아보이고,
내 마음이 안좋으면 세상이 안좋아 보입니다.
또 복이 있으면 가만의 생활이 편안할 것이고,
복이 적으면 가만의 생활이나 불편할 것입니다.
그래서 복과 혜를 쌍으로 닦아야 하는 것 같습니다.
나를 생존하게 하는 악을 행하고, 우리를 공존하게 하는 선을 행하리라.
다짐하면서,
오늘도 보시하고(복짓고) 지계하고(공부하고), 내일도 보시하고 지계하고,
오늘도 지난날 불선업을 지음(죄지음)을 참회하고 지계하고(공부하고) 내일도 참회하고 공부하고....
와! 내 삶이 왜 뜻대로 안되고 힘들까? 싶으면 즉시 지난날 지은 불선업을 참회하고 공부하고,
아! 내 삶이 왜 이렇게 편안하고 좋을까? 싶으면 즉시 복짓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형편따라 물결따라 그렇게 참회하고 지계하고, 보시하고 지계하면서 살고자 합니다.
언제까지? 꿈에서라도 그럴 때까지요^^
그래도 이런 얘기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요?
저는 행복합니다.
마도로스님, 늘 행복하시기 바랍니다._((()))_
참회하고 지계하고, 보시하고 지계하고,
꿈에서라도 그럴 때까지~~
넷도반의 행복한 동행의 힘입니다
참 행복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