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작품 신광사 가는 길이다.
이 그림은 깊은 산속 계곡 건너편에 있는 산사 풍경과 왼편 아래 지팡이를 짚고 절로 돌아가는 노승을 그리고 있다.
노스님 앞에는 누각형 다리가 있다. 석조다리는 보통 무지개다리로 만드는데 송광사 삼청교가 대표적인 모습이다.
신광사의 옛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작품이다.
그림 상단에는 석주 권필의 신광사에 관한 시임이 밝혀져 이곳이 해주 신광사임을 알게 되었다.
秋風赤葉寒溪水(추풍적엽한계수)
落月疎鐘古寺樓(낙월소종고사루)
가을바람에 붉은 단풍잎은 찬 시냇물에 떨어지고, 지는 달빛에 성근 종소리는 옛 산사에서 들린다.
해주 신광사의 창건에 얽힌 신비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황해도 해주에서 얼마 되지 않은 북고산에 신광사가 있다.
신광사는 중국 원나라 순제[順帝]가 창건한 절이다.
순제가 어려서 아목가라는 벼슬에 있을 때, 죄가 있어 황해도 대청도로 귀양을 왔다.
별로 감시가 심하지 않았으므로 황해도 연안 일대를 구경하다가 해주 복고산에 이르게 되었다.
주위의 경치에 취하여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수풀 속으로부터 아름다운 빛이 나는 것을 보았다.
이상히 생각하여 점점 가까이 가본즉 버려진 부처님 한 분이 수풀 속에서 신비한 빛을 발하고 계셨다.
그는 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생각하였다.
지금 길바닥에 버려진 부처님 신세나 자기의 처지가 비슷한 것처럼 느껴져 더욱 설음이 북받쳐 올라 하소연하였다.
“부처님께서 이 추운 계절에 비와 이슬을 막을 길 없이 초야에 묻혀 계시니 애절하기 그지없습니다. 저로서는 다만 이런 마음뿐이지, 귀양살이하는 처지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고 길게 탄식하면서 샘솟듯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리 크지 않았으므로 고이 파내어 맑은 내를 찾아가 말끔히 씻고는 양지바른 어느 바위 밑에다 모시었다.
낙엽 잎에다 정화수를 떠가지고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를 바치고 소원을 빌었다.
“이렇게 꼼짝 못 하는 귀양살이 신세로서는 어찌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이시여, 부디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고국에 돌아가 왕위에 오르게 하여 주신다면, 3개월 이내에 곧 절을 지어 부처님을 모심은 물론 불법을 위하여 이바지할 것을 다짐하옵니다.”
이렇게 발원하고 소원기도를 하며 무릎이 터져 피가 나도록 수 없이 절하였다. 부처님과 약속을 하고 대청도에 이르렀더니 며칠이 못되어 고국인 원나라에서 사신이 배를 타고 고려로 건너왔다.
그 간에 나라에 큰 변동이 생겨 귀양살이가 풀리고 대몽골 칸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황제의 자리에 앉아 산적한 일을 하다 보니 어느덧 삼 개월이 지났다.
하루는 꿈을 꾸었다. 황해도 해주의 북고산 바위 밑에 모셔둔 부처님이 나타났다가 아무 말씀도 않고 돌아서는 것이었다.
원순제는 꿈에서 깨어나 부처님께 맹세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곧바로 태감인 송골아로 하여금 37인의 유명한 목수를 골라 북고산에 가서 절을 짓고 숲속의 부처님을 모시게 하였다.
그렇게 지어진 절이 해주 신광사이다. 신광사는 숲 속에서 신비한 빛을 발하는 부처님을 모신 절이라는 뜻이다.
해주 신광사는 원황실의 원찰이 되었다. 나옹 스님과 무학 스님이 정진한 곳이다.
원순제는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이며 고려의 기황후는 공녀 출신으로 원순제의 황후가 되었다.
해주신광사에는 오층석탑이 있다. 원순제 2년에 조성하여 건립한 것이다.
신광사는 웅장하고 화려하기가 동방에서 으뜸이었지만 병화로 소실되고 석조유물만 옛터를 지키고 있다.
사진 1번 단원 김홍도 작품 신광사 가는길이다.
사진 2번 신광사를 창건한 원순제와 고려공녀출신 기황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