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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씀 : 박 찬 덕선교사
우리가 잠시 전에 누가복음 15장 말씀에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선한 목자의 비유에 대한 말씀과
10개의 드라크마 가운데 잃어버린 한 개를 찾기 위해서 세심하고도 아주 정성스럽게 찾으시는
그 영으로 상징된 여인의 비유에 대한 말씀과 그리고 15장 11절부터 32절까지의 집을 나간 탕자를 맞아들이는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에 대한 비유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여러분들과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맞아들임에 있어서 진심 어린 사랑의 마음을 가지시고
돌아온 아들에게 특별한 옷과 금가락지와 신과 살찐 송아지를 준비하신 것을 중점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교제의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이 세 가지 비유에 대한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하여 이 구원을 이루심에 있어서 먼저는 아들을 통하여 시작하시고
그리고 난 다음에는 그 영으로 말미암아 죄인들을 아버지께로 인도하셔서 아버지께서 그 죄인을 품으시는 이러한 사랑의
장면의 대한 비유를 우리가 누가복음 15장 말씀을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15장 4절부터 7절에서의 말씀을 통해서는 사랑이 많으시고 긍휼이 많으신 선한 목자는 그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하여 들로 가셔서 그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그러한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들로 표현된 선한 목자께서 허허벌판인 들판 가운데서 또는 산골짜기 또는 가시와 엉겅퀴가 있는 들판으로 가셔서
잃은 양을 찾으셨다 라는 것은 바로 세상 가운데 잃어버린 죄인들인 잃어버린 양들을 들판으로 상징된 세상 가운데로 가셔서
찾으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으로 오신 구주께서는 성육신 된 하나님으로서 2천년전에 세상에 오셨던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5장 8절부터 10절까지에서는 잃어버린 은전인 왕의 형상이 새겨진 드라크마를 찾으시는 그 영으로 상징된 여인의
비유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영으로 상징된 그 여인은 등불을 켜고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집을 쓸며 잃은 드라크마 동전을 아주 세심하고도
정성스럽고 주의 깊게 찾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서의 집으로 상징된 들판은 바로 주님께서 찾으시는 장소이며 그리고 그 영으로 상징된 그 여인은
집 안에서 잃어버린 동전을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면서 찾는 장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8절에서 나오는 등불을 켜고 집안을 쓸었다라는 그 집안은 바로 우리 내면의 자신인 우리 자아라는
자신을 상징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영으로 상징된 그 여인은 집인 바로 우리 안으로 친히 들어오셔서 우리를 비추시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 12절에 이러한 성령님의 역사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기록돼 있는데요.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으며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둘로 나누기까지 하고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분이라고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영과 혼과 몸 이렇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관절과 골수라는 몸의 부분들이 있고 그리고 그 안에 혼이 있으며 하나님을 닮는 용기이며 그릇인 영이라는
존재가 또한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 여인이 등불을 켜고 집안을 쓸었다라는 이 집은 바로 이 자아 라는 우리 존재의 혼이라는 우리의 감정과
우리의 생각과 의지가 있는 그곳을 친히 영으로 상징된 여인께서 비추셔서 아버지께로 돌아가고 싶은 회개하고 싶은
그러한 마음을 부여해 주신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 돌아온 탕자를 진심으로 맞아들이는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의 비유에서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이
이렇게 돌아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바로 세상 가운데서 찾으신바 되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러한 희망과 소망과 기대를 가지고
그 아들이 돌아올 것을 기대하면서 또 그 영으로 상징된 여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 자신의 존재인 감정과 생각과
의지에 비추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생각나게 하고 아버지를 그립게 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이 구원의 과정을 통하여 그 영이 죄인의 마음속에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나게 함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는 희망과 소망을 가지고 탕자가 집을 나간 순간부터 그 아들이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기대하면서 문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라는 것을 우리가 암시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께서는 반드시 이 아들이 돌아올 것을 문 바깥에서 고초를 당하면서 추위와 찬바람과 그리고 다른 일을
전혀 관심 갖지 못한 채 다른 일에 전혀 분주하지 못한 채 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고대하면서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말하는 이 선한 목자이신 아들은 들로 가셔서 곧 세상으로 가셔서 잃은 양을 찾으셨고
그 영으로 상징된 그 여인은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면서 자아라는 우리의 존재 우리의 마음안에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있는
우리 자신을 찾고 계셨고
아버지께서는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 자신의 집으로 이끄시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의 집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하늘에 계신 어떤 천국이나 천당이 아니라 바로 오늘날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모여서 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자들 몸을 이룬 자들이 모인 곳인 바로 교회가
아버지의 집이라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암시받을 수가 있습니다.
탕자가 돌아온 즉시 집 안으로 받아들여졌고 그 집 안에서 그 돌아온 탕자를 위하여 모든 것이 예비되었을 때 돌아옴과
동시에 준비를 함으로 말미암아 만찬을 베푸는 장면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암시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아버지의 집은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모여 있는 교회를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서
교회가 바로 아버지의 집이라는 것을 우리가 인식할 필요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돌아오는 것에 이어서 그 즉시로 아버지가 그를 아주 이 시간적인 어떤 차이가 없이 계속적으로 기쁨과
사랑의 마음으로 친히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이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의 마음을 탕자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누가복음 15장 11절부터 32절까지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께서는 집을 나간 탕자가 돌아오는 것을 기쁨으로 맞아들임에 있어서 어떻게 맞아들일 수가
있으셨는가? 아들이 들로 상징된 세상으로 친히 오셔서 세상에서 잃어버린 양을 찾으셨고 그 영으로 상징된 여인을 통하여
우리 몸 안에 있는 감정과 생각과 의지 안으로 친히 우리를 찾고 발견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등불을 켜고 집안을 쓸며
찾을 때까지 찾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상징하고 있는 들로 선한 목자이신 아들은 오셨고 그 영으로 상징된 여인은 우리 자신 안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비춰 주심으로 말미암아 발견되고 찾으신바 되었고 그 발견되고 찾으신바 된 우리를 아버지는 아버지의
집 안으로 오늘날 교회로 친히 우리를 맞아들인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그 교회는 바로 아버지의 품이며 아버지가 계신 곳이며 그 죄인들을 부요하게하고
풍성하게 하는 만족하게 하는 음식을 예비한 곳이며 그리고 아버지께서 친히 만찬을 베푸신 곳이 교회라는 것을
우리가 인식해야만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버지께서 집 안으로 상징되어진 교회로 우리를 맞아들이기 위하여 먼저 선한 목자이신 아들께서는
친히 세상에 오셔서 잃은 양을 찾으신 곳이 바로 다름 아닌 들판이었던 것입니다.
들판은 오늘날 악한 자에게 속하고 강한 자에게 속하여 있는 세상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아주 악한 자에 속한 곳이기 때문에 잃어버리기 아주 쉽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세상은 사단이 정복하고 있는 세상에 속한 곳이기 때문에 잃어버린 양들 곧 죄인들이 아주 잃어버린
바가 너무나 쉽게 되고 그 양을 잡아먹기 위하여 이 사단의 악한 영의 역사가 비일비재한 곳이 바로 황량한 곳으로
상징되고 있는 이 세상인 들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선한 목자께서는 들판인 이 세상으로 오셔서 이런 양들을 찾으시기 위하여 고군분투하시는
모습을 우리가 누가복음 15장 1절부터 7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찾으심에 있어서 영으로 상징된 여인처럼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혼과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비춰줌을 통하여 우리를 찾으시지 않고 우리를 찾으시는 그분의 특이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주제가 되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그 일을 통하여 이 세상을
상징하고 있는 들판에 잃어버린바 된 죄인들을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찾아내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영으로 상징된 여인은 하나님의 말씀인 그 등불의 비춤을 통하여 우리를 찾으신다면 아들로서 세상에 오신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우리에게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그 잃어버린 모든 양들을 위하여 생명을 버리는
선한 목자라고 요한복음 3장 14절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요한복음 10장 11절에서도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선한 목자이신 아들께서는
잃어버린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10:11 나는 선한 목자니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거니와
또 요한복음 3장 14절에서는 광야에서 뱀을 들어올린 것 같이 사람의 아들도 반드시 들려올려져야 한다라고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목자의 사명은 잃어버린 양들이 세상으로 상징된 들판에 있는 모든 잃어버린 양들이 위를 쳐다보면 볼 수 있는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바로 아들로 상징된 선한 목자의 일이요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선한 목자이신 아들께서 우리를 위하여 골고다 십자가에서 사람의 아들로서 높이 광야의 뱀처럼 들어올려지지
않으셨다면 그 들판에 있는 세상 가운데 있는 잃어버린 양들이 그분을 발견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그분께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선한 목자이신 아들이 우리를 찾으시는 방법은 우리를 위하여 골고다 십자가에 높이 들려 올려진 죽으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찾으시는 방법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으로 상징된 그 여인이 우리를 찾으시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타난 등불로 상징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존재 안에 빛비춤을 통하여 우리를 발견하고 세심하게 찾으신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 다릅니다.
그래서 드라크마 은전을 찾는 여인의 비유에서는 그 영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 존재 내부를 비추는 것입니다.
우리 안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있는 우리 바깥에 있는 삶의 환경과 그러한 어떤 조건들을 통해서 환경에서 나타난 어떤
상황들을 통해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를 찾으신다는 것을 우리가 구별해야 될 필요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드라크마 은전을 찾는 이 영으로 상징된 여인은 아주 세심하고 정성스럽고 아주 수고스럽게
그 등불을 켜고 집안을 쓸며 찾습니다. 집안은 우리 내면의 존재를 말하고 있죠.
내면의 존재인 혼이라는 바로 우리의 존재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있는 혼 바로 이것이 히브리서
4장 12절에 말씀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죠.
히브리서 4장 12절에 친히 우리 안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상징된 등불을 비춤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비추어서
우리가 잃어버린 바 되고 감춰진 바 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가 생각나게 하는 것이
영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은 그 먼지가 나고 어두운 곳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아니하는 곳에서 등불인 하나님의 말씀만을 가지고
그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하여 아주 정성스럽게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내면에 우리 자신의 존재인 내적 존재를
비추고 있다라는 것을 우리가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영으로 상징된 그 여인은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감정과 우리의 의지인 혼에게 빛을 비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인
등불을 비춤을 통해서 우리의 양심과 우리의 온 마음을 비추어 주심으로 우리 자신의 존재를 드러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를 그리워하게 하고 생각나게 하고 발걸음을 돌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방법으로 영으로 상징된 여인은 우리를 찾는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등불을 통하여 빛비춤을 우리에게 비춤으로 말미암아 그 영으로 상징된 여인이 우리를 찾으신 결과
우리가 어떤 것을 갖게 되는가 하면 우리가 어둠 속에 묻혀져 있다 라는 것 우리가 먼지 가운데 또는 장롱 밑구녕에 사람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우리가 깊숙하게 감추어져 있다 라는 것을 인식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깨어 정신을 차리고 왜 내가
어둠 가운데 있지! 내가 왜 이 먼지 구덩이와 같은 이런 곳에서 삶을 살고 있지! 내가 빛의 세계인 아버지 품으로 가서 삶을
살고 싶다 라는 이러한 생각이 들게 함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라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절대 어둠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 스스로는 절대 이 먼지 구덩이 가운데 속해 있다라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다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이 등불이라는 빛비춤을 통하여 그 영이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건드리는
혼이 우리 내면의 존재를 접촉하시고 건드리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인 영의 빛비춤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혼이 그냥 화들짝 깨어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으로 상징된 그 여인의 이러한 세밀한 찾으심과 정성스럽고도 지속적으로 등불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감정과 생각과 의지를 계속적으로 비춤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양심과 우리의 온 마음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으로 상징된 여인의 이러한 계속적인 찾으심과 정성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존재 안에
빛을 비추어 주심을 통해서 우리를 찾아낸다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세상을 상징하고 있는 들판에서 발생하지 않는 일입니다.
이 일은 십자가 위에서도 발생하지 않는 일입니다.
이 일은 그 영으로 상징된 여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등불을 통해서 빛을 비춰주어서
우리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그 영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영의 역사는 우리 마음에 일어난다면 선한 목자이신 아들을 통해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는 일을 통하여
우리를 찾으신다라는 것이 아주 확연히 다르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하나님의 이 말씀인 등불의 비춤을 통하여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감정과 의지를 비추어서 양심과 우리의
온 마음이 비춰짐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생각에 있어서 변화를 가져오게 하고 우리의 생활에 방향 전환을 가져오게 할 수
있는 터닝 포인트가 되는 마음을 가지게 함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가 생각남으로 말미암아 내가 왜 이곳에 있지!
내가 이곳에 있을 사람이 아닌데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되겠다 라는 바로 이 정확한 방향이 올바르게 설정되어진
회개를 빚어낼 수가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안에서 이 영으로 상징된 그 여인의 빛비춤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상징된 등불을 통하여 빛이
비추어졌을 때 우리 생각이 변화를 갖게 되어서 생활의 터닝 포인트가 되어서 이 세상을 향해 있던 그러한 생각과 감정과
의지들이 하나님께로 방향 전환이 설정되어져서 회개하고 싶은 곧 아버지의 품으로 찾아가고 싶은
그러한 마음을 갖게 한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선한 목자이신 아들을 통해서는 세상으로 상징된 들판에서 우리를 찾아내시지만 그 영으로 상징된 여인을 통해서는
왕의 형상이 새겨진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분을 가졌으나 잃어버린 바 된 우리들을 찾으심에 있어서는 우리의 존재 안인 집
내부에서 일어난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으로 상징되고 있는 들판에서 잃어버린 양이 골짜기를 향해서 짐승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그러한 악한
곳으로 또는 골짜기에 이렇게 빠지게 되고 또는 가시나무와 엉겅퀴가 있게 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존재라는 우리 자신 안에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골짜기에 갇힌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빠져 있습니까? 그 잃은 양이 나 자신 안에 스스로 깊이 빠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 안에 깊이 빠져 있으면 다른 것이 보여지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혼이라고 일컬어지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 안에 깊이 빠짐으로 말미암아 들판에서 헤매고
있었고 방황하고 골짜기에 빠져 있었고 가시나무와 엉겅퀴 그리고 곰과 늑대와 하이에나와 같은 그러한 양을 잡아먹을
수 있는 사단의 악한 영의 역사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 상징된 들판에서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자신 속에 우리 스스로가 깊이 빠져 있음으로 말미암아
골짜기에 갇혀진 바 되고 가시나무와 엉겅퀴가 있는 곳을 통해서 몸이 만신창이가 되고 악한 짐승들이 우글거리는 그곳에서
삶을 살다가 잡혀 먹게 되고 그리고 배고픔과 허기와 갈급함과 목마름과 갈증 때문에 세상이라는 들판으로부터
우리가 구출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으로 상징된 들판으로부터 우리를 되돌리시고 우리를 찾기 위해서 높이 광야에서 뱀을
들어올리신 것 같이 요한복음 3장 14절 말씀이죠. 사람의 아들도 반드시 들어올려져야 한다 라는 말씀처럼 우리를 찾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그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게 하여서 이끌게 하기 위해서 되돌리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지만 그러나 그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찾길 원하시지만 사실은 우리가 세상으로 상징된 들판에서
우리가 방황하고 헤매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 속에 우리 스스로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어쩔 수 없이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하면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를 찾아내실 길을 갖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암시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선한 목자이신 아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 죽음을 통하여 잃은 양을 찾지만 그 영으로 상징된 여인은 우리 자신
속에서 우리 혼으로 나타나진바 된 감정과 의지와 생각 속에서 우리 내면의 자신 속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인 등불로
빛비춤을 통하여 우리를 발견하고 찾으신다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회개는 전적으로 내적인 것인 것입니다.
전적으로 우리 내적 존재인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양심과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추는 일은 세상에 그 어떤 사람도
할 수 없습니다. 어떠한 천사도 우리 안에 그러한 직접적이고도 주관적인 역사를 이행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찾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그 영으로 상징된 그 여인을 통해서만 우리를 비추고 우리를 드러내기 때문에 그 영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 자신의 깊은 곳을 통찰할 수 있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시는 그러한 그 영의 역사로 인해서만 우리를 비추고 드러내고
발견하게 할 수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는 우리 자신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우리 스스로 깨이지 못합니다. 우리 스스로 정신 차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우리의 그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돌이키려고 해도 우리의 양심과 우리의 온 마음은 우리 스스로 속에
갇힌 바 되어서 우리 자신 안에 스스로가 빠져 있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는 절대 마음은 먹을 수 있을지 몰라도
행동으로 그것을 실천할 수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 영으로 상징되어진 그 여인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 자신이 정신 차리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빛비춤을 통하여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올 것을 결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선한 목자이신 아들의 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를 찾아내시는 것과 그리고 그 영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 마음 안에 빛비춤을 통하여 우리의 생각과 감정 의지와 양심과 마음에 비춤으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생각나게 하였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집밖에서 그러한 아들의 역사와 영의 역사로 인하여 우리를 고대하고 기대를 가지고 기다리고
계셨다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한 목자이신 아들의 역사와 그 영으로 상징된 여인의 역사가
반드시 우리에게 접촉되어져야만 우리가 반드시 아버지의 품으로 오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돌아온 탕자를 받아들인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의 비유를 우리가 가만히 묵상하게 되면 돌아온 탕자가 아버지에게
재산을 달라 하여서 아버지께 받은 그 재산을 가지고 이 사단에게 속한 세상 가운데서 재산을 탕진하고 있을 동안에도 아버지께서는 참 선한 목자의 역사와 그 영의 역사의 일들로 인하여 그 집을 나간 탕자가 반드시 돌아올 것을 기대하고 문 바깥에서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들은 19절 말씀을 통해서 내가 아버지께 돌아가면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아버지의 그 재산을 다 탕진하고
허랑방탕하게 산 나를 아버지께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 내가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아주시옵소서라고.15장 18절 19절을 통해서 그렇게 생각을 하지만 아버지의 그 아들을 대하시는
그러한 이 상황은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암시받을 수가 있습니다.
만약에 아버지께서 주신 그 모든 재산을 다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서 돌아왔을 때 과연 우리는 그 아버지를 만날 때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 할까요? 무릎을 꿇고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 수밖에 없는 그런 마음의 생각을 하게 될까요?
아니면 애걸복걸하면서 다시는 내가 집을 나가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얘기할까요?
아니면 아버지를 끌어않고 그냥 하염없이 눈물만 흘려야 될까요?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를 대해야 될까요?
이 탕자는 21장 19절에 보면 나를 품꾼들 중에 하나로 삼아주십시오라고 마음에 생각을 하고 말을 하겠다고
이렇게 마음에 작정을 합니다. 그리고 21절에서는 드디어 아버지를 만나서 아버지 내가 하늘을 거슬러 죄를 짓고
아버지 앞에도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말을 하려고 했는데
22절에서 아버지께서는 그 입을 가로막습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말을 했는데 아버지는 그 입을 다물게 하고 오히려
노예들에게 어서 그 제일 좋은 겉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기라
23절에서 또 살찐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거워하자.
그 탕자가 나는 아버지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전혀 없는 자입니다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 돌아온 아들의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정말 진심으로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안고 진심으로 다정하게 입맞추고 계시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아들을 위하여 특별히 준비되어진 아주 특별하고도 제일 좋은 옷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들에게 입힌 그 특별하고도 제일 좋은 옷은 무엇입니까?
아버지께서 그 돌아온 아들이 세상에 속해 있던 삶을 살다가 아버지 품에 왔을 때 바로 아버지의 집인 교회로
들어왔을 때 아버지가 준비하였던 것은 바로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 탕자는 집을 나가서 재산을 탕진하고 사단에게 속한 일들을 하면서 사단을 위해서 삶을 살았던 그가 아버지의 집인
교회 안에 들어왔을 때 바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는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로 나타난 제일 좋은
특별한 그 옷을 준비하여서 입혔다 라는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인 그 아들에게 미리부터 준비한 특별하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칭의를 상징하고
있는데요 제일 좋은 그 특별한 옷을 입히는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를 대면할 수 있는 자격 요건을 갖게 하기 때문에
그렇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좋은 특별한 그 옷으로 입는 자들인 돌아온 아들은 바로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의 증인을 상징하는
특별하고도 제일 좋은 옷을 입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칭의를 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일 좋은 특별한 옷인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만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을까요?아닙니다.
종들에게 그 돌아온 아들의 손에 금가락지를 끼우라고 말합니다.
금가락지는 무엇을 의미하냐면요 에베소서 1장 13절에 기록하고 있는 말씀을 우리가 보겠습니다.
1:13 그 분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분 안에서 또한 믿었으니
너희는 약속의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것이니라.
성령님은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도장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게 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었다 라는 것을
나타내주는 것이 바로 금가락지 금반지였던 것입니다.
이 금가락지는 돌아온 죄인에게 주어지는 인치시는 성령님이라고 에베소서 1장 13절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금가락지가 인치신 성령님이죠? 신성한 하나님의 속성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끼워준 그 반지는 금반지였다는 것을 우리가 암시받을 수 있습니다.
이 금가락지는 회개하는 죄인이 하나님의 신성한 속성인 하나님 자신의 영을 받았다 라는 표시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 좋은 특별한 옷을 통해서는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받게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 자신의 영을 받게 한다 라는 표시로서 금가락지를 끼워주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금반지는 인치시는 그 영을 상징하고 있는데요,
여러분 혹시 벤허라는 영화를 본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그 영화를 세 번 정도를 봤는데요.
그 벤허라는 주인공이 무고한 죄로 인하여 노예가 되어서 이 바닷가 지중해 그 전쟁터의 노예로서 배의 노를 젓는
이 벤허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벤허는 아리우스라는 로마 집정관이 물속에 빠져서 죽게 될 위기에 처했을때
구해줌으로 말미암아 그 집정관이 벤허를 자신의 양아들로 삼아주면서 금반지를 끼워줍니다.
그 금가락지가 바로 집정관의 아들에 속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그 영을 상징하는 그 반지는 바로 인치시는
그 영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돌아온 아들 곧 탕자가 신성한 하나님 아버지께 속한다 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기업이며 아버지의 분깃으로 소유하신 모든 것들을 집을 나갔다가 탕자로서 재산을 모두 탕진했으나
아버지 품에 돌아온 교회 안으로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의 모든 분깃을 바로 그 기업을 물려받을 자라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 바로 금가락지 금반지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금반지는 돌아온 죄인에게 주어지는 인치시는 성령님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아버지의 모든 기업들이 아버지께서 소유하신
모든 것들이 돌아온 아들의 것이다 라는 상속자라는 것을 이렇게 암시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5장 22절에서 아버지는 그의 노예들에게 어서 제일 좋은 겉옷 그리고 손에는 반지 발에는 그 신을 신겨라 라고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을 볼수 있는데요. 신발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냐면 제가 한국에 머물때는 저희 집 근처에 까치산이라고 있는데요
건강에 좋다고 하여 맨발로 1시간 정도 걷습니다. 그때 돌이나 날카로운 가시 같은 것도 있겠죠.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로 걷게 되면 험한 길을 감에 있어서 상당히 힘이 듭니다.
신발은 사탄에게 속한 더러운 땅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키고 분별시킴으로 말미암아 험한 세상을 걸음에 있어서 돌짝밭과
가시밭길을 걸음에 있어서 힘들지 않고 힘 있고 능력 있는 발걸음으로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신발인 것입니다.
신발은 세상으로부터 땅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키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돌아온 아들에게 신발을 신기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향하여 길을 감에 있어서
세상으로부터 험한 돌짝밭과 가시밭길과 날카로운 이물질이 있는 사탄에게 속한 세상으로부터 그분께로 분별시켜서
그분을 향하여 갈 수 있는 구원의 힘을 갖게 하는 것이 신발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통해서는 제일 좋은 특별한 옷을 그 영을 통해서는 바로 인치시는 성령님인 금가락지를 아버지를 통해서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킨 신발을 신겨 줌으로 말미암아 돌아온 아들이 특별한 제일 좋은 옷과 그리고 금으로 만들어진
금반지와 그리고 특별한 신을 통하여 완전히 무장되어지고 치장되어진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특별한 옷과 특별한 금반지와 특별한 신을 신게 됨으로 말미암아 아들을 통하여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완전히 의롭게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를 대면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되고 그리고 그 인치시는 성령님을
상징하고 있는 금반지를 통하여 아버지께서 소유하신 모든 기업을 소유할 수 있는 상속자의 자격을 갖춘 자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후에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분별시킴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향하여 올바로 나갈 수 있도록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우리를 분별시킨 다음에는 바로 아버지께서는 종들에게 그가 사탄에게 속한 세상에서의 삶을 사는 동안에 배고픔과 목마름과
갈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 온전히 자격을 갖추는 특별한 옷과 금반지와 신을 신겨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만족한 배부름이기 때문에 이 돌아온 아들의 누림을 위하여 살찐 송아지를 끌어다가
잔치를 열어서 같이 함께 즐기자 라고 명하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탕자였으나 아버지 품에 돌아온 이 아들은 외형적으로 바깥의 방면을 통해서 외적으로 의롭게 하시는 의이신
그리스도와 그리고 인이신 인치시는 그 성령님을 상징하는 그 반지와 회개한 죄인을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인 그 신발을 통해서 아들과 그 영과 아버지를 통한 역사인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돌아온 아들이 세상에 살고 있을 때와 달리 아버지 품을 찾아서 이렇게 돌아왔을 때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누림을 위하여 신성한 생명으로 우리를 채우시는 살찐 송아지로서 배부름과 풍요로운 그러한 생명의 양식으로써 살찐
송아지로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누림이 되기 위해서 바로 교회 안에 들어온 자들에게 신성한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배불리시는 생명의 양식을 먹이시는 분이심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그리고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이 아들과 나머지 그 이웃들과 벗들이 함께 기쁨과 즐거움의 잔치를
즐길 수가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내적인 방면인 살찐 송아지를 통해서 우리를 배부르게 하시고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서 내적인 방면으로서 우리를 배부르게 하시고 외적인 방면으로서 특별하고도 제일 좋은 옷을
입혀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게 하는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적인 방면을 통해서는 우리를 만족케 하고 배부르게 하고 우리를 살찌게 하는 생명 양식이 되시는 생명과 생명
공급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배부르게 하시고 그리고 돌아온 이 탕자는 그분의 구원 안에서 전적으로 아버지 앞에
대면할 수 있는 자격과 함께 이 배고픔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생명의 양식인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식량의 모든
부요함을 누림으로 말미암아 참된 희년의 누림을 갖는 자의 모습을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바로 교회로 돌아왔을 때
이러한 일들이 선물로 우리에게 부여가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내적으로서는 우리를 만족케 하는 생명과 공급이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소유하게 되고 외적으로는 특별하고도
제일 좋은 옷인 의이신 그리스도를 누림으로 말미암아 그가 아버지께 완전히 속한 자로서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자격을
가진 자가 되어서 아버지에게 속해 있는 모든 소유된 것들이 그에게 속함을 암시하는 인치시는 성령님을 상징하고 있는
금가락지를 바로 이렇게 선물로 받았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속한 자임을 암시하는 인치시는 성령님을 통하여 아버지가 소유한 모든 것들이 자기 아들에게 속했다는
것을 알려주심과 동시에 또한 아버지께서는 세상으로부터 분별시키는 하나님의 구원의 큰 능력을 주셔서 세상으로부터
그분에게로 올바르게 길을 향해서 갈 수 있도록 분별시키는 구원의 능력이 되는 신발을 신겨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이 세 가지 비유들을 통해서 주님께서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가 이 세대들과 죄인들과
바로 이 병자들을 찾고 계셨다 라는 것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앞에서 이 비유들을 의도적으로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세리들과 죄인들과 병자들은 기쁨 가운데 이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오신 선한 목자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그 영으로 상징된 여인의 이야기와 아들을 맞아들이는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의 비유를 통해서
매우 기쁨과 큰 즐거움을 가지고 주님을 찬양했으나 그러나 반면에 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들만을 위해서
이러한 세 가지 비유의 말씀을 하신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것이 매우 공정치 않다 라고 불평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주님을 싫어하였고 세리들과 죄인들과 병자들은 주님을 굉장히 기쁨으로 맞이한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들어온 성도가 된 우리들은 탕자처럼 회개한 죄인으로서 선한 목자로서 찾은 바 된 잃어버린 양으로서 왕의
형상이 새겨진 드라크마를 찾으신 그 여인으로 상징된 그 영의 역사로 인하여 회개한 죄인들로서 행복한 삶을 주님 안에서
가진 자들이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5장에서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묘사를 아주 자세하게 계시하고 있는데요.
이 성취되어지는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에 관한 묘사가 어떻게 시작되어서 어떻게 진행되고 어떻게 결말을 보는지를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누가복음 15장 1절부터 7절에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는 선한 목자의 비유를 통해서 선한 목자로 상징되고
있는 그 아들은 친히 이 세상으로 상징된 들판으로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당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속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 구속을 성취하신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들판에 있는 잃어버린 양들을 바라보게 하고 자신이 그 잃어버린 양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해서 그 환경을 조성해 나가시는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 영으로 상징된 그 여인은 우리 내면의 존재 안으로 친히 들어오셔서 우리의 감정과 의지와 생각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양심과 마음을 등불로 상징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비추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고 잘못했음을 알고 회개하기 시작한다라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아들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찾으셨다면 그 영을 통해서는 우리 존재 안으로 친히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빛을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 안에 비추셔서 우리를 찾으시고 발견하신다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아버지께로 갈 수 있도록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분별시키는 이러한 삶을 사는
구원에 관한 하나의 묘사를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들을 통해서는 구원을 준비하시고 그 영을 통하여는 진행하시고 결국에 가서는 궁극적으로 아버지께로 다가오게
함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자들이 되게 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와 그 영을 통해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복잡한 여러 과정과 여러 단계들을 거쳐서 우리가 아버지의 집으로 상징되어진 교회 안에 들어간
성도로서의 삶을 산 것은 특별히 얼마나 행복한 자들인지 얼마나 우리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자들인지를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특별히 하나님께 큰 은혜 가운데에서 늘 찬양하면서 삶을 살아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특별하고도 제일 좋은 옷을 그 돌아온 아들에게 입혀주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고 인으로 인치시는 성령님을 통하여 금반지를 끼워주셔서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들이 그 돌아온
아들의 것임을 분명하게 알려주시고 그리고 분별시키고 강화시키는 능력으로 신발을 신겨줌으로 말미암아 바로
이 생명 있는 능력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끄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세상으로 상징된 들판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누가복음 15장 8절에 기록된 것처럼 등불을 켜고 집안을 쓸며 집 안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나타내는 나라는 존재 나라는 자아라는 집 속에 더 이상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로 선한 목자이신 아들에 의하여 세상으로 상징된 들판에서 찾은 바 되어짐으로 말미암아 들판에 있지도 않고
더 이상 그 영의 역사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고 있는 등불의 빛비춤을 통하여 찾은 바 되었기 때문에
나라는 자아라는 집 속에 있지도 않고 이제는 우리가 아버지의 집안인 아버지의 품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0장 34절에 여관에 대한 말씀이 나오죠.
10:34 그가 그 사람에게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상처를 싸매 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그를 돌보아 주더라.
35절에 이튿날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이 사람을 돌봐주십시오.
이렇게 여관에 대해서 또 여관 주인에 대해서 나오는데 이 누가복음 10장에 기록된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 사랑이 많으신
참 이웃인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이 여관은 바로 다름 아닌 오늘날 교회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사랑이 많은 아버지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집이 바로 이와 같은 여관인
오늘날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암시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어진 이 70 내지 80평생에 주어진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교회는 우리가 잠시 머물 수 있는 여관과 같은
나그네가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여관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교회는 잠시 잠깐의 이렇게 여행을 하는 도중에 있는 우리들 바로 주어진 삶을 주님 안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교회가 우리의 집이요 우리 아버지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교회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가 암시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사랑이 많으신 돌아온 아들을 받아들인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의 마음에 먹은 생각과 달리
19절에서 나를 품꾼들 중에 하나로 삼아주십시오라고 생각하고 말씀을 드려야지
21절에서 나는 더 이상 아버지 아들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말을 하고 있는데,
22절에서 입을 딱 다물게 하고 아버지가 그의 노예들에게 어서 그 제일 좋은 준비한 제일 특별하고
제일 좋은 겉옷을 내어다 입히고 손에 금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찐 송아지를 끌어다가 잔치를 열자라고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생각한 그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긍휼과 자비는 끝이 없음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내가 그 아버지 앞에 너무나 몹쓸 짓을 지었기 때문에 무릎을 꿇어야 될까 애걸복걸을 해야 될까
그냥 눈물만 흘리면서 그냥 용서를 빌어야 되나 별별 생각을 다 하게 되지만 사랑이 많은 아버지께서는 그 집을 나갔던 탕자가
돌아오는 것, 그 기대와 희망과 소망을 가지고 가진 그 아들이 돌아왔을 때 그분의 기쁨은 더할 나위 없이 더 큰 기쁨을 가지고
있었다 라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서 목을 끌어안고 다정하게 입을 맞춰서 과거의 행적을 묻지 않습니다. 과거에 잘못한 것을 캐지 않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네가 나의 재산을 가지고 무엇에 썼느냐라고 전혀 그것에 대해서 일언반구를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과거에 잘못한 수많은 것들이 있다 할지라도 주님의 품에 들어오게 되면 그것이 다 깨끗하게 청산되어진다는
것입니다.그러므로 그때로부터 우리는 잘못한 일들을 낱낱이 회개하고 고백하여서 날마다 깨끗한 삶을 살 필요가 또한 있다
라는 것을 우리가 암시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복음 4장 18절에 보면 희년을 선포하고 있는데요.
4:18 "주의 영이 내게 임하시니 이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심이라.
그가 나를 보내셨으니 이는 마음이 상한 자를 치유케 하시며, 포로들에게 구원을 선포하고, 눈먼 자를 보게 하고,
짓밟힌 자들을 해방시켜 주고4:19 주의 기뻐 받으시는 해를 전파하게 하심이라."고 하시고
이 누가복음 4장부터 15장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렇게 쭉 이어지는 이 모든 말씀들이 참 희년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포되어지는 천국의 참 복음인 참 희년과 연관되어져 있다라는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 돌아온 아들이 이러한 특별하고도 제일 아름다운 옷이신 바로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소유를 받고
바로 이 인치시는 성령님을 통하여 돌아온 죄인들에게 주어지는 이 금가락지를 통하여 하나님의 신성한 속성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가 소유한 모든 기업들을 상속받을 수 있는 아들임을 나타내주고 그리고 신발을 통하여 세상으로부터
그분께로 갈 수 있도록 분별시키고 구분시키는 이러한 일들과 살찐 송아지를 통해서 내면의 배부름과 만족함을 주는
이 모든 일들은 희년의 참 누림이라는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 돌아온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옴으로 누린 이 네 가지가 정면으로 대조적으로 나타나지만 이런 모든 기쁨의
일들은 희년의 참 누림이라는 것입니다. 인치시는 영을 상징하는 그의 손에 반지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다시 회복하게 되고 여기에는 인치시는 영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회복함과 동시에 장자권에 대한 장자의
권한이 회복되어지고 그리고 세 분 하나님인 아버지와 아들과 영 하나님을 누릴 수 있는 권리의 회복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아버지께서 소유한 모든 것들이 바로 이 손에 금가락지를 낀 인치시는 영을 받은 자의 바로 분깃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금가락지와 신은 자유인에 대한 표시인 것입니다.
자유인은 뭐죠? 사단의 굴레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입니다.죄의 굴레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이에요.
우리가 반지를 끼고 신발을 신었다는 것은 세상의 굴레에서부터 나라는 자 나라는 존재인 자아의 굴레로부터 완전히 풀려난
사람으로서 자유와 해방을 누린 자라는 것입니다.
사단의 노예로부터 그리고 사단의 포로가 된 상태에서 완전히 해방된 사람이 성령님의 인치심을 통해서 금가락지를 받고
신발을 부여받은 자유인의 표시를 받은 사람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온 아들은 아주 적은 부분에 소극적인 부분에서는 사단의 굴레로부터 완전히 풀려났고 사단의 굴레는
세상과 죄와 나 라는 존재인 자아로부터 나 자신이 풀려났다는 것이고, 적극적인 면을 통해서는 아버지께서 소유한 기업의
그 모든 분깃들을 바로 이 인치시는 성령님을 통하여 신성한 하나님의 속성을 가진 아들로서의 신분을 나타내는 금가락지를
낌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소유하신 모든 것들을 이 금가락지를 낀 아들이 상속받을 자라는 것을 알려줌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기업의 부유함을 마음껏 누릴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이러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선한 목자 이야기와 왕이 새겨진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비유와
아들을 맞아들이는 사랑이 많으신 이 아버지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허락되어진 이 특별한 옷과 특별한 금가락지와
특별한 신발과 특별한 살찐 송아지는 참된 희년의 삶을 사는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자들이 오늘날 이 생을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 이 삶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신실한 믿음을 가질 때
다가오는 장차 도래하는 천년 왕국에서도 이 참된 희년의 삶이 유지되고 보존되어서 그곳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다스리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면서 오늘의 교제의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