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오백년!
초롱초롱 박철홍의 역사는 흐른다! 122
아관파천 (俄館播遷) 2
오백년 지속 된 왕조의 왕이 자기 나라 땅에 있는 궁궐에서도 자신의 신변 안전을 믿지 못한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궁궐을 벗어나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한다. 이와같은 세계 역사상 초유의 사태를 맞이한 일본은 경악을 한다.
일본 자신들이 그런 상황을 만들었다는 그런 죄의식은 일본에게 전혀 없었다. 단지 한 나라 왕이 자기가 사는 궁궐을 버린다는 것은 일본적 상식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은 임진왜란 때도 한양만 점령하면 조선 왕이 항복할 줄 알고 단기전 전략을 짰다. 그런데 조선 왕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도망 간 것에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일본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맨붕에 빠진 일본은 한양에서 3일간을 허송세월을 보내며 허둥지둥 하게 된다. 이 틈을 이용해 조선은 전략을 정비한다. 명에 구원을 요청 할 시간도 번다. 선조의 도성버리기 뛰어난 전략(?)으로 임진왜란은 장기전에 돌입했다.
사실 조선 왕 선조가 일본의 이런 전략을 미리 알고 도성 한양을 버리고 도망갔다면 제갈공명 못지 않은 전략가 였겠지만....
더 이야기 해 봤자 더 창피한 일만 되니 더 이상 이 문제는 언급하지 않겠다.
어쩌든 일본은 임진왜란 때 선조나 아관파천의 고종에게 뒷통수를 제대로 맞은 격이 되었다. 그런데 일본에게는 임진왜란 때보다 아관파천 때가 더 속수무책이었다.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했기 때문이다.
당시 러시아는 종이호랑이 이었던 청국과는 전혀 달랐다.
당시 러시아는 무적의 발틱함대를 거느리고 오대양을 누비고 있던 세계 최강국 중 하나였다.
일본은 이런 러시아를 주시하며 조금 더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당시 러시아도 왕조 말기 현상을 보이며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의 기운이 싹트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주도면밀 함을 조선의 아관파천 사태를 대처하는 데서도 볼 수있다.
일본이 조선을 먹고 중국까지도 넘 보고 동아시아를 제패하기 위해서는 러시아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일본은 아관파천으로 다 잡은 조선을 놓치는 아픔 속에서도 눈물을 머금고 러시아를 제압할 수 있는 힘을 기르면서 기회를 엿보기로 한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중국으로부터 받은 당시 청나라예산 2년치에 해당하는 엄청난 보상금으로 새로운 최신형 군함을 사들이며 함대를 증설한다. 러시아 무적의 발틱함대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러시아로서는 조선을 자기 지배하에 둘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고종은 러시아공관 안에서 신변안전은 철저하게 보호 받았다. 그리고 러시아가 원하는 대로 친러 내각을 출범시킨다. 그러는 동안 조선 정부의 인사와 정책은 러시아 공사와 친러 내각에 의하여 좌지우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에게만 모든 것을 뺏길 수 없다는 듯이 각국 열강들도 조선에 들이대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열강들에 의해 조선에 대한 이권 쟁탈전이 가장 심하게 벌어진다.
조선 왕을 확보한 러시아가 가장 큰 이권을 챙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경원·종성 광산 채굴권,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압록강 유역과 울릉도 삼림 채벌권 등의 경제적 이권이 러시아에 탈취 당하였다.
이 밖에도 러시아는 자국출신 알렉시예프를 조선 정부의 탁지부 고문으로 앉히고 조선의 재정까지 마음대로 휘둘렀다.
을미사변 후 일본에 못지 않은 러시아의 횡포가 이어졌다.
러시아는 한 술 더 떠서 러시아 황제 대관식 때 열린 로바노프·민영환비밀회담에서 러시아 측은 조선에 5개조의 원조를 약속하는 조건으로 조선으로부터 17개조의 이권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고종이 러시아 대사관에 있었던 1년동안 서구 열강은 아관파천에 대해서는 별 관심도 없었고 정치적 불간섭주의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경제적 이권만큼은 러시아에게 기회 균등을 요구하였다.
이 기간동안 서구 열강들도 전차·철도부설권, 삼림 채벌권, 금광·광산 채굴권 등 시설 투자와 자원 개발에 관한 각종 이권을 획득하였다. (아래 사진 참조)
그 결과 중 하나로 1896년 3월 미국인 모스가 경인간 철도 부설권을 얻어냈다.
모스는 본국에서 자본주를 찾다가 실패하자 1899년 그 권리를 일본에게 팔아넘겼다. 그 해 9월 일본은 경인철도주식회사를 통하여 제물포~노량진 사이 33.2km 철도를 완성하였다.
이 경인철도가 한국철도의 시초이다.
러시아에 선수를 빼앗겨 다 잡은 고기를 놓친 일본은 이런 식의 열강으로부터 전매하는 방법으로 이권 쟁탈에 참가했다.
어쩠든 일본에 의한 철도부설은 우리 역사 최초로 근대화 여명을 알리는 기적소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 기적소리는 희망의 빛과 절망의 그림자를 동시에 갖고 있었다.
그 후 일본은 계속하여 경부선부설권을 획득하여 경부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한다. 그리고 1903년도에는 경인철도주식회사를 흡수하였다.
그리고 곧 바로 경의선부설권도 획득한다.
그런데 이 철도 건설비용은 고스란히 조선의 국가 부채가 되었다. 이 빚은 일본이 우리를 합병할 때 주요한 근거가 된다.
'한반도'란 영화에서도 미래의 일본은 경의선 철도의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한반도 재침략 의도를 보인다. 경의선 철도부설권은 아직도 서류상으로는 일본의 소유로 되어 있는데 그 당시 일본과 협약을 맺고 찍은 옥새가 고종의 가짜 옥새여서 그 협약은 무효라는 게 한국측이 주장하고 진짜 옥쇄를 찾아서 일본의 야욕을 물리친다는 것이 영화의 주된 줄거리이다. 즉 그 옥새가 가짜가 아니라면 일본은 언제든지 경의선철도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해서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역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이해가 안되어 찜찜했다.
현재 남북협력사업으로 경의선등 철도복구사업이 가장 먼저 활발하게 이루어지려고 하고 있는 상황인 만큼 이 문제를 간략하나마 명확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내 개인적 생각으로는 '서류상 경의선부설권이 일본에게 있다'는 전제 자체가 말이 안되는 사실이다.
일본은 1945년 미국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하면서 과거 모든 식민지나 기티 그에 상응하는 모든 권리를 포기했다. 경의선에 대한 모든 권리도 포기했다고 봐야한다.
그러한 약속 위반을 하면서 서류하나로 경의선부설권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우리 정부는 물론 미정부나 중국 러시아에서 인정할 수도 인정할 리도 없다.
이러한 약속 위반을 인정할 경우 러시아가 1945년 이후 점유한 과거 일본의 북방 영토에 대한 반환요청도 수용해야하며 중국은 과거 식민지와 비슷한 사정때문에 수많은 이권을 열강에게 넘겨준다는 문서 대부분을 인정해야한다.
더불어서 북한이 일본에게 그러한 권리를 인정해줄 리도 없다.
그런데도 한반도라는 영화에서는 마치 그 서류상에 찍어진 옥쇄가 가짜가 아니었다면 일본의 주장을 기정사실화 한 것처럼 보여 기가막혔다.
그리고 영화에 나온 내각 총리와 장관들이 일본 편을 드는 모습과 마지막 장면에서 총리가 대통령에게 쏘아 붙인 말들이 상당히 논리적으로 다가오게도 해놔서 이 영화가 도대체 무엇을 지향하는지 상당히 헷갈리게 했다.
철도부설권 말이 나와 이야기가 조금 샜다. 당시 철도는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누가 부설했든 철도는 조선에도 반드시 필요했다.
그래서 당시에도 철도보상운동이 국채보상운동의 일환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100년 후 1998년 IMF때 금모으기 운동이 이때의 국채보상운동과 비슷했다.
그런데 그때나 이때나 우리 민족의 전통은 변함이 없었다.
고위관료나 부유층들은 당시 국채보상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가난한 민중들과 심지어 기생들까지도 비녀를 뽑아 참여했지만 조선의 기득권층인 부유층들은 나 몰라라 했다. 구한말 국채보상운동이나 IMF 때 금모으기
는 단지 일반 백성들만의 운동이었다.
성실하고 애국적인 백성이 있었고 탐욕스럽고 자기와 가문의 안위만 챙기던 고위층과 부유층이 있는 우리의 모습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
아관파천으로 서구열강들인 영국, 독일, 블란서의 이권 쟁탈전에 참여는 물론, 1882년 제물포에서 조선 전권대신 김홍집과 미국 전권 슈펠트 간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한 미국도 조선에서 이권쟁탈전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사실 아관파천 전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이 미국에 의한 조선이권 침탈의 시작이었다.
어떻게 보면 미국은 불평등조약인 '조미수호통상조약'을 핑계로 조선을 생각해주는 척 하면서 더 지능적으로 조선 이권 침탈에 나섰다.
그 당시는 모든 나라가 그러한 것을 당연히 여기던 제국주의 시대였음으로 미국을 탓하기는 뭐하다.
공자의 진짜 유교사상도 아닌 이상한 오도된 성리학에 빠져 자기들 안위만 챙기던 조선의 사대부 그 중 노론들인 당시 조선지도층의 책임이 아주 크다.
아관파천의 결과 조선의 국가 재정이 더욱 어려워지면서 그나마 간신히라도 이어 오던 조선국운도 크게 기울어졌다.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체류 기간이 1년 가까이 길어지면서 국가의 주권과 이권이 심하겨 훼손되자 국내외적으로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여론이 비등해졌다.
고종은 환궁을 요구하는 비등해진 여론을 달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조칙을 내려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으로 환궁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것은 경운궁이 수리중인 관계로 환궁 시기를 늦출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경운군 부근에 있는 구미 공사관의 보호를 받기 위함이었다.
고종은 끝까지 비겁했다.
참으로 자기나라 백성들을 믿지 못하고 외국 군대의 힘만 믿으려하는 졸렬한 왕이었다.
고종이 을미사변을 겪은 후 언제 당할지 모르는 인간적 두려움에는 동정심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한 나라 왕으로서는 자격없는 일이었다.
독립협회를 비롯한 일반 백성의 여론은 고종의 대외의존 자세를 비난하고 조속한 환궁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그 때마다 고종의 머뭇거림과 친러파들의 방해공작 때문에 실패한다.
어쩌면 구한말 우리의 지도층들은 일반백성들의 상식 선에도 못 따라 가는 지 모르겠다. 이 부분은 구한말 뿐만아니라 조선오백년 우리 역사 글을 쓰면서 가장 일관성있게 진행되고 있다고 느끼는 부분이다.
현재는 그렇지 않는 것일까?
지금 현재도 한 때 우리의 최고 지도층이란 작자들은 박근혜, 최순실 사태로 줄줄이 쇠고랑을 차고 있고 평범한 우리 일반 국민들은 세계적으로 유래없는 평화적인 촛불시위로 세계인의 찬사를 받고 있다
아관파천 당시에도 전국의 유생들이 상소 운동을 개시하는 등 여론이 더욱 거세어지자 고종은 환궁을 결심한다.
아관파천 1년 만인 1897년 2월 20일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을 단행하였다.
환궁 후에 고종은 큰 결심을 한다.
고종은 독립협회의 진언을 받아들여 그해 10월 12일 황제즉위식을 원구단에서 갖고 '국호를 대한, 연호를 광무(光武)'라 고치고 대한제국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지금의 대한민국의 대한이란 말이 이때 나왔다.
고종은 역사 상 유래가 없는 가장 수치스러운 일을 하고 나서 면목이 없었는 지 국가적으로 아무런 힘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조선 오백년 역사상 최초로 대내외에 공식적으로 황제국을 칭했다.
고종은 황제가 되었고 세자는 태자가 되었으며 민비는 명성황후로 후에 승격 된다.
우리가 민비를 명성황후로 부르는데 거부감 있으신 분들도 많은데 그 이유가 대한제국의 선포때문이다.
또 명성황후를 민비로 부르면 일제식민사관으로 몰아 붙이기도 한다.
아관파천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조선침략이 일시적으로 지연되기는 했다. 하지만 조선의 자주성과 국력은 크게 훼손되었다. 그리고 열강의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략이 심화되었다.
이와 같은 난국을 당하여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민중들의 자주 의식이 각성 되고는 있었다. 그러나 왕실과 보수 집권 세력의 반동으로 인하여 자주권 수호는 또 다시 좌절되고 만다.
여기서 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독립협회회장에 이완용이 이름을 올려 놓았다는 것이다.
정말 이완용의 공작꼬리보다 더 화려한 변신의 끝은 어디일까?
앞으로 이완용 편에 자세히 나오니 기대해도 좋다.^^
이어서 '대한제국의 시대'가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