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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서대장
지금이 회개할 때입니다. 롬7:21-25
주신 말씀 롬7:21-25을 중심으로 [지금이 회개할 때입니다]는 제목으로 말씀이 선포될 때 큰 은혜의 시간되기 바랍니다.
바울 사도조차 자기가 원하는 선은 행치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한다고 말합니다.
모든 성도는 육체를 입고 있어 성화되어가는 과정에서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며 점차 성숙한 신앙인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과속이 죄인 것처럼 너무 빨리 어떤 일을 하려는 것 조급한 것 서두르는 것 심지 않고 거두려는 것 심자마자 열매를 재촉하는 것은 죄입니다.
거듭나는 것은 단번에 이루어지지만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큰 바위 얼굴, 천사의 소녀상이 말하듯 우리는 말씀을 통해 매일 같이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인격과 품성을 닮아가려는 노력을 지속할 때 성령께서 생기를 불어 넣어 주사 마침내 예수 닮은 성도가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자신의 내적 모순을 제거하고 성화를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것 가장 시급한 것이 곧 회개입니다.
성도가 원치 않는 악을 행하지 않기 위해 주님을 의지하여 회개하여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첫째로 자신의 인격 속에 남아 있는 옛사람의 본성을 제거하라.(21)
20절에서 ‘내 속에 거하는죄’가 21절에서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라 합니다.
성도가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담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죄의 전가가 되어 있어 아직도 쓴 뿌리가 통째로 뽑히지 않고 옛 사람의 본성인 악의뿌리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잠간의 장마가 인사치레를 하고 난 다음 매일같이 폭염의 연속입니다.
벌써 강한 햇볕에 타들어가는 농작물도 생기고 ,폭염피해로 수 백 명이 상해를 입었다 합니다.
전에는 그리스도인들은 여름 성경학교를 마치고 나면 하계수양회를 기도원으로 떠나 휴가를 떠났습니다.
이제는 레저 관광의 붐을 타고 해외로 국내 유명피서지를 향해 떠납니다.
해마다 농촌봉사활동을 다녀오던 아들이 이번엔 교회일정과 맞지 않는지 4년 만에 처음으로 여름휴가 때 집에 내려오겠다 합니다.
아들이 온다니 기다려지면서 벌써 변해버렸나 하는 우려도 동시 생깁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전이 받은 원죄 때문에 온갖 죄악을 범하며 불신앙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운전할 때 운전대를 놓고 패달만 밟으면 차가 틀림없이 도로 밖으로 달려 나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기에 운전할 때 전방을 주시하며 운전대를 꼭 잡고 모든 신경을 집중할 때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듯이 ,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난 성도는 그리스도의 새 성품을 덧입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의와 선을 행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옛 사람의 본성이 아주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남녀가 함께 할 때는 복장을 단정히 하고, 나이에 관계없이 적정한 거리를 유지해야지 믿음이 좋고 서로 믿으니까 과도한 스킨십을 해도 좋을 것이라는 것은 착각입니다.
옛 사람의 본성이 잠복해 있다가 어떤 여건만 성숙되면 악한 영이 유혹을 할 때 내 안에서 함께 옛 본성이 함께 일어나 화답하게 됩니다.
이 옛 사람의 본성은 성도가 부활하여 신령한 하늘의 몸을 입을 때에야 비로소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죄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영화의 단계 즉 하늘의 신령한 인격체로 변화되기 전까지 , 즉 성화의 단계에서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옛 사람의 본성의 찌꺼기는 우리로 하여금 시시때때로 죄의 미혹에 빠지게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내 안에 남아있는 옛 사람의 본성의 찌끼가 활동하지 못하도록 깨어서 싸워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고뇌하고 갈등했던 것은 자신의 인격 안에 있는 두 성품입니다.
한 성품은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남으로 얻은 그리스도 닮은 성품이요, 다른 하나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옛 사람의 찌끼입니다.
이 두 성품이 내 안에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인디안들의 속담처럼 이 두 성품은 자신이 먹이를 주는 쪽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성도는 옛 사람의 본성이 우리 안에서 고대를 들지 못하도록 우리의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성도의 마음을 성령으로 말씀으로 가득채워야 됩니다.
성도가 원치 않는 악을 행하지 않기 위해 주님을 의지하여 회개하여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둘째로 자기 성찰의 눈을 떠라.(22-23)
모든 사람은 속사람이 분열하고 다투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성전된 성도의 몸 안에서 속사람이 서로 다투고 나뉘고 싸우고 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실제 그런 일들이 쉬지 않고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제도 어린이 성추행 살인 사건이나 제주도 올레길 살인 사건들은 성범죄전과가 있는 사람들이 포르노 중독이 된 상태에서 저지른 죄입니다.
그런데 제주도 부인 살인 사건은 안타깝습니다.
처자식 버려두고 집을 나가 멋대로 살다가 말년에 치매 중풍 걸려 찾아온 전남편을 지극정성으로 섬기다가 하도 욕하고 괴롭히니까 화가 치밀이 하니 목욕탕 욕조에 머리를 박고 귀를 잡고 몇 번 흔들었는데 숨을 쉬지 않아 살인자가 된 것입니다.
22절에서 “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성도가 얻은 예수 닮은 새 인격 새 성품입니다.
23절에서 “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범과 싸워”라는 말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의 법입니다.
그 다음 바울은 두 성품이 싸우다가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합니다.
바울은 세 가지 눈으로 자기를 보고 있습니다.
먼저는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육체의 눈입니다.
이 눈으로 사물의 실체를 파악합니다. 외형을 파악합니다. 겉모습을 봅니다.
다음으로 영적인 눈입니다.
이 눈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법을 봅니다.
그 다음은 자기의 영적상태를 보는 눈입니다.
자신의 영적상태가 정상적인지 아니면 비정상인지를 보는 눈으로 매우 중요한 눈입니다.
옛 사람의 본성의 찌끼가 새사람의 성품을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아성찰의 눈은 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갖게 되는 눈입니다.
성도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있지 않고 자신의 영적 상태를 늘 감시하고 관찰하는 자아성찰의 눈을 가진 성도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눈이 있어야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바로 행할 수 있습니다.
입체영화를 3D안경을 쓰고 봐야 실감나듯이 자기성찰의 눈으로 자신을 관찰하고 감시해서 한발자국이라도 빗나가지 않도록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봐야 합니다.
네비게이션이 업그레이드 하지 않으면 새로 난 길을 찾지 못합니다.
내 자신의 의지가 현재 선을 향하여 있는지 확인해야합니다.
이러한 자아성찰의 눈을 어떻게 얻을 수 있나요?
먼저 주님과 늘 깊은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주님과 깊은 교제를 유지하면 성령께서 자신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눈을 주실 줄 믿습니다.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때 비로소 자기 성찰의 눈을 가질 수 있는 것이지 교제가 단절되면 자기 육체의 눈만 이성의 눈만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적 생활의 척도입니다. 바로미터입니다. 잣대입니다.
말씀을 가까이하며 깊은 묵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의도를 계획을 목적을 바로 아는 성도는 자신과 타인의 영적상태를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리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뜻을 마음대로 다 행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찌무라 간조의 말대로 “ 만일 하나님 뜻을 마음대로 행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다”는 말처럼 하나님의 뜻을 다 안다고 해서 다 행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렇게 자아성찰의 눈을 가지고 자기 과오와 죄를 발견하고 회개할 때 한 발자국 한 단계씩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옛 사람의 본성을 쳐서 새 사람의 인격에 복종시켜야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법을 행하기를 원하는 자아가 자신을 주관하여 주 안에서 새 사람으로 거듭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도가 원치 않는 악을 행하지 않기 위해 주님을 의지하여 회개하고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셋째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라.(24-25)
바울은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거듭난 새사람이 된 후 항상 기쁨의 생활을 했습니다. 감사의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24절에서 죄책으로 인해 괴로워하며 비탄해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배제 시킨면 받게 되는 고통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율법을 지키려하는 사람, 스스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려고 하는 사람이 겪는 시행착오와 모순과 갈등을 바울 자신의 경험을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와 단절된 사람은 하나님 앞에 곤고한 사람이요 사망의 몸을 지닌 사람이라 합니다.
여기서 곤고하다는 말(탈라이포로스; ταλαίπωροϛ)는 전쟁에서 패하여 적의 포로가 되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고 씻지도 못한 채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없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은 결국 율법은 지키지 못해 죄의 포로가 되어 비참하게 마귀에게 끌려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와 단절된 사람은 ‘사망의 몸:σώματοϛ τού θανάτου)는 말의 뜻은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몸으로 문둥병자의 몸 같은 상태를 말합니다.
거울이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저 흉악한 놈이 바로 나란 말이냐하며 통곡한 강도처럼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을 섬기려는 자는 부패하고 흉측한 죄인의 모습인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대의 사형집행법에는 이미 썩기 시작한 시체와 함께 묶어놓고 같이 산채로 썩어가게 하는 형벌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멀리하고 스스로 의롭게 되려는 인간은 하나님 앞ㅍ에 비참한 죄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사망의 형벌을 받을 인간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서 예배 드리고, 봉사하고, 기도하고, 구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야만 하나님께 열납 됩니다.
그리스도의 속죄와 중보 은혜 없이 누구나 곤고하고 사망의 몸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해야합니다.
모로코 섬의 다미안 선교사가 아무리 전도해도 문둥병자들이 받아들이지 않자 하나님께 나에게도 천형인 문둥병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마침내 문둥병이 전염되어 발진이 일어나자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 여러분이 아니라 우리 문둥병자라고 부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다 합니다.
물론 모로코 섬은 다미안 목사님에 의해 구원 받은 지상낙원이 되었죠.
이제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성도가 원치 않는 악을 행하지 않기 위해 주님을 의지하여 회개하여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첫째로 자신의 인격 속에 남아 있는 옛사람의 본성을 제거하라.(21)
둘째로 자기 성찰의 눈을 떠라.(22-23)
셋째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라.(24-25)
성도도 영적 강들과 고뇌를 하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의 은혜를 떠나 스스로의 힘으로 죄악과 싸우려 한다면 백전백패입니다.
악한 마귀사탄과 싸워 이기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금이 회개할 때입니다.
내 속에 들어있는 옛 사람의 본성을 제거하고,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고 체크할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자기성찰의 눈을 떠서 모든 일들 특히 예배나 전도나 봉사나 구제나 섬김이나 모든 일을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 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가며 범사에 감사하므로 하나님이 찾으시고 기뻐하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