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곡학연구원 카페 명칭 회복
2019년 6월 11일
하곡학연구원의 카페 명칭을 ‘하곡서원’에서 ‘하곡학연구원’으로 회복시킵니다. 중요한 까닭은 한국 심학의 건립과 전수 맥락, 하곡 정제두 선생의 학술종지, 하곡 후학의 애국계몽과 독립운동 및 대한민국 건국 이바지 등을 널리 밝히려는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카페 명칭 변경의 학술적 취지는 아래와 같습니다.
첫째, 한국 심학의 정체성과 학맥입니다. 한국 심학은 서경덕과 남언경 두 선생이 마음의 본체와 수양공부를 건립하였고, 성호와 성남 형제분이 계승하여 조익, 최명길, 장유 세 선생에게 전수하였습니다. 서경덕 선생은 젋었을 때 6년간 靜坐공부를 하여 학술을 自得하였고, 중국 북송시기에 성리학을 일으킨 북송 오자를 비판하고 뛰어넘는 조선 심학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중국 성리학에서 심학 부분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조선 심학을 하곡 정제두 선생이 계승하여 발전시켰습니다. 하곡 후학 가운데 이광사 선생이 反身體仁하여 31살에 仁體를 깨달았고 공개하였는데, 결국 이것은 마음의 仁 본체를 깨달을 수 있다는 조선 심학과 하곡학의 효과가 검증되었습니다. 윤순 선생의 實心實學과 민옥 선생의 實事實言은 수양공부의 방편이며 조선 후기 경세학의 實學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나중에 정제두 선생의 후손과 전주 이씨 덕천군파의 후손들이 중심이 되었던 하곡 후학은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대한민국 건국에 이바지하였습니다.
둘째, 한국 심학의 학술주권입니다. 한국 심학은 임진왜란 이전에 서경덕과 남언경 두 선생이 독자적이며 자생적인 학술체계를 이루었습니다. 임진왜란시기에 명나라 지원군으로 압록강에 온 원황(袁黃)은 조선 영의정을 만나, 명나라가 발전한 것이 주자학을 버리고 양명학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양명학을 수용하라고 조선 조정에 건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영의정을 비롯한 조정과 학계는 조선의 학술주권을 내세워 거절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의 관원들과 학자들은 명나라 조정과 학계의 상황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명나라 조정이 양명학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도 잘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조선 심학자 남언경과 이요 등은 심학의 학술적 입장에서 명나라 양명학을 긍정하였고 하곡 정제두 선생은 양명학을 참고하고 조선 주자학자들의 비난을 비판하고 조선 심학을 방어하였습니다. 조선 심학과 하곡학은 묘목을 이식시키듯이 양명학을 수입한 외래학술이 아닙니다. 더구나 왕양명의 『전습록』이 전래되어 읽었다고 양명학자가 되는 것은 아니며, 본체론과 수양공부에 관하여 깊이 이해하고 수양공부의 체험이 있어야합니다.
셋째, ‘하곡학연구원’ 명칭은 2010년 9월 13일 강화읍에 설립할 때 결정한 것입니다. 일반 강연을 위하여 카페의 임시 명칭을 하곡서원이라고 사용하였으나, 옛날의 서원도 아니고 설립취지에 맞지 않아 본명을 회복시킵니다.
넷째, 최근 시흥시에서 하곡학을 현창하는 사업과 학술대회를 진행하는 것은 아주 훌륭하고 고무적인 학술사업입니다. 그러나 일부 무지한 사람들이 조선 심학과 하곡학을 모르고 양명학도 깊이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처음부터 개인적인 욕심에서 한국 심학과 하곡학을 오해하고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점들을 해소시켜서 시흥시의 하곡학 학술사업이 앞으로 올바르게 진행되고 시흥시민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장유 선생과 정제두 선생 두 분을 내세워 시흥시가 한국 양명학의 발상지라고 비석을 세워놓고 바윗돌에 제사를 지내면서 광고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조선 심학의 건립자가 서경덕과 남언경 두 분이라는 것을 모르고, 조선시기에 학술주권이 있었는지조차 모르며, 정제두 선생이 서울 반석동에서 살면서 조선 심학을 배우고 계승하여 30대에는 심학을 확신하였고 조선의 심학 입장에서 양명학을 긍정하였다는 서울 거주시기의 학술과, 60살에 강화도로 이주한 뒤부터 후학을 양성하여 학파를 이루었기 때문에 후학들이 '하곡선생'이라고 불렀다는 사실도 무시하였습니다. 더구나 하곡 정제두 선생의 문인 이광사 선생이 하곡 정제두 선생의 학술을 인정하였지만 왕양명의 학술을 부정하였다는 사실도 모릅니다. 이것은 하곡 후학들이 하곡학과 양명학을 구분하여 다르게 인식하였다는 것도 모르는 것이며 조선 심학의 정체성을 무시한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이 퇴계학과 율곡학을 망국의 학술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퇴율학이라는 주자학 때문에 조선이 멸망하였다고 보고 퇴율학을 폄하하며, 양명학이 주자학을 대체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이것은 조선 후기사회에 필요한 발전모델과 발전이론을 아직도 중국에서 수입한 양명학에서 찾겠다고 보는 주장인데, 조선시기 주자학자들을 비롯하여 조선 심학자들은 이렇게까지 중국의 양명학에 사대하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것은 일본의 식민사관을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일본 학자들이 마르크스의 아시아 정체론과 막스 베버의 자본주의 정신을 참고하여 제기하였던 양명학의 근대적 사유도 사실상 근거가 부족한 주장이었습니다.
또한 최근 한국의 일부 학자들이 대만을 중심으로 현대 양명학을 연구한 학술성과를 인용하여 양명학에는 서양의 현대사회와 유사한 점이 있다고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왕양명과 양명 후학들은 민주정치와 과학을 연구하거나 연구할 것을 요청한 적이 없습니다. 중국 54운동시기의 학자들과 모종삼 등은 양명학에는 민주정치와 과학이 없다고 단언하고 반성하였습니다.
현대중국의 지식인들은 적어도 1919년 31운동부터는 오히려 한국의 독립운동과 인권운동을 찬양하였고, 1978년 12월 개혁개방시기에 정치인들은 한국의 경제발전을 참고하였고, 1989년 64천안문 사태에서 보듯이 진보지식인들은 주변국의 정치민주화를 주목하였습니다. 한국의 경제발전과 민주정치는 현대중국에 영향을 주는 발전모델입니다.
이와 같이 시흥시의 일부 사람들은 일부 학자들의 오해와 왜곡에 따라 한국 양명학의 발상지가 시흥이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결국에는 퇴계학과 율곡학을 폄하하고 조선 심학과 하곡학의 정체성을 버린 것입니다. 발상지라고 말한다면, 서경덕 선생을 비롯하여 남언경 선생과 최명길 선생 같은 훌륭한 학자들이 살았거나 학술을 연구하였던 지역은 어떻게 부를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현재 한국의 경제발전과 민주정치는 서양을 배우고 스스로 노력하여 이룬 것입니다. 조선 후기부터 한국 학계와 정치계가 퇴율학과 조선 심학을 버리고 중국의 양명학을 수용하고 양명학에 근거하여 한국을 건국하고 발전시킨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이들은 조선의 심학과 하곡학의 학술 정체성을 모르고 중국의 양명학으로 퇴계학과 율곡학을 대체시키고, 하곡 정제두 선생의 양명학에서 조선후기 실학이 나왔다고 보는데, 이러한 학술변천에 따라 한국이 발전한 것처럼 인식하는 것은 한국현대사회 발전론을 크게 오해한 잘못입니다.많은 시흥시민들은 이런 왜곡과 잘못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실까요?
시흥시민들과 시흥시는 앞으로 조선 심학과 하곡학의 연구와 현창을 정상화시키기 위하여 ‘시흥 양명학’이 아니고 ‘시흥 하곡학’이라고 이름부터 바로잡아 하곡학을 시흥에 가두지 않고 세계화시켜야하며, 또한 강화군 하일리에 있는 하곡 정제두 선생의 묘소를 찾아오고 하곡제에도 참여하고, 학술사업은 전문연구자들에게 맡기고 행정적 지원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또한 강화군과 시흥시 모두 서로 소통하고 협조할 것을 바랍니다.
위와 같은 몇 가지 까닭이 있기에 명칭을 회복시킵니다.
하곡학연구원 원장 이경룡 올림
2019년 6월 11일
첫댓글 2019년 9윌 13일이 아니고 2010년이 아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