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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소망의 동산 원문보기 글쓴이: 끄싱개
사랑의 위험
고전 13:5~6
찬 송 : 304장(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310장( 아 하나님의 은혜), 563장(예 사랑 하심은)
설 교 : 2010년 3월 14일 주일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의 보냄을 받고 로마에 갇혀 있는 바울을 섬기던 사람입니다(빌 2:25~30). 그는 형제로서 교제할 줄도 알고 사랑으로 섬길 줄도 알며, 자기 생활에 매이지 않고 주님을 기쁘시게 한 군사요 균형잡힌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할 줄도 알고 교제도 알며 진정한 봉사가 무엇인지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다른 사람의 필요에 대단히 민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바울을 섬기는 가운데 중병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가 병든 것을 빌립보 교인들이 들은 줄 알고 오히려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이 그들에게 거침돌이 될까 염려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민감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자기생명의 위험을 돌보지 아니하고 위험 속에서도 바울을 도왔습니다. 그는 시련 속에서도 진정한 우정의 산 본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성경 66권을 모두 강해하신 목사님이신 헤리 아이언 사으드 목사님은 "에바브로디도는 기꺼이 낮은 길을 가며 자신을 위해 위대한 것을 구하지 않으며,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높이실 것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참된 사랑에는 희생과 위험이 따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처받을 각오를 하며 다른 사람을 위해 섬길 때 사랑의 열매들이 맺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희생과 위험을 무릅쓰고 피 흘리시기까지 주신 사랑입니다. 이것은 상처를 받을 줄 아는 사랑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사랑에 희생과 위험이 없다면 그 사랑의 보람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사랑의 근본 동기와 사랑의 선택, 사랑의 기쁨을 말하면서 사랑의 특징을 더 묘사하고 있습니다.
1. 사랑의 동기 -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말은 자기가 주장할 권리를 포기할 자세가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이기심이 없는 헌신적인 사랑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은사는 풍부한 교회였으나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서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 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자기 유익, 자신의 길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으므로 바울은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신문에 구혼 광고를 냈습니다. 그는 38살 된 농촌 노총각인데 신부감은 "트럭트와 사진 동봉을 요함"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왜 노총각이 되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자기의 유익만 구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의 자세는 "당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으므로 당신을 사랑할 수 있소"라는 태도입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어떤 것이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기의 평판이나 자기 소유, 자기 성취를 위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것은 이와같이 자기 중심이 아니라 다른 사람 중심입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향하신 그대로 그 사람을 보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그 사람을 위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종의 마음을 기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비전을 주신 것을 이룰 수 있도록 내가 도움을 주는 사람입니다. 종의 마음에 대한 진리를 가장 아름답게 가르쳐 주는 말씀이 빌립보서 2장 1~11절에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기적인 아닌 사랑의 본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종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예수님 같이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며 예수님같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무디 목사님이 신학교를 시작한 후 유럽 각지에 있는 목사님들을 초대해서 사경회를 열었을 때의 일입니다. 유럽에서 오신 목사님들은 유럽의 관습대로 신발을 벗어 숙소 바깥에 벗어 놓았습니다. 그것은 신발을 닦아 달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관습을 잘 아는 무디 목사님은 그들을 섬기고 싶은 뜻으로 신학생들을 불러 신발을 닦아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때 한 신학생이 말하기를 "무디 목사님, 저는 사역을 배우기 위해 이곳에 왔지 구두 닦으러 오지는 않았습니다."라고 말하자 다른 학생들도 이에 동조하였습니다. 학생들을 모두 돌려 보내고는 밤새도록 그 구두를 모두 닦아 놓았습니다. 무디 목사님은 학장의 권리를 주장하여 강제로 학생들에게 구두를 닦도록 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면 유럽에서 온 목사님들에게 자국의 풍습을 따르라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종의 마음을 가지신 본을 보이며 구두를 손수 닦으셨습니다.
2. 사랑의 선택 -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1) 사랑은 성내지 아니합니다.
성낸다는 단어에는 뼈가 부러져서 오는 고통과 같은 짜증의 의미가 있습니다. 성내는 것은 내적인 소용돌이가 일고 있는 것으로써 마음 속에 평안이 없는 것입니다. '팔꿈치에 신경을 달고 다닌다'는 말이 있습니다. 누가 조금만 건드려도 폭발합니다. 항상 성내는 사람은 사랑이 없는 사람입니다. 과민하고 날카로운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성내는 순간 사랑의 사람이 아닙니다. 성내는 것은 폭발하기 위해서 카운트 다운(count down)을 하고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가장 쉽게 성을 내는 것입니다. 즉 내 남편, 내 아내, 자녀 가족들, 친구들, 동료들에게 성을 잘 내는 것입니다.
성내는 것에는 두 가지 뿌리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기심입니다. 왜 내 계획과 생각에 맞추지 않고 나를 존경해 주지 않으냐는 자기 중심성, 즉 이기심 대문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둘째는 평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삶의 특징은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은 상주시는 분임을 믿었기에 사람의 반응에는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원수도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을 알았으므로 원수갚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알렉산더 대제의 괴롭힘에도 자신이 원수 갚으려 하지 않았으며, 원수로부터 숱한 위험, 동역자가 자신의 곁에서 떠나가 버림도 있었으나 그는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나님의 주권 밑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모든 것에 자족할 줄 아는 비결을 배웠으므로 마음에 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재하심에 신롸하지 않는 사람은 평안과 쉼이 없습니다.
(2)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다는 것은 용서하기를 선택하는 사랑의 선택입니다. 그릇되게 고난 당하는 것을 오래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잘못 한것을 내내 기억 속에 새겨두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컴퓨터처럼 상대방이 내게 잘못한 것을 기억했다가 그 잘못들을 시시로 쏟아 내놓습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에는 자유함이 없습니다.
요셉은 애매히 고난을 당한 사람이었습니다. 형들의 시기로인해 노예로 팔려 갔고,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치려 한 일 때문에 그녀의 거짓말에 의해 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이 보시는 모든 것을 보았을 때 애굽의 영관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과거의 상처, 아픔, 고난을 기억하여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보복하려는 악한 생각을 품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과거의 죄를 기억하지도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죄를 기억하지도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롬 4:7-8에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엄청난 죄의 값을 피값으로 지불하셨습니다. 주님의 그 엄청난 사랑으로 인해서 우리는 구원을 바았고 그 사랑을 경험한 사람만이 용서하며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관계 속에서 참 용서를 하든지 아니면 인간관계를 파괴시키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용서하지 않는 것은 "쓴뿌리"입니다. 쓴뿌리를 에베소서 4장 30-32절에서는 악독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악독은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입니다. 악독의 쓴뿌릴르 가지고 있으면 용서하지 못하고 마침내 분을 냅니다. 사랑의 능력을 상실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겸손하심과 같이 자신을 낮추며, 그리스도의 용서하심과 같이 용서하며, 그리스도의 사랑하심과 같이 사랑하는 그리스동니 에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을 의뢰하시기 바랍니다.
3. 사랑의 기쁨 -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사랑은 기쁨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이 절대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은 참된 것에서 분리되지 않습니다. 진리에 반대하여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엡 4:15)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하며"라는 뜻입니다. 반드시 사랑과 진리는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진리와 분별이라는 양 둑 사이에 흐르는 강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디로 흐르든지 축복을 가져다 주는 생명의 강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진리라는 둑과 분별력이라는 둑이 무너지면 파괴의 수단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곳에 무엇이 있진디 모두 쓸어가버리기 대문입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라는 의미는 분별하는 사랑에 기쁨이 있음을 말합니다. 살아하게 되면 죄 자체를 기뻐할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이 범죄했을 때 다른 사람의 죄를 기뻐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이 범죄 했을 때 그를 찾아가서 "너 잘난 척 하더니 죄를 지었구나? 그렇 줄 알았다."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친구를 사랑한다면 그의 죄를 기뻐할 수도 없고, 험담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하게 되면 다른 사람의 실패를 말하지 않습니다. 죄인은 받아들이지만 죄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여기에 두가지 극단이 있습니다. 하나는 어떤 사람이 죄를 범했을 때 죄와 함께 사람도 버리는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죄와 함께 사람도 용납하는 두 극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롬 12:9)고 했습니다. 진실된 사랑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사랑은 진리에 무관심 할 수 없습니다. 진리가 승리할 때 사랑은 기뻐하고, 진리가 고통 당할 때 사랑은 슬퍼합니다. 이유는 사랑은 진리를 사랑하며, 하나님의 진리를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의 진리와 함께합니다. 어떤 우정도 하나님의 진리만큼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할 때 진정한 사랑은 그것을 기뻐합니다. 진리가 살아 움직일 때 사랑은 기뻐합니다. 사랑은 사랑을으로 말하고 사랑을 실천합니다.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인격 그 자체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중 제일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거듭남으로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 속에 거하실 때 사랑은 역사하고 나타나며, 실천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이 없고 실패 투성이리하 할지라도 주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 안에 사랑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께 맡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