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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28
각자의 땅으로 / 한서노회
우리는 여호수아 13장부터 어제의 본문인 17장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지파들의 땅 분배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는 이미 요단 동편에서 기업을 분배받았습니다. 그리고 유다와 에브라임, 남은 므낫세 반 지파 역시 요단 서편에서 기업을 분배받았습니다. 따라서 아직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한 지파는 베냐민, 시므온, 스불론, 잇사갈, 아셀, 납달리, 단 지파뿐입니다. 여기까지가 어제까지 우리가 상고한 말씀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땅 분배의 과정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여러 모양으로 들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음성에 따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 모든 기도들이 이제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 둘 응답의 열매로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는 땅을 기업으로 나누는 작업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작업이 마치기 전에 여호수아가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감행한 일이 한 가지 있음을 본문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본문 1절과 2절 말씀을 함께 봉독합니다.
"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 회막을 세웠으니 그 땅이 이미 그들의 앞에 돌아와 복종하였음이나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 기업의 분배를 얻지 못한 자가 오히려 일곱 지파라"
여호수아는 계속되는 땅 분배작업을 잠시 중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실로에 모여서 '회막'을 세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여호수아 전체에서 최초로 '회막'이라는 단어를 찾게 됩니다. '회막'이 무엇인지는 아시지요? '회막'은 히브리어로 '오헬 모에드'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직역하면 '만남의 장막'이라는 뜻이 됩니다.
'만남의 장막', 이것이 회막의 기능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주시는 장소', 또한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대면하시는 장소', 이것이 회막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회막은 구약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 이름도 '성막', '증거막', '성소', '여호와의 전', '하나님의 집', '여호와의 장막' 등등으로 다양하게 불립니다. 오늘로 말하면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 회막이 가진 중요한 의미는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앞서 잠시 말씀드렸지만 회막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는 구별된 공간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회막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구심점이요, 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신앙의 근거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모세를 통해 구체적으로 증거되고 있습니다. 민수기 2장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군대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번 찾아볼까요? 먼저 민수기 2장 1절과 2절 말씀입니다(p. 195). 함께 봉독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은 각각 그 기와 그 종족의 기호 곁에 진을 치되 회막을 사면으로 대하여 치라"
보세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처로 삼고 있는 진의 대형을 결정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12지파가 행진할 때에 지파별로 지켜야 할 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3절 이하의 말씀은 각 지파들의 위치를 지정해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2절 말씀을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군대형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회막'입니다. "진을 치되 회막을 사면으로 대하여 치라" 회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진을 치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모세는 즉시 순종합니다. 각 지파별로 지켜야 할 행군위치를 정해주고 있습니다. 동쪽에는 유다, 잇사갈, 스불론 지파입니다. 남쪽에는 르우벤, 시므온, 갓 지파입니다. 서쪽에는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지파입니다. 북쪽에는 단, 아셀, 납달리 지파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12지파는 회막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동안 광야를 지나면서 지켜왔던 가장 큰 삶의 원리입니다. 그들은 '회막'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보이는 회막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것입니다. 또한 회막에 들어가 말씀을 받아가지고 나오는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지켜야 할 중요한 삶의 원칙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지탱해 온 원동력입니다. 여호수아는 이 시점에서 이러한 사실을 상기했습니다. 그리고 회막을 통해 다시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다짐을 가지게 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 가나안 땅에 들어와 전쟁과 땅 분배로 분주했다는 이유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느슨해졌기 때문입니다. 당시 저들의 삶이 느슨해진 흔적은 본문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본문 3절 말씀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취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느 새 느슨한 마음을 가지게 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렸지만 아직 가나안 땅의 분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일곱 지파가 아직 땅을 분배받지 못한 상황입니다. 따라서 남은 지파들 역시 땅을 나누는 작업을 계속 진행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그렇지 못합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가나안 정복에 대한 기대감과 긴장이 풀리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 지녀왔던 열정이 식어지고 있는 것을 여호수아는 목격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그 다음의 일들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회막'을 당시의 거점인 실로로 옮겨왔습니다. 그 회막 앞에서 여호수아는 남은 지파들에게 질문합니다. "너희가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취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도대체 어느 때까지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일에 그렇게 머뭇머뭇하겠느냐는 물음입니다. 여호수아는 이렇게 묻고 난 뒤에 각 지파에서 세 명씩을 선출토록 지시합니다. 그 결과 도합 이십 일명의 사람들이 선출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들을 남아 있는 땅으로 보냅니다. 그 땅을 일곱 부분으로 나누어 지도를 그려오는 것이 그들의 사명입니다. 여호수아는 이러한 방법을 통해 지지부진해진 가나안 땅 정착의 역사를 역동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상이 여호수아가 느슨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독려했던 한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의 신앙은 어떠한 상태입니까? 혹 우리에게도 저 일곱 지파들처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느슨해진 우리의 신앙이나, 삶의 모습이 있지는 않는지요? 만일 그와 같은 모습이 있다면 오늘 이 시간, 바로 이곳 하나님의 전에서 그와 같은 우리의 삶을 다시금 조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새벽기도회 시간이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새롭고 다부진 것들로 채워나가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머뭇거리는 신앙의 태도는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열왕기하 18장 20절과 21절 말씀에서 그와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p. 547). 함께 봉독합니다.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보내어 선지자들을 갈멜산으로 모으니라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이 말씀은 아합 왕 시대에 우리가 잘 아는 갈멜산에서 벌어진 영적 전쟁의 전초전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머뭇 거리고 있었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느슨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뭐라고 하십니까? 하나님께 속한 삶을 택하든지, 아니면 하나님 아닌 다른 어떤 것에 속한 삶을 택하든지 양자택일 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십니다. 그 가운데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로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결코 원하시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금 남은 일곱 지파의 모습이 마치 이와 같습니다. 가나안 정복이라고 하는 대업의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주저하고 있습니다. 지금 더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머뭇거리는 저들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합니다. 여호수아의 마음 역시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머뭇거리는 남은 지파들을 독려함으로 계속해서 가나안 땅 분배작업을 진행합니다.
본문 9절과 10절 말씀입니다.
"그 사람들이 가서 그 땅으로 두루 다니며 성읍들을 따라서 일곱 부분으로 책에 그리고 실로 진에 돌아와 여호수아에게 나아오니 여호수아가 그들을 위하여 실로 여호와 앞에서 제비 뽑고 그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의 분파대로 땅을 분배하였더라"
보세요. 그 동안 머뭇거리며 가나안 정착작업에 소극적이었던 이스라엘 지파들이 여호수아의 독려를 통해 열정을 회복했습니다. 일곱 부분으로 나누어 그려온 가나안 땅의 지도를 놓고 각 지파의 대표들이 제비뽑기를 통해 땅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제 제비뽑기로는 모든 땅의 분배가 끝났습니다. 남은 일이라고는 각 지파들이 각자의 땅으로 나아가는 일만이 있을 뿐입니다. 일곱 지파는 '회막'을 중심으로 모인 자리에서 결정된 각자의 땅을 향해 행군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지파는 1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께 봉독합니다.
"베냐민 자손 지파를 위하여 그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 제비뽑은 땅의 경계는 유다 자손과 요셉 자손의 중간이라"
남은 일곱 지파 가운데 첫 번째로 제비를 뽑은 지파는 베냐민 지파입니다. 이때 베냐민 지파가 차지한 기업의 경계는 동쪽으로는 요단강, 서쪽으로는 벧 호른에서부터 기럇여아림에 이르는 직선 코스입니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유다 지파의 북쪽 경계선과 일치하며 북쪽으로는 요셉 자손이 얻은 기업의 남쪽 경계와 일치합니다. 이렇게 베냐민 지파로부터 시작된 일곱 지파의 땅 분배는 다음 월요일의 본문인 19장까지 계속됩니다. 이렇게 각자의 땅으로 나아가는 위대한 행진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말씀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각자의 땅으로 나아가는 일곱 지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의 아름다움입니다.
이 세상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것 중에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자신의 자리를 잘 지키는 삶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이 그 자리를 지켜주시는 것이 아름답고요, 자녀들이 자녀로서의 자리를 지키는 것 역시 아름답습니다. 당장 우리의 얼굴을 생각해보세요. 우리의 얼굴 곳곳에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들이 우리 얼굴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습니다. 눈, 코, 입, 귀 등등이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우리는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이 만일 뒤죽박죽 되어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우리는 끔찍한 얼굴을 떠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야말로 용기 있는 사람들입니다.
미가서 4장 4절 말씀도 이 사실을 증거합니다.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라"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각 사람이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것, 그것을 귀한 일로 인정하십니다. 또한 이런 사람들은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이미 자신들의 땅을 향해 나아간 지파들은 물론 오늘부터 새로운 각자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지파들 역시 자신들의 자리를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간에 땅 때문에 서로 싸우거나 다툰 역사는 결코 없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자리를 존중해 주었습니다. 상대방의 자리를 인정해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에도 이와 같은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지키고 있는 자리를 존중해야 합니다. '나' 또한 내가 지켜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노력이 교회에서든,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학교에서든, 어디에서든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원리가 깨어지면 분열하게 됩니다. 다투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아무쪼록 이 새벽을 깨우고 있는 우리 모두는 자신이 지켜야 할 자리를 잘 지킬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자리 역시 인정할 줄 아는 넉넉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각자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또 하나의 신앙적인 삶입니다.
이제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오늘로 3이레째 새벽기도의 행진을 꽉 차게 감당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 새벽기도의 행진이 남은 4이레째 기간에도 더욱 능력 있게 진행될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느슨해진 우리의 삶이나 신앙의 모습이 있다면, 머뭇거리는 모습이 있다면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조율해주시도록 의뢰하는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를 온전하게 지키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기를 위해서도 기도함으로 응답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