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지(三國志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 成事在天]
-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나 그것이 이루어지느냐는 하늘에 달려 있음.
이 표현을 혹시 “그러니까 노력 하나마나야. 어차피 운명은 정해져 있으니까!”라고 이해하시는 분은 안 계시죠? 절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한 후에는 그 결과에 연연해하지 말라는 말이거든요. 그래서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말도 있잖아요.
이 표현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제갈량과 관련된 말입니다.
제갈량(諸葛亮)은 사마의(司馬懿)를 제거하기 위해 계곡으로 유인합니다. 물론 그 계곡에는 엄청난 양의 폭탄을 설치해 놓아 사마의의 군대가 포위되는 순간 폭발시킬 예정이었죠. 드디어 제갈량의 계략이 성공하여 사마의 일행은 포위되었고, 그들은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됩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져 촉군의 포탄 세례도 멈추었고, 설치한 폭탄도 터지지 않습니다. 이 모습을 본 제갈량이 하늘을 바라보며 탄식하죠.
“일은 사람이 꾸미나 그 성공 여부는 하늘에 달려 있으니 어찌 하겠는가?[謀事在人 成事在天]”
제갈량은 유비의 유훈(遺訓)을 지키지 못하고 맙니다.
---------------------------------------------------
제갈량(諸葛亮, 181년 ~ 234년 10월 8일)
(1) 제갈량(諸葛亮, 181년 ~ 234년 10월 8일)은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의 재상, 정치인이다. 자는 공명(孔明)이며 서주 낭야국 양도현(陽都縣) 사람이다. 별호는 와룡(臥龍) 또는 복룡(伏龍). 후한 말 군웅인 유비를 도와 촉한을 건국하는 제업을 이루었다. 형주 남부 4군을 발판으로 유비의 익천을 도왔다. 221년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승상에 취임하였고, 유비 사후 유선을 보좌하여 촉한의 정치를 주장하였다. 227년부터 지속적인 북벌(北伐)을 일으켜 8년 동안 5번에 걸쳐 위나라의 옹·양주 지역을 공략하였다. 234년 5차 북벌 중 오장원(五丈原) 진중에서 54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중국 역사상 지략과 충의의 전략가로 많은 이들의 추앙을 받았다. 그가 위나라 토벌을 시작하면서 유선에게 올린 출사표는 현재까지 전해 내려온다.
동진 시기 제갈량을 무흥왕(武興王)으로 추존하였다.
(2) 생애
제갈량의 생애는 크게 형주 시절, 입촉과 유비가 죽기 전, 그리고 유선대에 이르러 남정과 북벌을 할 시기로 나눌 수 있다.
(3) 출생 및 융중 시절
친형은 제갈근(諸葛謹)이고,누나가 2명,친동생은 제갈균(諸葛均)이다. 어떤 기록에는 제갈량의 친모는 제갈균이 태어나기 전인 제갈량이 2~3살쯤에 세상을 떠났고 제갈균은 제갈량의 새어머니가 제갈균을 낳았다고 한다. 이유는 친형제라고는 하나 제갈량과 제갈균은 7살이라는 나이차이가 난다.그만큼이나 차이가 나면 이복형제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15세가 되기 전에 부친과 모친이 돌아가셔서 한동안 숙부 제갈현(諸葛玄)이 예장에서 제갈량을 돌봤다. 제갈현이 죽자 형주로 이주하였다. 그는 양양(襄陽) 인근의 융중이란 마을에서 학문(學文)과 농사로 소일했는데, 이 시기에 지었다는 양보음(장송곡의 일종)은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당시 형주는 전란을 피해 온 명망 높은 문인들이 많았는데, 제갈량은 이들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또 그는 양양 지역의 유명한 문인이였다. 그 결과 20대 중반의 나이에 재야의 현인(賢人)으로 상당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4) 유비의 참모로 출사함
당시 유비는 여남에서 조조에게 패한 후 유표(劉表)에게 의탁하고 있었는데, 제갈량의 명성을 듣고 융중으로 직접 찾아와 제갈량을 자신의 모사로 두었다. 이 때 만들어진 고사가 유명한 삼고초려(三顧草廬: 초가집을 세 번 찾아가다.)이다. 사실 삼고초려는 제갈량이 스스로 유비에게 출사했다는 구주춘추나 위략의 기록과는 다르다. 반면 출사표와 정사 삼국지의 기록에서는 유비가 세 번만에 제갈량을 만났다는 정황이 보이기 때문에, 현재에는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선제께서 신을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셔서 세 번이나 몸을 낮추어 초려를 찾아주시고, 신에게 친히 형세의 일을 물으시니 신은 감격하여 선제께 이 한 몸 바치리라고 결심하였습니다 - 출사표 중
이후 화북 일대를 석권한 조조가 형주를 공격해오자, 남쪽으로 퇴각하는 유비를 수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비는 조조군의 추격을 받아 당양에서 패주하는 등 위기에 몰리지만, 유표의 장남 유기의 구원으로 강하 지역에 둔병하여 한동안 소강 상태를 이루었다. 이후 조조가 동진하자, 손권에게 사신으로 가서 반 조조 동맹을 성사시켰다. 결국 208년 11월 손·유 연합군이 적벽에서 조조군을 격파하기에 이른다. 연의에서는 제갈량이 조조군의 화살을 소진시키거나, 제사를 지내 동남풍을 부는 등의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가공이다. 정사에서는 제갈량이 적벽대전 당시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 정사 삼국지 《선주전》과 《산양공재기》에는 유비가 패주하는 조조군을 남군까지 추격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참모로 종군하거나 병참 등을 담당한 듯 하다. 이후 유비가 형남 4군(장사, 계양, 무릉, 영릉)을 정벌할 때 군사중랑장으로 임명되어 행정(行政)과 병참(兵站)을 담당하였다. 즉, 내정에서의 수완은 유비에게 인정받은 듯 보인다.
(5) 무후사(武侯祠)
입촉 및 촉한의 건국
형주 남부를 장악한 유비는 이후 서촉(西蜀)을 차지할 계획을 세운다. 211년 한녕의 장로가 유장을 공격하자, 유비는 이를 구원한다는 명목으로 서천으로 출병하였다. 결국 212년 유비와 유장과 전쟁이 발발하자 형주 병력을 이끌고 서촉으로 진격한다. 연의에서는 방통(龐統)이 죽자 군대를 이끌고 참전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실제로는 유비와 방통이 부수관을 공격하자 바로 서촉으로 진군하였다.
214년 유장(劉璋)이 항복한 후 '군사장군(軍師將軍)'에 임명이 되는데, 이후 유비가 황제를 칭할 때까지 이 직위에 머물러 있었다. 군사장군이란 직위가 이름을 붙여 만든 잡호직(雜號職)에 속하므로 이 시기에는 유비 정권 내에서 제갈량의 위상이 높지 않았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정사 삼국지 가후전에서 조조가 제갈량의 정치가 뛰어나다고 평가한 기록이 있기 때문에, 그 권한이 상당했으리라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이 시기에 새로운 법률인 촉과(蜀科)를 만들고 익주의 국가적 구조조정에 참여하였다.
219년 유비와 조조간의 일생일대의 격전인 한중공방전이 발발한다. 반년 간에 걸친 전쟁은 유비의 승리로 끝나는데, 연의의 기록에서는 갖가지 계책을 펼쳐 조조군을 격파한 핵심 브레인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실제 한중공방전에서 유비를 수행한 참모는 법정(法正), 황권(黃權)이었다. 이 시기 제갈량은 성도에 있었으며, 병참과 보급을 담당했다.
이후 유비가 한중왕이 된 후에도 계속 군사장군 직에 있었고, 221년 유비가 황제에 오르자, 조정의 수장인 승상(丞相)에 취임하였다. 222년 선주(先主: 유비를 말함)는 손권의 공격으로 패사한 관우의 복수를 위해 동오를 공격하는데, 이 때도 성도에 머물며 내정과 병참을 관장하였다. 223년 이릉대전에서 패한 선주가 백제성에서 병사하자, 상서령(尙書令) 이엄(李嚴)과 함께 탁고를 받아 후주(後主: 유비의 장남 유선을 말함)를 보좌할 고명대신이 되었다.
(6) 남정
선주가 죽고 후주가 즉위하자, 승상(丞相), 녹상서사(錄尙書史), 익주목(益州牧) 및 사례교위(司隸校尉)를 겸하며, 대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12년 동안 촉한의 재상으로서 실권을 행사하였다.
223년 당시 익주 남쪽의 호족이었던 옹개(雍闓), 고정(高定), 주포(朱褒) 등이 손권의 은밀한 지원을 받아 반기를 들어 고정이 초황을 살해하고, 옹개 역시 태수 정앙을 죽이고 후임 태수 장예를 잡아 오로 보냈으며 주포는 파견나온 종사 상기를 살해하여 난을 일으켰다.
제갈량은 일단 내부 사정을 안정시킨 이후 직접 남정에 나섰다. 촉의 남중(월준, 건녕, 장가, 영창)은 유언(劉焉)과 유장 부자가 익주를 장악하던 기간부터 이민족과 토착 호족들이 결탁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한중공방전 기간에도 반란이 일어나 이엄을 출전시켜 진압한 전례가 있었다. 제갈량의 남정은 225년 봄부터 같은 해 겨울까지 계속되었으며, 칠종칠금(七縱七擒: 일곱 번 사로잡고 일곱 번 놓아주다.)의 고사를 남기며 성공적으로 반란이 진압되었다. 칠종칠금의 고사는 화양국지와 한진춘추, 자치통감에 기록되어 있으나 현대의 사람들은 이 사건의 신빙성을 의심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맹획(孟獲)이 반란의 주모자로 등장하지만, 맹획은 촉한과 친화적인 인물이었다. 또한 축융부인, 올돌골 및 목록대왕 등도 연의에서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다. 남정의 성과 중 하나는 구리광산의 개발이었다.
(7) 북벌
제갈량의 북벌 계획들은 익주 북부의 중심지인 한중에서 출발한다. 3세기 당시 한중은 원시림에 둘러싸인 상대적으로 한적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한중은 한강 유역의 비옥한 평야가 북쪽의 진령산맥과 남쪽의 대파산맥으로 둘러싸인 군사적 요충지로서, 남쪽으로는 풍요로운 쓰촨 분지의 평야에 닿았고, 북쪽으로는 위수를 넘어 북서쪽의 서량(오늘날의 감숙성) 하서주랑 건조지대로 통할 수 있었다.
진령산맥은 장안과 한중 사이의 막강한 자연장벽으로 존재하는데, 산맥 자체가 여러 개의 평행한 산줄기가 겹쳐 있는 데다가 온갖 계곡이 가지쳐서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지진으로 인한 구조 파괴로 지형학적으로는 매우 어지럽고 복잡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은 소위 잔도라고 불리는 매우 적은 험준한 길들 뿐이었다. 제갈량의 북벌에서 주요 전투들과 거점 탈환전은 이 잔도들을 주위로 벌어진다.
자오도(子午道): 한중에서 출발해 장안에 도착한다. 북쪽 입구를 자곡, 남쪽 입구를 오곡이라 하여 통틀어 자오곡이라고 한다. 가장 동쪽에 있는 길이며, 자곡이 장안성 코앞에 있다. 그러나 길이가 660리로 긴데다 좁고 험준하기까지 하여 잘 사용되지는 않았다. 당낙도(儻駱道): 한중에서 출발해 자오도를 따라가다가 낙성에서 북쪽으로 갈라져 장성현으로 나온다. 길이는 420리. 낙곡도라고도 한다. 길이와 위치가 모두 애매해서 제갈량의 북벌 때는 사용되지 않았고, 나중에 위가 촉을 공격할 때 한번 사용된다(낙곡 대전). 야곡도(斜谷道): 한중에서 출발해 오장원에 도착한다. 오장원에서 위수를 건너면 미현이다. 길이는 470리. 초한상쟁 때 장량이 불태운 잔도인 포야도(褒斜道)와 같은 길이다. 기곡도(箕谷道): 한중에서 출발, 야곡도와 같은 방향으로 가다 중간에 동쪽으로 갈라진다. 기곡도 출구에서 위수를 건너면 진창이다. 기원전 3세기 진나라 때 개발된 오래된 길으로, 진창고도(陳倉故道)라고도 한다. 초한상쟁 때 한신이 장한을 잡았던 "암도진창"의 진창도가 바로 이 길. 길이는 야곡도와 얼추 비슷. 기산로(祁山路): 한중에서 출발해 한수를 따라 서쪽으로 가서 진령산맥의 서쪽 끝인 기산에 도착한다. 기산에서 북진하면 천수군이 지척이고, 천수에서 동쪽으로 향하면 진창이다. 길이 상대적으로 넓고 편하지만 길이도 가장 길다.}}
227년 제갈량은 선주의 유조를 명분으로 위(魏)나라에 대한 북벌군을 일으켰다. 출진하기에 앞서 올린 상주문이 바로 유명한 출사표이다. 이는 350자로 되어 있으며, 선주에 대한 충성과 후주에 대한 당부가 담겨있다. 북벌은 227년부터 234년까지 8년간 다섯 번 이루어졌다. 제갈량은 북벌 기간 동안 전쟁이 없는 상황에도 한중에 상주했는데, 이 기간 촉한은 준전시 체제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8) 1차 북벌
228년 봄 제갈량은 사곡(옹주 서부)과 기곡(장안의 서쪽)으로 동시에 진격하였다. 이 때 사곡의 본진은 제갈량이 지휘하였고, 기곡에 파견된 별동대의 지휘관은 조운이었다. 위의 명제(明帝)는 조진(曹眞)을 도독으로 삼아 방어하게 하였고, 조진은 장안과 가까운 기곡에 전력을 집중시켰다. 제갈량이 사곡에 진출하자 옹주 일대의 호족들이 일제히 호응하였고 남안, 천수, 안정 3군을 점령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제갈량의 후계자로 평가되는 강유(姜維)가 귀순하였다.
이 때 위연(魏淵)은 1만의 병사로 진령산맥을 넘어 장안(長安)을 급습하는 "자오곡 계책"을 진언하였다. 당시 장안은 무능하다고 알려진 관중(關仲)도독 하후무(夏候楙)가 지키고 있었는데, 위연은 열흘 동안 신속하게 행군하여 자오곡을 지나 장안을 기습하면 하후무가 도주할 것이고, 이를 통해 장안을 점령하면 위군은 사례주 쪽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즉, 전선이 동쪽으로 이동하여 촉한이 옹양주를 장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제갈량은 각종 위험부담을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다.[3]
이후 명제는 자신이 직접 관중으로 출병하는 한편, 당시 위나라 제일의 용장으로 꼽히던 장합(張郃)에게 5만의 군사로 제갈량의 본진을 상대하게 하였다. 장합은 사곡과 한중을 잇는 가정으로 진격하여, 촉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자 하였고, 제갈량은 마속(馬謖)에게 방어하게 하였다. 하지만 마속은 협곡을 막아 방어하라는 제갈량의 지시를 무시한 채 산위에 둔병하였고, 장합의 포위전술을 맞아 고전하였다. 왕평(王平)과 고상(高翔)이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대패하였다. 보급로가 끊긴 촉군 본대는 한중으로 퇴각하였고 기곡 전선에서는 조운의 의군 별동대가 조진에게 밀려 한중으로 퇴각하기에 이른다. 이로서 1차 북벌은 실패한다. 이후 제갈량은 마속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 처형했는데, 이 과정에서 읍참마속 또는 휘루참마속이라는 고사가 생겼다.
제갈량은 후주에게 표를 올려 북벌 실패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스스로 우장군(右將軍)으로 지위를 낮추었지만, 재상의 권한은 유지하였다.
(9) 2차 북벌
같은 해 가을 제갈량은 진창으로 진격하였다. 진창은 조진의 부하 장수인 학소(郝昭)가 불과 1천명의 병력으로 수비하고 있었는데, 그는 20일에 걸친 촉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저력을 보였다. 이후 조진이 낙양에서 구원군을 이끌고 출병하고, 식량까지 떨어지자 제갈량은 한중으로 귀환하였다. 이 때 복병전을 통해 조진군의 장수인 왕쌍(王雙)의 추격군을 격파하였다.
(10) 3차 북벌
229년 제갈량은 진식(陳式)에게 무도와 음평을 기습하게 하였다. 무도와 음평은 옹양주(擁凉州)와 촉을 직접 잇는 메인 루트로 이곳을 점령하면 익주(益州)의 방어가 용이해진다는 장점이 있었다. 위나라에서는 옹양주도독 곽회(郭淮)가 진식의 촉군을 맞아 싸웠는데, 제갈량의 본진이 건위로 진격하자, 곽회는 무도와 음평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하지만 겨울이 오자 양측은 소강상태에 진입하고, 제갈량은 한중으로 귀환하여 기회를 엿보게 된다. 무도와 음평을 점령한 공으로 제갈량은 승상직에 복직하였다.
이후 해가 바뀌어 230년이 되자 조진은 군세를 3로로 나누어 반격을 시도하였다. 조진의 본진은 사곡에서 한중을 공격하고, 사마의(司馬懿)와 장합의 2로군은 각각 상용과 무도를 공격하였다. 이에 제갈량은 성고에 본진을 두고 방어하였다. 이후 계속된 여름장마로 도로가 유실되고, 보급이 어려워지자 위군은 퇴각하였다. 그해 가을 제갈량은 위연에게 강중으로 진출하게 하여 곽회의 위군을 상대하게 했다. 위연은 양계(陽溪)에서 곽회군을 대파하였다.
(11) 4차 북벌
231년 제갈량은 다시 기산으로 진격하였다. 이때 위나라는 조진이 병사하고, 사마의가 대촉전쟁을 주관하는 진서대도독으로 기용된다. 4차 북벌부터 제갈량은 목우유마(木牛流馬)를 사용하여 보급의 수송력을 높이고, 둔전(屯田)을 강화한다. 이는 매 북벌에서 문제가 된 군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촉군은 상규에서 가을 보리를 수확하는 한편, 비요, 곽회의 위군을 격파하였다. 이후 노성에서 촉군과 위군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는데, 사마의를 제갈량이 상대하고 장합을 왕평이 막았다. 이 전투는 촉군이 위군을 격파하여 촉군의 승리로 끝난 듯 하다.[4] 노성 전투 이후 사마의는 본영으로 퇴각하여 촉군에 대한 전략을 견벽거수(見辟擧守: 벽을 바라보며 수비만 함)로 수정하고 수비로만 일관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에 병참을 담당한 이엄(李嚴)의 태업이 발생하였고, 촉군은 다시 군량부족으로 퇴각하였다. 사마의는 참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합에게 촉군을 추격하게 하는데, 장합은 목문도(木文道)에서 촉군의 매복계에 걸려 전사하였다.
제갈량은 이후 조정에 복귀하여 표기장군 이엄에 대한 진상조사 후 이엄의 태업이 밝혀지자 연명장을 올려 탄핵, 이엄은 그에 따라 면직되어 재동군으로 이주하게 된다.
(12) 5차 북벌
234년 제갈량은 북벌을 재개하였다. 기존의 북벌이 7 ~ 8만 정도의 병력으로 이루어진데 반해, 5차 북벌은 10여 만의 병력이 투입된 최대 규모였다. 촉군은 오장원에 둔병하여 위군과 대치했는데, 제갈량이 양염을 시켜 무공수를 건너자 사마의가 공격하였으나 제갈량이 무공수를 건너오자 퇴각한다. 이후 제갈량은 두번의 기만기동으로 위군의 허를 찌르나 곽회만이 이를 간파하여 위급한 상황에 이르지 않을수 있었다. 그 사이 촉군은 위빈 일대 오장원 지역에서 식량을 비축하고 해당지역 주민들과 친화력을 높여 가면서 주변을 장악하였다. 이 와중에 위군인 총수인 사마의는 견벽거수 전략을 고수하였으며 제갈량은 위군이 전투에 나서도록 하기 위해 도발했으나[5], 사마의는 수비로만 일관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4개월 간의 대치 끝에 그해 10월 진중에서 병사하였다. 그의 나이 54세였다.
제갈량이 죽자 촉군은 양의(楊義)의 지휘아래 한중으로 퇴각하였고 이 사실을 안 사마의는 추격하여 촉군을 격퇴하려 했으나 촉군이 바로 공격할것처럼 태세를 전환하니 곧바로 군사를 물러 퇴각하고 다시 촉군을 핍박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촉군이 완전히 퇴각한 후에야 사마의는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고 추격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이 과정에서 양의와 사이가 나빴던 위연이 반란을 일으키지만, 왕평과 마대(馬代)의 활약으로 진압되었다.
제갈량의 영구는 성도로 운구되어, 유언대로 한중의 정군산에 매장되었다. 자손들에게 남긴 재산으로는 뽕나무 800그루와 척박한 농토 15경이 있었다고 한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때 제갈량은 자신이 죽을 때를 알고 북두를 향해 기도한 뒤 7일간 등불이 꺼지지 않으면 수명이 12년 연장된다는 의식을 행했지만, 6일째 되는 날 위군의 기습을 알리려고 온 위연이 등을 밟아 불이 꺼지는 것으로 묘사한다.
(13) 평가
제갈량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평가는 정사《삼국지》에 실린 진수의 평이다.
제갈량은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시대에 맞는 정책을 내고, 마음을 열고, 공정한 정치를 행하였다. 이리하여 영토 안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형벌과 정치는 엄격했는데도 원망하는 자가 없었던 것은 그의 마음가짐이 공평하고 상벌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년 군세를 동원하면서 성공을 거둘 수 없었던 것은, 생각하건대 임기응변의 군략은 그의 장기가 아니었기 때문이 아닐까.
진수는 제갈량을 정치가 및 행정가로써 높이 평가하였지만 군사적 능력은 이에 미치지 못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에 대해 진수의 아버지가 제갈량에게 곤형(머리를 깎고 근신토록 하는 형벌)을 당했기 때문에[6] 진수가 개인적인 감정으로 제갈량을 비판한 것이라고 주장이 있다. 하지만 후일 진수가 진(晉) 무제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제갈량을 관중과 소하에 버금간다고 극찬한 것을 감안하면 진서의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또한 이를 근거로 진수의 아버지가 진식(陳式)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이것 역시 설득력이 부족하다. 진서에서 진수의 아버지는 가정 전투에서 마속의 부장으로 종군했다가 패전 후 곤형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을 뿐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았다. 반면 진식은 한중공방전에 종군했고, 유비의 동오 복수전에서도 수군 지휘관이었으며, 제갈량의 3차 북벌에서 무도 공략을 지휘한 고위급 장수였다. 진식과 같은 핵심인사가 마속의 부장으로 종군할 리는 없으며, 패전으로 곤형을 당한 인사가 무도 공략전과 같은 중요한 전투의 지휘관으로 임용되는 것도 개연성이 낮다.
제갈량은 새로운 법률인 촉과(蜀科)를 제정하고 신상필벌을 명확하게 하였다. 이는 제갈량의 정치관이 법가(法家)에 기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덕망이 높은 사람들을 관리로 기용했다는 점에서 유학(儒學)을 경시하지는 않았다. 또한 그가 승상에 재임한 기간 동안 촉한의 경제 규모가 크게 성장했다는 점에서[7] 경제 정책 면에서도 유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내정(內政)과 치국(治國)의 측면에서는 관중(官仲)과 소하(蕭何)에 비견될 정도의 찬사를 받았다.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기본기와 정공법(正攻法)을 중시한 지휘관으로써 삼국지연의에 묘사된 책략가적 면모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즉 제갈량의 군사적 특기는 책략이 아닌 부대운용이었다. 이를 기록한 문헌들은 다음과 같다.
제갈량이 군대를 이끌고 기산(祁山)을 공격했는데, 진영이 잘 정돈되어 있고, 상벌이 엄숙하며 호령이 분명했다. - 삼국지(三國志) 제갈량전(諸葛亮傳)
제갈량은 부대를 교묘하게 통솔하였으며, 군령은 엄명하였다. - 진양추(晉陽秋)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을 화공(火功) 및 반간계(反間計)의 명수로 묘사하고 있는데 반해, 실제 역사의 제갈량은 8년간의 북벌 동안 화공을 사용한 적이 없으며 반간계의 활용 빈도 역시 낮았다.[8] 또한 위연이 제안한 자오곡 계책을 거부한 것으로 볼 때 속공이나 야습과 같은 위험부담이 있는 작전 역시 선호하지 않은 듯 하다. 즉 전반적으로 정적(靜的) 스타일의 작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임기응변의 군략이 장기가 아니었다는 진수의 평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하지만 의외로 동적(動的)인 측면도 있다. 복병 전술을 자주 구사하였고, 이를 이용해 여러 차례 승리하였다.[9]
제갈량이 임기응변의 책략에 능하지 못했다는 점을 근거로 군사적 능력이 크게 떨어진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반론이 있다. 먼저 실제 전쟁의 경우 임기응변의 책략 못지않게 부대운용 능력의 중요성이 크다는 점을 들 수 있다.[10] 또한 1차 북벌 당시 조운의 별동대로 당시 위군의 총수였던 조진의 본진을 유인한 점, 3차 북벌이 기습의 형태로 이루어진 점, 그리고 매복계를 이용한 복병전에 능통했다는 점은 책략가로써의 능력 역시 수준급이었다는 근거로 사용된다. 특히 당시 위나라 제일의 전략가인 사마의가 4차 북벌 시 노성 전투에서 패한 이후[4] 촉군에 대한 전략을 견벽거수(見辟擧守: 벽을 맞대고 수비만 함)로 수정했다는 점을 보면 제갈량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제갈량이 위연의 자오곡 계책을 채택하지 않은 것에 대해, 군사적 안목이 없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사실 자오곡 계책은 지금의 시각으로도 꽤 혁신적인 작전이었고 성공했을 경우 촉한이 위나라 서부를 석권할 수도 있었겠지만, 상당한 위험부담을 안고 있었다. 먼저 1만의 군사(전투병 5천, 보급병 5천)가 험준한 산악지역을 700여리나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피로 누적에 의한 전투력 저하를 감수해야 했다. 위연은 자오곡을 지나 장안(長安)을 급습하면 수비군의 사령관인 하후무(夏候楙)[11]가 도주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장안이 요새화된 도시임을 감안하면 쉽게 함락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특히 장안의 위군이 농성전을 벌이는 동시에 기곡에 있는 조진의 본진에서 구원군을 파견하면 위연의 별동대는 고립되어 패퇴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는 기본을 중시하고 모험을 선호하지 않는 제갈량으로써는 받아들일 수 없는 작전이었다.
결국 제갈량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논란은 진수가 말한 "임기응변의 장략이 장기가 아니었다"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볼 수 있다. 그의 군사적 능력을 비판하는 이들은 이를 제갈량의 책략 구사 능력이 매우 떨어졌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반면 제갈량을 옹호하는 이들은 책략가로써의 역량이 정치가로써의 역량과 비교했을 때는 상대적으로 떨어지지만 그마저도 비범한 수준이었으며, 그의 군사적 능력은 부대운용의 측면에 중점을 두고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단 당대 제갈량을 가까이서 본 사람들은 제갈량의 군사적 능력을 높이 평가한 듯 하다. 이는 다음의 기록들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제갈량이 위수(渭水) 유역으로 진격하자. 관중(關中) 일대가 발칵 뒤집혔다. - 삼국지(三國志), 세설신어(世說新語)
제갈량이 병으로 죽자 제장들은 둔영을 불태우고 퇴각했다. 선제(宣帝: 사마의를 말함)께서 출병해 이를 추격했다. 제갈량의 장사 양의가 북을 치며 군사들을 되돌리니 다시 맞서 싸우려는 듯 했다. 선제는 "궁지에 몰린 적은 몰아붙이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돌아왔다. 과연 양의는 결진한 채 떠났다. 다음 날 선제는 제갈량이 진을 쳤던 자리에 가서 가서 남은 흔적을 살펴보고 도서와 양곡을 많이 노획했다. 그제서야 제갈량이 죽었음을 알아채고 말했다. "그는 과연 천하의 기재(奇才)로구나." - 진서(晉書) 선제기(宣帝記)
군이 퇴각하자 선왕(宣王-사마의)이 그의 영루(營壘)와 처소(處所)를 둘러보고 말했다, "천하의 기재(奇才)로다!" 양의(楊儀) 등이 군을 정돈하고 출발하자 백성들이 선왕(宣王)에게 급히 고했고 선왕이 이를 추격했다. 강유는 양의에게 명하여 군기를 반대로 하고 북을 울리도록 하여 선왕에게로 향하는 것처럼 하자, 선왕은 이내 물러나 감히 핍박하지 못했다. 이에 양의는 진형을 짠 채 물러나고 계곡으로 들어간 뒤 발상(發喪)했다. 선왕이 퇴각하니 백성들은 속어(諺)를 지어 "죽은 제갈(諸葛)이 살아있는 중달(仲達)을 달아나게 했다." 라고 했다. 어떤 이가 이를 선왕에게 고하자 선왕이 말했다, "나는 산 자를 헤아릴 수는 있지만 죽은 자를 헤아려 대적할 수는 없다" - 삼국지(三國志) 제갈량전(諸葛亮傳)
제갈량이 죽고 비의는 강유의 북벌을 반대하며 말했다. "승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우리가 할 수 있겠소?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기 전까지 기다림만 못하오." - 삼국지(三國志) 비의전(費禕傳)
제갈량의 북벌은 위나라를 멸하여 한실을 회복하는 것이 명분이었겠지만, 실제 현실적인 목표는 옹·양 2개주를 점령하여 국력의 신장을 꾀하고 중원 진출을 수월하게 한다는 평가가 타당하다. 《삼국지》《위서》《진태전》에 그 기록이 나온다. 또 제갈량은 높은 권력을 얻었지만 왕이 되려고 하진 않았는데 제갈량집에는 이엄이 구석을 권하자 답신을 통해 "천하가 평정되면 모두 더불어 높아지고 십명도 받을 수 있는데 하물며 아홉이랴?"라는 발언을 한 기록이 남아있다. 여기서 십명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 이엄을 달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제갈충무기에 이르길: 환온(桓溫)이 촉(蜀)을 정벌하였는데 제갈무후가 (생존하였을) 때 소사(小史)를 지낸 사람이 아직도 (살아) 있어 나이가 1백여 세였다. 환온이 묻기를
“제갈승상은 지금의 누구와 더불어 비교 할 만한가?”
하니 자신과 비교할 만하다 여겨 마음으로 자못 자긍(自矜)하였다. 대답하여 말하기를
“제갈공께서 계실 때에는 또한 남다름을 깨닫지 못하였사온데, 공께서 돌아가신 후부터는 그분과 비교할 만한 (사람을) 본적이 없습니다.” 하였다
----------------------------------------------------------
1. 영한대역 칼라만화 삼국지(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 나관중 / 20권 / 할인가 108,000원
2. 도서 구입 안내 : 각권 정가 15,000원 / 택배비 무료
(각권 정가 15,000원 / 10% 할인 정가 13,500원)
(1) 출판사명 : (주)파우스트 칼리지
(2) 저자명 :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21st C.E.T.A.)
(3) 도서 구입 전화 : 1599-9039(파우스트 칼리지)
입금 계좌 : 국민은행 024801-04-350812(예금주 (주)파우스트 칼리지)
(4) 이메일 : faustcollege@naver.com
(5) Blog : http://blog.naver.com/ceta211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6) Cafe : http://cafe.daum.net/21ceta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http://cafe.naver.com/ceta21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7) Web-site : www.faustcollege.com (주)파우스트 칼리지
(8) 판매처 : 교보문고, YES 24, 알라딘
[재미로 읽는 영한대역 세계명작 만화]
징기즈칸[Genghis Khan, 成吉思汗]
출생 – 사망 : 1162 ~ 1227
재위 기간 : 1206 ~ 1227
지역 : 아시아 대륙
왕조 : 몽골 제국
거대한 몽골 제국은 동방으로부터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유럽 세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서양사에 공포의 상흔을 남긴 징기즈칸, 그리고 몽골은 어떠한 존재였을까?
(1) 배경 - 동방 왕의 전설
리처드 왕의 십자군도 만족스러운 전과(戰果)를 올리지 못하고 유럽 세계가 이슬람과의 오랜 싸움에 염증이 났을 무렵, "적국 이슬람의 동쪽 저편에 기독교도들의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 왕은 프레스터 존(Prester John), 즉 '사제 요한'이라고 한다"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동방에서 이슬람과 싸우면서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노리고 있다는 이 왕의 이름은 서방의 '십자군' 사이에 하나의 구세주의 전설로서 사실인 양 퍼져 나갔다. 전설의 근원이 된 것은 당시 위구르와 몽골 고원의 일부에서 널리 퍼져 있던 네스토리우스파(派) 기독교(景敎)의 일부인데 그 실체는 전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은 이 허상을 바라고 있었다. 페쇄된 시대에 성스러운 왕이 동방에서 나타나 이슬람군을 격파해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결국 희망대로 동방에서 전설의 왕이 왔다. 하지만 그 왕의 이름은 징기즈칸이었다.
(2) 태생 - 몽골의 고아
징기즈칸이 이끄는 몽골이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13세기 초이다. 당시 몽골 고원에서는 위구르 유목 제국이 해체된 이후에 3세기 반에 걸쳐 분열과 할거(割去)가 이어졌다. 요(遼)를 비롯한 주위 국가들은 모두 몽골의 유목 부족이 하나로 뭉치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그 이유는 과거의 흉노(匈奴), 돌궐(突厥)같이 하나가 된 부족 연합은 틀림없이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유력한 부족이 나타나면, 그 대항마(對抗馬)를 지원하여 서로 싸우게 했고 그래도 안 될 때는 대군을 북벌(北伐)하게 하여 직접 격파했다. 경연(硬軟) 양면에서 간섭한 결과 유목 부족들이 통일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요(遼)가 금(金)에 쓰러지고 멀리 중앙 아시아에서 서요(西遼)가 된 이 당시에는 몽골 고원에 대한 압박도 다소 느슨해져 있었다. 사실, 이 시대에 이르면서 몽골 부(部)는 통일되었고, 칸도 3대째에 이르렀다. 그러나 유목 부족 사이에서 여전히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고, 몽골 고원 전체를 하나의 군단(軍團)으로 통일할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징기즈칸, 그의 어릴 때 이름은 테무진이었는데 초년 시절은 그리 평탄치 않았다. 아버지 에스게이는 쿠트라 칸의 뒤를 이어 몽골 부의 제4대 족장에 오를 것으로 촉망받고 있었으나 테무진이 어렸을 때 숙적(宿敵) 타타르 부(部)에 의해 독살당했다. 그러자 에스게이를 따르던 타이치우트 씨족은 손바닥 뒤집듯이 테무진을 배신했고, 테무진의 복수를 염려해 어린 그를 죽이려고 계획했다. 난세에 이용 가치가 없는 사람을 배척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각별히 사악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테무진이 어리고 힘이 없을 때 제거하려 한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테무진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호에른의 엄한 교육 때문에 테무진은 아주 가혹하고 격렬한 성격으로 자라났다.
이런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테무진을 비롯한 4형제가 강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이때 에스게이의 또 다른 아내의 아들, 이복형제 두 명이 찾아와서 그들이 낚은 고기를 빼앗았다. 테무진은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말했는데, 어머니는 형제끼리 싸워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어머니의 책망을 듣고 테무진은 남동생 카사르와 활을 들고 집을 나가 이복형제를 앞뒤에서 공격하여 활로 쏘아 죽였다. 집으로 돌아온 두 아들을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어머니는 "같은 집안 사람끼리 싸워서 어떻게 하느냐"고 테무진을 꾸짖었다고 한다. 그런 성격의 소유자가 조용히 참으며 살 리가 없었다.
테무진은 보르테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눈에 불이 있고 얼굴에 빛이 있는' 소년 테무진과 소녀 보르테를 약혼하게 한 것은 아버지 에스게이였지만 정식 결혼은 그로부터 9년이 지나서야 성사되었다. 이때 보르테가 갖고 온 결혼 선물 크로텐(검은담비) 가죽옷이 테무진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당시에 크로텐 가죽옷은 매우 고가품이었고 유목민 사이에서 진귀한 옷이었다. 테무진은 이 털가죽을 가지고 케레이트 부(部)의 군주 토오릴 칸에게 찾아갔다. 토오릴 칸은 선친 에스게이의 친한 친구였고 그를 같은 편으로 만들면 100만의 우군을 얻게 되는 셈이었다. 테무진은 몽골 고원 최대의 군주를 우군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이용하려는 과감한 도박에서 결국 이겼던 것이다. 크로텐 모피에 기분이 좋아진 토오릴은 기뻐하며 말했다.
"답례로 너의 해산된 씨족 사람들을 모아 주마."
(3) 인격 - '유린하라'고 초원은 말했다
유목민의 생활은 가혹한 편이다. 으레 초원이라고 하면 초목과 바람, 끝없이 높은 하늘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기후는 1년 중 짧은 여름에 불과하며 이 시기를 제외하고는 혹독한 추위 속에 갇힌다. 1월의 평균 기온은 영하 26.1도. '눈에 방목된 소의 머리가 얼어서 깨지거나' '쇠꼬리가 얼어붙어서 뚝 잘려 땅에 떨어지기도' 하는 가혹한 환경 속에서 유목민들이 철저한 약육강식의 논리로 살아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정확한 판단력과 단호한 행동력이 없으면 유목 생활을 해나갈 수 없으며 그것이 몽골 제국 전체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징기즈칸은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는 "남자가 쾌락과 기쁨으로 삼는 것은 모반인(謀叛人)을 유린하고 적을 정복하여 재산을 박탈하고 그 시종들의 눈, 코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며, 그들의 살진 말을 타고 그들의 아내를 나의 침상으로 삼아 그 장미 같은 뺨을 애무하고 진홍빛 입술에 입맞춤하며 끌어당기는데 있다"고 말했다.
징기즈칸의 이 잔학성은 젊을 때 겪은 여러 굴욕적인 사건이 원인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죽음을 당하고 가난의 밑바닥에서 허덕이며 아내를 빼앗기고 아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의 아들을 낳은('징기즈칸의 큰아들' 박스 글 참조) 데 대한 분노는 마음 속 깊이 앙금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징기즈칸이 단순히 어두운 분노에 자극받아 행동할 사람은 아니었지만, 어떤 분노에도 좌우되지 않는 냉철함, 그것이 징기즈칸이 무서운 진짜 이유였다. 그의 냉철함과 지략(智略)은 원정(遠征)에서 충분히 발휘되었다.
(4) 징기즈칸의 큰 아들
징기즈칸의 아내 보르테는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르키드족에 의해 납치당했다. 그녀는 토오릴 칸이 9개월 동안 교섭을 벌인 끝에 징기즈칸에게 돌아올 수 있었는데, 돌아온 직후에 사내아이를 낳는다.
징기즈칸은 아들의 이름을 주치[朮赤]라 했는데, '객인(客人)' 즉 '이방인'이라는 뜻이다. 이런 이름을 붙인 이유는 보르테가 남편에게 돌아오는 도중에 뜻하지 않게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설과 사실은 징기즈칸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5) 대서정(1) - 호레즘 샤와의 대립
1219년, 징기즈칸은 서양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때까지의 10년 동안 그는 몽골을 강력한 통일 국가로 통합하고 중국 북부의 금(金)을 침략하여 정복했다. 당초에는 유목민 특유의 약탈 행위로 시작된 이 침략은 해를 거듭하면서 토지를 제압하고 항구적으로 지배하는 정복 행위로 그 성격이 바뀌어 갔다. 혹독한 자연 속에 자란 유목민들에게 정착민들의 토지는 처분하기에는 너무 풍요로웠던 것이다. 지배를 하게 되면서 몽골 유목민들의 성격도 바뀌어 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지배하기 위해 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몽골의 서양 정복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당시에 서아시아 최대의 이슬람 국가이던 호레즘 샤 왕조는 1210년에 국력이 쇠퇴해 있던 서요(西遼)를 멸망시키고 북쪽은 카스피해 연안으로부터 남쪽은 페르시아, 동쪽으로는 힌두쿠시로부터 서쪽은 코카서스(카프카스)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징기즈칸은 몽골의 접경 지역에 위치한 호레즘 샤와 당초에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215년에 징기즈칸은 호레즘 샤가 보낸 사절단에게 말했다.
"내가 동방의 패자가 될 것이니 샤는 서방의 패자가 되시오. 우리는 서로 평화와 우호를 유지하여 상인들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해야 하지 않겠소?"
그러나 징기즈칸의 진의는 다른 데에 있었다. 『집사(集史)』에 의하면 1216년에 대금(對金)침략에 일단락을 지은 징기즈칸은 몽골 전군에게 2년간 휴식을 명령했다. 부족 전체적으로 대원정 준비가 진행되어 서방으로 첩보(諜報)·조략(調略)을 목적으로 통상단이 보내졌다. 표면상의 우호 관계는 적의 내정을 다 살필 때까지의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1219년에 호레즘 영(領)인 오트라르(시르다리야 강의 동안, 그 지류 아리스 강 남쪽에 있었으며 옛 명칭은 파라브. 호레즘 왕국 시대에는 그 국경 도시가 되고, 태수가 몽골의 대상을 살해했기 때문에 징기즈칸이 서부 정벌을 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에서 몽골 통상단이 첩자 혐의로 학살을 당했다. 문명국 사이에서 통상단이 파견되는 경우 그것은 보통 스파이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며,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상태에서 받아들일지 아닐지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 방식이었다. 호레즘이 취한 방법은 그다지 문명적이지 못했다. 징기즈칸은 분노했고, 이것은 침략을 개시할 아주 좋은 빌미였다.
(6) 대서정(2) - 중앙 아시아에서 러시아로
용의주도한 첩보 활동을 벌인 결과 호레즘에 대한 조사가 끝났다.
골 왕조, 아바스 왕조를 누르고 이슬람 세계의 최대 패자(覇者)로 알려졌던 서방의 강국은 실은 겉보기보다 실속은 없었다.
호레즘 샤 왕조가 갑자기 대두하게 된 것은 아랄해(海) 북방의 사나운 유목 민족인 터키계 캉글리족(族)의 무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직접 충성을 맹세한 것은 호레즘 국왕 무하마드의 생모, 캉글리족 출신의 테르켄 하튼이었고, 호레즘 왕조에서는 어머니와 아들이 대립하고 있었다. 캉글리족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염려한 무하마드는 병력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이러한 사정은 몽골측에 바로 누설되었다. 몽골의 철저한 내부 교란(攪亂)의 결과, 공격의 손길은 무하마드의 어머니 테르켄 하튼에게까지 뻗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호레즘 군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개별적 도시 방위군으로 몽골 군대 전체와 싸워야 했고, 마침내 모조리 패하고 만다.
1219년, 징기즈칸이 이끄는 원정군은 오토라르 시를 공격하고, 이어서 마와라 안나르 지역을 침공했다. 나중에 제왕 티무르에 의해 번영하는 이 지역은 옛날부터 중앙 아시아에서 가장 비옥한 지대였고 수도 사마르칸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탐내던 곳이었다.
오아시스 여러 도시를 공격, 함락시킨 몽골군은 공성전(攻城戰)에도 뛰어났다. 오토라르를 공략하는 데는 5개월이 걸렸지만 부하라는 며칠 만에, 그리고 사마르칸트는 4일 만에 함락되었다. 금(金)과 서하(西夏)에서 등용한 기술자에게서 습득한 공성전 기술이 주효했음은 물론이고, 몽골군(軍)이 두려워 자진해서 문을 여는 도시들도 많았다. 사전에 조사한 대로 호레즘 샤 왕조의 행동은 전혀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몽골군은 강력하고 잔학한 군대임을 알려 전쟁 전부터 정보전에서 상대방의 사기를 꺾어 놓았다. 사마르칸트에 몽골군이 오기 직전에 국왕 무하마드는 도시에서 도망쳐 버렸다.
서양 세계에 이 사태는 전설의 구현으로 전해졌다. 프레스터 존은 다윗 왕으로 이름을 바꾸고, 페르시아를 석권하고 바그다드 근처까지 육박했다는 정보가 로마 교황청을 통해 유럽에 퍼졌다. 환상의 구세주가 나타났다는 데 힘을 얻은 십자군은 아이유브 왕조의 수도 카이로를 공격했으나 물론 동방으로부터의 원군(援軍)은 오지 않았다. 십자군은 참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서양 세계에 동방에서 온 군단이 루시(러시아)를 향해 올라오고 있다는 새로운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7) 진격 - 러시아 공략전
사마르칸트에서 도망친 호레즘 국왕 무하마드는 서쪽으로 달아났다. 무하마드가 도망친 것은 몽골군을 내지(內地)로 유인, 공격하려는 책략이었다는 설이 있지만 이미 때늦은 일이었다. 국왕의 추태가 호레즘 샤 왕조의 해체를 앞당겼다는 설도 있다.
이 시기에 니샤푸르에서 징기즈칸이 낭독한 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사령관, 대관, 평민들이여. 신이 동에서 서에 이르는 지상의 제국을 짐에게 준 것을 알라. 항복하는 자는 목숨은 살려 줄 것이다. 그러나 저항하는 자는 불행을 당하여 처자(妻子), 평민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풍요로운 마와라 안나르를 제압한 징기즈칸은 세계 제패의 실현을 계획했는지도 모른다. 징기즈칸의 군대는 이란 서부 여러 지역을 공략하는 한편, 장군 제베와 스베테이가 군대를 이끌고 루시로 향했다. 무하마드를 쫓아간다는 것이 명목이었지만 사실은 새로운 땅을 정복하기 위한 침략 행위였다.
무하마드는 추격을 피해 카스피해 남안의 쿠르간까지 달아났다. 그러나 결국 몽골군에게 발견되어 카스피해 앞바다의 아바스쿤 섬으로 다시 탈출했으나 폐병이 악화되어 죽고 말았다. 이것이 1220년 12월의 일이다.
제베와 스베테이의 진군은 계속되었다. 몽골군은 그대로 카스피해 서안에서 북진하면서 도시들을 함락해 나갔다. 카프카스 지방을 지나 흑해 연안으로 들어간 원정군은 곧 칼카 해반(海畔)에서 루시군(軍)과 일전을 벌인다.
몽골군은 당초에 남러시아 초원에 분포하는 터키계 유목민 부족 킵차크족(族)을 정복하려는 계획도 있었는데, 킵차크족은 예전의 징기즈칸의 숙적 메르키드족과 교류하는 부족이기 때문에 제압해야 할 적이었다.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킵차크의 족장이며 루시와 인연이 있던 코치아는 루시측에 협력을 요청했고, 루시의 대공 게오르규는 몽골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게 된다.
루시 제후들로 이루어진 연합군은 드네프르 강 우안(右岸)에 진을 치고 몽골군을 기다렸다. 연합군은 8만 정도였고, 이에 비해 몽골군은 훨씬 열세였다. 첫 전투에서는 연합군의 가리치 공(公)이 몽골군을 압도했다. 기세등등해진 연합군은 후퇴하는 몽골군을 추격했고, 몽골군은 연합군을 방어하면서 칼카 강 동안(東岸)까지 후퇴했다. 그러나 그것은 몽골군의 책략이었다. 몽골에 비해 기동력이 뒤떨어지는 루시군(軍)은 추격전에 지쳐 있었는데, 가루치 공은 혈기만을 믿고 칼카 강을 건너는 작전을 감행했다. 때를 기다리고 있던 몽골군은 일제히 반격에 나섰고 루시군은 꼼짝없이 격파당하고 말았다.
가루치 공의 군단과 그것을 지원한 킵차크 군대는 괴멸되었고 몽골군은 제후들을 추격하여 그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키에프 공, 체르니고프 공은 붙잡혔고 공전승(共戰勝)의 연회석상에서 함께 처형되었다.
칼카 강의 결전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후 원정군은 동쪽으로 전진하여 징기즈칸의 본군대와 합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루시 남쪽에 몽골군의 직접적 영향이 미치지는 않았지만, 이 패배는 루시 제후, 그리고 흑해 건너편의 비잔틴 제국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상흔(傷痕)을 남기고 몽골은 이렇게 떠났다. 1227년 징기즈칸은 서하 정복전이 한창일 때 죽었는데, 그가 만든 제국과 정복에 대한 야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서양 세계는 다시 한번 징기즈칸의 그림자에 떨게 된다.
(8) 재방문 - 유럽 침입
1236년, 루시인들이 몽골을 거의 잊어갈 무렵에 몽골은 다시 동쪽에서 왔다. 징기즈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 칸의 명령하에, 죽은 징기즈칸의 장남 주치의 아들인 바투 칸이 군을 이끌었다. 이번 원정의 목적 또한 킵차크족 지배, 호레즘 잔당의 괴멸, 그리고 서양 세계의 정복이었다.
바투 원정군은 우선 가까이 있는 킵차크족을 공격했다. 유목민 집단에 불과하며 몽골처럼 군단으로서 통일되지 않은 킵차크족은 몽골군의 적수가 못 되었다. 어떤 자들은 서쪽으로 도망치고 어떤 이들은 투항하여 대부분이 몽골의 지배하에서 몽골군의 일원으로 재편성되었다.
새롭게 킵차크군을 얻게 된 바투 원정군은 그 다음으로 루시를 침공했다. 카스피해에서 북상하여 모스크바, 블라디미르 여러 도시를 장악하고 노브고로드를 위협한 후에 방향을 바꾸어 폴란드, 헝가리 방면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겁에 질린 두 나라는 동유럽의 비잔틴 제국과 로마 교황에게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지만 당시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의 전쟁에 패해 그 호소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9) 압도 - 발슈타트 전투
유럽의 권력자들이 방관하고 있는 동안, 몽골군 별동대는 폴란드에 침입하여 폴란드 대공은 국내가 수습되지 않은 채 이를 맞아 싸우게 되었다. 1241년 4월, 양군은 리그니츠 평원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이고 몽골군은 폴란드군을 괴멸했다. 이곳은 훗날 발슈타트라 불렸는데 독일어로 '시체의 도시'라는 뜻이다. 이는 전투 후에 시체가 많이 나왔기 때문인 듯하다. 이 전투의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몽골군의 가차없는 살육은 러시아인들에게 이질적인 모습으로 비쳤을 것은 확실하다.
그 무렵 바투가 이끄는 본대(本隊)는 헝가리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헝가리 왕국의 군대는 유럽 최강으로 알려져 있었고, 국왕 베라 4세가 이끄는 헝가리군은 전력상 몽골군에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
헝가리의 수도 부다(현 부다페스트)로 진로를 잡은 몽골군과 헝가리 국왕군은 사요 강의 하반(河畔)에서 대치했다. 몽골군의 노궁포(弩弓砲)가 빗발치듯 쏟아져 헝가리군 내부에서는 참전한 수도원장과 국왕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이 혼란을 틈타 몽골군은 헝가리를 격파했다. 참패한 헝가리군은 몽골군의 추격을 받아 퇴로에는 여정 이틀에 걸쳐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10) 공포의 전설 - 타타르의 멍에
유럽은 위기에 처해 있었고, 몽골군이 어디까지 공격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헝가리에서부터 서쪽으로 향하면 그곳은 독일, 프랑스와 평원이 이어져 있었다. 라인 강 이외에 몽골군의 진격을 저지할 요충지는 없었다. 그대로 대서양에 도달하고 마는 것이다. 바투군은 헝가리 평원의 목초 지대에 주둔하며 전진에 대비하고 있었다. 만약 몽골군이 유럽을 정복했더라면 라인 강가의 구릉지대는 목초지대로 모습을 바꿔, 훗날 유럽의 역사, 아니 세계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유럽을 구한 것은 1241년 12월의 오고타이 칸의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정복 명령은 본래 오고타이 칸이 내렸으므로 그것을 계속할 것인지는 대회의를 열어 결정할 문제였다. 바투 칸은 빈을 눈앞에 두고 군사를 돌려 유럽을 떠났다. 그후에 몽골군이 유럽을 공격하는 일은 없었지만, 루시 땅에서는 제후와 각 도시, 그리고 정교회(正敎會)가 몽골의 지배를 완전히 받아들여 이후 수백 년간 루시는 킵차크 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를 러시아인들은 '타타르의 멍에'라 불렀고, 이 말은 지금도 불행을 뜻한다.
몽골인들의 지배는 몽골군의 가혹함과 잔학성에 비하면 훨씬 온후한 편이어서 기독교는 보호되었고 국내의 치안은 양호했다. 하지만 그들은 러시아인으로부터 10분의 1세(稅)를 거두는 한편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했는데, 거역할 경우에는 가차없이 학살했다.
러시아 제후는 이 타타르의 멍에 아래에서 단결을 결의했다. 1380년에 모스크바 대공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주위의 제후에게 킵차크한국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호소하여 크리코보 전투에서 한번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대군을 이끌고 역습한 킵차크한국에 패하여 모스크바는 황폐화되었고 1만 내지 2만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결국, 러시아가 타타르의 멍에에서 탈출하려면 이반 뇌제(雷帝) 시대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11) 몽골 제국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양 제국에게 몽골, 그리고 징기즈칸은 파괴와 약탈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몽골에 관한 저서들은 대부분 그들의 파괴와 약탈, 폭력과 살육만이 묘사되어 있다. 그들이 서양 세계에 던져준 공포를 생각하면 당연하겠지만, 몽골이 서양 세계에 준 또 다른 영향 ― 몽골이 동서의 교통을 활발하게 만들었다 ― 에 대해서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몽골의 지배자들은 '초원의 길'이라 전해지는 동서의 교통로에 역과 말과 숙사(宿舍)를 마련했고 그 때문에 외국 사절과 여행자들은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또한 금과 은으로 된 파이자라는 여권이 발행되어 이것이 있으면 외국인도 여행할 때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상인 마르코 폴로가 멀리 중국을 여행하다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 영향이 크다. 파이자는 현재의 러시아 영(領)에서 여러 장 발견된 바 있다.
몽골인들은 통상을 통해 얻는 이익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결국은 육로뿐 아니라 해상로도 열렸다. 몽골 제국의 지배하에 통일을 회복한 중국 남부 항구에서 3층 갑판의 큰 배가 인도를 향해 항행(航行)했다. 몽골 제국의 보호하에 중국, 페르시아, 인도, 중앙 아시아, 흑해 주변에서 러시아까지를 포함한 거대한 통상 시장이 나타나 세계는 동과 서가 서로 통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쇄술, 항해자의 나침반, 화기(火器), 사회생활의 매우 중요한······이것들은 유럽에는 없는 것들이며 몽골의 영향에 의해 극동(極東)에서 유럽에 이입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몽골 고원의 한촌(寒村)에서 태어난 소년 테무진, 징기즈칸은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상징으로서, 또 한편으로는 세계를 발전으로 이끈 공로자로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e)
(1)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은 영국의 작가 에밀리 브론테가 필명 엘리스 벨(Ellis Bell)로 출간한 유일한 소설이자 유작 소설이다. 아버지 패트릭 브론테 신부가 성공회 사제였던 가정환경상 에밀리는 어린시절을 사제관이 있던 영국 요크셔의 황량한 벌판에서 보내면서 작가로서의 상상력을 길렀으며, 어른이 된 후 요크셔 벌판의 폐가(TopWithens)에서 영감을 얻어 《폭풍의 언덕》을 썼다. 캐서린(Catherine Earnshaw)과 히스클리프(Heathcliff)와의 불멸의 사랑을 우울하면서도 아름답게 묘사한 작품으로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가 뛰어난 게 장점이다. 출간당시에는 비윤리적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20세기에 토머스 몸 등에 의해 재평가되었다. 한국어판은 범우사 등의 문학전문출판사들에 의해서 역간되었다.
(2)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줄거리
1801년 황량한 벌판에 위치한 폭풍의 언덕에 세입자인 락우드씨가 찾아온다. 자신이 세든 집인 드러시크로스 저택의 주인인 히드클리프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두 거칠었고 잘 곳도 변변하지 못하여 감기에 걸려서 돌아온다. 집에 돌아온 락우드는 폭풍의 언덕과 드러시크로스 저택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가정부 넬리 딘에게 그동안 있었던 두 집안의 역사에 대해서 듣는다.
이야기 1
폭풍의 언덕의 주인이었던 언쇼는 리버풀에 갔다가 거지꼴을 한 소년을 데려온다. 가족들은 출신을 알 수 없는 소년에게 경계심을 갖고있었는데, 특히 아들 힌들리는 히스클리프를 미워한다. 죽은 아들의 이름까지 지어줄 정도로 히스클리프를 편애하는 아버지에 대한 불만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죽은 후, 아내 프랜시스를 데리고 집에 돌아온 힌들리는 결국 히드클리프를 머슴처럼 가혹하게 학대한다. 게다가 어린시절부터 같이 자랐던 친구이자 애인인 캐서린까지 드러시크로스 저택의 아들인 에드거에게 사랑을 품자, 이에 상심한 히드클리프는 가출한다.
이야기 2
몇 년후 부자가 되어서 돌아온 히드클리프는 몸이 약했던 아내 프랜시스의 죽음이후 폐인이 된 힌들리를 도박으로 빈털털이로 만들어버린다. 알코올 중독으로 힌들리가 죽자, 그는 힌들리의 아들인 헤어턴에게 자신이 당한대로 앙갚음을 하여, 무식한 머슴으로 키운다. 새끼 뻐꾸기가 다른 새의 알들을 내치는 것처럼, 폭풍의 언덕의 주인이 머슴이 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애인을 뺏어간 에드거의 여동생 이사벨라를 유혹해서 결혼한 뒤, 인권을 짓밟는다. 히드클리프와의 만남이후 결혼전부터 갖고 있던 정신착란이 심해져서 죽은 캐서린만 찾는 무관심과 학대를 견디지 못한 이사벨라는 런던으로 달아나서 아들을 낳는다. 한편 에드거는 죽은 아내가 남긴 외동딸 캐시를 곱게 키운다.
이야기 3
여동생이 병으로 죽자 에드거는 런던에 가서 조카를 몰래 데려오지만 12살의 철없는 꼬마 캐시의 말실수로 발각된다. 히드클리프가 아들을 데려갈 것이 분명하자, 에드거는 마지못해서 조카를 폭풍의 언덕에 데려다 준다. 까다롭고 버릇없는데다가 허약하기까지 한 아들이 마음에 들리 없었지만, 히드클리프는 아들을 캐서린과 결혼시켜서 드러시크로스를 먹어치울 생각을 한다. 결국 히드클리프는 아들을 캐시와 강제로 결혼시켜, 탐욕을 채운다. 딘은 셋방을 구해서 어릴적부터 모셔온 캐시 아가씨를 다시 모시고 싶어하지만 그건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이야기 4
1802년 친구의 초대를 받아서 가던 락우드는 폭풍의 언덕에 다시 온다. 전세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는데, 딘 아주머니는 히드클리프가 죽었다고 했다. 비가 몰아치는 날, 눈도 못 감고 죽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헤어턴과 캐시 사이에서 사랑의 감정이 싹트고 결혼을 앞두면서, 폭풍의 집과 드러시크로스저택의 불행한 역사는 끝나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1. 도서 구입 안내 : 각권 정가 15,000원 / 택배비 무료
(각권 정가 15,000원 / 10% 할인 정가 13,500원)
(1) 출판사명 : (주)파우스트 칼리지
(2) 저자명 :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21st C.E.T.A.)
(3) 도서 구입 전화 : 1599-9039(파우스트 칼리지)
입금 계좌 : 국민은행 024801-04-350812(예금주 (주)파우스트 칼리지)
(4) 이메일 : faustcollege@naver.com
(5) Blog : http://blog.naver.com/ceta211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6) Cafe : http://cafe.daum.net/21ceta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7) Web-site : www.faustcollege.com (주)파우스트 칼리지
입금 계좌 : 국민은행 0244801-04-350812 (주)파우스트 칼리지
(8) 판매처 : 교보문고, YES 24, 알라딘
2. 재미로 읽는 영한대역 세계 명작 칼라 만화
세계 최초 / 국내 최초[영어 만화 세계 문학 + 상세한 작품 해설]
완벽한 논술 구술 대비 / 완벽한 AP 영문학 대비 / 해외 유학 대비 !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들의 학교 내신 및 필독서 시리즈 !
모든 가족이 한글 또는 영어로 함께 읽을 수 있는 가족용 세계 문학 시리즈입니다.
아래의 모든 만화 작품은 소년조선일보, 매일경제, 에너지데일리신문, 아시아일보, 용산신문, The Korea Times, The Korea JoongAng Daily 등에 100% 연재된 도서들입니다.
3. 영한대역 세계 명작 칼라 만화 : 총 20권(각권 정가 15,000원)
(각권 정가 15,000원 / 10% 할인 정가 13,500원)
(1) 돈키호테 Don Quixote / 세르반테스 (Miguel de Cervantes)
(2) 걸리버 여행기 Gulliver's Travels / 조나단 스위프트 (Jonathan Swift)
(3) 우주 전쟁 The War of The Worlds / H.G. 웰즈(H.G. Wells)
(4)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e)
(5) 로빈슨 크루소 Robinson Crusoe / 다니엘디포우(Daniel Defoe)
(6) 파우스트 Faust / 괴테(Goethe)
(7) 로미오와 줄리엣 Romeo and Juliet /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8) 왕자와 거지 The Prince and the Pauper / 마크 트웨인(Mark Twain) - 사무엘 클레멘스(Samuel Clemens)
(9) 보물섬 Treasure Island / 스티븐슨(R.L. Stevenson)
(10) 백경(白鯨) Moby Dick / 허만 멜빌(Herman Melville)
(11) 슬리피 해로우의 전설 The Legend of Sleepy Hollow / 워싱톤 어빙(Washington Irving)
(12) 노트르담의 꼽추 The Hunchback of Notre Dame /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3) 정글 북 The Jungle Book / 루드야드 키플링(Rudyard Kipling)
(14)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Dr. Jekyll and Mr. Hyde / 스티븐슨(R.L. Stevenson)
(15) 크리스마스 선물 A Christmas Carol / 촬스 디킨즈(Charles Dickens)
(16) 80일간의 세계일주 Around The World in Eighty Days / 쥴 베른(Jules Verne)
(17) 해저 2만리 20,000 Leagues Under the Sea / 쥴 베른(Jules Verne)
(18) 위대한 유산 Great Expectations / 촬스 디킨즈(Charles Dickens)
(19) 모히칸족의 최후 The Last of the Mohicans /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James Fenimore Cooper)
(20) 죄와 벌 Crime And Punishment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Fyodor Dostoevskii)
4. 영한대역 칼라 만화 징기즈칸((Genghis Khan) : 5권(각권 정가 15,000원)
(각권 정가 15,000원 / 10% 할인 정가 13,500원)
5. 영한대역 칼라만화 삼국지(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 나관중 / 20권 / 할인가 108,000원
6. 이솝우화 10권(오디오 CD 포함) : 할인 가격 30,000원
7. 10주 완성 영어 회화(1권 - 정가 15,000원)
(각권 정가 15,000원 / 10% 할인 정가 13,500원)
8. 위 도서 관련 내용
(각권 정가 15,000원 / 10% 할인 정가 13,500원)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 ㈜ 파우스트 칼리지 제공
도서구입 전화 : 1599-9039
이메일 : faustcollege@naver.com / ceta211@naver.com
Blog : http://blog.naver.com/ceta211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Cafe : http://cafe.daum.net/21ceta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http://cafe.naver.com/ceta21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Web-site : www.faustcollege.com (주)파우스트 칼리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